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줄리앙 아르디 레날 공작
줄리앙의 절망은 처음만큼 강렬하지는 않았지만 처음보다 더 깊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만반의 준비를 했다. 다시 또 하라고, 더 해야 한다고 누군가 말한다면 그렇게 할 터였다. 하지만 하늘에서 내리는 벼락을 피하게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장례식이 치러진 다음 날, 그는 커다란 도끼를 가지고 나갔다. 호두나무를 내치려고 했다. 나무에는 아무 잘못도 없는 것을, 그는 그렇게라도 레아를 죽게 한 죄를 누군가에게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끝끝내 나무에 손도 대지 못했다.
‘줄리앙, 호두나무. 호두나무를 기억해 줘. 호두나무 아래서 나를 껴안은 걸 기억해 줘. 그 나무가 썩으면 안 돼. 그 나무에서 거둔 호두가 땅에 떨어져서 썩으면 안 돼. 알았지. 호두나무를 그냥 두지 마.’
레아가 죽기 전에 바로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그 호두나무를 죽게 할 수는 없었다. 나무가 베어지고 썩어 문드러지고 결국 사라진다면, 지금은 눈앞에 선명히 살아 있는 이 나무의 생김새도 언젠가는 그의 머릿속에서 까마득히 사라질 것이다. 그 나무가 어떻게 생겼더라 하고 떠올리려 해 봐도 도무지 떠오르지 않을 것이었다. 레아의 얼굴이 그랬듯이.
그는 호두나무 아래서 레아를 껴안은 걸 잊을 수는 없었다. 언젠가 레아의 얼굴이 다시 생각나지 않게 될 때에도, 이 나무만은 여기 있어야 했다. 레아와 그가 그 나무 앞에서 키스하고, 안고, 산책하고, 싸우고, 실랑이하고, 이내 울음을 터뜨리고, 비를 맞고, 다시 끌어안고, 레아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가 다시 환한 미소로 변했던 그 모든 순간을 기억하기 위해서는 그 나무가 있어야 했다. 나무를 베어서는 안 되었다. 그래서 그는 그 도끼를 고쳐 잡고 자신의 가슴에 대었다.
“줄리앙, 대체 뭐 하는 거예요!”
이사벨라가 황급히 쫓아나와 그의 손목을 잡았다. 도끼가 아래로 떨어졌다. 그 손목을 잡는 온기가 이상하게 레아와 비슷해 그는 아래로 떨어진 도끼가 자신의 가슴에 그대로 와 박힌 줄 알았다.
서서히, 그는 벨라의 아래로 무너져 내렸다. 마치 커다란 탑 하나가 무너지는 것처럼 무력한 움직임이었다. 완전히 무너져 내린 그는 소리도 내지 않고 미동 하나 없이 울었다. 누가 보면 사람이 아니라 물체라 생각했을 것이다. 아무 생기도 느껴지지 않는 생물체.
이사벨라 리버런은 훗날 그 일을 이렇게 회고했다.
‘그런 식으로 슬퍼하는 사람의 모습은 처음 보았어요. 사람이 이렇게 슬퍼하는 것도 처음 보았고요. 네 번째 딸을 잃은 리버런 공도, 어머니도, 동생을 잃은 저 자신조차도 그렇게는 슬퍼하지 못할 거예요.’
하지만 그렇게 침착하게 이 순간을 떠올리는 것은 아주 먼 훗날의 일이었다. 지금의 이사벨라는 그저 허물어져 내린 그의 커다란 등을 천천히 쓸어 주었다. 마치 레아가 그렇게 했듯이 따뜻하게.
줄리앙은 자신의 목숨을 끊지 않았다. 레아가 그렇게는 하지 말라고 했기에. 대신에 변방 토벌에 나섰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곳에 말이다.
그 일이 있은 후 1년이 지나 벌어진 2차 제국전쟁은 아르디 왕국의 승리로 끝났다. 미치광이처럼 혼자 사람을 베고 다니는 지휘관이 하나 있었기에 이뤄 낸 승리였다고 모두들 말했다. 이상하게도 줄리앙은 전쟁 끝까지 죽지 않았다. 그 전쟁에 참여한 양쪽 군대의 모두를 통틀어 그만큼 죽고 싶었던 사람이 없었는데 말이다.
그리고 그의 나이가 마흔이 되었을 때, 그는 아무 의심도 하지 않고 잠자리에 들었다. 아니, 사실 그는 제 나이가 얼마나 되었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아침에 일어났을 때 그는 거짓말처럼 다시 왕궁에 있었다. 이사벨라 리버런의 초상화 앞에 말이다.
줄리앙은 자신이 아주 나쁜 꿈을 꾸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첫 번째 삶이 꿈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두 번째 삶이 꿈이었을까. 그의 인생은 처음부터 여태까지 줄곧 삭막한 것이었고, 레아와의 행복한 삶은 그저 꿈에 지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살아야 했다. 살아야 다시 레아를 보니까. 이게 환상이든 꿈이든 뭐든 그가 어떻게 행동해야 레아를 다시 만날 수 있는지 알고 있는 이상, 줄리앙은 그대로 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다시 모든 작업을 새로 했다. 3년의 시간 동안 레아를 맞을 준비를 했다. 이번엔 한결 수월했다. 이미 한번 해 보았기에 그는 망설임 하나 없이 움직였다. 저택을 개조하고, 모든 물건을 레아의 취향에 맞게 바꾸고, 마법사들을 불러 정원을 꾸미고 그러고 나서도 시간이 남아 레아가 그렇게도 좋아하던 미스터리 소설이며 로맨스 소설도 독파했다. 그녀가 좋아하던 책들을 사 모았다. 그러고 나서도 아직 리버런 섬에 가려면 1년이라는 시간이 남았다.
‘이번엔 또 언제 죽을까.’
줄리앙은 제 손톱을 물어뜯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아마 또 죽을 것이다.’
어쩔 수 없었다. 이젠 자신이 레아를 지킬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만나야 했다. 지킬 수 있을 만큼 지켜야 했다. 하지만 신은 레아와 줄리앙에게 그리 오랜 시간을 주지는 않을 터였다. 그는 하인을 불렀다.
“말을 준비해라. 긴 여행을 떠날 채비를 하고. 내일 새벽에 곧 떠날 것이다.”
그는 그렇게 레날의 영지를 떠났다.
그 새벽, 육지에서 리버런 섬으로 들어가는 문을 지키고 있던 문지기 자크는 깜짝 놀랐다.
“저놈은 대체 뭡니까?”
“글쎄. 멈추겠지.”
벌써 25년째 성을 지켜 온 수문장 왈도는 태연하게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 검은 말은 멈추지 않고 그대로 돌진했다. 마치 문을 뚫고 들어갈 듯이 말이다.
리버런은 초대받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는 섬이었다. 원칙상 그랬다. 애초에 아르디 왕국과 완전히 동떨어진 북쪽 끝의 독립된 공국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었다. ‘여왕님이 오셔도’라는 단서까지 붙어 있었다. ‘여왕님이 오셔도 초대받지 않으면 리버런 섬에는 들어갈 수 없다.’ 이 문구는 리버런 섬의 자존심이었다. 절대로, 초대받지 않은 손님을 이 문으로 들일 수 없었다.
“어, 어떡하죠, 수문장님?”
자크가 다급하게 말했다.
대대로 수문장을 역임하고 있는 마크햄 가문의 명예를 걸고 왈도 마크햄은 눈을 질끈 감고 문 앞에 섰다. 그제야 흑마는 속도를 낮추었다. 수문장을 그대로 뚫고 갈 수는 없을 노릇이었을 것이다.
“웬 미친놈이냐. 리버런 섬에는 이름에 ‘아르디’가 들어가도 못 들어가는 걸 모르는 게냐!”
왈도가 큰 소리로 불호령을 내렸다.
“말에서 내려 관등성명을 밝혀라!”
검은 망토를 두른 귀공자는 천천히 말에서 내려 망토 사이로 손을 집어넣었다. 단검이라도 꺼내려는 것인가 싶어 왈도와 자크가 함께 공격할 태세를 갖추자 귀공자는 씁쓸한 미소를 짓더니 허리춤에 찬 검을 들어 보여 주었다.
잎사귀를 문 용이 앞쪽을, 양날 검의 무늬가 그 반대쪽을 장식하고 있었다. 아무리 수도에서 떨어진 리버런 섬에 사는 수문장이라 한들 왈도는 그 문양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것은 각각 아르디 왕가와 레날 공작가의 문장이었다.
“줄리앙 아르디 레날 공작이오.”
자크는 아직 영문도 모르는 눈치였지만 왈도는 바로 자세를 고치고 자크에게 들고 있던 칼을 내리게 했다.
“레날 공작님께 검을 드는 무례를 범하였습니다.”
“아닐세. 내 급한 일이 있으니 문을 통과해도 되겠는가.”
자크는 슬쩍 고개를 들어 올려 그 얼굴을 봤다. 기껏해야 이제 제 나이 정도밖에 안 돼 보이는 젊은 공작이었다. 왈도는 아직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천천히 예를 갖추어 인사를 한 후 왈도는 고개를 들어 레날 공작을 바라보고 똑똑히 말했다.
“안 될 말씀이십니다. 아까 말씀드렸듯이, 초대장이 없으면 리버런 섬에는 ‘아르디’가 이름에 들어가 있다 한들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하지만 줄리앙 아르디 레날 공작은 그 문을 통과했다. 30분 후, 그는 라벤더 숲에 당도했다. 어떻게 그렇게 했냐고? 그는 힘을 쓰지 않았다. 화를 내지도 않았다.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자크와 왈도를 협박하지도 않았다. 그저 솔직하게 자신의 얘기를 했다.
“……이렇게 된 것이네. 그러니 부디 나를 들여보내 주지 않겠는가.”
웬 미치광이 같은 젊은 청년이 와서 레날 가문의 인장을 보여 주는 데서 이미 한번 왈도는 크게 놀란 터였다. 평화로운 리버런 섬에서야 이런 일마저도 10년을 우려먹을 얘깃거리다. 그런데 이 공작이 이번에는 자신들을 붙잡고는 몇 분을 제가 지금 세 번째 삶을 반복 중이며 이미 레아 리버런 공녀와 결혼도 두 번이나 했다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것도 저 깊고 그윽한 눈동자 가득 우수를 담고는 절절하게 말이다.
말을 하는 태도가 아주 미친 사람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들은 제정신인 사람이 하는 이야기라고는 할 수 없었다. 혹시 이 젊은 청년은 좀 침착하게 돌아 버린 것은 아닐까.
“그 얘기를 지금 저희에게 믿으란 말씀이십니까?”
자크가 그렇게 물었다. 왈도는 그의 머리를 후려쳤다.
“공작님께 무슨 말버릇이냐?”
줄리앙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웃었다. 그러고는 그러지 말라는 손짓을 했다. 그 손짓마저도 얼마나 우아한지, 자크도 왈도도 이 미남 귀공자의 몸짓을 넋이 나간 듯 쳐다보았다. 줄리앙이 마음만 먹었더라면 둘이 그렇게 혼이 빠져 그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는 새에 얼른 문을 따고 성문 안으로 들어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대신 그는 신사답게 이렇게 말했다.
“믿지 않아도 좋소. 사실 나도 믿을 수 없소. 하지만 모두 사실이오. 그리고 이런 연유로 나는 리버런 섬에 들어가야 하오. 나를 막을 셈이오?”
왈도와 자크는 대답 없이 한 손을 허리에 찬 검에 가까이 대었다.
“그렇다면 안타깝지만 나도 검을 뽑아야 하겠소.”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줄리앙이 고개를 숙였다. 레날 공작의 무훈에 관해 들어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척 봐도, 장신의 키에, 넓은 어깨에, 근육질의 균형 잡힌 몸매, 그리고 검을 뽑는 폼이 자크와 왈도가 상대할 만한 사람은 아니다 싶었다. 그리고 또…….
“처음부터 그렇게 하실 수도 있었을 텐데요.”
자크가 왈도가 생각한 것을 말했다. 그랬다. 그는 처음부터 검을 뽑아 들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소.”
이번에는 줄리앙 레날 공작이 왈도가 생각한 것을 말했다.
“왜냐면 다 진짜니까 그러셨겠지요.”
이번에는 왈도가 입을 열었다. 줄리앙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눈이, 굳게 다문 입술이 슬퍼 보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왕국에는 마법이라는 게 있었다. 100여 년 전, 지금 여왕님의 아버지가 왕이었던 때에 흑마법이 기승을 부려 여러 문제가 일어난 후 모두 한꺼번에 소탕하고 완전히 마법이 금지되었지만, 그 전에는 별의별 믿을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났다는 것을 왈도 마크햄은 그의 아버지, 리버런의 23대 수문장에게 들은 터였다. 그는 한숨을 쉬고 마음을 정했다.
“들여보낸 죄를 묻게 하지 않으시게, 알아서 잘 해 주시겠지요.”
왈도의 말을 듣고는 줄리앙은 다문 입꼬리를 살짝 위로 올렸다. 정말이지, 누구라도 홀릴 수 있을 것 같은 옅은 미소였다. 그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웃고 있었지만 그의 얼굴에는 얼마간의 다급함과 지침, 피로, 슬픔 같은 것이 어려 있었다. 피로야 레날의 영지에서 리버런까지 말을 타고 달려온 탓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저 젊고 잘생긴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깊은 슬픔은 뭐라 설명하면 좋단 말인가.
줄리앙 레날 공작이 말한 이야기가 모두 사실이라면, 정말이지 그는 끔찍한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이었다. 왈도는 그 이야기가 차라리 다 거짓이거나 이 젊은 공작이 완전히 미쳐 있기를 빌며 문을 열었다.
“행운을 빕니다, 공작님.”
“고맙소.”
줄리앙은 다시 미소를 띠며 말에 올라탔다. 검은 망토가 펄럭이는 그 뒷모습을 보며 자크와 왈도는 다시 한번 그 자태에 감탄했다.
“저렇게 잘생긴 사람은 처음 봤네요. 그런데 저 말을 다 믿으시는 거예요, 수문장님?”
자크가 물었다. 왈도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대답했다.
“너무 잘 믿어지니 문제일세. 사실이 아니라면 좋으련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