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달콤한 것
무도회가 끝나 갈 무렵, 레아 리버런은 다시 줄리앙의 앞으로 왔다. 양옆으로 언니 이사벨라 리버런과 엘리자베스 드 라넬이 레아의 조그마한 어깨를 붙들고 있었다. 딱 봐도 알 수 있었다. 언니들의 손에 이끌려 온 것이다.
“아까 그 말은 진심이 아니었습니다. 무례하게 굴어서 죄송합니다. 기분이 상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젖살이 채 빠지지 않아 동그란 볼이 복어처럼 부풀어 있었다. 입술은 앞으로 이만큼이나 나와 있어 손으로 잡으면 손잡이처럼 잡힐 듯했다. 입술을 그렇게 내밀고 못마땅한 표정을 감추지 않으면서 겨우 하는 사과가 너무도 레아다웠기에 줄리앙은 미소가 절로 나왔다.
“무례는요. 괜찮습니다. 염려 마십시오.”
줄리앙은 싱글벙글 웃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레아는 샐쭉한 얼굴로 줄리앙을 한번 쳐다보더니 무릎을 살짝 굽혀 인사를 하고는 바로 회장 밖으로 나가 버렸다. 이사벨라 리버런이 뒤에 남아 사정을 설명했다. 기대하던 마법의 여름이 깨져 버려 속상한 모양이라는 것이 요점이었다. 줄리앙이 그간 만나 왔던 레아 리버런은 마법의 여름을 고대하던 소녀가 아니었지만, 그건 열일곱 살이 되어서의 사정이었고, 3년이나 이른 시기인 지금은 또 달랐다.
그러고 보니 제멋대로 일을 처리해 버린 것이 미안해졌지만, 그렇다고 자신을 난생처음 보는 레아와 상의해서 뭔가를 진행할 수 있는 노릇은 또 아니었다.
줄리앙은 밖을 바라보았다. 씩씩거리며 회장 밖으로 나간 레아는 씩씩한 걸음으로 라벤더 숲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성난 새끼 고양이 같은 그 귀여운 뒷모습에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리다 말고 줄리앙은 한숨을 푹 쉬었다.
다음 날 아침, 조찬회가 끝나고 나서야 겨우 줄리앙은 레아에게 말을 걸 기회를 잡았다. 레아는 진줏빛 살결과 너무 잘 어울리는 살굿빛 드레스를 입고는 아직도 뾰로통한 얼굴로 새침하게 자리에 앉아 있었다. 줄리앙 쪽은 한 번도 쳐다보지 않고 말이다.
“레아.”
“제가 레아라고 불러도 된다고 했었나요?”
“실례했습니다, 레이디 레아 리버런.”
레이디라는 말에 레아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이 무렵의 레아는 레이디라는 말을 붙여 주면 어깨가 우쭐해지는 어린 소녀였다.
“티타임이 끝나고 나서 저와 함께 산책이라도 하시지 않겠습니까?”
“됐어요. 난 당신이랑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아요.”
“혹시 아직도 화가 나셨나요?”
“물론이죠. 어제 한 사과는 언니들이 시켜서 한 거지 진심이 아니었어요.”
줄리앙은 그런 레아가 그저 귀엽기만 했다. 고집 센 레아, 제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레아, 그것도 모두 줄리앙이 좋아하는 레아였다. 그는 농담을 섞어 대답했다.
“어제는 아까 그 말이 진심이 아니었다고 하시더니 오늘은 어제 그 말이 진심이 아니었다고 하시는군요. 혹시 산책이 끝나고 나면 지금 이 말도 진심이 아니라고 말하게 되시지는 않을까요?”
어쩜 저렇게 말을 번지르르 얄밉게 말할까 싶어 레아는 조그마한 입을 떡 벌리고 줄리앙의 잘생긴 얼굴을 쳐다보았다.
“당신이 의도한 대로 저는 당신과 결혼하게 되겠죠. 하지만 내가 당신을 진심으로 좋아하게 되는 일은 없을 거예요.”
레아의 말을 듣자마자 줄리앙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도 그럴 것이 첫 번째 인생에서 두 사람은 꼭 이렇게 첫 단추를 끼웠던 것이다. 내가 당신과 결혼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라고 빽 소리를 지르고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던 레아를 아직 줄리앙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 사정을 알 리가 없는 레아는 줄리앙의 웃음에 기분이 상할 따름이었다. 마치 첫 번째 인생 때처럼 얼굴이 빨개져서는 팽 돌아서 가는 레아의 손목을 잡으려다가 줄리앙은 잠시 움찔했다. 오른쪽 손목뼈가 유난히 불거져 있는 마르고 가느다란 손목, 그 손목을 붙잡고 그녀를 멈춰 세운다면 상처라도 날 정도로 가녀린 손목이었다.
그는 레아의 손목을 붙잡는 대신에 빠른 걸음으로 레아를 앞질러 가 그녀의 앞에 섰다. 길을 가로채느라 걸음을 서두르는 그 꼴이 제법 우스웠던 모양인지 레아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웃네요.”
“뭐예요. 저리 가세요.”
“제가 어떻게 해야 기분이 풀리실까요?”
“내가 어떻게 하라고 하면 그대로 할 건가요?”
“하늘의 별이라도 따다 드리지요.”
“제 마법의 여름을 돌려주시면 용서해드릴게요.”
“그건 불가능합니다.”
레아가 거보라는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위로 으쓱했다. 줄리앙은 레아에게 물었다.
“왜 마법의 여름을 돌려받고 싶으신 겁니까? 제가 그렇게 맘에 안 드세요?”
레아는 그 말에 그제야 줄리앙을 제대로 쳐다보았다. 첫눈에도 헉 소리 나게 잘생겼다는 생각을 했지만 이렇게 찬찬히 살펴보니 정말 잘생기긴 잘생긴 얼굴이었다. 누군가 심혈을 기울여 섬세하게 조각해 놓은 듯한 얼굴이었다. 날렵한 턱 선, 높고 곧은 코, 밤에 바라보는 호수 밑바닥 같은 검은 눈동자. 레아는 특히 그 눈동자가 마음에 들었다.
어찌 되었든 이렇게 된 이상 몇 년 후 이 남자와 결혼할 수밖에 없는 게 레아의 운명이었다.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면, 그 운명이 아주 참혹한 건 아니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레아의 표독스러웠던 표정이 누그러진 것을 줄리앙은 금세 알아챘다.
“왜, 자세히 살펴보니 아주 마음에 안 드시지는 않나 봅니다.”
“당신이 마음에 들고 안 들고의 문제가 아니에요. 당신은 멋대로 내게 선택의 기회를 빼앗았잖아요.”
“그럼 다시 선택하십시오.”
“네?”
“다시 선택하실 수 있게 해드리겠습니다.”
레아는 줄리앙이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다시 선택한다니 그게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영문을 몰라 하는 레아를 앞에 두고 줄리앙은 말을 이었다.
“제가 3년을 더 리버런 섬에 머물러 왔다는 것은 이미 들으셨겠지요.”
“네. 다들 당신이 리버런 공의 자리를 탐내고 있는 것은 아니겠냐고들 하더군요. 삼촌께서 젤 불만이시죠. 당신이 3년이 아니라 영원히 리버런에 머물 속셈을 가지고 있다며 뭐라 하시더군요.”
“영원히 머무는 것도 좋지요. 당신만 좋다면요. 3년 동안 제가 늘 당신 곁에 함께할 겁니다. 3년이 지나고도 당신의 맘에 제가 차지 않는다면 돌아가겠습니다.”
“돌아간다고요?”
레아로선 황당하기 이를 데 없는 이야기였다. 3년 후 여름에 돌아간다고 해서 이미 정혼자를 두었던 적이 있는 레아가 그제야 마법의 여름을 가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런 레아의 속마음을 모두 읽은 것인지 줄리앙이 선수 쳐 대답했다.
“가능합니다. 3년 후라 봐야 열일곱이 아닙니까. 제가 여기 머물렀던 것이 당신의 흠이 되지 않게 행동할 것입니다.”
“이런 얘기를 내게 하는 이유가 뭐예요? 그래서 정말 저한테 선택권을 주시겠다는 건가요? 주시려면 지금 주시면 되잖아요.”
“제가 바본가요. 지금 드리면 바로 제가 싫다고, 마법의 여름을 돌려 달라고 하실 거잖습니까?”
정곡을 찌르는 줄리앙의 말에 레아가 입을 다물었다.
“3년 후입니다. 3년 후에 다시 결정해 주십시오, 레이디 리버런. 전 당신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당신도 저를 좋아하게 되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은 없겠지요.”
“3년 후에 내가 당신을 거부할 일은 없다고 생각하시는 거죠, 지금?”
줄리앙은 여전히 말없이 능글맞은 미소만 보일 뿐이었다. 레아가 죽는 것이 운명이라면, 줄리앙과 레아가 결혼하는 것도 운명이었다. 백번을 넘게 살면서도 레아는 언제고 변함없이 줄리앙을 택했다. 줄리앙과 사랑에 빠졌다. 어차피 당신은 나와 사랑에 빠지게 될 운명이라는 말이 얼마나 재수 없고 황당무계하게 들릴까를 짐작하면서도 줄리앙은 그 말을 기어코 하고야 말았다.
“당신은 언젠가 반드시 저와 사랑에 빠질 겁니다. 레이디 레아 리버런.”
“아무렴요.”
레아는 별 미친놈 다 보겠다는 듯이 줄리앙을 멀리 쫓으려는 듯 손을 밖으로 휘둘렀다. 궁정의 나이 지긋하신 레이디들이나 하는 그런 제스처를 열넷밖에 안 된 꼬마 숙녀가 하고 있는 걸 보고 있자니 줄리앙은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제 방으로 돌아온 레아는 출산 중인 유모 대신 제 시중을 들고 있는 하녀 뮤리엘을 앞에 두고 실컷 욕을 퍼부었다.
“그런데 공작님이요.”
“공작님은 무슨 공작님이야. 미친놈이라고 불러.”
“어, 그러니까 아가씨의 그 미친…… 공작님이요.”
“그래. 그 미친놈이 왜.”
커다란 눈을 부라리면서 화를 내는 레아를 보며 킥킥대고는 뮤리엘은 말을 이었다.
“정말 잘생기지 않았나요. 어쩜, 그런 미남자와 결혼하시다니. 우리 아가씨는 운도 좋으세요.”
“그 잘생긴 놈이 완전 미친놈이라니까? 내 얘기 못 들었어?”
“글쎄요. 근데 어차피 결혼은 해야 하고, 결혼할 상대는 아가씨가 맘대로 고를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그런 모든 걸 갖추신 분이 오셔서 아가씨와 결혼하시겠다고 하는데 좋은 것 아닌가요?”
“모든 걸 갖췄다고?”
“그럼요. 여왕님의 조카시죠, 영지도 수도 가까이 엄청 커다랗게 있죠, 공작님이시죠, 얼굴도 잘생기신 데다가 행동도 어찌나 기품이 있으신지!”
레아는 오늘 처음 제대로 노려봤던 줄리앙의 얼굴이나 풍채를 하나하나 떠올려 보았다. 잘생겼다는 말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럼 뭐해. 인성이 덜 되었는데. 그리고 난 엄연히 선택할 권리가 있었어, 뮤리엘. 마법의 여름이 없어졌다고.”
“그것도 아가씨가 원하시면 3년 후에 되돌려 준다고 하셨다면서요.”
뮤리엘은 샐쭉한 얼굴로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레아는 입술을 잘근 잘근 씹으며 혼자 중얼거렸다.
“그게 제일 마음에 안 들어.”
이상하게 그랬다. 네가 원하면 나를 선택하지 않아도 좋다는 그 여유만만한 자세도, 그래 봤자 넌 나를 좋아하게 될 거라는 알 수 없는 그 자신감도 모두 신경에 거슬렸다. 차라리 자신의 앞에서 무릎 꿇고 조신하게 구혼이라도 한다면 레아 역시 못 이기는 척, 연애놀이라도 해 보는 건데 이 공작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레아는 자신이 지는 게임을 시작한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레아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레아의 그 미친놈은 그 후로도 정말로 자신의 말대로 행했다. 자신의 말대로‘만’ 행했다. 조찬 모임이든 티타임이든 주말에 치러지는 별의별 행사든 줄리앙은 언제나 레아의 곁에 있었다. 하지만 크게 레아에게 더 다가오지 않았고 무리하게 친해지려 들지도 않았다. 당연한 일인 것이 줄리앙으로서는 레아의 옆에 있고, 그녀를 볼 수만 있다면 더 서두를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아침 식사 때, 가족들 모두와 함께하는 저녁 만찬 때, 이따금씩 있는 궁정 무도회 때, 어머니가 주관하는 티타임 겸 독서회 때 만났다. 가볍게 인사를 했고, 근황을 물었다. 날씨에 대해서도 이야기했고, 지나가는 계절에 관해서도 이야기했다.
벨라 언니의 구혼자들처럼 거창한 선물로 레아를 꼬드기려 든 적은 없었지만 계절이 지나갈 때마다 그는 살뜰히도 레아를 챙겨 주었다. 추운 날이 다가오면 티타임이 시작되기 전에 레아에게 양털로 짠 무릎 담요를 넌지시 덮어 주었고, 봄에는 얇아진 드레스 위에 덮을 가운을 선물했다. 좀 배고프다 싶으면 다가와 구움 과자를 하나 건네기도 했고, 어디서 구했는지 달콤하고 맛있기 이를 데 없는 초콜릿 한 상자를 선물하기도 했다. 그때는 레아도 도리가 없었다. 그렇게 맛있는 초콜릿은 처음 먹어 보았으니 말이다. 처음으로 레아는 자신이 먼저 줄리앙에게 말을 걸었다.
“레날 공작님.”
“레이디 레아 리버런,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지난번의 그 초콜릿은 정말 맛있게 먹었어요.”
“그렇습니까?”
그러고는 레아는 한참을 가만히 줄리앙을 쳐다보았다. 몇 초, 아니 몇 분을 기다리다가 줄리앙이 다시 레아에게 물었다.
“그런데 무슨 볼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어디서 구한 것인지, 더 주실 수는 없는지를 물어보려다가 말고 레아는 그만 부끄러워져 말을 꺼내지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노려보고 있는 레아를 보고는 또 무슨 화라도 났나 하고 고민했다. 한참을 골똘히 있다가 침을 꼴깍꼴깍 삼키며 저를 보는 레아의 눈을 보고 그는 겨우 눈치를 챘다.
“혹시 더 드시고 싶으신가요?”
줄리앙이 말을 꺼내자마자 레아가 냉큼 대답했다.
“주신다면야 사양은 않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