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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우유 한잔 시럽 두 스푼 2 (29/48)

29. 우유 한잔 시럽 두 스푼 2

그렇게 싸우고 난 날이면 줄리앙은 이상하게도 꼭 레아에게 시럽 두 스푼 탄 따뜻한 우유를 건네주었다. 사용인에게 시키지도 않고 제가 직접 내려가서 끓여 온 것이었다. 처음엔 시럽 따위는 들어 있지 않았었다.

“웬 우유야? 당신이 직접 끓인 거야?”

“감기 걸려.”

줄리앙의 말은 언제나 짧았다. 특별히 무뚝뚝하게 굴려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 원래 그렇게 길게 말하는 법이 없었던 어머니 아버지에게서 자랐기에 그런 것이었다. ‘감기 걸려.’라는 말 뒤에는 ‘감기 걸릴까 봐 걱정되어 손수 우유까지 데워 왔으니 어서 먹고 화를 풀고 자’라는 마음이 들어 있었다.

“시럽도 안 탄 우유를 어떻게 마셔?”

한입 마시고는 바로 우웩 하며 컵을 저리 치우는 레아가 줄리앙은 하나도 얄밉지 않았다. 크게 싸우고 나서도 이렇게 사랑스럽다는 게 정말 신기할 노릇이었다.

“시럽?”

“응. 달게 타 줘.”

줄리앙은 공작을 이렇게 부려 먹는 법이 어딨냐고 툴툴거리면서도 하인을 시키는 대신 제가 직접 가서 시럽을 듬뿍 두 스푼 넣어 레아에게 다시 우유를 대령해 왔다.

“천천히 마셔. 뜨거워.”

퉁명스러운 말투 뒤에는 또, ‘혹시나 식을까 봐 한 번 더 끓여 오느라 늦었다’는 속마음이 들어 있었다. 레아는 이 서툰 화법에 피식 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울리지나 말든가.’ 하고 레아가 중얼거리자 줄리앙은 그 작은 소리를 어떻게 들은 것인지 바로 툴툴거리며 대답했다.

“넌 화가 나면 소리 지르면서 울잖아. 그걸 내가 어떻게 말려.”

두 사람은 얼굴을 노려보다가 말고 픽, 눈을 마주치며 웃었다.

그렇게 싸우고 난 날 밤이면 두 사람은 꼭 끌어안고 더 정답게 잠이 들었다. 아니 줄리앙이 레아를 꼭 안고 잤다는 말이 더 옳다. 마치 레아가 어디론가 도망갈까 봐 걱정이라도 되는 듯 그렇게 끌어안고 잠에 드는 줄리앙을 레아는 미워할 수가 없었다.

그는 먼저 사과하는 법도 없었고, 레아에게 걱정된다는 말 대신 화를 내 버리고, 화해하자고 해도 쭈뼛거리며 침묵을 지키고 서 있는 얄미운 놈이었다. 하지만 미안하다는 말 대신 레아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만든 시럽 담긴 우유를 건네주고, 레아를 숨 막히도록 끌어안고 잘 때면 꼭 소년같이 측은했다. 그렇게 그는 언제나 레아에게서 쉽게 용서를 사는 남자였다.

하지만 누그러진 마음으로 잠이 들었다가도 다음 날, 혹은 다음 주에 두 사람은 또 싸웠다. 사소한 싸움은 늘 두 사람의 성격 차이 때문에 크게 번졌다. 크게 번져 봤자 곧 풀리곤 했지만, 잦은 싸움은 둘 모두를 피곤하게 만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줄리앙은 크게 화가 났다. 레아가 제 맘대로 방을 꾸미겠다고 설쳐 대다 팔을 다쳤기 때문이었다. 분명 나중에 사용인을 불러다 주겠다고 했었고, 자신이 도와줄 때까지 기다리라고도 했는데 이번에도 그의 말을 듣지 않고 혼자 이것저것 하다가 결국엔 손목을 심하게 다쳤다.

“제발 내 말 좀 들어라, 응?”

걱정이 되어 한 말이었다. 하지만 그의 생각과는 다르게 말투가 날카로웠다. 짜증 내듯, 소리치는 제 목소리를 듣고 스스로도 느꼈을 정도이니 레아의 귀에는 줄리앙이 자신에게 소리를 지르는 걸로만 들렸을 게 분명했다. 줄리앙은 바로, 사과하려고 했다. 하지만 레아가 더 빨랐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그렇게 소리를 지르는 거야?”

레아의 그 말을 웃어넘기고 ‘그래, 미안해. 화내려던 건 아니라 걱정이 되어서 그랬어. 근데 레아, 네 목소리가 더 커.’라고 웃으면서 말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렇다면 성격 좋고 뒤끝 없는 레아도 같이 웃으면서 미안하다고 했을 텐데. 줄리앙은 그렇게 못 한 것을 그 후로 아주 오랫동안 후회했다.

왜 그렇게 못 했던 걸까.

줄리앙의 차가운 말투와 레아의 화르르 타오르는 불같은 성격은 정말이지 상극이었다. 줄리앙은 그냥, 그날 더는 말하고 싶지 않았다. 여기서 더 입을 열었다간 또 날카로운 말들이 나올 것이고, 그것이 레아를 상처 입힐 터였다. 조금 더 화가 가라앉고 나서 조곤조곤히 대화하는 게 낫지 않을까?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다.

“그만하자.”

그만하라니, 그런 식으로 대화를 자르는 것이야말로 레아가 가장 못 견뎌 하는 행위라는 걸 알고서도 말이다.

“그만하라고 말하는 거 싫다고 했잖아. 내가 잘못한 건 알아. 하지만 당신이 그렇게 화를 내면―.”

레아는 또 울먹이면서 말했다. 사과하려는 것 같았다. 사실 레아가 잘못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레아는 그냥 조금 서툰 것이었고, 저 혼자 무언가를 하고 싶었을 뿐이고, 덤벙대다가 다친 것뿐이었다. 줄리앙은 미안했다. 레아가 지금 이렇게 사과하고 울고 그러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냥 나중에 얘기하자.”

나중에 걱정되어서 그랬다고 사과하고 싶었다. 좀 더 목소리가 가라앉고 나서 말이다. 레아가 원하는 대로 부드럽게, 정중하게, 다정한 방식으로.

“그래, 그럼 화해하자. 나 안아 줘.”

“나중에.”

“안아 줘! 포옹하고 화해하자.”

줄리앙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풀리지도 않은 기분으로 죄책감만 잔뜩 느낀 채 레아와 포옹하고 싶지 않았다. 조금 있다가, 한 시간만 있다가, 제가 먼저 다가가서 레아를 안아 주고 미안하다고, 소리친 것 잘못했다고, 걱정되어서 그랬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잠자코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는 줄리앙의 모습을 본 레아는 더 크게 화가 난 것 같았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해서 그래? 화해하자고 말하면 좀 화해해라, 응? 지금 줄리앙 당신이 나한테 화낸 건데 내가 또 사과하고 있잖아. 정말 미워!”

줄리앙은 한숨을 푹 쉬고 레아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힘없이 그녀를 안았다. 그게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이제 됐지?”

“더, 더 안아 줘. 이제 됐지? 라고 말하지 말고 따뜻하게 안아 주고 사랑한다고 말해 줘.”

‘네가 걱정되어서 깜짝 놀랐고, 그래서 불쑥 화가 났고, 아직 진정이 안 되었으니까 조금만 기다려 주면 다시 안아 줄게. 언제나 널 사랑하니까 사랑한다고 말해 달라고 하지 않아도 돼.’

줄리앙은 그렇게 말했어야 했다. 하지만 대신 이렇게 말했다.

“지금은 그럴 기분이 아니야.”

“뭐가 또 그럴 기분이 아니야! 안아 달라고 해도 안아 주지 않고 바보!”

레아는 쿵쾅거리면서 문을 박차고 나갔다. 줄리앙은 귀를 막고 누웠다. 어차피 또 제풀에 지쳐 찾아올 것이다. 미안하다고 사과할 것이다. 그럼 그때 안아 주면 된다. 그냥 여기 누워 있자.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누워 있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냥 내버려 둘 수 없는 존재였다. 멀쩡히 걸어가다가도 갑자기 넘어져서 다치는 것이 레아 리버런 아닌가. 씩씩거리면서 제 방이 있는 위층으로 올라가다가 계단이라도 헛디디면 어쩌나, 하고 줄리앙은 또 걱정이 됐다. 이만하면 걱정도 병이었다.

“레아 리버런, 정말 넌 신경 쓰이는 애야.”

줄리앙은 한숨을 크게 몰아쉬고는 벌떡 일어나 레아의 뒤를 쫓았다. 레아의 방은 비어 있었다. 문이 열려 있는 걸 보니 방에 들어왔다가 고새 어디 다른 데로 씩씩대면서 간 모양이었다. 조그만 체구를 한 그녀가 일부러 쿵쿵대면서 큰 걸음으로 걸어서 어딘가로 향하고 있는 모습을 생각하니 줄리앙은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언젠가 그들은 이런 대화를 한 적도 있었다.

“레아, 넌 대체 왜 그러는 거야? 왜 그렇게 싸우기만 하면 나한테 안아 달라고 하고, 사랑한다고 말해 달라고 하는 거야?”

“모르겠어. 싸우고 나면 당신이 너무 차갑게 느껴져.”

“난 언제나 당신을 사랑해. 영원히, 변함없이.”

“알아.”

“그러니까 물어보지 마.”

“그래도 그냥 불안해. 싸우고 나면 그냥 그래. 당신이 날 사랑한다고 영원히 날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 말해 줬으면 좋겠단 말이야.”

“싸우고 났는데 나한테 사랑하냐고 묻는 당신을 보면 내가 그렇게 못 미더운가 싶어서 가끔 화가 나. 그리고 난 언제나 행복한 기분으로 당신을 안고 싶어. 안아 달라고 해서 안아 주는 거 말고.”

“그래도 그냥 내가 안아 달라고 하면 안아 줘. 내가 사랑하냐고 물으면 사랑한다고, 엄청나게 사랑한다고 말해 줘. 알았지?”

레아는 그렇게 말하고 방긋 웃었다. 회푸른색 눈이 둥근 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빛나는 머릿결, 진줏빛 살결, 장밋빛 뺨, 그렇게 웃을 때의 그녀는 꼭 천사 같았다.

“그래, 알았어.”

줄리앙은 한숨을 푹 쉬고 졌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렇게 말해 놓고 오늘 또 사랑한다고 말하는 대신 나중에, 라고 말했다. 그는 급하게 레아를 찾았다. 찾아서 사랑한다고 말해 줘야지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레아는 없었다. 방에도, 그녀가 손수 꾸며 놓은 작은 서재에도, 당연히도 부부침실에도, 줄리앙의 방에도, 메인홀에도, 정원에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대체 여기서 뭐하는 거야.”

줄리앙이 레아를 찾은 곳은 호숫가 근처의 호두나무 아래였다. 키가 큰 호두나무 아래에서 레아는 비를 맞으며 앉아 있었다. 분명 그녀를 보면 바로 ‘사랑한다’고 말해 주려 했는데 그 모습을 보자 또 불쑥 화가 났다.

“비 맞고 있어.”

“감기 걸려. 왜 그러는 거야, 대체!”

“당신이 날 안 보니까! 내가 그냥 잘못해서 넘어진 것뿐인데, 그거 가지고 나한테 화를 내니까! 화를 내지 말라고 화를 냈더니 또 화를 내니까! 안아 주고 화해하자고 하는데도 등을 돌리니까! 대화하자고 하니까 그만하라고 하니까! 줄리앙, 당신이 그럴 때마다 내가 얼마나 답답한지 알아?”

줄리앙은 한숨이 나왔다. 우리는 어쩜 이렇게 다른 사람들일까, 왜 그렇게 그녀에게 상처만 주는 것일까, 분명 잘하려고 노력하는데 왜 이렇게 매일 싸우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알았어. 이제 그만 들어가자.”

“뭐가 알았어야. 말을 해! 내가 잘못한 거야?”

“그냥 좀 나를 내버려 두면 돼, 레아. 내가 잘못한 거 맞아. 잠깐만 내버려 두면 되잖아. 그럼 내가 미안하다고 말하고 안아 줄게. 그게 안 돼?”

“응, 나는 그게 안 돼. 미안해, 줄리앙. 답답해서 미치겠어. 난 그렇게 못 하겠어. 당신이 그냥 나한테 맞춰 주면 안 돼?”

“알았어. 미안해. 내가 그렇게 할게. 그러니까 얼른 들어가자.”

“지금 나한테 먼저 사과한 거야?”

“그래, 당신한테 내가 먼저 사과한 거야. 그러니까 그만 비 맞고 이리 와. 안아 줄 테니까.”

레아는 비에 다 젖은 몸으로, 빗물인지 눈물인지 알 수 없이 물로 범벅된 얼굴을 고양이가 제 주인의 다리에 그러듯 줄리앙의 볼에 비벼 대며 그에게 안겼다.

그는 도무지 레아가 왜 이러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세상에는 영영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관계들이 있다. 그중 하나가 싸울 때 대화로 풀려고 하는 사람과 싸우고 나면 침묵하고 자기 시간을 가져야 하는 사람이었다. 레아와 줄리앙이 바로 그랬다.

줄리앙은 레아를 꼭 안았다. 레아의 몸이 얼음처럼 차가웠다.

“레아델피나 루이스 레날, 넌 정말 짜증 나는 여자야, 그거 알아?”

“줄리앙 아르디 레날, 너도 그래.”

레아와 줄리앙, 두 사람은 너무 달랐고, 또 너무 똑같았다. 비에 젖은 몸으로 레아를 꽉 껴안고 있자니, 줄리앙은 그녀의 마른 몸이 제 생각보다도 훨씬 가녀리다는 걸 새삼 느꼈다. 다시 한번 그는 맹세했다. 이 여자를 영원히 행복하게 해 줘야지. 하고 말이다. 줄리앙은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다시는 혼자 비 맞고 앉아 있지 마.’

하지만 그는 레아를 알았다. 레아는 입을 삐죽이면서 ‘나를 혼자 비 맞고 싶은 기분 들게 하지 마.’라고 말해서 줄리앙의 화를 돋울 것이다. 그는 거기까지 자신이 레아를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 웃겼다. 그래서 혼자 실소를 짓고는 제 머릿속의 말을 조금 바꾸어 입 밖으로 꺼냈다.

“다시는 혼자 비 맞게 안 할게, 레아.”

레아는 아무 말 없이 더 꽉, 줄리앙의 품에 안겨 왔다. 그러고는 그 작은 손을 들어 줄리앙의 커다란 등을 토닥토닥, 매만져 주었다.

저택으로 돌아와 줄리앙은 레아에게 따뜻한 우유를 데워 주었다. 시럽 두 스푼 역시 잊지 않았다. 그러고는 그녀를 꼭 안고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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