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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행복한 삶 (30/48)

30. 행복한 삶

그날 새벽 줄리앙은 레아가 끙끙 앓는 소리에 일어났다. 열이 불같았다. 온몸이 너무 뜨거웠다. 그런데도 레아는 추워하고 있었다. 하인이 얼음물을 가져와 레아의 몸을 흠뻑 적시게 했다. 오들오들 떠는 레아의 작은 몸을 보고 줄리앙은 자신을 죽이고 싶었다. 내가 그렇게 화만 내지 않았어도 레아가 빗속으로 뛰어들어 가는 일은 없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마음 한편에서는 또 화가 샘솟고 있었다. 또 자신의 말을 안 듣고 제 맘대로 행동하고 그러다가 결국 이렇게 아프게 된 레아 리버런, 이 여자가 몹시도 미웠다. 하지만 이런 성격의 레아라도, 아니 이런 성격의 레아였기에 더 줄리앙은 그녀를 사랑했던 것이다. 그녀가 이런 사람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행동한 자신을 줄리앙은 용서할 수 없었다.

거의 삼 일 밤낮을 고열에 시달렸지만 다행히 일주일 정도 지나자 레아의 열은 점점 내려갔다. 심한 기침도 줄어들기 시작했다. 매일 밤 줄리앙을 불러 추우니까 안아 달라거나, 사랑한다고 말해 달라거나 하면서 마치 싸우고 나서 마음이 약해졌을 때처럼 아이같이 굴었지만 그녀의 몸은 점점 나아지고 있었다.

의사는 레아의 병을 단순한 감기라고 말했다. 마치 이제 좀 쉬어 가면서 두 사람의 시간을 가지라고 하늘이 허락해 준 듯했다. 줄리앙은 요즘 왕궁 출입이 잦았고, 레아 역시 집 꾸미기며 화원 꾸미기에 열중하느라 결혼 3년 차가 되니 슬슬 둘만의 시간이 줄어든 터였다.

“책 읽어 줘.”

“미스터리 소설?”

“그거 말고. 이거.”

오래 고열에 시달린 탓인지 눈빛이 약간 멍해진 레아는 근 일주일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한 탓인가 어린아이처럼 조그맣게 줄어들어 핏기 없이 투명해져 있었다. 어떨 땐 내일이라도 바로 죽을 듯 창백해 보이다가도, 다음 날에는 마치 이제 막 태어난 요정처럼 청초해 보이기도 했다.

말을 많이 하다 보면 흥분해서 열이 또 올랐기에, 의사는 줄리앙에게 레아와의 대화를 자제하라고 말했다. 베개에는 물결치는 긴 머리를 흐트러뜨린 채 누워만 있어야 하는 레아를 위해 줄리앙은 그녀가 원하는 책을 읽어 주었다.

“왜 이 책이야?”

“당신이 읽고 울었던 책이잖아. 그때 좀 귀엽다고 생각했어.”

“귀여워? 내가? 네가 아니고?”

줄리앙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피식, 웃었다.

“그래, 당신도 그때는 제법 귀여웠지. 자, 귀여운 목소리로 읽어 줘 봐.”

레아가 고른 책은 줄리앙에게 처음 빌려준 궁정 로맨스 소설이었다. 폭풍우가 치는 밤 성벽에서 죽는 공녀의 이야기가 나오는 무섭도록 비극적인 이야기였다. 그랬다. 줄리앙은 처음 이 소설을 읽고 펑펑 울었다. 하지만 다시 한번, 비가 몰아치는 레날의 겨울에, 레아의 옆에 앉아 그녀에게 그 소설을 조곤조곤 읽어 줄라 치니, 이제는 웃음이 나왔다.

“왜 웃어.”

“좋아서.”

“뭐가 좋은데.”

처음 이 소설을 읽었을 때, 이렇게 네 앞에 앉아 이 이야기를 너에게 읽어 줄 일이 있을 줄은 몰랐노라고, 그저 조금 더 친해지고 싶어서 닥치는 대로 빌려주는 소설을 읽고, 아니 내 마음이 뭔지도 모르면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무작정 네가 있는 라벤더 밭을 서성였노라고 줄리앙은 말했다.

레아는 오랜만에 크게 웃었다. 일주일 전의 싸움은 마치 없었던 일인 듯, 그들의 사이는 다시 평화로워져 있었다. 부부싸움이라는 것이 원래 그런 것 아닌가 하고 줄리앙은 생각했다.

“내가 아프니까 당신은 화내지 못하겠지. 그러니까 이런 말, 해도 돼?”

레아가 말했다.

“뭔데 그래.”

줄리앙이 묻자 그녀는 쭈뼛거리며 대답했다.

“당신이랑 그렇게 심하게 싸우고 당신이 그만하라고 말할 때마다 너무 화가 나서 어떨 땐 그냥 당신을 떠나고 싶어지기도 했어. 그래 이제 우리는 끝이야, 그런 생각을 했어. 당신이 너무 미웠어. 날 안아 주지도 않고 내 말도 들어 주지 않고.”

줄리앙은 많은 말을 속으로 삼키고 단 한마디로 대답했다.

“난 한 번도 그런 생각 한 적 없었어.”

“내가 그렇게 생각해서, 당신도 혹시 그럴까 봐 자꾸 날 사랑하냐고 묻고 안아 달라고 하고 그랬나 봐.”

“지금도 나와 헤어지고 싶어?”

“아니야. 당신 얼굴만 보면 금세 그런 생각은 잊어버려.”

“또 싸우면 또 그런 생각 할 거잖아.”

“이젠 싸워도 그런 생각 안 할게.”

“정말이야?”

“응. 그냥 나는 당신이 나를 떠날 것 같았어. 늘.”

“한 번도 그런 적 없잖아.”

“그러게. 하지만 내 생에 이렇게 날 사랑해 준 사람은 당신밖에 없는걸? 이렇게 좋은 게 언제까지 끝나지 않는다는 건 믿을 수가 없어.”

그렇게 말하고 웃는 미소가 힘이 없었기에 줄리앙은 화가 나는 대신 레아가 애처로웠다. 왜 이렇게 애 같은지, 왜 저렇게 사랑을 갈구하는지 줄리앙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레아의 무정한 아버지와 사랑 없는 어머니를 알고 있었다. 그 속에서 컸으면서도 사랑을 듬뿍 받은 사람처럼 다정한 레아의 성격도 잘 알고 있었다. 레아가 자신에게 더 의존하고 저에게만 이렇게 아이같이 구는 이유도 알았다. 아니 알아야만 했는데, 이해해 줘야만 했는데 자꾸 이렇게 부딪치며 싸우는 자신이 싫었다.

그다음 주에 이사벨라 리버런이 레날의 저택에 도착했다. 처음 열이 오른 날 보냈던 편지를 받고 바로 출발한 것일 터였다.

“레아는 원래 어려서부터 감기에 자주 걸렸어요. 조심성 없이 새벽이슬을 맞으면서 잘도 돌아다녔거든요. 한번 걸리면 오래가기도 하고 좀처럼 낫지를 않아요.”

그녀가 그렇게 말했기에 줄리앙도 걱정하지 않았다. 기침은 떨어질 기미를 안 보였지만 아무도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원래 좀 그랬어. 감기만 걸리면 이래.”

이사벨라가 도착한 후로 레아의 상태는 꽤 호전되어, 이제는 일어나서 앉아 있거나 하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벨라가 도착한 지 일주일쯤 더 지났을 때였다. 이제 슬슬 다시 돌아가려고 하던 찰나에 레아의 열은 다시 올랐다. 기침도 더 심해져 있었다. 급하게 불러온 의사는 폐렴인 것 같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그때도 폐렴쯤이야 어려서도 한번 걸렸었으니 곧 낫겠지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약이 듣질 않았다. 약이 듣질 않는 새에 금세 열은 40도를 넘었다.

일주일이 넘게 그런 상태가 지속되었다. 이제 책을 읽어 주어도 그걸 들을 정신이 없었다. 줄리앙은 레아의 어머니와 아버지를 레날의 저택에 부르지 않았다. 하지만 벨라가 부른 동생 둘, 그리고 언니 한 명이 레날의 영지에 하나하나씩 도착했다.

“아마 난 죽을 거야.”

레아가 그렇게 말한 것은 감기에 걸린 지 꼭 20일째가 되는 날이었다.

“아냐. 곧 나을 거야.”

“알아. 나는 이제. 슬퍼. 줄리앙. 나는 너무 슬퍼.”

울 힘도 없고 울 만큼의 수분도 없어 보이는 레아는 그렇게 계속 슬프다고 중얼거렸다. 아마 가족들이 하나하나 모이는 것을 보고 제가 죽을 것이라는 걸 알았을 것이다. 제대로 말할 기운도 없는 제 몸에 대해서도 이상하게 생각했을 것이었다.

“뭐가 그렇게 슬퍼. 우리 레아.”

벨라가 그렇게 묻자 레아는 흐느끼듯 속삭이듯 말했다.

“내가 죽으면 줄리앙은 혼자잖아. 언니도 혼자가 아니고 마리안느도 혼자가 아닌데 줄리앙은 내가 죽으면 아무도 없잖아. 그의 인생엔 아무것도 남은 게 없잖아. 어쩌자고 내가 비를 맞았지. 언니, 내가 왜 이렇게 경솔하게 행동한 거지? 이제는 어떻게 할 수가 없어.”

그렇게 말하고는 레아는 새초롬한 그 얼굴을 베갯잇에 파묻고 잠에 들었다. 줄리앙은 레아의 얼굴 근처로 몸을 숙이고는 살며시 쥐고 있던 그녀의 손등에 제 이마를 대고는 잠자코 있었다.

레아가 곧 일어나서 불현듯 생각난 듯이 말했다.

“내가 죽으면 다시 결혼해.”

줄리앙은 계속 그녀의 손에 제 얼굴을 파묻은 채 가만히 있었다.

“그래. 재혼해야 해. 죽으면 안 돼. 자살하면 안 돼. 절대로. 자살하면 내가 죽여 버릴 거야. 언니, 벨라 언니. 이 사람이 자살하지 못하게 막아 줘.”

벨라는 힘겹게 입을 열어 말했다.

“안 죽을 거야. 젊으니까 곧 나을 거야.”

“줄리앙, 자살하지 마.”

“왜.”

줄리앙 역시 어렵게 입을 열어 그렇게 말꼬리도 올리지 않은 채 레아에게 왜―라고 물었다.

“싫어. 날 따라 죽으면 안 돼. 좋은 삶이었잖아. 더 살아도 돼. 당신은 오래 살고, 아주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어. 아, 좋은 인생이었다 싶을 때, 그때까지 살고 죽어.”

“좋은 삶이었다고?”

“그래. 최고였잖아. 날 만나고, 사랑에 빠지고, 행복하고.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있어?”

네가 죽으면 모든 게 끝나는 거잖아, 라고 말하는 대신에, 줄리앙은 아이가 투정부리듯 레아에게 화를 냈다.

“하나도 안 좋았어. 최악이었어. 당신이랑 결혼해서 정말 싫었어.”

“싫었어?”

“그래, 싫었어.”

“최악이었어?”

“그래. 최악이었어.”

줄리앙은 어느새 울고 있었다. 하지만 이상한 에너지 같은 게 그의 주위를 휩싸고 있는 듯 그의 눈은 더 굳건하게 빛났고, 그의 목소리는 하나도 흔들림이 없었다. 벨라는 그가 울었다는 것을 한참 후에야 알았다. 레아는 눈을 감고 있었고, 그의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했으니 그가 울고 있는 것을 알 턱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상하게 모든 것을 다 안다는 듯한 목소리로 달래듯이 말했다.

“좋아. 당신한테 최고의 것이 늘 나라면 그걸로 좋아. 최악도 좋아. 당신, 재혼할 거야?”

“그래. 할 거야. 네가 죽으면 바로 할 거야.”

“바로는 좀 그렇다. 다시 결혼해. 알았지? 근데 5년만 있다가 해. 5년은 네 생각을 좀 해.”

“싫어. 당신이 죽으면 바로 결혼할 거야.”

“그래.”

“그러니까 제발 죽지 마.”

“그래.”

이제 레아는 누구의 말도 안 들린다는 듯이 눈을 감고 웃으며 그냥 알았다고만 하고 있었다.

“제발 죽지 마, 레아.”

“그래.”

“평생 너랑 싸울게.”

“평생?”

“응. 평생 너랑 싸울게. 그만하자고도 안 할게. 계속 얘기를 들어 줄 거야. 안아 달라고 하면 안아 줄게.”

레아는 마치 마지막 힘을 짜내는 사람처럼 위로 몸을 일으켜 줄리앙의 팔을 잡았다. 그러고는 그 팔에 매달려 조금 상체를 더 일으키고는 눈을 떠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안아 줘.”

줄리앙이 깊숙이 침대 위로 몸을 숙여 레아를 안았다. 레아는 줄리앙의 팔에 매달린 채 잘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가 죽어도 나랑 싸워 줘야 해.”

“그래.”

“죽으면 안 돼. 자살하면 안 돼.”

줄리앙은 짜내듯이 그래, 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레아는 기운이 다한 모양으로 조용해져서는 다시 제 몸을 눕혔다. 줄리앙이 그녀의 곁에 눕자 레아는 그의 귓가에 제 입을 대고 목소리를 겨우겨우 짜내어 말했다.

‘줄리앙, 나 죽고 싶지 않아.’

그는 죽지 않을 거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레아는 저 밑바닥에서 길어온 듯 힘을 꽉 주어 팔을 뻗고는 그의 등에 손을 대고 그 등을 토닥토닥, 몇 번이고 두드려 주었다. 그 손은 아주 뜨거웠고, 움직임은 곧 죽을 사람이라고는 볼 수 없게 명확했다.

그녀는 아주 또렷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죽고 싶지 않아. 줄리앙, 난 죽고 싶지 않아. 죽으면 행복할 수가 없는데, 행복해지고 싶은데, 난 죽고 싶지 않아. 그렇게 한참을, 몇 번이고 반복하며 레아는 줄리앙에게 그렇게 중얼거렸다.

“줄리앙, 호두나무. 호두나무를 기억해 줘. 호두나무 아래서 나를 껴안은 걸 기억해 줘. 그 나무가 썩으면 안 돼. 그 나무에서 거둔 호두가 땅에 떨어져서 썩으면 안 돼. 알았지. 호두나무를 그냥 두지 마. 언제나 호두나무를 보고 나를 기억해 줘.”

그녀는 잠꼬대하듯, 정신 나간 사람이 중얼거리듯 계속해서 호두나무 이야기를 했다. 줄리앙은 계속해서 그래, 그래, 라고 말하며 이제는 팔 올릴 기운도 없는 그녀 대신 그녀의 등을 토닥이고 쓸어 주었다. 그의 손이 제 등에 닿을 때마다 그녀의 얼굴에선 만족스러운 미소가 어렸다. 그것이 줄리앙에게는 또 희망이 되었다. 웃을 힘이 아직 남아 있는 한 레아 리버런은 아직 죽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 말이다.

그다음 날 아침까지 레아는 눈을 뜨지 않고는 열에 달뜬 채 잠에 들었다. 아침 해가 뜨고 얼마 안 돼 호흡이 곤란해지고, 의식을 차리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날 밤이 지났을 때쯤에는 이미 혼수상태였다. 얼굴은 이미 창백하게 질린 것을 넘어 보라색이 되어 가고 있었고, 그녀의 회푸른 눈을 보지 못한 지는 삼 일이 넘었다.

호흡곤란은 점점 심해져, 이제는 온몸이 푸르러 이미 산 사람보다 죽은 사람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다음 날 아침에 겨우겨우 부여잡고 있던 그 희미한 생명의 빛이 사라졌다. 1776년 겨울, 레아 리버런은 그녀의 남편의 품에 안긴 채 20세의 나이로 죽었다. 사인은 폐렴으로 인한 심각한 고열과 호흡곤란이었다. 감기로 나약해진 체력이 그것을 버텨 내지 못했다. 허무한 죽음이었다.

벨라가 그 소식을 듣고 방에 들어갔을 때 줄리앙은 레아보다도 더 시체 같은 꼴을 하고 앉아 있었다. 이미 며칠 동안 식사는커녕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줄리앙은 오열했다. 아니 오열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았다. 마치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한참 그 울부짖음이 저택을 지배했고, 그러고도 줄리앙은 거기서 나오지 않았다. 레아의 시신이 다 썩어 문드러지고, 거기에서 나는 냄새가 너무 심해 사용인이 하나둘, 레날의 저택을 떠나는 날까지 줄리앙은 그 방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누가 들어와서 거기에다 소리를 치고 설득을 한다고 해도 소용없었다.

이사벨라는 레아가 죽은 후 그렇게 막무가내로 구는 줄리앙 레날을 말리지 못했다. 오를의 영지로 돌아온 후에도 계속해서 그의 소식을 들어 보려 하였지만 어떤 서신이나 연락책에도 그는 답하지 않았다.

줄리앙은 죽지는 않았다. 어디에서도 줄리앙 레날 공작이 죽었노라 하는 이야기는 들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제대로 살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레날의 영지에 미치광이 공작이 거미줄이 걸린 저택에서 사용인 하나 없이 혼자 살고 있노라 하는 이야기는 왕국 전체에 널리 퍼져 있었으니 말이다.

그 후로 10년이 넘게 단 한 번도 줄리앙은 그 저택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가 어떻게 먹고살고 있는지 아무도 몰랐다. 줄리앙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만 저택의 영지 한가운데에 있는 키가 크고 커다란 호두나무에서 열리는 열매가 철이 되면 늘 거두어지고, 한 번도 썩지 않고 잘 자라는 것을 보아 사람들은 그가 저택 어딘가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죽지 못했다. 레아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래도 살았다. 마흔 살이 되던 해의 가을, 그렇게 죽지 못해 살아 있듯 시체처럼 있던 줄리앙 아르디 레날 공작은 오랜만에 저택 바깥으로 나갔다. 호두열매 수확철이었다.

연둣빛 열매가 어떤 식으로 익어 가든, 그것을 누가 먹든 그에게는 아무 의미 없었지만 레아는 그에게 말했었다. 호두나무 아래서 두 사람이 사랑했던 것을 기억해 달라고, 호두나무가 썩게 두지 말고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말이다.

줄리앙은 매번 그 약속을 지켰다. 시월 하순의 쌀쌀한 날씨에 그는 혼자 처량함도 모르고 호두열매를 주웠다. 마치 저주인 양, 호두나무를 볼 때마다 레아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호두나무를 보며 자신을 기억해 달라는 말 말이다.

그는 정말로 영원히 레아를 잊지 못했다. 그날도 언제나처럼 혼자 잠자리에 들었고 레아의 꿈은 또 꾸지 못했다. 그리고 다시 일어났을 때는 여왕의 궁전에 있었다. 그의 나이 20세였다.

심신은 이미 몹시 지쳐 있었다. 눈을 뜨자, 여왕 폐하의 앞에서 그는 무릎을 꿇고 있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 몰라 그는 멍한 눈으로 이게 꿈이겠거니 했다. 여왕이 말했다.

“제법 미인이라니, 사랑하는 조카여, 왕국 최고의 미녀에게 그런 평가는 너무 냉혹하군.”

그의 앞에 이사벨라 리버런의 초상화가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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