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31. 운명
처음엔 꿈인 줄 알았다. 한참 시간이 흐른 후에도 줄리앙은 그랬다. 자고 일어나니 갑자기 열아홉에서 스물로 넘어가던 해로 돌아와 있다니, 현실일 리가 없지 않은가. 이것이 그저 지루할 정도로 긴 꿈이었던 것은 아닐까.
“왜 웃는가, 조카여.”
꿈이라도 행복했다. 이것이 꿈이라 할지라도 이 전개대로면 레아를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꿈에서 레아를 만난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레아가 죽고 나서 몇 년간은 거의 매번 꿈에 그녀가 나왔다. 모두가 악몽이었지만 달콤한 악몽이었다.
세월은 덧없이 흘렀다. 저택에 박힌 못처럼 줄리앙이 아무 데도 못 가고 있는 동안에도 시간은 저 혼자 쏜살같이 그를 지나쳤다. 그는 레아의 초상화 한 점 가지고 있지 않았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렇게나 사랑하던 그 얼굴도 어느새 그 기억의 윤곽을 잃었다. 언제부터인가 줄리앙의 꿈에 레아가 나와도 얼굴은 나오지 않았다. 늘 뒷모습이었다. 연푸른 드레스 자락, 머리칼, 손가락, 다 보이는 데 얼굴만은 볼 수가 없었다.
커다란 회색 눈동자, 새초롬하게 내민 입술, 작고 오뚝한 코, 동그랗고 턱이 짧은 얼굴, 풍성한 황갈색 머리칼, 크림색 살결, 금세 빨개지는 귀, 모든 것이 다 기억나는데, 이상하게도 막상 얼굴 전체를 떠올려 보면 어딘가 흐릿했다. 줄리앙은 레아의 얼굴을 잃고 만 것이다. 무엇보다 그것이 가장 슬펐다. 기억 속에서라도 그녀를 만날 수 없다는 것이 말이다. 그렇기에 이렇게 꿈에서라도 그녀를 한 번 더 볼 수 있다면 그곳으로 가야 했다.
“알겠습니다, 폐하.”
“알겠다고?”
“네. 분부대로 따르겠습니다.”
그렇게 그는 리버런 섬으로 갔다. 문제는 이게 꿈이 아니었다는 데에 있다. 길고 지루한 꿈일 거라고 생각했던 그의 생각은 기다려도 기다려도 끝나지 않는 이 지독한 현실감과 마주치고 깨지고 말아 버렸다.
큰일이었다. 지금 그는 이사벨라 리버런의 구혼자 자격으로 리버런 섬에 초대된 터였다. 레아 리버런의 구혼자가 되려면 그는 3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레날 공작님께서는 말수가 정말 없으시네요.”
환하게 웃으며 이사벨라가 그렇게 말했다. 아름답다는 단 한마디로 표현하는 것이 아까울 정도의 미인이 해맑은 얼굴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줄리앙은 그 얼굴에는 아무 감흥이 없었다. 그녀는 레아의 가장 친한 자매였음에도 불구하고 레아와는 전혀 닮지 않았다. 레아의 눈빛은 좀 더 당돌했고, 레아의 입매에서는 좀 더 그녀의 고집이 보였고, 레아의 코는 좀 더 귀엽고 조그마했고, 레아의 턱선은 좀 더 둥글었고, 레아의 눈썹은 좀 더 가늘고 섬세했다.
“레이디 리버런.”
그렇게 말하고 잠시 줄리앙은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인생에 ‘레이디 리버런’은 단 한 명뿐이었으니 그 말을 꺼내는 데에도 힘이 부쳤다.
“왜 그러세요, 공작님?”
그에게는 패가 하나밖에 없었다. 지는 패라고 해도 그 패를 보일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당신은 저에게 시간을 할애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제이미 오를 공과 결혼하실 테니까 말입니다.”
그렇게 그는 미친놈처럼 이야기를 꺼냈다. 이사벨라는 레아만큼이나 커다란, 그리고 아주 사려 깊은 아름다운 눈을 가늘게 뜨고는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조금 당황한 눈치였지만, 그의 말을 자르거나 비웃지는 않았다.
“……그래서 당신이 지금 내 어린 동생과 결혼할 사람이라는 말인가요?”
“이미 했습니다. 그게 꿈일 수도 있겠지만요. 꿈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공작님, 굉장히 로맨틱한 얘기를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마 제 동생이 들으면 아주 좋아할 거예요. 그 애는…….”
“로맨스 소설을 좋아하니까요.”
줄리앙이 이사벨라의 말을 받자 그녀의 표정이 변했다.
“그걸 어떻게 알고 계시죠? 뭐, 비밀까진 아니지만 말이에요.”
“또 궁정 미스터리 소설도 좋아하고요. 눈은 아주 예쁜 회색빛이고 책 얘기를 할 때면 푸른색으로 빛납니다. 매일같이 책을 읽는데 어쩜 그렇게 범인 알아맞히기에는 실패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라벤더 정원에서 산책하는 것을 좋아하고, 먹을 것도 꽤 좋아합니다. 단것, 케이크를 좋아한다고 지난번에 당신이 제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우유를 따뜻하게 데워 먹을 때에는 시럽 두 스푼을 넣어 달라고 하지요. 목에는 빨간 점이 작게 하나 있고, 가슴에는 하트모양 점이 있죠. 좀 성격이 급하고 경솔한 편이지만 마음이 아주 착합니다. 방에는 붉은빛이 나는 등불이 하나 있는데 어려서부터 거기 있었다고 제게 설명한 걸 기억하고 있습니다. 레아는 그걸 딸기 빛이 나는 등불이라고 부르지요. 또…….”
줄리앙은 두서없이 생각나는 대로 모든 것을 말했다. 그의 말을 들으며 이사벨라의 표정은 점점 변화했다.
“당신이 믿어 주시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하지만 난 이번 생을 이미 살았습니다. 다시 돌아왔지만, 레아 리버런을 만나서 다시 결혼하기 위해서 돌아온 것이지 나는 당신의 짝이 아닙니다. 당신은 지난 생에 이미 제이미 오를 공과 결혼했습니다. 제 말을 믿으실지 모르겠지만요.”
“믿어야 할지 말지는 잘 모르겠지만 제가 제이미 오를 공과 결혼한다는 이야기는 듣기 좋군요.”
줄리앙이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그녀의 볼이 발그레해져 있었다. 이미 이사벨라는 제이미 오를에게 반해 있었던 것이었다.
“세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사실 겁니다.”
“믿고 싶어지는군요. 그래서 이야기꾼인지 사기꾼인지 미래에서 오신 분인지 알 수 없는 공작님, 제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요?”
“레아 리버런을 만나게 해 주십시오.”
“지금 공작님이 얼마나 수상해 보이는지 아시나요?”
이사벨라는 그렇게 말하고는 샐쭉 웃었는데, 그 웃음은 이상하게도 그 동생 레아와 너무도 닮아서 줄리앙은 가슴이 철렁했다. 그리고 그녀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는 레아를 만나 보고 나서야 이해했다.
레아가 줄리앙을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열일곱 살이었고 줄리앙은 스물둘에서 스물셋이 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둘의 나이 차이는 다섯 살로 꽤 나는 편이었지만 당시 귀족가문은 보통 그보다 더 많은 나이 차이로 부부의 연을 맺곤 했다. 그녀는 어른스러웠고, 열일곱이면 왕국의 기준으로는 결혼 적령기였기에 그들은 나이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3년이나 더 어린 레아는 정말이지 여자라고 보기에는 너무 어린아이였던 것이다.
“줄리앙 레날 공작님.”
아직 어린 꼬마 아가씨 레아 리버런은 서툴게 무릎을 구부리고 그에게 인사했다. 껑충 커다랬던 키 역시 열일곱이나 되어서야 그렇게 컸던 모양인지 아직 그의 가슴까지도 안 올 정도로 조그마한 여자애였다.
“레이디 리버런.”
“전 아직 레이디가 아닌 거 같은데, 그렇게 불러 주시니까 기분이 좋네요.”
레아는 방긋방긋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두 사람이 아주 오래 행복하게 살다가 아이를 낳았더라면, 딸이 저렇게 귀여웠을까 싶었다. 줄리앙은 아주 크게, 몇십 년의 그리움이 담긴 숨을 뱉어 내고는 겨우겨우 목소리를 쥐어 짜내어 말했다.
“만나서 정말 반갑습니다.”
레아는 입꼬리를 올려 아주 크고 환하게 웃었다. 태양 같은 미소였다.
“공작님, 정말 미남이시네요. 엄청나게 잘생기셨어요.”
더 어린 시절부터 그녀는 당돌한 꼬마였다. 줄리앙은 그동안의 회한이며 그리움이며 슬픔이며 아픔이 모두 그녀의 맑은 목소리와 미소 하나에 씻겨 내리는 듯했다. 자신도 모르게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부끄러워하지도 않으시고 그런 말씀을 하시는군요. 레아.”
“부끄러울 게 뭐가 있어요. 저는 열네 살밖에 안 되었는데요. 제가 열일곱 정도 되어서 진짜 레이디 리버런이 되면 모를까요. 그땐 저도 좀 부끄럽겠죠. 근데 어차피 절 꼬마로만 생각하시잖아요. 제가 잘생겼다고 해도 쑥스럽지도 않으시죠?”
“아닙니다. 쑥스럽습니다.”
“에이, 어차피 우리 언니 같은 미인한테나 관심 있으시잖아요. 저도 나중에 공작님처럼 잘생긴 남자랑 결혼하고 싶어요.”
줄리앙은 웃었다. 아주 크게 웃었다. 그는 정말 기뻤다. 그가 아는 바로 그 레아였다. 그 레아의 얼굴이 그의 눈앞에 있었다. 좀 더 앳되고, 아직 어린 소녀였지만 이제는 레아의 얼굴이 모두 기억났다. 이제 눈을 감아도 그릴 수 있었다. 그는 레아의 손을 살며시 잡고 그녀의 작은 키에 맞추어 무릎을 꿇고는 손등에 아주 살짝 입을 맞췄다.
“레이디 리버런, 나중에 열일곱이 되어 진짜 레이디 리버런이 되시면, 저와 결혼해 주시겠습니까? 제가 3년 정도는 기다려드리지요.”
“진짜요? 공작님, 정말이에요, 약속한 거예요?”
“네, 꼬마 아가씨.”
레아는 신이 나서 언니에게 달려가 자랑했다. 이사벨라는 의미심장한 눈으로 줄리앙을 쳐다보았다. 그 손위 언니인 엘리자베스는 깔깔대고 웃으면서 공작님이 레아를 놀리는구나 하고 말했다. 레아는 다시 줄리앙에게 쪼르르 달려왔다.
“공작님, 혹시 저를 놀리시는 거예요?”
“아닙니다, 레이디 리버런.”
“진짜예요?”
“네. 3년 후에 다시 뵙겠습니다. 레아.”
“공작님, 잠깐만요. 놀리시는 거라고 해도 제가 기분이 좋으니까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장소를 보여드릴게요. 이리 와 보세요.”
레아는 줄리앙의 손을 냉큼 잡고 어디론가 이끌었다. 그녀의 방이 있는 동쪽 탑으로 들어간 줄리앙은 꼬마 레아나 제대로 들어갈 수 있을 만한 작은 출입구를 지나서 동쪽 탑 뒤쪽에 있는 올리브 나무 화원에 도착했다. 아직 수국도, 라벤더도 제대로 피어 있지 않았지만, 우뚝 선 올리브 나무가 태양 빛을 받아 은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제가 만든 거예요. 꽃씨도 심었으니까 3년쯤 후면 필 거예요.”
레아는 환하게 웃었다.
그렇게 그들은 다시 만났다. 두 번째 만남이었다는 것을 아는 건 줄리앙 레날뿐이었지만 말이다.
그는 다시 수도로 돌아갔다. 덜렁대는 레아가 걱정되었지만 어차피 그녀는 열일곱까지, 아니 스물까지는 아무 사고 없이 건강히 살아 있을 것이다. 그에게는 처리해야 할 일들이 있었다. 그는 왕궁으로 가서 여왕에게 이사벨라 리버런이 제 짝을 만났다고 말했다. 저는 3년을 기다려 다시 리버런 섬에 가기로 했노라, 리버런 공의 네 번째 딸과 결혼하겠노라 하는 말에 여왕은 몹시 흡족해했다.
“폐하, 하나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무엇인지 말해 보게나, 사랑하는 조카여. 오늘이라면 그대의 부탁을 무엇이든 들어줄 수 있을 것도 같군.”
“리버런 섬으로 저와 다른 남자들을 보내지 마소서.”
“아니 그게 무슨 소린가. 방금 3년 후에 다시 리버런 섬에 가겠노라 하지 않았는가.”
“저는 갈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가씨와 결혼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필요 없습니다. 저만 보내 주시면 됩니다.”
여왕은 호탕하게 웃으며 그의 말대로 될 것이라고 약조했다.
그는 지난번 생에서처럼 변방으로 가지 않았다. 할 일이 아주 많았다. 저택을 완전히 개조해야 했다. 골조만 남기고 저택 전체를 부쉈다. 아주 추운 겨울이라도 지나가는 감기 하나라도 걸리지 않게 보온이 잘되는 떡갈나무로 완전히 다시 지었다. 레날의 영지는 추운 지역이 아니었기에 커튼과 침구가 모두 얇았다. 그는 북쪽에서 방한용 고급 침구와 커튼을 들여왔다. 여름용으로는 바람이 잘 통하는 짙은 파랑색 커튼을 달아 두었다. 레아가 좋아하던 색이었다.
높고 긴 모양을 하고 네 개의 첨탑이 있던 저택은 넓고 평평하며 낮은 모양으로 변모했다.
“나으리, 대체 얼마나 낮게 지을 생각이십니까.”
“사람이 뛰어내리거나, 사고로 떨어졌을 때 죽지 않을 정도의 높이는 어느 정돈가?”
“글쎄요. 3, 4층 정도면 다리나 팔은 부러져도 죽지는 않습죠.”
그래서 레날 공작저의 높이는 낮아졌다.
그는 레아가 나서서 저택의 곳곳을 손보겠다고 하다 다칠 일이 없게 모든 곳을 완벽하게 만들어 두었다. 레아가 원하던 도서관을 만들었고, 레아가 꾸며 놓은 대로 정원을 꾸며 두었다. 라벤더 씨앗을 얻어 심는 데에는 꽤 애를 먹었다. 수국은 레날의 영지에서 잘 자라지 않았다. 줄리앙은 오래전에 선대 레날 공작이 내쫓은 마법사들을 수소문했다. 다 찾을 수는 없었지만 그럭저럭 솜씨 있던 몇의 소식은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의 힘을 빌려 정원을 꾸몄다. 대체 어떻게 이곳에 수국이며 라벤더가 싹을 틔웠는지는 아무도 모를 것이었다.
저택이 완공되자 그는 내부를 연노란색으로 칠했다. 마치 레아가 그렇게 했던 것처럼. 라탄으로 된 조명을 달았다. 레아가 골랐던 그대로. 레날 공작저는 점점 아름다워지고 있었다. 기억을 짜내서 그는 레아가 만들어 둔 그대로, 레아의 취향대로 저택을 바꿔 두었다. 그 작업은 3년이 꼬박 걸렸다.
그리고 다시 리버런 섬으로 갔다. 성으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번화가로 가서 예의 그 고급 드레스 상점에 들렀다. 첫 번째 삶 때와 달리 그곳에는 아직 연푸른 드레스가 걸려 있지 않았다.
“연푸른색 실크로 된 드레스를 사고 싶소.”
“아니, 나으리, 어떻게 그렇게 딱 여기에 찾아오셨습니까? 마침 그런 색의 드레스를 만들고 있었는데요. 이제 내일이면 완성이 되어 걸어 둘 참이었습니다.”
주인은 그렇게 말했다. 줄리앙은 오랜 시간이 지나서 보자 그마저도 반가웠다. 이번에도 줄리앙과 함께 리버런 섬에 온 에드몽은 친구의 신묘한 재주에 감탄하는 눈치였다.
“대체 어떻게 이 가게에 연푸른 드레스가 있다는 걸 안 건가, 친구?”
“예전에 한번 와 봤거든.”
“예전? 대체 언제 허가받지 않으면 오지 못할 이곳에 와 보았단 말인가?”
에드몽의 물음에 줄리앙은 별말 없이 씩 웃기만 했다.
그는 이번엔 한시도 지체하지 않았다. 레아에게 무례를 저지를 새도, 나서서 사과할 새도, 오해를 살 새도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그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했다. 그녀를 행복하게 해 주어야 했다. 그녀를 지켜야 했다.
그는 마침내 리버런 성으로 가는 다리를 건넜다. 성문이 열렸다. 접객실의 문을 열었다. 그곳에는 레아 리버런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셨군요. 정말로.”
다시 그녀가 웃었다. 여름 햇살처럼 환하게. 꼬마 아가씨 레아 리버런은 그를 잊지 않고 있었다. 줄리앙은 그녀를 와락 안고 싶었다. 그리고 그녀가 생의 마지막에 그에게 그렇게 해 주었듯이 그 작은 등을 손으로 토닥토닥 쓸어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 대신 그는 그녀의 앞에서 오른 무릎을 꿇었다.
“레아델피나 루이스 리버런, 약속대로 나와 결혼해 주시겠습니까?”
레아는 고맙게도 망설임 하나 없이 그 청혼을 받아들였다. 그가 가져온 연푸른색 드레스를 입고 그들은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 후에는 레아가 꽃을 피워 둔 비밀의 정원에 들어가서 첫 키스를 했다. 키스를 하고 나서 줄리앙은 레아에게 가만히 서 있어 달라고 했다.
“왜요?”
그녀가 묻자 줄리앙은 말없이 커다란 몸을 푹 숙여서 제 볼을 레아의 볼에다 대고는 손으로 그녀의 등을 쓸어 주었다. 토닥토닥거리는 소리가 조용한 정원 안의 바람에 부스럭거리는 이파리 소리와 함께 어우러졌다.
훗날 그녀는 물었다.
“대체 어떻게 일말의 망설임 하나 없이 날 보자마자 결혼하자고 한 거예요?”
“당신과 결혼할 운명이었으니까.”
“열네 살, 내가 아주 어렸을 때 날 보았을 때부터요? 그래서 나랑 결혼하려고 우리 언니를 버리고 얼른 수도로 돌아가 버린 거예요?”
“그래.”
“너무한 거 아니에요? 나 그때 정말 조그만 아이였는데? 혹시 어린애 좋아하는 취미 있어요?”
줄리앙은 변명도 하지 않고 그냥 웃었다. 레아가 그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면서 빨리 대답해 보라고 하면 그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서른이어도, 마흔이어도, 쉰이 넘었어도 상관없었을 거야. 난 그냥 당신과 결혼할 운명이니까.”
그는 몇 번, 레아에게 말을 높이려 해 보았지만, 레아의 기억 속에 그는 엄청나게 커다랗고 나이 많은 어른이었기에, 레아는 그가 말을 높이는 것을 되레 어색해했다. 그래서 그는 레아가 원하는 대로 편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의 말투는 언제나 부드러웠다.
“그런데 당신은 왜 바로 그렇게 내 청혼을 받아들였지?”
줄리앙이 물었다.
“그야, 아주 어렸을 때 만났던 엄청나게 잘생긴 오빠가 3년 만에 다시 와서 나한테 왕자님처럼 무릎을 꿇는데 내가 별수 있겠어요.”
레아는 때로는 이렇게 말하며 웃었다. 혹은 다른 식으로 대답하기도 했다.
“글쎄요. 당신 말대로 나는 당신과 결혼할 운명인가 봐요.”
레아는 이 이야기를 하는 걸 좋아했다. 줄리앙이 자신을 처음 만나서 청혼하고, 다시 3년 후에 돌아온 이야기 말이다. 그래서 둘은 자주 반복해서 이때의 이야기를 했다. 대화가 거듭되면서 레아의 대답은 후자 쪽으로 기울었다. 레아가 그 말을 하면 줄리앙이 더없이 행복하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결혼 생활에는 구름 한 점 없었다. 레날의 저택은 어디 하나 손댈 곳 없이 완벽히 레아의 취향 그대로였고, 레아와 줄리앙은 단 한 번도 싸우지 않았다.
“가끔은 당신이 날 너무 참아 주는 것 같아요.”
레아는 그렇게 말했다.
“뭐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게 해 주잖아요. 당신은 나한테 바라는 게 하나도 없어요?”
줄리앙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글쎄. 그냥 내 옆에만 있어 주면 돼. 바라는 거 없어.”
“그래도요. 빨리 말해 봐요. 오늘이 지나면 안 들어줄 거예요.”
레아가 입을 삐죽이며 그렇게 말하자, 줄리앙이 한참을 생각하다 대답했다.
“음, 비 오는 날은 밖에 나가지 마.”
“뭐예요. 싱겁게. 비 오는 날 굳이 밖에 나갈 일이 뭐가 있어요, 내가.”
그들은 언제나 행복했다. 모두가 레날 공작 부부를 부러워했다. 결혼 생활은 4년간 계속되었다. 줄리앙의 걱정이 무색하게 레아는 감기도, 폐렴도 걸리지 않고 스무 살을 보냈다. 줄리앙은 그제야 정말로 행복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다음 해의 여름, 레아 리버런은 호두나무 옆 뜰에 라벤더 씨앗을 심겠다고 밖에 나간다. 라벤더 화원을 만들 만한 괜찮은 땅을 물색한 후 저택으로 돌아가는 길, 그녀는 호두나무 아래에서 마른하늘에서 내린 벼락을 맞고 즉사한다. 그녀의 나이 21세, 줄리앙의 나이 27세 때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