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화 〉내기
“뭐라고요?”
내 말에 자애로움을 가장하던 성녀의 표정이 무너졌다.
누군가가 자신의 말을 거부한 것에 대한 거부감이 그 빈자리를 채워가고 있었다.
아마도 성녀가 된 이후로, 그녀의 부탁을 이렇게 단칼에 거절한 자는 없을 지도 몰랐다.
“다시 말씀 드리죠. 그대로 물러나지는 못하겠습니다.”
나는 자존심이 상한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는 성녀에게 다시 한 번 확인 사살을 가했다.
등장하던 순간부터 은은한 미소를 머금고 있던 성녀의 입술이 삐죽 튀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도대체, 이러시는 이유가 뭡니까? 당신의 말대로 왕국은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국가. 당신이 데메테르 여신을 부정할 자유가 있듯, 저 하나를 보기 위해 이 수많은 이들이 모이는 것 또한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성녀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며 나에게 그렇게 말했다.
나는 그런 그녀를 보며, 속으로 웃음을 흘렸다.
아무리 사람들의 떠 받들어주는 성녀라고는 하나, 그녀의 나이 고작 스물.
나 같이 산전수전 다 겪은 노땅을 상대하기에는 그녀는 여러모로 부족한 점이 많았다.
당장 그녀는 스스로의 사소한 감정 하나도 제대로 컨트롤 하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이거,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리겠는데? 그나저나 얘는 내 얼굴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은 건가?’
나는 성녀를 보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혹시나 싶어 나름의 끼를 분출해 보았지만, 오히려 미소가 또 그녀의 기분을 상하게 만든 모양.
성녀의 고운 미간이 구겨지는 것이 보였다.
매력 보정이라는 사기 급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는 하나, 상대하는 사람마다 먹히는 정도가 다른 듯싶었다.
얼굴이 아무리 잘생기고 매력적이라고 해도, 모든 여자가 쉽게 다리를 벌리는 것은 아닐 테니까.
‘그거야, 뭐 천천히 확인해 보면 될 일이고…’
나는 기분 나쁜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는 성녀를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작가로서 성녀를 따 먹을 나름의 계획이 세워졌기 때문이었다.
“성녀 님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모이는 것은 자유이나, 그것 때문에 역병이 더욱 번지는 것은 어쩌실 생각입니까?”
“…..”
내 말에 성녀가 허를 찔렸다는 표정으로 인상을 구기는 것이 보였다.
아무리 내가 떨어진 세계가 중세를 기반으로 하는 판타지라고는 하나, 이곳의 사람들도 상식이라는 것은 있었다.
애초에 역병이 사람을 통해 옮는다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면, 도시의 출입을 통제하는 강수 따위는 두지도 않았을 테니까.
“…여신님이. 데메테르 여신님께서 모두를 보호해주실 겁니다.”
나는 성녀의 말에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명백한 비웃음.
나는 물론이고, 직접 여신을 운운한 그녀도 자신의 말이 억지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수많은 군중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수는 없기에 억지를 부리는 것이리라.
“글쎄요. 아무리 여신의 가호가 있다지만, 굳이 이렇게 모여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있을까요? 저 같이 미천한 자가 여신님의 생각을 알 수는 없겠지만, 여신님도 이런 무모한 짓을 행하는 인간들을 보면 골치가 아프실 텐데요.”
“이런 무엄한 자가! 어디서 함부로 여신님을 운운하는가!”
성녀의 옆을 지키고 있던 기사 중 하나가 칼을 빼어 들고는 날 위협하듯 소리를 쳤다.
하지만, 내 신분을 모르는 이상 저들은 절대로 나를 해할 수 없었다.
이미 그 사실을 나에게 들킨 이상, 그들의 위협은 나에게 한 편의 연극으로만 보일 뿐이었다.
“당신은….당신이라고, 무슨 방법이 있습니까?”
성녀는 주먹을 꼭 쥔 채로 나를 노려보며 그렇게 말했다.
메시지를 반박하기 어렵다면, 그 메신저를 공격하라.
성녀는 꽤나 영악하게도 내 자격 자체를 묻고 있었다.
“세상에 불만을 떠드는 자들은 많습니다. 하지만 아무런 대안도 없이 불만만을 제기하는 것은 문제의 해결 방법이 아닙니다. 오히려 다수의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불순분자일 뿐이지요.”
“불순분자라…?”
나는 성녀의 말 꼬투리를 잡으며 그녀를 바라봤다.
논리적인 척 말을 하고는 있었지만, 아직 어리기 때문인지 확실히 감정 컨트롤이 제대로 되지 않는 모양.
성녀는 자신이 신분에 맞지 않는 과격한 단어를 사용했다는 것을 그제야 인지하고는 표정을 굳히는 중이었다.
“뭐, 저도 성녀님의 말씀에는 어느 정도 동의를 합니다.”
하지만 나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굳이 그녀의 말 실수를 붙잡고 물고 뜯지는 않겠다는 의미.
성녀의 눈에 고마움이 아닌 의아함이 스쳐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제게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있다면, 어쩌시겠습니까?”
“….뭐라고요?”
성녀는 나를 향해 놀란 표정으로 그렇게 물었다.
아니 그저 놀라움이라는 표현만으로는 그녀의 표정을 설명하기에 부족했다.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경악, 그 자체.
성녀에게 나는 여신의 은총을 받은 자신조차 해결하지 못할 일을 해결해 보겠노라 자신 있게 선언한 상대였다.
‘이 정도면 강한 인상을 박는 것은 성공인가?’
나는 성녀의 경악한 얼굴을 감상하며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에게도 딱히 이 상황을 해결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눈치 채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애초에 역병을 진정시킬 수 있다면, 성녀씩이나 되는 여자가 이런 쇼를 펼칠 이유가 없을 테니까.
“그 말, 책임질 수 있습니까?”
성녀는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쏘아보며 그렇게 말했다.
나는 그녀의 말에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완벽히 해결 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지만, 어차피 주사위는 던져진 상황.
굳이 자신감 없는 모습을 보여서 점수를 깎아먹을 필요는 없었다.
“저 남자가 지금 뭐라는 거야? 이 역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
“말도 안 돼! 의사들도 다 도망친 판국에…”
판타지 세계라고 의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치유 마법이 존재하기는 했지만, 그 마법을 다룰 수 있는 이는 소수.
당연히 평민들은 사제들의 치유 마법을 받는 것 자체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이곳에도 의사는 존재했다.
물론 내가 살던 한국처럼 그 입지가 높은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평민들 보다는 조금 더 나은 위치.
그럼에도 그들은 역병이 번지자 마자, 가장 먼저 도시를 탈출했다.
왕국에서 역병이 번진 도시를 어떻게 처리하는 지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이 바로 의사들이었으니까.
“네. 책임지겠습니다. 제가 니스에서 이 더러운 병마를 쫓아내겠습니다.”
나는 성녀를 보며 그렇게 대답했다.
순간, 성녀와 내 대화를 들으며 소근거리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더욱 커지기 시작했다.
“……그 말을 어떻게 믿죠?”
“제 목이라도 걸라면 걸겠습니다.”
나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날 향해 묻는 성녀에게 그렇게 답했다.
아무것도 없는 내가 대중들을 설득시키기 위해서 걸 수 있는 건 목숨 밖에 없었으니까.
“흥미롭네요. 당신.”
성녀는 정말로 흥미로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나는 성녀의 말에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제 겨우 내가 생각한 목표의 시작점에 섰을 뿐이다.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았으니, 이제는 제대로 약을 한 번 팔아봐야 하는 상황.
“대신!”
나는 성녀를 보며 큰 소리로 그렇게 외쳤다.
성녀처럼 목소리를 증폭시키는 마법을 사용할 수는 없었지만, 그 자리의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도록.
“….대신?”
“제가 목을 걸었으니, 성녀님도 뭔가를 걸어 주셔야 공평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성녀를 보며 도발적인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애초에 성녀를 이 말도 안 되는 도박에 끌어들이는 것이 내 계획.
어쩌면 성녀씩이나 되는 여자를 낚기 위해서는 내 목을 거는 정도는 싸게 먹히는 것일지도 몰랐다.
“무엄하오! 어디 성녀님께 그런 망발을! 그리고 시민들의 목숨이 걸린 일에 내기라니, 당치도 않은 소리를!”
성녀를 호위하는 기사가 나를 향해 그렇게 외쳤다.
논리적으로 뚫을 수 없을 만큼 완벽한 정론.
하지만 나는 기사의 말에 반박하는 대신, 성녀를 향해 묘한 미소를 계속 보일 뿐이었다.
원래 사람이란 동물은 논리로만 움직이지 않는 법이니까.
가끔은 내가 질 것이라는 것을 뻔히 알아도, 상대의 숨겨진 패를 보기 위해 달려드는 것이 사람의 본성이었다.
‘물론, 저 여자는 자기가 질 거라는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겠지만.’
나는 넘어올 듯 말듯한 성녀의 표정을 살피며, 계속해서 그녀를 향해 같은 미소를 보이고 있었다.
‘쫄려? 쫄리면 뒤지시던가?’
“좋습니다.”
“성녀님!”
그리고 결국, 내 작전은 성공을 거뒀다.
당장 성녀 주변의 기사들이 그녀를 말리고 나섰지만, 이미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성녀는 물러나지 않았다.
겨우 자신의 호위 기사들 따위의 말에 물러나는 모습을 보였다가는, 그야말로 그녀의 존재가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 없었으니까.
“이 분 말대로라면, 그는 니스를 구한 영웅이 되는 겁니다. 그런 큰 일을 해낸 영웅의 부탁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들어 드려야죠.”
성녀는 그렇게 기사들에게 끼어 들지 말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는 성녀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나 따위가 절대로 이 역병을 이겨낼 수 없을 것이라는 확신.
그리고 그 불가능한 일에 도전하는 어리석지만 용감한 자를 바라보며 느끼는 아주 조금의 감탄과 스스로의 우월감.
나는 성녀의 얼굴에 떠오른 명확한 감정의 소용돌이를 보며 입 꼬리를 말아 올렸다.
‘이제야, 진짜 얼굴을 보여주네?’
나는 점점 더 그녀를 굴복시키고 싶다는 욕구를 느끼며, 광장에 모인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이 병의 대표적인 증상은 설사입니다. 증상이 없는 분들은 가급적이면 집에 머무르십시오. 설사를 하는 분들은 모두 제가 있는 여관 [로엔하임]으로 찾아오시면 됩니다. 질병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나는 대중을 향해 그렇게 소리쳤다.
거기다 손 씻기와 물을 끓여 먹는 것에 대한 중요함, 그리고 증상이 나타난 환자와 화장실을 공유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린 나는 슬쩍 성녀를 돌아보았다.
성녀의 입가에 비웃음이 한층 더 깊어 지는 것이 보였다.
아마도 내가 원론적인 이야기만을 했기 때문인 모양.
‘흐흐. 나중에도 그렇게 웃을 수 있는지 보자고, 세라양.’
나에게 그녀는 더 이상 성녀도 뭣도 아니었다.
그저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제 멋대로 살아 온 안하무인의 스무 살 여자.
그것도 내가 꼭 따먹어야 할 여자에 지나지 않았다.
**
“미친 새끼! 뒤지려면 혼자 뒤질 것이지, 왜 나까지 끌어들여!”
광장에서 벗어난 직후, 여급이 나를 향해 신경질을 부리기 시작했다.
마치 로또를 주운 줄 알았는데, 똥을 밟은 것 같은 표정으로 나를 보는 여급의 모습에 나는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서방님이라며? 우리 이미 운명 공동체 아니었나?”
나는 여급을 향해 능글맞은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지랄. 내가 왜 너랑 운명 공동체야? 이제 겨우 며칠 본 사이인데.”
너무나도 쉽게 안면을 바꾸는 여급의 모습에, 나는 허탈함을 넘어 신선함까지 느끼는 중이었다.
내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자, 여급이 인상을 구기며 스스로의 머리를 헝클었다.
“아아! 몰라. 네가 책임져! 혹시라도 엿 되면, 나는 상관 없는 거야, 알지?”
그제야 내 뒤에 남작이 있다는 것을 상기시킨 여급이 그렇게 선을 그었다.
어쨌거나 성녀와의 내기가 끝날 때까지는 나에게 협조하겠다는 소리.
나는 그 제안이 충분히 마음에 들었기에, 여급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게 하도록 하지. 절대로 네게는 피해가 안 가게 하겠다.”
나는 여급에게 그렇게 말하며 안심을 시켰다.
“지랄 좀 하지마! 똥 싸지르는 새끼들이 다 내 여관에 기어오게 생긴 것부터가 피해막심이거든?”
“….어차피 손님도 없는 여관이잖아?”
“….그건 그거고. 앞으로도 손님 없을 거라는 보장 있어?”
나는 여급에게 질병이 퍼졌을 때, 호텔 관광 업계가 어떻게 박살이 나는 지를 설명할까 하다 그만두었다.
어차피 그 말을 한다고 여급에게 위로가 되진 않을 테니까.
“그럼, 우리 관계는 딱 거기까지인 건가?”
나는 여급을 향해 다소 아쉬운 표정으로 그렇게 물었다.
“당연하지. 성녀 앞에서 여관 이름까지 거론되지만 않았어도 너 같은 건 당장에 아웃이거든!”
아무래도 여급이 내기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 주는 이유는 자신의 여관이 공식적으로 언급이 되었기 때문이었던 모양.
물론, 내가 의도적으로 그녀의 여관 명을 밝힌 것이긴 했지만 너무나 내 생각대로 반응하는 여급의 모습이 재미있게 느껴지기만 했다.
“아, 이제 오십니까?”
여급과 내가 그렇게 투닥 거리며 여관에 다다르자, 여관 앞에서 기다리던 남자가 달려와 나에게 그렇게 말을 걸었다.
“….어? 이 아저씨는?”
확실히 장사를 하는 사람답게 여급은 단번에 그 사람의 얼굴을 알아봤다.
나는 여급이 기억력 하나는 훌륭하다는 것에 감탄하며, 남자를 향해 미소를 보였다.
“네. 이제 환자들이 이쪽으로 올 겁니다. 도와주시겠습니까?”
“당연하죠. 선생님 덕분에 살았는데, 제 목숨이 다할 때까지 돕겠습니다.”
남자는 내 손을 꼭 붙잡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랬다.
남자는 얼마 전, 여관 문을 열고 도움을 청하던 그 병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