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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비밀의 방 (36/48)

36. 비밀의 방

천장이 무너졌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몇 년을 계속해서 이 방에서 나가지 않고 살았는데, 비록 갇혀 있는 삶이지만 그래도 줄리앙과 레아는 행복했는데, 줄리앙은 천장이 무너질 만한 집을 가진 가난한 귀족 나부랭이 따위가 아닌데 말이다.

고색창연한 빛을 내던 높은 천장의 샹들리에는 수백 개의 파편이 되어 나무 바닥에 박혀 있었다. 이 방의 바닥만은 떡갈나무로 바꾸지 못했었다.

“이 방은 이렇게 두는 수밖에 도리가 없습니다. 공사가 불가능합니다.”

“왜지?”

“이 저택이 지어진 지도 백 년은 넘지 않았습니까? 오래된 저택에는 이렇게 집무실 바로 옆에 딸린 작은 방이 하나씩 있습죠. 예전에는 성내의 마법사에게 내주곤 했던 공간입니다. 그것들이 쓰던 공간이니만큼 쓸데없는 잡마법이 섞여 지어져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서 부술 수 없는 마법이라도 걸려 있는가?”

“그건 아닙니다. 부수려면 부술 수야 있지요. 하지만 운이 나빴다간 괜한 잡마법에 휘말려 저택 전체를 다 다시 지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상관없네.”

“더 큰 문제는 마법사의 공간을 함부로 손대었다가는 재수 없어진다는 풍문이 있다는 점입니다. 아마 아무도 이 공사에 참여하려고 하지 않을 겁니다.”

“아무도?”

“네. 아, 저, 공작님께서 명하신다면 또 모릅니다만, 글쎄요. 그렇긴 해도 아마 힘드실 겁니다. 저, 어떻게든 인부를 구해 보려면―.”

“되었네. 그럼 이 방은 그대로 두고 공사를 진행해 주게.”

저택 개조 계획이 시작되었을 때는 미처 몰랐던 일이었다. 아마 실제 측량을 나온 공사 책임자가 얼렁뚱땅 저택을 검사한 탓일 것이다. 그는 줄리앙의 눈치를 보며 어떻게든 제 실수를 무마하고자 했다. 하지만 줄리앙의 입장에서는 이 공사를 더 진행할 필요는 없었다. 그냥 그 방을 덮어 두면 되었다.

‘마법사의 공간을 함부로 손대었다가는 재수 없어진다라…….’

이미 재수 없을 일은 많았다. 괜한 긁어 부스럼은 그의 입장에서는 필요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매 생애 저택의 모든 곳을 개조하면서도 이 방은 레날 저택의 첫 모습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었다. 조금 낡았지만 견고한 바닥, 작고 두꺼운 창문, 북풍이 스며들어 오는 차가운 벽, 높은 천장 위에 달려 있는 아르디 왕조 특유의 유리 조각 양식으로 만들어진 커다란 샹들리에. 레아는 늘 이 방을 좋아했었다.

“대체 왜 이 춥고 음습한 방을 좋아하는 거요?”

“줄리앙, 대체 왜 이 방만 이렇게 천장이 높은 거예요?”

“공사할 때 이 방만 바꾸지 못했거든.”

“마법사의 방이라서요? 그 얘기 해 줘요. 그 얘기 듣는 게 좋아요.”

로맨스 소설이며 궁정 미스터리 소설을 좋아하는 레아에게는 모든 가문이 한 명씩 전속 마법사를 가지고 있던 시절의 이야기가 환상처럼 아름답고 멋지게 느껴졌다. 그녀는 가끔씩 이 방에 와서 글을 쓰곤 했다.

“내 글에도 마법이 깃들지도 모르는 일 아니겠어요?”

그렇게 말하고는 싱긋 웃었던 레아가 대체 몇 번째 삶에서의 레아였는지도 줄리앙은 아득했다. 이 방에서 이렇게 죽을 줄은 몰랐다. 이 방에는 레아와 함께한 수많은 추억이 깃들어 있었다. 레날의 영지의 모든 곳이 그랬다. 리버런 섬의 곳곳이 그랬다. 하지만 이곳만큼 공기 입자 하나하나가 모두 레아를 담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곳은 없었다.

4년이라는 기간 동안 틀어박혀 지내다가 생을 마감했다. 그녀가 안고 눕고 숨 쉬고 살던 곳이었다.

줄리앙은 갑자기 숨이 막혀 왔다. 레아의 숨결이 이 방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숨 하나 쉽게 들이마실 수 없었다. 호흡이 쉽게 골라지지 않았다.

이번에는 꼭 살겠다며, 줄리앙을 혼자 두는 일이 없을 거라며, 모든 참사를 피해 가겠다고 레아가 열심히 작성해 둔 흑판 한편에 쪼르르 쓰여 있는 일흔두 개의 숫자와 작은 글씨들, 레아가 즐겨 보던 책들, 얇은 모슬린으로 만든 레아의 잠옷, 그녀가 글을 쓰던 커다란 책상, 창문 밖을 바라보며 독서를 하라고 줄리앙이 놔준 안락의자에 아무렇게나 걸린 숄까지. 모든 것이 그녀의 물건들이었다. 모든 것이 그녀의 흔적이었다.

73번째의 삶이 끝나는 그날까지 줄리앙은 이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방에 틀어박혀 모습을 감춘 레날 공작의 이야기가 왕궁 전체에 퍼져 나갔다. 괴팍한 변태라서 그의 부인을 골방에 가두어 두었고, 부인이 죽자 그곳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소문이 호사가들의 입에 올랐다. 그런 불명예 따위 줄리앙은 상관도 하지 않았다. 기괴한 소문 속 주인공이 된 일이야 이번이 처음도 아니었다.

그는 매일매일 기도했다. 이 삶이 빨리 지나가기를, 그녀가 없는 시간이 단숨에 흘러가 눈을 뜨면 다시 여왕의 궁전이기를.

그의 바람은 그렇게 쉬이 이뤄지지 않았다. 하지만 빠르든 느리든 어떻게든 시간은 흘러가는 법이다. 호두알이 떨어지던 가을 어느 날, 눈을 뜨자 그는 정말로 그가 바라던 대로, 언제나 그렇듯 여왕의 궁전에 있었다.

“알겠습니다, 여왕 폐하.”

여왕에게 리버런으로 가겠다는 약조를 하고 집으로 돌아와 그는 다시 그 방의 문을 열었다. 무언가를 기대하고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단지 오래된 습관처럼 줄리앙은 자연스럽게 그 방에 들어갔다. 그 방에서 나오지 않고 십몇 년을 지냈기에, 피곤에 지쳐 돌아가 잘 곳도 당연히 그 방이라 생각했을 뿐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져 있었다. 꼭 어제까지 레아가 여기 살아 있었던 것처럼 그 방 가득 레아의 흔적이 있었다. 흑판의 왼쪽 위에서부터 쪼르르 적혀 있는 레아의 글씨는 그대로였다. 그녀의 모슬린 파자마, 담비 털을 섞어 울사로 뜨개질해 만든 초록과 파랑이 섞인 촌스러운 무늬의 겨울용 숄, 모든 것이 다 그대로였다.

“이게…… 가능해?”

자기도 모르게 입 밖으로 소리가 나왔다. 혹시 삶이 끝나지 않았나, 내가 궁전에서 온 게 아닌가. 갑자기 선잠을 자서 잠깐 다시 돌아갔다는 꿈을 꾸었나. 그는 집사를 불러 물어보았다.

“내가 오늘 무얼 했지?”

“네? 공작님이 오늘 무얼 하셨냐고요?”

집사는 얼떨떨한 얼굴로 제 주인을 바라보았다.

“그래. 알론소. 내가 오늘 뭘 했지?”

“방금 여왕 폐하를 뵙고 오지 않으셨습니까? 혹시 앞으로의 일정을 물으시는 거면 변방백과 오늘 저녁 식사를 함께하시기로 했습니다.”

“그래. 여왕 폐하를 뵙고 왔지. 내가. 수도에 가서. 그렇지, 알론소?”

“네. 혹시 몸이 안 좋으시면 저녁식사는 뒤로 미루시겠습니까?”

줄리앙이 경쾌한 소리를 내며 웃자 집사 알론소는 당황한 듯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줄리앙은 밝게 말했다.

“아냐, 됐어. 가서 쉬게나, 친구. 오늘은 행복한 첫날이니.”

이 방은 마법의 방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일흔세 번이나 반복한 끝에 줄리앙은 드디어 이 지독한 윤회의 사슬을 끊고 나갈 아주 작은 단서 하나를 부여잡은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정중한 인사를 하고 슬금슬금 뒤로 물러가는 알론소를 보고 실실 웃다가 줄리앙은 문득 아주 중요한 것이 생각났다는 듯 다급하게 그를 다시 불러 세웠다.

“말을 준비해 주게. 내일 바로 떠날 걸세. 그리고 사람을 시켜 선대 공작 때까지 이 방에 살았다는 마법사를 찾게 하게.”

“카리안 알드망 말입니까?”

“카리안 알드망?”

그러고 보니 집사의 머리가 하얗게 센 지도 벌써 오래되었다. 줄리앙이 태어나기 전부터 이 저택에서 일하던 알론소라면 오래전에 그 마법사를 만난 적이 있을 터였다.

“그래, 자네는 그 마법사를 알겠군. 혹시 지금 어디 사는지 아는가?”

“벌써 50년은 된 일입니다. 흑마법금지법이 공표되고 그가 여기서 쫓겨난 것이요. 그다음 해에 여왕님께서 마법사라고는 보이는 대로 다 잡아들이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모두들 꽁꽁 숨어 버렸는걸요. 제가 알 리가 있겠습니까?”

“그래?”

“카리안을 찾기는 힘드실 텐데요.”

회의감을 깊이 드러내며 알론소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줄리앙은 그때만 해도 그 일이 그렇게 힘든 일이 될지는 몰랐다. 넓은 왕국의 영토 안에서 작정하고 숨은 마법사를 찾아내는 일은 전 생애를 다 바쳐도 성공하기 힘든 일이라는 것을 말이다. 자그마치 312년이 걸렸다. 한 사람을 찾는 데 말이다.

레아가 차지하는 잠깐의 시간 외의 홀로 있는 세월들을 모두 할애하여 스물네 번의 생을 반복해 나가며 틈틈이, 조금씩 조금씩 그 영역을 좁혀 줄리앙은 마침내 그를 찾아내었다. 상대가 바로 코앞, 레날의 영지 안에 있었던 것을 알고 줄리앙은 허탈함에 실소를 흘렸다.

“여기 있을 줄이야.”

스물네 번의 생 동안 매번 줄리앙의 분부대로 마법사 카리안을 찾아왔던 집사 알론소가 대답했다.

“역시 공작님은 대단하십니다. 보통 가장 먼 곳에서부터 찾아볼 텐데 어떻게 그자가 레날의 영지에 있을 거라는 사실을 짐작해 내셨습니까? 공작님이 이렇게 총명한 분이 아니었더라면 백 년도 넘게 걸렸을 겁니다. 이제 스무 살을 갓 넘기셨는데 이렇게 영특하시니 저로서는 정말이지 공작님 같은 주인을 만나 영광이라는 생각밖에 안 듭니다.”

줄리앙은 자조하며 대답했다.

“백 년? 삼백 년은 넘게 걸렸지.”

어쨌든 그렇게 그는 카리안이 있는 곳을 찾았다. 그곳은 레날의 저택에서 멀지 않았다. 저택의 입구를 빠져나가면 바로 커다란 강이 흐른다. 쉰다섯 번째 삶에서 다리가 무너지며 레아가 빠져 죽었던 타주 강이다. 너무 길어 꼭 바다와 같은 강의 모습은 아름답다. 이 아름다운 강을 볼 때마다 줄리앙은 아랫입술을 꾹 깨문다. 언젠가 레아는 물었었다.

“왜 그렇게 무서운 표정을 지어요? 이 다리를 건널 때마다.”

“네?”

“늘 그러는 것 같아서요.”

‘이 다리에서 당신이 죽는 걸 봤거든. 시체는 열흘 만에 찾았고 정말 참혹했지.’

줄리앙은 이렇게 말하는 대신 그냥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 입술을 깨무는 버릇을 고치려고 노력한다. 타주 강의 남쪽과 북쪽을 잇는 긴 다리는 나무로 되어 있었다. 레아가 죽기 전에는 말이다. 이제 다리는 단단한 돌을 이어 아치 모양으로 축조되어 있다. 얼마 전 줄리앙이 레아를 위해 다시 지은 다리이다. 몇 번째로 다시 지었는지 알 수 없다. 이번에 새로 디자인한 모양이 줄리앙은 제법 마음에 든다.

“대체 어떻게 저보다 더 잘 아시는 겁니까? 공작님이 되려면 다리에 대해서도 잘 알아야 하는 법이라도 있답니까?”

교각 전문가가 줄리앙에게 그렇게 말했을 때 그는 그저 웃었다. 아무나 붙잡고 제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고백하고 싶다는 유혹에서 벗어난 지도 이미 오래되었다.

긴 다리를 지나면 바로 레날의 가장 평범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왁자지껄한 시장거리가 있다. 레날의 영지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다. 풍요로움이 영지 전체에 흐른다. 평범한 시장 사람들이라고 해도 왕국의 다른 지역처럼 찢어지게 가난하거나, 초라한 행색은 드물다. 그렇긴 해도 줄리앙의 기품은 그들 사이에 있으니 단연 돋보인다. 가장 오래된 옷을 입고, 마차도 말도 수행인도 요란스러운 행색도 없이 혈혈단신으로 길을 나섰지만, 시장 한복판에서 숨어든 귀족 하나를 찾아보라고 누군가에게 시킨다면 누구든 바로 그를 가리킬 터였다.

갓 스물을 넘긴 단정한 행색의 귀공자, 다리에 대해서든 무엇에 대해서든 충분히 공부할 시간이 많았던 오래 산 사람, 그는 그렇게 자신이 얼마나 특별해 보이는지를 결코 모른 채 시장을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이윽고 그가 찾던 가게가 나왔다. 얼핏 보면 아주 평범해 보이는 작은 가게이다. 안에서는 찻잎이며, 찻잔 따위를 팔고 있다. 여기가 마법사 카리안의 거처이다.

저택 입구에서 여기까지 걸어서 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정말 코앞에 있었는데 312년을 이곳을 찾아 헤맨 셈이었다.

“어르신, 계십니까?”

드르륵, 문을 열며 줄리앙이 그렇게 말했다. 문이 열리자 조잡한 내부가 보인다. 찻잎을 담아 두는 조그만 약재함 같은 작은 서랍 몇십 개로 이루어진 가문비나무 서랍장이 한쪽 벽을 가득 채우고 있다.

반대편 벽 쪽에는 오래된 찻잔들이 옹기종기 앉아 있다. 천장에는 웬 조잡한 장식품이 주렁주렁 달려 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곳이다.

입구 반대편에 있는 작은 문을 열고 한 노인이 나왔다. 마른 체형에 허리는 꼿꼿한데 긴 머리와 배꼽에 닿을 정도로 기른 수염은 하얗게 세었다. 그 늙은이는 단호해 보이는 입매를 찌그러뜨리며 이렇게 말한다.

“나보다 훨씬 오래 산 이가 대체 왜 내게 어르신이라 칭하는 거요. 말씀 낮추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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