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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월의 복숭아 2-28. 우유 한잔 시럽 두 스푼 1 (28/48)

유월의 복숭아 2

28. 우유 한잔 시럽 두 스푼 1

아침 햇살이 밝도록 두 연인은 곯아떨어져 있었다. 먼저 잠에서 깬 건 레아였다. 레아가 졸린 눈을 겨우 뜨고 줄리앙을 바라보자 거짓말처럼 줄리앙 역시 눈을 떴다. 기다란 눈매가 스르르 열리고, 뜨는 해가 눈부시다는 듯 가늘게 뜬 그 눈 사이로 언제나처럼 까만 눈동자가 다정하게 레아를 바라보았다.

줄리앙은 레아를 제 팔로 끌어 감싸 안았다. 레아는 줄리앙의 품에 안겨 한참을 더 잤다. 제 품 안에 쏙 들어오는 레아를 안으면서 줄리앙은 처음으로 행복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그는 이 순간을 잊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했다. 처음 그녀와 사랑을 나누고, 곤히 곯아떨어졌다가 아침 늦도록 잠자리에 있으며 그녀를 품에 안고 잠에서 깨는 이 순간의 행복을 말이다.

줄리앙에게 그들의 결혼 생활은 그때부터 이미 시작이었다. 결혼식은 천천히 진행되었다. 여름 늦도록 그들은 매일 밤 라벤더 숲에서 밤 산책을 했고, 함께 책을 읽었고, 차를 마셨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영지를 몇 개월씩이나 비울 수 없었던 줄리앙이 레날에 잠시 돌아가 있는 중에 레아는 언니들과 함께 결혼식 준비를 했고, 그가 돌아오자 바로 결혼식이 열렸다. 왕국의 내로라하는 귀족 대부분이 참석한 성대한 결혼식이었다.

9월이 가기 전에 레아는 레날의 영지에 도착했다. 저택은 아주 높고 성대했다. 저택 안의 모든 가구들은 튼튼한 떡갈나무로 되어 있었고 메인홀에 깔린 카펫이며 커다란 샹들리에와 군데군데 놓인 조각상이며 조명이며 모두 매우 고급스러웠다. 하지만 모두 많이 낡아 있었고 유행이 한참 지난 디자인이었다. 사방에 먼지가 가득했고, 등불은 여기저기 금이 가 있었으며, 난간도 은촛대도 심지어 식기구 하나하나도 이가 나가거나 어딘가 부서진 물건들뿐이었다. 수년 동안 누구도 저택 안에 큰 관심을 쏟지 않았다는 것이 여실히 보였다.

“어머니께서는 모든 집중력을 저택을 꾸미는 데 쓰시다가, 그것도 부질없다는 걸 깨달은 후에는 이곳을 완전히 방치해 두기 시작했습니다.”

레아의 눈동자에 잠시 놀라움이 지나간 걸 순식간에 눈치챈 줄리앙은 변명하듯 그렇게 말했다.

“괜찮아요. 난 집을 꾸미는 데는 도사거든요. 내가 타고난 정원사라는 걸 몰랐죠?”

레아는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결혼한 지 채 3년이 지나지 않아 높고 황량하기만 했던 레날 공작저를 아름답게 만들었다. 저택 벽을 타고 올라가는 아이비하며, 저택 전체를 둘러싼 장미덩굴, 방치된 호숫가 주변에 심은 작은 나무들, 어느새 뿌리 내린 들꽃들까지 모든 것이 레아의 손만 닿으면 아름다워지는 듯했다.

나날이 변모하는 저택의 모습과는 달리 그들의 사랑은 3년이 다 가도록 변함이 없었다. 제 침실을 각각 이용하는 일 없이 거의 매일 부부 침실에서 함께하는 부부의 생활에 저택의 사용인들 사이에는 듣기 좋은 수군거림이 오갔다.

레아는 언제나 레아답게 사랑스러웠고, 줄리앙 역시 언제나 처음처럼 레아를 사랑했다. 문제는 그들이 어마어마하게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 그렇게 싸웠다는 데에서 그걸 눈치채야 했는데 둘 모두 그런 차이를 인식하기엔 너무도 강렬한 사랑에 빠져 있었다.

“또 넘어졌어?”

“그냥 호숫가에 갔는데 갑자기 다람쥐가 튀어나오잖아. 깜짝 놀라서 뒷걸음질을 치다가 돌부리에 걸려서.”

“내가 잘 좀 보고 다니랬지.”

결혼한 지 얼마 안 돼 둘 사이는 더없이 친근해졌다. 줄리앙과 레아는 서로 말을 편하게 한 지 오래였다.

“그렇게 말하지 말고 좀 더 다정하게 말해 주면 안 돼? ‘호숫가에 가는 건 걱정되니까 나랑 같이 가자.’라고 말해도 되잖아.”

레아는 줄리앙이 자신을 걱정해서 잔소리를 해 대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가 ‘하지 말랬지.’, ‘그러지 마.’ 같은 말을 하며 인상을 쓰면 저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줄리앙 자신은 자기가 얼마나 세게 말하는지 모르는 것 같았지만, 그런 식으로 레아에게 잔소리할 때면 그의 낮은 목소리는 더 낮게 가라앉았고, 잔뜩 화를 품고 있어서 그런 말을 듣는 것 자체가 레아에겐 큰 스트레스였다.

“내가 뭘 어떻게 말했는데?”

줄리앙은 줄리앙대로 불만이었다. 레아는 언제나 제멋대로였다. 호숫가에 좀 가지 마라, 넘어지지 않게 앞 좀 잘 보고 다녀라, 어디 긁히고 다니지 마라, 나무에 부딪치지 않게 걸어 다닐 때 책 좀 읽지 마라, 무거운 거 들다가 손목 다치니 아무것도 들지 마라, 추울 때는 밖에 나가서 산책하자고 하지 마라, 비 오는 날에는 나가지 마라…….

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 보듯 레아를 바라보고 있으면 늘 한숨이 나왔다. 그녀는 너무 조심성이 없었고, 늘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했다. 아무리 줄리앙이 주의하라고 해도 제 맘대로 다니다가 결국엔 어딘가를 다쳤다. 줄리앙은 레아가 다치는 것이 정말 싫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늘 레아에게 화를 냈다.

“또 그렇게 말하잖아. 나한테 명령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나한테 자꾸 뭐 하지 마, 뭐 하지 마, 하고 화내지도 말았으면 좋겠고…….”

“그럼 어떻게 말해.”

“그냥 나한테 화내지 말았으면 좋겠어. 잔소리도 조금만 덜 하고. 당신이 다정하게 말하면 나도 웃으면서 대답하고 주의 깊게 들을 수 있다고.”

“잔소리하게 하지 마, 레아. 제발 내 말 좀 들어.”

한숨을 쉬면서 줄리앙이 그렇게 말하면 레아는 울먹거리며 말했다.

“처음처럼 우리 어렵게 말하는 게 낫겠어.”

“어렵게?”

“당신이 그랬잖아. 우리는 자주 싸울 테니까, 존댓말을 하는 게 낫겠다고. 야, 야, 하면서 싸우면 싸움이 커질 거라고 그랬었잖아.”

“그거야 그때 얘기지. 우리는 자주 안 싸우잖아.”

“당신은 우리가 자주 안 싸운다고 생각해?”

줄리앙과 레아 사이엔 아무 문제도 없었다. 부부 생활은 완벽했고, 결혼 생활엔 어떤 걸림돌도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일주일에 한 번 이상을 그렇게 싸웠다.

“줄리앙, 당신은 늘 나한테 차갑게만 말하는 것 같아. 레아, 당신이 걱정됩니다. 그러니까 조금 보고 다니십시오. 이렇게 말하면 되잖아. 내가 그러지 말랬지! 하면서 화내지 말고. 그냥 우리 처음으로 돌아가자. 처음처럼 나한테 정중하게 말해 줘.”

줄리앙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줄리앙은 지금이 좋았다. 그는 누군가와 지금처럼 편하게 대화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 같았다. 아무 거리낌 없이 레아에게 무슨 말이든 하고 레아 역시 자신에게 편하게 말한다는 것이 줄리앙은 좋았다. 이제 와서 처음으로 돌아가자는 것이 그에게는 도무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갑자기 어떻게 그렇게 말해. 싫어.”

“그래도 그렇게 해 줘. 나한테 싫어라고 말하면 가슴이 아파.”

“그럼 레아 당신도 제발 내 말 좀 들어.”

“당신이 좀 정중하게 말한다면 들을 수도 있지.”

레아의 말투에는 점점 빈정거림이 어리고 있었다. 계속 대화하다간 괜히 화가 날 것 같아 줄리앙은 말을 끊었다.

“그만하고 나중에 얘기하자.”

“뭘 그만해? 당신이 왜 잔소리하는지는 알겠는데 당신 말투가 너무 화가 난 것 같아 무섭다고, 줄리앙! 그러니까 그렇게 말하지 말아 달라고 하는 거잖아. 그럼 알았어, 그렇게 할게, 하면 되는 거 아니야? 왜 당신은 늘 싸우다가 말고 그만하자고 하는 거야? 내가 시작한 거야? 당신이 시작했잖아! 당신은 진짜 나쁜 놈이야!”

그런 사소한 일로 그들은 한두 시간 정도 말을 하지 않고 지내는 때도 있었다. 우습게도 그렇게 싸워 봤자 하루를 못 갔다. 아마 레아가 조금이라도 더 고집 센 여자였더라면 그런 싸움이 이틀도 사흘도 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레아는 침묵을 견디지 못했고, 제가 잘못한 것이 아닌데도 늘 먼저 줄리앙에게 와서 사과했다.

“그만 우리 화해하자, 줄리앙.”

그러고는 줄리앙에게 와서 그의 품에 폭, 아기 새처럼 안기는 것이었다. 레아는 성격이 급하고 쉽게 흥분해서 화가 나면 줄리앙에게 소리를 지르며 퍼부었는데, 그러고는 또 한두 시간 후에 먼저 와서 아이처럼 사과를 하자고 손을 내밀었다. 줄리앙은 어떨 땐 그 모습이 순수하게 느껴졌고, 어떨 땐 나 원 참, 어떻게 하란 말인가 싶기도 했다.

때때로 그는 레아에게 미안했다. 레아가 그렇게 자신에게 먼저 다가오면 줄리앙도 조금은 화가 풀렸다. 하지만 이미 찌푸릴 대로 찌푸려진 얼굴을 다시 펴는 데는 꽤 시간이 걸렸다. 줄리앙에게는 이미 언짢아진 기분을 푸는 일이란 조금은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었다. 그는 레아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던 것이다.

“사과하자, 줄리앙. 빨리 날 안아 줘.”

“왜 말없이 있어? 아직 화났어?”

“뽀뽀해 줘, 줄리앙. 재밌는 얘기 해 줘, 줄리앙.”

응, 안아 줄게.

아니야. 화 안 났어. 당신이랑 아무것도 아닌 거로 싸우고 나니까 괜히 후회돼서 그래.

그래, 뽀뽀해 줄게. 레아, 내가 재밌는 얘기 해 줄까? 미스터리 소설 읽은 거 얘기해 줄게, 범인을 맞혀 봐.

줄리앙은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그게 안 되는 사람이었다.

그는 그냥 가만히 두면 시간이 지나 사르르 풀리는 사람이었다. 싸우고 나면 잠시 침묵 속에 빠져 있기를 원했다. 레아는 말이 많았고 뭐든 대화로 풀려고 했다. 싸우자마자 바로 화해하고 하하호호 웃기를 원했다.

줄리앙은 싸울 때면 저도 모르게 말투가 더 짧아지고 퉁명스러워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 말투가 레아에게 혹여 큰 상처라도 줄까 두려워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침묵이 레아에게는 더 큰 독인 듯했다.

두 사람은 하나부터 열까지 아무것도 맞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그도 레아에게 맞춰 주고 싶었지만, 아무리 맞춰 주려고 노력해 봐도 타고난 성품이라는 건 쉽사리 변하지 않는 법이었다.

“그거 알아, 줄리앙? 우리 둘이 싸우면 늘 내가 먼저 사과한다는 거.”

“당신은 내게 막 퍼부어 버리잖아. 나쁜 놈, 미친놈, 빌어먹을 놈, 밉다, 싫다. 그리고 한 5초쯤 있다가 줄리앙, 우리 화해해요, 라고 하지.”

“그러게. 난 성질이 불같아서 탈이야. 하지만 그러고 나서 아무 말 안 하고 있다 보면 갑자기 이렇게 싸우고 가만히 있는 시간이 너무 아까운 거야. 당신이랑 빨리 화해해서 다시 행복하게 지내고 싶어. 내가 화해하자고 하면 그냥 같이 화해하면 안 될까?”

“노력하고 있어.”

줄리앙 딴에는 정말이지 크게 노력하고 있었다. 줄리앙은 제 말이 짧고 퉁명스럽게 들릴까 더듬거리며 몇 마디를 덧붙였다.

“레아, 나로서는 이 이상은 잘 안 돼. 그냥 내가 알아서 풀릴 때까지 가만히 내버려 둬. 아니, 내버려 둬 줄 수 있을까?”

레아는 한숨을 푹 쉬었다. 내버려 두라고 명령하는 대신 내버려 둬 줄 수 있겠냐고 묻는다는 것 자체가 줄리앙이 얼마나 열심히 레아의 방식에 따르려 노력하고 있는가 하는 증거였다.

레아 역시 알고 있었다. 줄리앙은 줄리앙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줄리앙이 노력한다고 해도 레아의 성에는 차지 않았다.

“그러게, 줄리앙. 나도 당신이 노력하고 있다는 걸 알아. 그런데 참 이상하지? 난 침묵을 지키고 있는 당신을 그냥 내버려 두는 게 잘 안 돼. 그냥 못하겠어. 그리고 내가 당신을 화나게 한 것도 아니고 같이 싸운 건데, 당신이 그렇게 가만히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으면 괜히 안절부절못하다 내가 먼저 말 걸고 화해하자, 미안해하고 말하게 되고 결국 내가 다 사과하게 되는 게 너무 싫어.”

“사과하지 않아도 돼. 가만히 두면 내가 사과할게.”

“하지만 난 줄리앙 당신이 내게 사과하는 걸 기다릴 수가 없어. 늘 내가 먼저 사과하게 돼. 아마 내가 더 착해서 그런가 봐.”

그렇게 말하고 레아가 불쌍하게 웃으면 줄리앙은 한없이 미안해졌다.

“그냥 우리 싸우지를 말자.”

“그래. 이제 내가 뭘 해도 나한테 소리 지르거나 화내면 안 돼!”

“소리는 레아 네가 늘 지르잖아.”

줄리앙은 웃으면서 레아의 볼을 잡아당겼다.

“그런가? 그럼 낮게 목소리 깔고 무섭게 말하는 것도 안 돼. 그렇게 말하면 나도 기분이 상한단 말이야.”

레아는 정말 똑똑한 여자였다. ‘네가 이렇게 행동하면 내 기분이 상한다.’라고 정확하고 정중하게 말할 줄 알았다. 하지만 줄리앙은 그렇게 말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었다. 그는 ‘네가 그렇게 행동하면 걱정이 되고 깜짝 놀라.’라고 말하는 대신 레아에게 화를 내 버리곤 했다.

“레아, 나도 정말 그렇게 하기 싫어. 하지만 넌 끊임없이 날 괴롭히잖아. 정원을 가꾼다고 하고 고꾸라지질 않나, 호수에서 놀다가 감기에 걸리질 않나. 미치겠단 말이야.”

“걱정이 되면 걱정을 해. 나한테 화를 내지 말고. 내가 아프면 왜 화를 내는 거야? 가뜩이나 아파서 괴로운데.”

“모르겠어.”

그가 그렇게 말하고 혼란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면 레아도 화가 다 누그러졌다. 그런 말을 할 때 줄리앙은 주인 잃은 강아지가 꼬리를 늘어뜨리듯이 까만 눈동자가 가득 찬 눈꼬리를 아래로 늘어뜨리고는 정말이지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얼굴로 레아를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아, 나도 모르겠다. 있잖아, 줄리앙. 언젠가는 내가 사과하기 전에 제발 당신이 내게 먼저 사과해 줬으면 좋겠다. 언젠가는 한 번은 그러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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