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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After all this time (44/48)

44. After all this time

[레아 레날에게.

요즘 통 가족 모임에 오질 않는구나.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지? 언니들이 네 걱정을 많이 해. 리버런 섬에도 이제 여름이 왔단다. 눈이 다 녹은 지 오래야. 곧 네가 좋아하는 수국 철이 오겠지. 6월이면 네 생일이라는 걸 잊지는 않았겠지? 다시 리버런 섬에 오지 않겠니? 네가 좋아하는 초콜릿을 잔뜩 준비해 둘게.

―네 환한 웃음이 보고 싶은 언니 이사벨라 오를.]

[사랑하는 동생 레아에게.

잘 지내고 있지? 호두나무는 안녕하니? 호두열매를 빠르게 잘 수확하는 방법을 아는 아이를 하나 찾았어. 하인 그레고리가 데려온 아이인데 아주 귀엽단다. 말도 많아 곁에 두면 재잘거리는 것이 너랑 참 잘 맞겠다 싶어. 너에게 보내 주고 싶은데 네 생각은 어떠니? 이제 곧 네 생일인 걸 까먹진 않았겠지? 그날 리버런 섬에 오는 게 좀 그러면 오를의 영지에 놀러 오지는 않을래?

―벨라 언니가.]

[답장을 안 쓰는 걸 보니 손에 무슨 문제가 생긴 건 아닌지 걱정되는 내 동생 레아 리버런에게.

그날이 네게 특별한 날이란 걸 알아. 하지만 기쁜 날이든 슬픈 날이든 가족과 함께하는 게 제일 아니겠니? 무엇보다 이제 슬슬 네 얼굴을 까먹어 가는구나. 연락을 좀 주련?

―너를 많이 생각하는 이사벨라가.]

편지를 읽다 말고 레아는 한숨을 쉬었다. 벨라는 이런 편지를 일주일에 한두 통씩 보냈다. 다 레아를 걱정해서 그런 것이라는 걸 안다. 그래서 더 부담스러웠다. 레아는 사람들이 자길 걱정한다는 것이 싫었다. 걱정을 산다는 건 안 좋은 일이 있다는 것이고 그 안 좋은 일이라는 건 물론 레아의 남편, 줄리앙 레날 공작의 죽음을 말했다.

레아는 그것이 싫었다. 줄리앙 레날이 죽은 것이 안 좋은 일이 되었다는 것은 그가 살아 돌아올 리가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당연한 일이다. 죽은 자는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 하지만 이제 2년이 다 되어 가는데도 레아 리버런의 생각엔 줄리앙은 금방이고 성큼성큼 걸어 타주 강 다리를 지나 흑마를 타고 호두나무를 돌아 레아의 앞으로 돌아올 것 같았다.

아니었다. 그가 돌아오는 곳은 이곳이 아니었다. 그는 언제나처럼 리버런 섬의 라벤더 밭 옆 응접실에 커다란 복숭아를 하나 들고 돌아올 것이었다. 레아는 그 장면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리버런 섬에 돌아갈 수 없었다. 금화를 잃어버린 자가 제 호주머니를 가장 마지막에 뒤지는 것처럼 레아는 리버런 섬으로 가는 것을 주저했다. 거기에서 기다리는데도 줄리앙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건 정말로 줄리앙이 죽었다는 이야기가 되니까 말이다.

레아 레날 공작부인은 시간이 날 때마다 먼 옛날, 줄리앙 레날 공작과 처음 만났던 때를 떠올려 보았다.

‘리버런 섬에도 복숭아밭이 있습니까?’

그렇게 말하며 줄리앙은 그녀에게 탐스럽게 영근 복숭아를 주었다. 썩을 복숭아, 그녀를 수백 번 죽게 하고 그녀의 남편의 마음을 수만 번 갈기갈기 찢어 놓은 마법의 복숭아, 하지만 그 복숭아만이 지금 레아 레날이 가진 마지막 희망이었다.

그녀는 기억을 더듬어 다시 몇십 년 전의 유월의 리버런 섬으로 돌아갔다. 줄리앙은 깨끗한 손으로 복숭아 껍질을 살금살금 까고 있었다. 과즙이 그의 하얀 손에 끈적끈적하게 묻었다.

‘손이 더러워져요.”

그녀가 이렇게 말하면 줄리앙 레날은 볼멘소리를 한다.

‘까 달라고 하셨잖아요.’

아니 ‘까 달라고 했잖소.’였던가. 시간이 갈수록 어떤 기억은 선명해지고 어떤 기억은 가물가물해진다. 이제는 그가 어떤 말투로 그녀에게 말했는지가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투덜거리면서도 입가에는 싱글벙글 미소를 머금고 있었던 것만은 박제한 듯 그녀의 머릿속에 남아 있다.

열심히 껍질을 까는 줄리앙의 손목뼈를 타고 복숭아 과즙이 흐른다. 그는 불편하다는 듯이 팔을 위로 치켜든다.

‘줘 보세요.’

열일곱의 레아는 줄리앙의 팔을 붙잡고 소매가 젖지 않게 두어 번 옷을 접어 올려 준다. 그러고는 손목뼈를 타고 흐르는 복숭아 과즙을 혀로 살짝 핥아 올린다.

‘달아요.’

그림으로 그려 놓은 듯 선명한 기억은 이상하게도 딱 거기에서 멈춘다. 그래서 그녀는 그 복숭아를 먹었던가, 아니면 먹지 않았던가. 분명 줄리앙의 손에 흐르는 복숭아 과즙을 핥았다. 그가 들고 있던 복숭아를 건네받았다. 그것을 그녀가 베어 물었던가. 아니면 그대로 응접실에 있던 마호가니 탁자 위의 사기그릇 위에다 아무렇게나 올려 두고 그와 대화하느라 깜빡 잊었던가.

어떤 때는 베어 문 것 같았다가 또 어떤 때는 그런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그날은 당신이랑 정원을 뱅글뱅글 돌며 얘기하느라 바쁜 통에 복숭아를 먹을 새도 없었잖아요.’

그녀는 분명 남편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녀의 남편은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내가 당신 앞에서 죽을 일은 없겠군요, 내 사랑하는 아내여.’

그날 밤 줄리앙은 더없이 편안한 잠을 이루었지만, 레아는 그를 끌어안고 잠자리에 누워서 말똥말똥한 눈으로 새벽을 지새웠다.

확신이 서지 않았다. 정말 그녀가 복숭아를 먹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 두었는지, 아니면 나중에라도 먹었는지가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 불안을 잠재울 만큼 두 사람 사이는 좋았다. 매일매일이 더없이 행복했다. 해결할 수 없는 한 가지 의심을 붙들고 고군분투하기에는 인생은 너무 복잡하고 바빴다. 복숭아를 베어 물었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면, 줄리앙이 지금처럼 웃지 않을 수도 있을 거라는 것이 무서웠다. 그래서 레아는 애써 그 일을 잊고 지내려 했다.

그럼에도 문득문득 드는 의문들은 그녀를 괴롭혔다. 레아는 시간이 날 때마다 그날의 일을 차근차근 복기해 보았다. 줄리앙의 차가운 손끝, 응접실 한가운데 놓인 마호가니로 만든 작은 테이블, 응접실 밖으로 나가 손을 씻던 줄리앙의 발걸음, 달콤했던 복숭아 과즙, 그의 말투, 웃음, 모든 것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머릿속 기억을 낱낱이 끄집어 내어 보았지만 이상하게도 단 하나만큼은 떠오르지 않았다. 단 한 번도 그녀가 복숭아를 베어 문 장면을 기억 속에서 찾아낸 적은 없었다. 떠오르지 않았다는 것은 먹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매일매일 자신이 복숭아를 먹지 않았기를 간절히 빌던 그녀는 어느 틈에 마음을 놓았다.

세월은 흘렀고 그녀의 남편도 그녀도 모두 무사했으니까. 두 해 전 6월 27일, 줄리앙 레날 공작이 숨진 바로 그날 전까지는 말이다.

이제 그녀는 정반대의 기도를 하고 있었다.

‘부디 내가 그 복숭아를 먹었기를.’

매일매일 그 생각만 하다 보니 이제는 이상하게도 그녀의 뇌리에 더없이 선명한 기억이 하나 생겼다. 줄리앙과 대화하는 사이에 잠시, 복숭아를 한입 베어 물던 장면, 그런데 이 장면이 진짜일까, 아니면 간절한 염원이 만들어 낸 가짜 기억일까.

가짜 기억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는 그 장면에 매달려 살았다. 그러는 수밖에 없었다.

[나의 귀여운 아내, 잠자고 일어나서 당신의 모습을 보는 것이 제일 즐겁지.]

[사랑하는 내 아내에게, 잠시 궁정에 다녀와 다시 사랑해 줄 테니 얌전히 기다리고 있을 것.]

[수도에서 찾았어요. 당신이 보면 좋아할 걸 알았지. 얼른 읽고 나도 빌려주세요.]

때마다 줄리앙이 써 놓았던 자잘한 편지를 하나하나 펼쳐 보는 것이 요즘 레아의 낙이었다. 쪽지는 수백 장이 있었지만 레아는 아껴 읽었다. 한꺼번에 다 읽고 나면 그다음 날부터는 줄리앙이 없는 이 세상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똑바로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매일 한 개씩, 이미 읽었던 것을 다시 읽는 것은 좋으나 새로운 것은 내일을 위해 아껴 둘 것, 그것이 레아가 만든 규칙이었다.

이런 꼴이니 레아는 정상적으로 살려면 그 가짜 기억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복숭아를 먹었더라면, 그래서 줄리앙이 죽은 거라면, 레아는 마흔 살의 생일 때 다시 열일곱으로 돌아갈 것이다.

“난 슬프지 않아. 왜냐면 기다리면 되니까.”

그녀는 거울을 보고 싱긋 웃고는 소리 내서 이렇게 말해 보았다.

“기다리는 건 줄리앙도 많이 했으니까 이번에는 내가 하는 거야.”

다시 한번 다짐하듯 말했다.

“사실 얼마 안 남았어. 이쯤이야.”

이번에는 자신을 타이르듯 말했다.

레날 공작이 죽고 나서 공작부인이 미쳐서 혼자 소리 내서 중얼거리고 돌아다닌다는 소문이 돌 수도 있는 일이었다. 괜찮았다. 사람들의 수군거림 따위야 웃어넘길 수 있었다. 어차피 레아 레날 공작부인은 사교계에 발길을 완전히 끊은 터였다.

처음에는 계속해서 사람들을 만났다. 그가 말한 대로 행복한 인생을 살아 내기 위한 일환이었고, 가만히 집에만 있으면 정말로 이대로 죽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레아의 머릿속에는 줄리앙을 따라 죽는 시나리오밖에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았다. 밖에 나가고 누굴 만나고 떠들고 해 봤자 마음은 지옥이었지만, 그래도 혼자 있는 것보다 나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엔가, 참석했던 모임에서 누군가 내어 온 초콜릿이 미치도록 달콤했다. 마치 줄리앙이 자신에게 주던 그 초콜릿처럼 말이다. 서른이 넘어서부터 입맛이 변했는지 레아는 예전만큼 단것을 많이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레아의 남편은 언제나 그 초콜릿을 챙겨 주었다.

‘당신이 제일 좋아하는 거잖아.’

그렇게 말하면서 웃는 남편의 얼굴에다 대고 이제는 질렸다고 말할 수 없어 언제나 꿀꺽 초콜릿을 삼키고 맛있다는 표정을 짓던 제 모습이 떠올라 레아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이제 좀 살 만하신가 보군요, 공작부인.’

‘그래요. 벌써 1년 아닙니까.’

옆에 있던 사람들이 그런 말을 했다. 레아는 대체 뭐라 대답할지 알 수 없었다.

‘그래요. 이제 좀 괜찮아요.’라고 말하고 웃을까?

아니면 솔직하게, ‘아뇨 내 남편이 죽고 당신들 같은 사람들이 살아 있다는 게 너무 화가 나서 당장 일어나서 당신을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 싶어요. 언젠가는 정말 그러고 말 거예요.’라고 말할까?

벌써 1년이라니, 레아는 이미 백 살은 더 먹은 것 같았는데 말이다. 사람들은 이렇게나 무신경했다. 이토록 멍청하고 무례했다. 레아는 속의 말을 삼키고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그는 아마 살아 돌아올 거예요. 그래서 괜찮아요.’

말을 마치고 다시 한번 싱긋 웃자, 앞에 앉은 사람들의 표정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때부터였다. 레날 공작부인이 미쳤다는 소문이 수도 안을 가득 채운 것은 말이다. 레아는 이제 어떤 무도회에도 사교계 행사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한 달에 한 번씩은 꼭 오던 이사벨라의 편지는 이제 더 횟수가 늘어 사흘이 멀다 하고 오기 시작했다. 그녀는 사랑하는 동생이 미친 것은 아닌가 하고 걱정하는 것이다. 다정도 하지, 하고 레아는 혀를 찼다.

그녀는 유월에 딴 복숭아를 손에 들고 한입 베어 물어 우물거리며 다시 한 번 벨라 언니의 편지를 읽었다. 예의 그 나무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레날의 복숭아는 모두 유난히 커다랗고 달콤했다. 하지만 달콤한 것을 먹으면서도 레아의 기분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이미 아침에 줄리앙의 쪽지를 열 번은 읽은 터였다. 이 편지들을 다 읽고 나서도 시간은 분에 넘치게 많이 남아 있을 터였다.

[사랑하는 벨라 언니에게. 6월이네. 리버런 섬으로 갈게. 연락이 늦어 미안해.

―레아 레날.]

어디 있든 6월 27일은 올 터였다. 그날 밤, 잠이 들었다가 깨면 모든 것이 밝혀질 터였다. 리버런 섬에서 잠이 깬다면, 라벤더 숲으로 나아간다면, 그곳에 줄리앙이 있다면, 아니 없다면…….

레아는 무언가 결심한 듯 비밀의 방으로 달려가 보석함을 열었다. 결혼 생활이 지속되던 이십 년간 그녀의 남편이 매일같이 그녀에게 남겨 주던 수많은 쪽지들이 들어 있는 그 보석함을 열어 마치 굶주린 사람이 빵을 먹어치우듯 모든 쪽지를 읽어 내렸다. 아껴 두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믿기로 했다. 줄리앙은 레아를 두고 먼저 떠날 리 없다. 반드시 다시 돌아올 것이다. 그녀는 복숭아를 먹었다. 그들에게는 다시 한번 기회가 주어질 것이다.

호위무사 하나 없이 리버런 섬으로 갔지만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슬픔이 그녀를 집어삼켰다. 그때는 왜, 대체 그런 일이 일어난 걸까.

유월의 리버런 섬은 여느 때처럼 아름다웠다. 푸르른 라벤더 숲에는 줄리앙과 함께 맡던 내음이 났고, 그와 함께 산책하던 옥수수 밭은 바람에 흔들리며 이파리가 부딪치는 소리로 그녀를 반겨 주었다. 동쪽 별관 근처의 그들만의 화원 역시 그대로였다. 올리브 나무 잎이 햇볕을 받아 은색으로 빛났다.

“레아, 생각보다 좋아 보이는구나!”

이사벨라가 레아를 반겼다.

“좋아 보이긴, 얘. 왜 이렇게 못생겨졌니?”

옆에서 레아의 어머니, 리버런 공작부인이 인상을 쓰며 나왔다.

이사벨라의 말이 거짓말인 걸 알고 있었다. 줄리앙이 죽은 이래로 10킬로그램은 더 빠진 터였다. 어머니의 무신경한 말에 레아는 웃음으로 응수했다. 일일이 예민하게 반응할 필요 없었다. 어차피 며칠 후 그녀는 다시 돌아갈 것이다. 열일곱 살의 리버런 섬으로. 만약 돌아가지 않는다면? 그럼 그냥 죽어 버리면 된다.

“그래서 죽어 버린다고?”

이사벨라가 화들짝 놀라 물었다.

“그래, 그럴 거야.”

자매 사이엔 비밀이 없었다. 레아는 스스럼없이 제 이야기를 모두 털어놓았다. 그러니까 세 번의 인생, 아니 그 전의 줄리앙의 인생까지 모조리 다 말이다. 짧게 간추린 이야기였지만 다 말하는 데에 꼬박 반나절이 걸렸다. 이사벨라는 걱정이 가득한 눈을 하고는 레아를 바라보았다. 여동생이 미쳤다고 생각해서 걱정하는 것인지, 아니면 죽어 버린다는 말에 반응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었다.

“레아, 네 말을 믿어.”

“사실 안 믿어도 상관없어.”

“아냐, 정말로 믿어.”

이사벨라는 레아의 손을 꼭 쥐더니 그렇게 말하고는 한참을 침묵 속에 있다가 다시 이야기를 꺼냈다.

“하지만 복숭아를 먹지 않았더라면 어쩔 참이니? 마흔 살 생일이 지나고 나서도 네가 돌아가지 않는다면 어쩔 참이야?”

“죽을 거야.”

“레아, 줄리앙이―.”

“그래, 줄리앙이 그랬어.”

살아 있으면 행복해질 수 있다고 줄리앙은 말했다.

아니 사실 그 말은 아주 오래전, 다른 인생을 살았던 레아가 한 말이었다.

죽지 말라고도 했었다. 절대로 자살하지 말라고, 그것 역시 레아 자신이 줄리앙에게 한 당부였다.

“하지만 내가 언제 줄리앙 말을 잘 들은 적이 있어?”

“그건 그렇지.”

순간 자매의 눈이 마주쳤다. 황록색 눈동자도, 회푸른 눈동자도 이제는 소녀 때보다 부쩍 깊어져 있었지만, 눈가의 주름마저 아름다운 채로 두 여자는 그렇게 아주 오래전 그랬듯 눈을 마주치고 웃었다.

인간이란 참 신기했다. 마음속에는 꺼지지 않는 고통의 불길이 가슴을 태워 없애는 듯 아프게 하고 있는데도, 이렇게 웃을 수 있으니 말이다. 웃음이 잦아든 후 먼저 입을 연 것은 이사벨라였다.

“그래서 줄리앙의 말을 거역하고 네 맘대로 죽겠다고?”

“언니, 난 행복했어. 줄리앙도 행복했어. 우린 둘 다 행복한 인생이었어. 내가 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고 해도, 줄리앙이 그렇게―.”

레아는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골랐다.

“……그렇게 죽었다고 해도 그 인생이 행복한 게 아니었다고는 할 수 없어. 안 그래? 언니는 줄리앙의 인생이 실패한 인생이었다고 생각해?”

벨라는 말을 골랐다. 뭐라 말을 해야 동생이 마음을 덜 다칠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그냥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줄리앙이 그렇게 젊은 나이에 죽은 것이 안타깝고 슬프지만, 실패한 인생이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레아.”

“그럼, 슬픈 인생이라고 생각해?”

“아니, 그는 슬픈 인생을 살지 않았어. 슬프게 죽었을 뿐이야.”

“맞아. 언니. 줄리앙이 그렇게 죽었다고 해서 그의 인생에 행복한 시절이 있었단 걸 부정할 수는 없어. 나 역시 그래. 내가 어떻게 죽든 내 인생에 더없이 행복한 시절이 있었다는 걸 언니도 알잖아. 그걸로 됐어. 내 인생은 이미 완성되었어. 난 이제 더 살아도 아무 의미 없어. 이제 내 인생에 남은 것은 의미 없는 고통뿐이야.”

“나한테 의미가 있다고 말하면 살래? 나한테는 의미가 있어. 남은 게 의미 없는 고통뿐인 삶이라고 해도, 네가 살아 있으면 좋겠어. 레아, 나를 위해 살아 줘.”

이사벨라는 가벼운 어투로 그렇게 말했다. 레아에게 쓸데없이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말투가 가볍다고 해서 그 말이 전달하는 무겁다 못해 간절하기까지 한 마음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레아는 언니의 고마운 마음을 웃음으로 때우며 외면할 정도로 비겁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녀는 더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딱 잘라 말했다.

“안 돼. 언니. 언니가 보는 앞에서 죽진 않을 거야. 그리고 언니가 뭘 하든 소용없을 거야. 난 나중에 언니가 내가 노력하면 뭔가 달라졌을까 하고 후회할까 봐 지금 말하는 거야. 언니가 뭘 어떻게 하든 달라지는 건 없었을 거라고 미리 말해 두는 거야.”

그녀는 미안해, 라고 덧붙이려다 그만두었다. 사실은 전혀 미안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가 지금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이사벨라가 그 아픔의 반의반만이라도 안다면, 절대로 자신을 위해 살아 있으라는 그런 부탁은 못 할 테니 말이다.

“그럼 널 가둬 둘 거야. 알아? 마흔 살 생일날 아침에 일어나면 넌 감옥에 있을 거야. 네 손으로 죽지도 살지도 못하고 나한테 구속당할 거야, 응?”

이제 이사벨라는 웃다 못해 눈물이 흐른 척, 눈가를 훔치고 있었다. 하지만 목소리는 여전히 장난기 어려 있었다. 이런 식의 배려가 레아는 고마웠다. 레아 레날 공작부인은 사교계의 뭇 사람들을 경악시켰던 말을 반복함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는 아마 돌아올 거야. 그래서 난 괜찮아.”

정말이었다. 레아 레날은 지금 자살예고를 하러 리버런에 온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스스로 목숨을 끊을 일은 없을 터였다. 줄리앙 레날은 포기 않고 다시 한번 레아 레날에게 돌아올 테니까. 그는 절대로 레아를 먼저 두고 영원히 떠날 이가 아니었으니까. 레아는 그렇게 믿었다.

오랜만에 리버런으로 돌아온 레아를 위한 작은 생일 축하 파티가 열렸다. 언니들, 동생들이 모두 리버런 섬으로 모여들었다. 그들의 사랑스러운 조카들은 레아가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줄리앙의 이야기에서만 들었던 제 딸 레아델피나를 추억하게 만들었다.

줄리앙이 그렇듯 이들 역시 어린 레아만을 기억하며 또다시 초콜릿으로 범벅된 케이크를 만들어 왔다. 찐득찐득한 초콜릿 덩어리를 삼키고 나니 속이 메스꺼웠다. 줄리앙이 죽은 이후로 레아의 몸은 뼈밖에 남질 않았다. 그렇게나 먹는 것을 좋아했는데 이제는 아무것도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다. 어떤 때는 이틀에 한 끼, 어떤 때는 사흘에 한 끼씩 만 겨우 먹었다. 오랜만에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멀쩡한 식사를 하자니, 간만에 들어온 음식을 몸이 견디지 못했다. 먹은 것을 다 게워 내고는 레아는 침대에 걸터앉아 잠자리에 들 채비를 했다.

똑똑―.

노크 소리는 가벼웠다. 이사벨라의 작고 성마른 손임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눈을 감았다가 뜨며 레아는 다시 한번 혹시나, 혹시나 했다. 이 노크 소리가 줄리앙의 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말이다. 빼꼼하게 문틈으로 얼굴을 내민 것은 이사벨라와 제인이었다.

“우리가 옆에 있을 거야.”

제인의 말에 레아가 웃으며 대답했다.

“꺼져.”

“꺼지라니, 벨라 언니, 레아 언니 말버릇 좀 봐.”

제인이 호들갑을 떨며 벨라를 바라보자 벨라는 슬픈 눈을 하고는 레아의 어깨를 토닥였다.

“레아, 그냥 잠들어. 내일은 괜찮을 거야. 알았지?”

이제 두 사람은 레아의 침대 양옆으로 왔다. 이 방은 열일곱에 레아가 리버런을 떠났을 때 그대로였다. 침대도, 옷장도, 침구, 이불까지도 말이다. 소녀 시절부터 쓴 침대는 그다지 크지 않아 세 사람이 눕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레아는 빈틈없이 제 옆을 차지하고 누운 두 자매를 한 번씩 쳐다보고는 자포자기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하고 자리에 누웠다. 지금 여기서 무슨 소리를 해도 저 두 사람은 제 옆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나를 위해 살아 줘.’

이사벨라는 그렇게 말했다. 레아는 그 말에 미안함을 느낄 새도 없이 자신이 열일곱으로 이동해 있기를 바라며 잠자리에 들었다. 아니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레아는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것이었다.

슬픈 끝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줄리앙 역시 미소 지으며 눈을 감지 않았던가. 행복한 인생이었다고 말이다. 레아는 숨을 한번 폭 내쉬고 천장을 바라보고는 읊조리듯 말했다.

“나 역시 행복한 인생이었어, 줄리앙. 정말이야.”

햇살이 레아의 눈을 어지럽혔다. 분명 커튼을 닫고 잤을 터인데, 아마도 벨라나 제인이 제멋대로 커튼을 젖혀 놓았을 것이었다. 유월의 리버런은 냄새부터가 달랐다. 라벤더 숲은 레아의 방에서는 아주 멀었는데도 그 내음은 여기까지 진득이 느껴졌다.

눈을 뜬다고 해서 바로 줄리앙이 있을 리가 없다는 걸 알았다. 자신이 복숭아를 먹지 않았을 가능성이 더 크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도 레아는 희망을 품고 눈을 떴다.

눈앞엔 푸른 라벤더가 펼쳐져 있었다. 레아는 자신의 방이 아니라 라벤더 숲 한가운데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곁에 이사벨라가 있었다. 이사벨라 리버런, 아니 이사벨라 오를 공작부인이 고개를 돌려 레아를 바라보았다. 눈부신 햇살에 레아는 얼굴을 찌푸렸다. 역광이 그녀의 언니의 아름다운 얼굴에 그림자를 만들었다.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입가에 미소가 걸린 것은 볼 수 있었다.

“생일 축하해, 레아.”

레아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사벨라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여자 인생에는 두 번, 수많은 남자들이 몰리는 시기가 있다고 하는데, 레아…….”

레아는 벌떡 일어났다. 얼굴이, 이사벨라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 더 앳되게 들린다. 하지만 이것은 레아의 착각일 수도 있었다. 이사벨라가 자신에게 장난을 치는 걸 수도 있었다. 그녀는 이미 절박해진, 목까지 차올라 꿀꺽 삼키지 않으면 머리끝까지 차오를 듯하게 부푼 희망을 품고 이사벨라를 바라보았다.

“레아, 왜 그래? 얘가 참, 열일곱이 되자마자 활기가 넘치는구나!”

다가오는 이사벨라의 얼굴은 젊었다. 이사벨라의 녹색 눈동자에 비치는 레아의 얼굴도 그럴 것이다. 크림색 얼굴, 살굿빛 뺨, 딸기 빛 입술, 그리고 이미 차올라 눈물이 넘쳐 제대로 보이지 않는 회푸른색 눈동자.

레아는 그대로 오른쪽을 바라보았다. 레아의 방이 있는 동쪽 별관 앞을 지나 옥수수 밭을 가로질러 수국 꽃밭을 돌아 라벤더 숲. 그리고 그 바로 옆 화원에 딸린 응접실. 지금 레아에게서 백 걸음도 채 떨어지지 않는 그곳, 거기에는 그가 있을 터였다. 하얀 셔츠를 입고, 칠흑같이 검은 머리를 하고, 심연같이 깊은 눈동자를 한 그가.

레아는 달렸다. 응접실 앞까지 전력을 다해 달렸다. 숨이 차올랐지만 괜찮았다. 이곳엔 그가 있을 것이다. 그녀의 단 하나의 사랑, 줄리앙 아르디 레날 공작이.

헉헉대며 응접실에 들어가자 놀란 그는 황급히 고개를 돌려 레아를 바라본다. 얼떨떨한 얼굴로 그는 그녀를 바라보더니 설핏 미소를 짓는다. 그러고는 무언가 커다란 고민거리라도 있는 듯이 얼굴을 찌푸리고는 손에 든 탐스럽게 영근 복숭아를 내밀고 이렇게 말한다.

“리버런 섬에도 복숭아밭이 있습니까?”

“아뇨. 그런데 레날의 복숭아는 먹어 봤어요.”

겨우 대답을 마친 레아는 흘러넘치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다. 줄리앙은 레아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란 듯하다. 사려 깊은 눈에 수심이 어린다. 터벅터벅, 그녀의 남편이 그녀를 향해 걸어오는 동안 레아는 흔들리는 다리를 주체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는다.

“왜 그러십니까, 레이디 리버런.”

이제야 두 사람은 만났다.

이제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레아 레날.

레아보다 더 많은 삶을 살았지만 지난 생만은 기억하지 못하는 줄리앙 레날 공작.

두 사람은 억겁의 시간을 지나 드디어 다시 라벤더 숲 옆 한편에 자리한 응접실에서 다시 만난다.

줄리앙은 레아의 팔을 붙잡고 일으키려 하는 대신 레아의 옆에 같이 주저앉는다. 걱정스러운 눈으로 레아를 바라본다. 레아는 그대로 그를 끌어안는다. 그리고 말한다.

“호두나무, 호두나무를…….”

“네?”

줄리앙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묻는다. 자신을 막무가내로 끌어안은 레아를 단단한 팔로 조심스럽게 감싸 안은 채 말이다. 레아는 여전히 눈물범벅이 되어 정신없이 말한다.

“호두나무요. 줄리앙, 호두나무를 기억해요. 줄리앙. 줄리앙, 아, 내 사랑.”

줄리앙 레날 공작, 그녀의 사려 깊은 연인은 그 말에 아무 대답 않고 그녀를 힘주어 끌어안는다. 그도 이제 알았다. 무슨 연유인지 모르지만 레아가 자신과 같은 아픔을 겪었음을, 그 모든 고통을 뚫고 다시 와 그를 만났음을 말이다. 그대로 그들은 몇 시간이고 그 응접실에 주저앉아 끌어안고 있다. 괜찮다. 그들 앞에 놓인 시간은 무한대이다. 이제 영원히 함께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이 모든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들은 그렇게 만났다. 그리고 그 끝이 어떻게 될지는 우리 모두 알고 있었다.

레아델피나 루이스 레날 공작부인과 줄리앙 아르디 레날 공작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영원히 함께 살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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