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에필로그 2. 행복과 불행 사이 (46/48)

에필로그 2. 행복과 불행 사이

“말도 안 돼. 당신 또 거짓말하는 거 아니에요?”

하녀 주디가 하인 알프레도에게 말했다.

“진짜라니까 그러네. 벌써 일주일째 말도 안 하고 계신다니까.”

알프레도는 귀엣말로 속삭이듯 그렇게 말했다. 주디는 한숨을 푹 쉬었다. 레날 공작 부부가 정말로 말도 안 하고 서로를 피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 주디도 하녀장 마리아를 통해 언뜻 들은 터였다.

문제는 이 소식을 알프레도가 알고 있다는 데 있었다. 떠버리 알프레도가 저한테까지 와서 귓속말하고 있을 지경이니, 아마 내일쯤이면 아르디 왕국 전체가 레날 공작 부부의 소식을 알 수 있을 터였다.

그랬다. 정답기로 소문나 세간의 질투마저 사던 레날 공작 부부 사이에 냉전이 시작되었다는 소식은 그 주가 지나기 전에 이미 왕국의 호사가들을 즐겁게 하는 새로운 가십거리가 되었다.

“슬슬 사이가 나빠질 때도 됐지.”

“결혼한 지 벌써 몇 년째야? 십 년이 넘은 지 오래지. 아이도 없잖아. 레날 공작도 다른 여자에 눈독을 들일 때가 됐어.”

“애초에 기세등등한 두 공작 가문의 결합에서 그런 사이좋은 커플이 나왔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거였어.”

입방아 찧기를 좋아하는 사교계의 사람들은 신이 났다. 그런 사람들이 무얼 말하고 다니든 줄리앙 레날 공작은 개의치 않았다. 그는 무엇이 중요한지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일상이었다. 아침이 오면 눈을 뜬다. 고개를 돌려 옆자리에 누운 사람을 본다. 퉁퉁 부은 눈을 하고 잠든 아내의 이마를 쓸어 만진다. 그녀를 꼭 끌어안으면, 잠에 덜 깬 그녀는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그의 품에 폭 안겨 온다. 그녀가 완전히 잠에서 깰 때까지 그녀의 쌕쌕거리는 숨소리를 들으며 조금 더 침대에 누워 있는다. 하녀를 시켜 아침에 마실 로즈마리 티를 준비해 온다. 아침잠이 많은 레아의 앞에 차를 대령하고, 커튼을 열고 눈부신 햇살이 그녀의 동그란 얼굴에 드리우는 그림자를 본다. 그녀가 감았던 두 눈을 열고 회푸른색 눈동자를 보이면 언제나처럼 그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음에 기뻐한다. 마치 아이가 눈을 뜨고 걸으면 칭찬해 주는 아빠가 된 것처럼 그녀가 아침에 일어났음에, 그리고 눈을 떴음에, 자신을 보고 웃고 있음을 칭찬한다.

“눈 떴네.”

그렇게 말하고는 줄리앙이 레아의 눈가에 키스하면 레아는 마치 아이처럼 대답한다.

“응, 나 눈 떴어.”

“잘했어. 잘 눈 떴어.”

“나 걸을 거야.”

“그래, 레아, 잘한다. 잘 걷는다.”

누가 보면 비웃겠지만 줄리앙은 아침마다 치르는 이 의식이 좋았다. 시작은 단순했다. 레아는 어렸을 때 무얼 잘해서 아버지 리버런 공작이나 어머니 리버런 공작부인에게 칭찬받아 본 적이 없다고 했었다.

“이렇게나 잘하는 게 많은데?”

줄리앙이 과장해서 놀리듯이 말하자 레아는 배시시 웃으면서 받아쳤다.

“대체 내가 뭘 잘하는데? 어렸을 땐 맨날 뭘 흘리고 다니고 잃어버리고 다니고 떨어뜨리고 다니는 통에 혼만 났어.”

“당신은 책을 잘 읽고, 초콜릿을 잘 먹지.”

“그게 뭐야?”

장난스러운 줄리앙의 말들에 이번에는 레아가 과장된 표정으로 심통 난 듯 볼을 부풀린다. 그러면 줄리앙은 웃으며 레아가 잘하는 것들에 대해 늘어놓는다.

“당신은 사람을 웃게 하지. 언제나 날 가장 웃기는 사람이 당신이야. 그리고 또, 책을 엄청나게 빨리 읽어. 그리고 요점만 파악해서 나한테 재미있게 이야기를 들려주지. 나는 어떨 땐 진짜 책을 읽는 것보다 당신이 읽고 들려주는 이야기가 훨씬 더 재밌어. 그리고 꽃을 피우지. 당신이 물을 주면 이상하게 꽃이 더 잘 자라. 또, 당신은 고양이들의 마음을 사는 데 천재적인 재능이 있어. 지난번에 봤어? 하인들 몰래 시장에 갔을 때 당신을 졸졸 따라오던 삼색 고양이? 그 녀석, 나랑도 자주 봤었는데 나한테는 통 관심도 보이질 않더니 당신이 몇 번 만져 주니 바로 당신한테 와서 고개를 비벼 대더군. 그리고 당신은 잠을 잘 자지. 아기처럼 쌕쌕거리면서 자.”

“그만해.”

레아가 부끄럽다는 듯이 줄리앙의 입을 두 손으로 막으면 줄리앙은 능청스럽게 손 말고 입으로 막아 달라면서 키스를 구걸한다. 그의 자비로운 아내는 기꺼이 자신의 부드러운 입술을 줄리앙의 입술에 맡긴다. 그리고 그다음 날부터 또다시 칭찬의 아침이 시작되었다.

“레아, 눈떴네. 눈 잘 떴어. 잘한다.”

“뭐하는 거야?”

“칭찬.”

“지금 나 눈 떴다고 칭찬한 거야?”

“응, 몰라? 원래 어렸을 때는 눈만 떠도 부모님이 칭찬해 주고 유모가 칭찬해 주고 온갖 사람들이 와서 아기가 눈을 뜨네요, 하고 칭찬해 주는 거야.”

“내가 아기야?”

열다섯, 처음 만났던 때처럼 해사한 얼굴로 서른이 넘은 지 한참 된 그의 아내가 얼떨떨한 표정을 짓는다.

“지금부터 아기 해. 내가 칭찬해 줄 테니까 엄마 아빠한테 못 들은 칭찬 듣고 무럭무럭 자라.”

“줄리앙, 나 아마…….”

산수에 서툰 레아는 한참을 머릿속에서 골똘히 생각한다. 무언가를 떠올릴 때면 그게 제 머리 위에 그려지기라도 하는 듯이 천장을 한참 바라보는 제 아내의 버릇이 귀여워 공작은 또 웃음을 터뜨린다. 그러고는 레아보다 더 빠른 셈으로 정답을 찾아내 던져 준다.

“152년…….”

“그래, 152년이나 살았어.”

“나한테 비하면 아기 맞아. 그러니까 칭찬받아.”

줄리앙은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한번 레아의 이마에 키스한다. 매일같이 눈을 뜬다고 칭찬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다. 정말이지 매일 아침 회푸른색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볼 때면 칭찬이든 상이든 뭐든 세상 전부라도 그녀의 손에 쥐여 주며 고맙다고 말하고 싶은 심정이었으니 말이다.

문제는 이런 소중한 일과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는 데 있었다.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나 옆자리를 만졌을 때 레아가 없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그냥 그녀가 좀 일찍 잠에서 깼나 보다 했다. 그래, 언젠가 배가 고프다고 몰래 나갔던 적도 있었다. 그래도 그땐 줄리앙이 깜짝 놀라 레아의 이름을 부르면 바로 달려왔었다. 이번엔 어디로 갔는지 대답 하나 없었다.

미리 잠자리에서 빠져나가지 말고 조금만 기다려 주지 싶지만 그런 걸로 서운해할 필요는 없었다. 그들에게는 내일 아침이 또 있으니까. 하지만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언제나 아침에 일어나면 레아는 그의 옆자리에 없었다. 어떤 때는 서재에서 책을 읽고 있었고, 어떤 때는 먼저 일어나 차를 마시고 있기도 했다. 어떤 날은 정원에서 꽃과 함께 있었으며, 그중 어느 때에도 줄리앙이 다가가면 환한 미소로 그를 반겨 주었다. 그래서 줄리앙은 이게 큰 문제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아침잠이 없어졌어?”

“그런가 봐.”

그렇게 말하고 웃으면 끝나는 문제였던 것이다. 일주일이 지나서야 줄리앙 레날 공작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새벽에 선잠에서 깬 그가 옆자리의 그녀를 끌어안으려 했을 때, 그때도 레아는 그 자리에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아침에만 유달리 분주한 것이 아니었다.

“왜 여기 있었어.”

놀란 마음으로 잠자리에서 벗어나 한참을 찾아다닌 끝에 아무도 없는 주방에 혼자 서 있는 그녀를 발견하고 뒤에서 끌어안자,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목이 말랐어.”

그 후로도 몇 번을 레아는 목이 말랐다. 밤이 되어 함께 잠에 들었다가 깨면 언제나 레아는 옆자리에 없었다. 어떤 때에는 1층에 있기도 했고, 어떤 때에는 비밀의 방에 들어가 무언가를 들여다보고 있기도 했다. 어떤 때는 서재의 안락의자에 누워 책을 읽고 있었고, 어떤 때에는 메인홀의 장작도 타오르지 않고 있는 난롯가에 혼자서 가만히 앉아 있기도 했다. 며칠이나 잠을 설친 끝에 줄리앙은 겨우 깨달았다. 레아가 전혀 잠을 자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레아, 무슨 고민이라도 있어? 요즘 잠을 잘 못 자?”

줄리앙의 말이 들리지 않기라도 하는 듯 그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말해 주겠지 싶어 줄리앙은 가만히 그녀의 침묵에 응대했다. 하지만 레아의 기행은 계속되었고, 그 후로도 잠자리, 잠, 밤, 새벽이 그들의 대화 속에서 언급될 때면 언제든 능숙하게 화제를 돌렸다.

“그러고 보면 요즘에도 잘 못 자? 나는 밤에는 곯아떨어져서 당신이 옆에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자네.”

줄리앙 역시 매일 밤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하고 있었다. 잠깐씩 잠에 들었다 깨면 레아는 매번 옆자리에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새벽에 깨서 아내를 찾아다닌 적이 없었던 것처럼 줄리앙은 그렇게 넌지시 레아에게 물었다. 하지만 이렇게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그의 수고가 무색하게 레아는 이렇게 대답하곤 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까 벨라 언니도 그랬어. 잠에 한번 들면 도무지 깰 줄을 모르는 거야. 신기하지. 어렸을 때 있었던 일인데 한번은 불이 난거야. 그래서 모두가 다 깨서 1층으로 내려왔는데 언니만 없는 거야. 난리가 났었지. 그런데 언니가 어디 있었는지 알아?”

“……자고 있었겠지. 자기 방에서.”

“맞아. 어떻게 알았어?”

화제를 돌리는 솜씨가 어찌나 능숙한지, 줄리앙은 언젠가 써 두었던 <레아가 잘하는 것들의 목록>의 가장 윗부분에 ‘화제 돌리기’를 넣어 두어야겠다고 생각까지 하고 말았다. 그렇게 말재주가 좋고 수다 떨기를 좋아하는 레아가 잠과 관련된 이야기만 나오면 꿀 먹은 벙어리가 되니 줄리앙으로서는 당황스럽기 이를 데 없었다.

“일기장을 훔쳐보는 건 어때?”

에드몽에게 고민을 털어놓자 그가 제시한 해결책은 우스울 정도로 저열했다.

“일기장?”

“그래, 부인이 일기를 매일 쓴다고 하지 않았나? 그걸 훔쳐보면 될 거 아니야.”

레아의 일기장은 서재의 오크나무 책상 오른쪽 한편에 놓여 있었다. 레아는 그걸 잠가 두지도 않았고 심지어 책상 서랍 안에 넣어 두는 수고도 마다했다. 그는 언제고 부인의 일기장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레아가 자신의 일기장을 그렇게 쉽게 손에 닿는 곳에 둔다는 것은 줄리앙이 봐도 상관없다는 뜻이 아니었다. 줄리앙이 보지 않을 것을 믿는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그는 매너와 예의로 무장한 레날 공작이었다. 아내의 일기장을 훔쳐본다는 것은 그의 사전에서는 어떤 이유를 붙이든 간에 용납이 안 되는 일이었다. 줄리앙은 다시 한번 정면 돌파를 시도했다.

“레아.”

라벤더 정원에 다시 여름이 찾아왔다. 여름 감기는 겨울만큼 쉽게 걸리진 않으니 레날 공작으로서는 한시름 덜었다. 레아는 이상하게도 아무리 조심을 해도 1년에 한두 번은 감기에 걸렸다. 그럴 때마다 줄리앙은 조마조마한 심장을 부여잡고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벌써 몇 생 전의 일인데도 아직도 레아가 감기만 걸리면 이렇게 과민반응인 스스로가 싫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겨울보다 여름이 좋았다. 리버런 섬처럼 넓게 펼쳐진 숲은 아니었지만 레날의 영지의 라벤더들 역시 여름이 오면 리버런 저리 가라 할 만큼 아름다운 색을 자랑하며 제 향을 내뿜었다. 그 라벤더 무더기 사이에 서 있는 가느다란 레아의 뒷모습은 어쩐지 오늘은 처연하게까지 느껴졌다.

“놀랐잖아.”

분명 몇 번이나 불렀는데도 들은 적이 없다는 듯이 레아는 화들짝 놀라며 그의 부름에 응답했다.”

“얘기 좀 할까?”

“무슨 얘기할 게 있어?”

“무슨 일이 있는지 이야기해 줘. 안 그러면 나도 같이 괴롭잖아. 도와주고 싶어.”

검은 눈 가득 다정함을 담아 자신을 바라보는 남편의 눈을 보며 레아는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저 눈에 슬픔이 어리는 걸 보려고 이러는 것은 아니었는데. 하지만 자신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도와줄 수 있는 게 없어. 아무 일도 없으니까.”

“잠을 못 자고 있잖아. 얼굴이 핼쑥해졌어.”

“별일 아니야. 나이 들어서 그런가?”

“그냥 이야기해 줘. 응?”

레아는 주특기인 화제 돌리기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정원을 나갔다. 마치 줄리앙이 투명인간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한참 후 절망한 줄리앙이 레아를 쫓아 방으로 들어가자 레아는 단 한마디를 던졌다.

“그 얘기 계속할 거면 난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퉁명스러운 말투가 아니었다. 그래서 화도 나지 않았다. 절실함이 담겨 있었다. 제발 이해해 달라는 몸짓이었다. 줄리앙은 긍정의 대답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알았어.”

우스웠다. 싸우고 나서 침묵하는 건 자신이었고, 그걸 못 견뎌 하던 것은 레아였던 처음의 인생을 생각해 보았다. 이제는 레아가 그 수법을 쓰고 있었다. 다행히도 줄리앙은 침묵을 견디지 못하는 성정은 아니었다. 사실 줄리앙에게 이런 신경전은 일도 아니었다. 그는 이런 것에 기분이 상하지도 않았다. 다만 레아가 걱정되었다. 저렇게까지 할 사람이 아니었는데, 무엇이 그렇게 괴로워서 자신에게까지 말 못 하는 것인지, 저러다 몸을 해치지는 않을지 하는 것이 말이다.

그다음 날 그는 의사를 찾아갔다. 의사는 한 시간여에 걸친 검진 끝에 아무 이상도 없다는 소견을 남기고 사라졌다. 점성술사도 찾아갔다. 큰 도움은 안 되었다. 카리안은 이제 죽고 없었지만 레날의 영지 어딘가에 숨어 있는 마법사들을 찾아가 묘약을 사 오기도 했다. 하지만 복숭아의 경우에 그렇듯 마법사들이 만들어 낸 장난감이란 큰 도움은 안 될 것이었다. 그는 차마 레아에게 그 약을 먹이지는 못했다. 마지막으로 심령술사를 불렀을 때 잘 견디던 레아가 드디어 큰 목소리를 냈다.

“제발! 줄리앙! 난 병에 걸린 것도 아니고 귀신에 씐 것도 아니고 우울한 것도 아니야! 제발 날 좀 내버려 둬!”

결혼하고 처음으로 난 큰소리였다. 그랬다. 그렇게 레날 공작 부부 사이가 좋지 않다는 소문이 퍼지게 된 것이다.

* * *

“그럼 여태까지 한 번도 싸우질 않았단 말이야?”

에드몽이 물었다.

“응.”

“우리는 하루가 멀다 하고 싸우는데 말이지.”

“부부 사이에 싸울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줄리앙의 말에 에드몽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사실 이렇게 말하는 줄리앙도 첫 결혼에서는 일주일이 멀다 하고 싸우긴 했었다. 한번은 레아도 줄리앙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베스 언니가 결국 라넬 자작과 헤어진다는 거 알아?”

“헤어진다고? 결혼했는데?”

왕국 법에서 결혼한 부부가 법적으로 갈라설 방법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결혼을 유지하면서도 서로 다른 공간에 살거나, 영원히 서로를 보지 않고 사는 부부는 많았다.

“완전히 헤어지는 건 아니지만, 그냥 여름 별채를 개조해서 언니와 아이들은 그곳에서 따로 살기로 했대.”

“사이가 좋은 거 아니었어? 정략결혼이 아니라 진짜 사랑해서 결혼한 거라고 했었잖아.”

줄리앙이 한쪽 눈썹을 올리며 묻자 레아는 고개를 저었다.

“사랑이야 엄청 하지. 두 사람 성격이 너무 달라서 문제야. 완전히 정반대거든. 지난번에 우리 집에 놀러 온 것도 사실 그 이야기를 하려던 거였어.”

“그랬군.”

“당신이랑 나도 사실 그렇잖아. 어떻게 우린 안 싸웠던 거야? 당신이 다 받아 줘서 그런 거겠지만……. 대체 성격이 다른 걸 어떻게 해결했어?”

레아도 결국 줄리앙에게 그렇게 물어봤었다. 두 사람은 정말이지 신기할 정도로 싸우지 않았다. 완전히 생각하는 방식이 다른 두 사람이었는데 말이다.

“내가 알았으니까.”

줄리앙의 대답은 간단했다.

“뭘? 내가 죽는다는 걸?”

레아가 생각하기엔 그랬다. 두 사람의 싸움이 결국엔 레아의 죽음을 불렀고, 그것이 씻을 수 없는 죄책감을 줄리앙 레날 공작의 가슴속에 남겼기에, 안간힘을 다해 줄리앙이 제 성격을 죽이고 살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레아는 줄리앙에게 조금 미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레아의 그런 추측을 듣고 줄리앙은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레아, 그걸 다 참고 살았다간 아마 몇 년 안에 애간장이 녹아 죽어 버렸을 거야.”

“죽을 만큼 힘들었어?”

동그란 눈이 강아지처럼 축 처져서는 줄리앙을 바라보았다. 줄리앙은 다시 한번 웃으며 말했다.

“레아, 사람이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해?”

“글쎄.”

그의 사랑스러운 아내가 눈알을 또르르 굴렸다. 레아 역시 세 번, 아니 네 번째 인생을 살고 있었다. 이제 인간군상에 대해 어느 정도는 식견이 있다고 자부할 만했다. 레아가 생각하기에 사람은 변하지 않았다. 모습이 변할 수도 있고 생활 습관을 바꿀 수도 있었다. 노력해서 인격을 수양할 수도 있고, 남들이 보는 앞에서만 새로 태어난 듯 위장하고 연기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사람의 본질은 영원히 변하지 않았다. 레아의 생각엔 그랬다. 그녀 자신도 언제나 다름없었고, 그녀의 남편 역시 그랬으니 말이다. 언제나 따뜻하고, 다정하고, 레아를 많이 생각하고, 조용히 배려하는 줄리앙이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사람은 변하지 않아.”

그의 답 역시 레아의 답과 같았다.

“죽었다 살아나도?”

레아가 물었다.

줄리앙은 어깨를 으쓱하고 다시 대답했다.

“직접 임상 실험해 본 결과가 여기 둘씩이나 있지.”

레아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아직도 의문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렇다면 줄리앙 레날 공작은 어떻게 성격을 바꾸었단 말인가?

“그런데 왜 당신이랑 나는 처음에 그렇게 싸웠을까? 그리고 왜 이제는 이렇게 사이가 좋을까?”

화롯가의 장작이 눅진한 소리를 내며 타고 있었다. 난롯가 위의 장식장에는 레아가 만들어 놓은 어설픈 인형 몇 개가 놓여 있었다. 레아는 이 인형을 만들겠다고 유모에게 손바느질을 배우다 말고 수십 번을 바늘에 찔려 뭇 사람들(주로 줄리앙)의 안타까움을 샀다.

난롯가 옆 카펫은 푸른색과 회색 실을 엮어 만든 멋진 무늬가 일품이었지만 귀퉁이가 좀 타 있었다. 얼마 전에 난롯가에서 책을 읽겠다며 촛대를 들고 이리로 나오다가 그만 레아가 카펫 위로 촛대를 떨어뜨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카펫 위로 멋진 불길이 일었다. 줄리앙은 놀라지도 않고 얼른 마시던 물을 부어 불길을 잠재우고 집사 알론소를 불러 뒷일을 해결했다. 메케한 연기에 콜록거리는 레아를 위해 하녀장 마리아를 시켜 창문을 열어 환기를 했다. 차가운 공기에 레아가 감기가 들세라 줄리앙은 바로 따뜻한 차를 대령했고, 푹신한 벨벳 천으로 만든 따뜻한 겨울 잠옷으로 갈아입혀 연기가 미처 올라가지 못한 손님용 침실에 겨울용 시트를 새로 깔아서 제 아내를 잠재웠다. 레아의 남편은 아주 능숙한 보모였다.

“내가 이제 당신을 아니까.”

사고뭉치인 그녀를 돌보는 데는 누구보다 선수인 남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결국, 당신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문제였어. 내가 너무 당신을 몰랐거든.”

줄리앙은 레아가 테이블 모서리 근처에다 아무렇게나 둔 유리컵이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게 슬쩍, 그 위치를 테이블 한가운데로 옮기며 말을 이었다.

“당신은 어떤 일은 아주 완벽히 잘하는 사람이야. 어떤 일에는 놀랍도록 미숙하고. 다른 모든 사람처럼 말이야. 그리고 늘 공상에 빠져 있는 사랑스러운 여인이고. 생각이 많아 언제나 정신이 다른 데로 가 있는 탓에 주의력은 좀 없지. 그래서 일상생활에서는 가끔 실수하고, 나처럼 누군가 당신의 비서 역할을 해야 하기도 하지. 내가 그걸 잘하면 되는데, 괜히 당신한테 화를 냈어. 내가 화를 내지 않으면 되는 일이야.”

“사람 일이 어떻게 그렇게 돼?”

레아는 그렇게 말하고 웃었다. 고마움과 경애가 뒤섞인 사랑스러운 미소였다. 그녀의 남편은 다시 말했다.

“그래도 그렇지 너무 심할 때는 한 템포 쉬고 당신에게 말하지. 레아, 컵은 테이블 한가운데 놓는 것이 좋을 것 같아. 하지만 그런다면 내 아내가 아니지. 그렇게 주의력이 깊은 건 레아의 탈을 쓴 복숭아일 거야. 그러면 당신은 샐쭉 웃고는 착하게도 앞으로는 주의할게요, 라고 하잖아. 그리고 또 컵을 떨어뜨리고말고. 그게 당신이야. 나는 그런 당신을 사랑하고.”

그랬다. 줄리앙은 그런 레아를 사랑했다. 화가 나도 자신이 차근차근 말하기만 하면 쉽게 용서해 주는 레아, 포옹을 좋아하는 레아, 언제나 덤벙대서 한눈을 팔 수 없는 레아를 말이다.

에드몽이 돌아간 후, 그는 다시 한번 레아에게 다가가기로 했다. 큰소리치고 화를 냈다면, 그 이유를 알면 되었다. 그는 그냥 덮어 두고 넘어가는 사람이 아니었다. 수백, 수천 년 동안 언제나 그는 문제를 해결해 낼 방법을 찾기를 중단하지 않았다.

“레아, 나는 강하고 언제나 당신을 포기하지 않을 거야.”

레아의 손을 잡고 줄리앙이 이렇게 말하자, 레아는 무슨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하냐는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소리야?”

“당신이 어떤 말을 해도 내가 들어 줄 수 있다는 거야. 심령술사를 부르지도 마법진으로 영을 소환하지도 않을게.”

“아까 심령술사가 메인홀에 그리고 있던 게 마법진이었어?”

레아는 푸흡― 하는 소리를 내며 웃음을 터뜨렸다. 오랜만에 보는 아내의 순순한 웃음에 레날 공작 역시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그래. 레아. 난 알아. 당신은 강한 여자잖아. 나 없는 인생을 버티고 다시 내게 온 내 사랑, 한 번도 나를 사랑하는 일을 중단한 적 없는 사람이잖아. 지금이 아니라도 좋아. 언제든 말해 줘. 다시 당신과 함께하는 아침을 맞고 싶어.”

레아는 그 이야기를 듣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곱씹는 듯한 무표정이 무언가 커다란 스트레스를 감당하는 듯한 무거운 표정으로 변하더니, 아주 맵거나 쓴 것을 먹은 아이의 표정처럼 오묘하게 변하다가 일그러졌다. 줄리앙은 이런 때의 레아를 알았다. 그녀의 눈물은 이렇게 참고 참다가 훅, 어린아이처럼 서럽게 터지곤 했다.

줄리앙은 레아의 옆에 무릎 꿇고 앉아 그녀를 가만히 안아 주었다. 레아는 이것이 좋았다. 남편은 무슨 일이냐고 호들갑을 떨며 물어보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녀가 울고 있으면 말없이 다가와 그저 끌어안아 주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이렇게 몇 번을 찾아와 왜 그러냐고 물을 때까지 자신이 그를 괴롭힌 것이었다.

“미안해.”

“미안할 거 없어.”

“미안해. 내가…….”

한번 터진 울음은 잦아들 줄을 몰랐다. 숨을 몰아쉬며 엉엉 울다가 결국엔 엉망진창이 된 얼굴을 두 손으로 감추는 레아를 보자 안쓰러운 마음 한편에 사랑스럽다는 생각이 샘솟았다. 그는 서른이 넘은 지 오래인 그의 아내의 곁에 앉아 이제 어린아이를 어르듯 말했다.

“그래, 이제 말해 줄 거야?”

“뭘?”

조금만 더 타이르면 모든 것을 다 말할 듯 레아의 목소리는 어느새 누그러져 있었다.

“왜 그렇게 잠을 못 자는지.”

“……어떻게 잘 수 있어, 당신은? 나는 잠을 못 자겠어.”

“왜?”

“이게 다 꿈일까 봐.”

줄리앙이 레아의 볼을 살짝 꼬집고는 그녀에게 물었다.

“아파?”

“안 아파.”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그렇게 말하는 레아의 볼을 잡아당기며 줄리앙이 대답했다.

“그럼 꿈이네.”

“당신이 아플 만큼 세게 꼬집지 않잖아.”

볼멘소리를 하는 레아의 이마에 키스하며 줄리앙은 말했다.

“그래. 아플 만큼 세게 꼬집지 않는 나를 알잖아. 이게 꿈이 아닌 걸 알잖아. 알면서 왜 그래. 이건 우리가 두 발 디디고 살아가는 현실이야.”

“모르겠어. 아침에 꿈에서 깨어나면 당신이 없어져 있을 것 같아. 당신이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릴 것 같아, 옆에 있는 게 너무 괴로워. 잠을 못 자겠어. 이게 다 꿈이고 당신이 죽은 게 현실일까 봐 무서워. 아니라는 걸 아는데, 그래서 당신이 잠에 들면 당신 숨소리를 느끼고, 코에다 손을 대 보고 내 볼을 꼬집어 보고, 당신 입술에 입을 맞춰 보는데.”

“그 모든 걸 하는데 내가 안 깼어?”

레아는 눈물을 한 손으로 훔치며 웃었다.

“응, 어떻게 그렇게 잘 자는 거야? 나는 한숨도 못 자는데.”

줄리앙은 레아의 손을 치우고 제 손으로 레아의 볼에 말라붙은 눈물들을 닦아 주며 물었다.

“왜 나한테 말 안 했어?”

“말도 안 되잖아.”

“뭐가 말이 안 돼?”

“줄리앙, 당신은 멀쩡해 보이는데. 수백 번을 겪은 당신이 멀쩡한데, 고작 당신이 죽는 걸 한 번 본 내가 이 꼴이라는 게.”

자신이 꼴사납다는 듯이 레아는 작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제 줄리앙이 레아를 안아 줄 차례였다. 스스로를 처량하게 생각하지 않도록 따뜻하게 말이다.

이상했다. 레아는 줄리앙에게 안길 때마다 꼭 어린 시절 선물로 받은 제 몸보다도 커다랗던 곰인형에게 안겨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의 가슴팍은 탄탄했고, 팔은 딱딱했다. 몸 어디 한구석, 부드럽고 물렁한 데가 없는데도 그의 품에 안겨 있자면 곰인형에게 안겨 있듯 폭신한 느낌이 들었다. 안전가옥 안에 들어가 있는 듯한 기분 말이다.

“레아, 나도 그랬어. 나도 죽을 만큼 힘들었어.”

레아를 끌어안은 채 줄리앙이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도 그랬어?”

레아가 물었다.

“응.”

줄리앙이 대답했다.

“그런데 이제 괜찮아?”

“맞아. 이제 괜찮아. 여러 번 반복하고 겨우 괜찮아졌어. 이제 그냥 다 괜찮아.”

레아가 숨까지 몰아쉬며 겨우 멈춘 눈물을 다시 터뜨렸다. 이번에는 자신이 아니라 줄리앙을 위한 눈물이었다. 그녀로서는 줄리앙에게 이 모든 것들이 괜찮아지기까지의 그 과정이 얼마나 힘들었을지를 가늠할 능력이 없었다. 우는 그녀의 등을 토닥거리며 줄리앙이 물었다.

“레아, 당신 나랑 있는 게 행복하기는 한 거지?”

레아는 말문이 막혔다. 어떻게 그런 질문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녀는 겨우 입을 열어 대답했다.

“행복해. 세상에서 지금이 제일 행복해. 너무 행복해서 문제야.”

줄리앙이 레아를 다시 꼭 끌어안고 말했다.

“상담해 줄 사람을 찾을까? 심령술사는 아녀도―.”

레아가 그의 말을 자르고 대답했다.

“싫어. 그리고 뭘―.”

이번에는 레아의 말을 자르고 줄리앙이 그 말을 받아 이었다.

“뭘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지?”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배시시 웃은 것은 줄리앙의 잘생긴 검은 눈이 먼저였다. 조금 전까지 레아의 눈에서 흐르던 눈물이 그녀의 눈가에 고여 있다가 웃음과 함께 또르르 흘렀다. 줄리앙이 그 눈물의 결을 따라 레아의 볼에 입을 맞추었다.

“레아, 그럼 나한테 말할래?”

“당신한테?”

“그래, 나 말고 누구한테 말하겠어.”

“맞아. 당신 말고 내가 누구한테 말하겠어.”

두 사람은 침대로 자리를 옮겼다. 레아는 늘 침대의 왼쪽에서 몸을 옆으로 하고 잤다. 그것이 그녀의 버릇이었다. 줄리앙 역시 언제나의 버릇이 있었다. 그녀의 등에 제 등을 맞대고 반대편에서 옆으로 누워 잠자리에 드는 것이 그의 버릇이었다. 하지만 그는 잠시 레아를 위해 자신의 습관을 포기하기로 했다. 그 포기는 그녀를 위한 모든 포기들이 그랬듯 아주 쉬웠다.

그날뿐만이 아니었다. 이제 그는 그녀의 등에 제 등을 맞대는 대신 그녀를 제 품에 꼭 끌어안고 잠들었다. 며칠은 불편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레아는 간혹 얕은 잠에서 깨곤 했다. 그러면 자신의 몸을 감싸고 있는 따뜻한 열기와 약간의 푹신함이 느껴졌다. 줄리앙이 언제나 레아의 곁에 있음을, 레아는 눈을 뜨기도 전에 알 수 있었다.

레아가 잠에서 깨 몸을 뒤척인 어느 새벽이었다. 줄리앙 역시 옅게 잠이 든 터라 그녀의 뒤척임에 잠에서 깼다.

“레아.”

줄리앙이 말했다.

“줄리앙.”

레아가 대답했다.

“키스할까?”

“그래.”

레아가 몸을 돌려 줄리앙과 얼굴을 맞대었다. 그의 다정한 눈에 제 눈을 맞추었다. 줄리앙이 그녀의 이마에, 볼에, 그리고 입술에 차례대로 그의 입술을 가져다 댔다.

“나는 안 물어봤었지. 줄리앙, 궁금해. 당신은 내 옆에서 행복해?”

레아가 물었다.

“그럼. 행복하고말고. 우리는 영원히 행복할 거야. 알아?”

줄리앙이 말했다.

“응, 알아. 그리고 행복하지 않아도 괜찮아.”

레아가 말했다.

“뭐가 괜찮아?”

“당신이 옆에 있으면 행복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러고는 바로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시 잠이 들었다. 그들은 때때로 행복했으며 가끔은 불행했다. 그러나 그 어떤 날이든 언제고 영원히 서로의 곁을 지키며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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