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화 〉내기의 보상
성녀라고 역병이 퍼진 2주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매일 같이 정해진 시간 신전 앞으로 나와서 버프를 걸었고, 순진한 니스의 시민들은 그것이 여신의 은총이네 기적이네 떠들며 그녀를 떠받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던 환자들이 여관만 들어갔다 하면 멀쩡히 걸어 나오는 모습을 목격하며, 니스 시민들도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성녀 명성이 다 죽지는 않았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녀의 기도 시간에는 신전을 찾는 시민들이 많았다.
그만큼 데메테르교는 왕국에서 확고한 위치를 가지고 있었고, 수 많은 신도들을 보유한 종교였다.
재미있는 것은 그 성녀의 버프를 받는 이들 중 환자들을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었다.
‘하긴 이 도시에 더 이상 환자는 없으니까.’
나는 멀리서 기도, 아니 정확히는 버프를 걸고 있는 성녀를 바라봤다.
모종의 방해가 있을 거라고 여겼지만, 놀랍게도 모든 환자를 치료할 때까지 어떠한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조금만 머리를 굴려보면, 왜 아무 일도 없었는지는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완치자가 나오기 전이라면 모르되, 성녀가 음험한 계획을 세운 것은 이미 완치자가 나온 상황.
나나 여관에 무슨 문제가 생긴다면, 사람들의 의심이 향할 곳은 당연히 데메테르교 밖에 없었다.
성녀와 나의 내기는 은밀한 곳에서 주고 받은 밀약 같은 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대놓고 공언한 것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신전의 성기사들도 그녀의 말을 치기 어린 억지라고 생각할 뿐, 실행에 옮기는 미친 짓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호오? 도망을 치시겠다?”
순간, 나와 눈이 마주친 성녀가 인상을 구기며, 신전 안으로 도망치려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눈 앞의 먹이 감을 그냥 보내주는 짐승은 없는 노릇.
“성녀님! 성녀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일부러 큰 목소리로 성녀를 부르며, 사람들을 헤집고 나아갔다.
어쨌거나 성녀의 기도 시간.
주위는 정숙하다는 말이 어울릴만큼 조용했고, 내가 만든 소란에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나에게로 몰렸다.
“성자님이다!”
“명의께서 오셨다!”
아마도 기도를 나온 사람들 중에, 여관에서 치료를 받은 이들도 있는 모양.
나는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계속해서 성녀를 불렀다.
“세라 성녀님, 제 목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성녀님!”
결국, 내 목소리를 외면하지 못한 성녀가 걸음을 멈춰세웠다.
그대로 신전 안으로 들어갈 수도 있었지만, 그래서야 모두가 그녀를 도망쳤다고 비난할 테니까.
나는 사람들이 비켜준 길을 통해 신전의 입구로 나아갔다.
“성녀님. 혹시라도 귀가 안 좋으십니까? 제가 귀를 뚫어드리는 약도 만들 수 있는데…”
나는 목소리를 죽여, 성녀에게 그렇게 소근거렸다.
대놓고 자신을 놀리는 말에, 성녀의 이마에 핏줄이 불거지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성녀는 역시 성녀.
그녀는 어느 새, 인자함이라는 가면을 쓰고 나를 향해 미소를 보이고 있었다.
“이런, 전에 오셨던 그 의사 선생님이시군요.”
“아, 저 의사 같은 거 아닙니다. 그냥 약초에 대해 얕은 지식이 있을 뿐이죠.”
성녀는 그 잠깐 사이, 나를 의사로 둔갑시키려 했다.
의사가 병을 치료하는 거야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아마도 그 당연한 일을 하고서 자신에게 뭔가를 요구한다는 프레임을 씌우려 했던 모양.
계획이 어긋난 성녀의 눈가가 파르르 떨리는 것이 보였다.
“직업이 중요한 가요. 당신이 니스의 수 많은 분들을 살렸다는 것이 중요하지요. 저도 이번 일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답니다.”
성녀는 나를 향해 그렇게 말했다.
‘이 년이 또 무슨 개 수작을 부리려고?’
나는 갑작스럽게 태도를 바꾼 성녀를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녀가 무슨 개수작을 부릴 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그래, 무엇을 배우셨나요?”
“저 같이 미천한 자가, 감히 여신님의 뜻을 헤아릴 수 없다는 것을 배웠지요. 여신님은 니스에 더러운 병마가 퍼지게 만들었지만, 또 당신을 보내서 사람들을 구하시지 않았습니까? 이 모든 것이 데메테르 여신님의 안배…”
하?
나는 성녀를 보며 콧방귀를 꼈다.
어린 년이 벌써부터 정치 질을 하는 솜씨가 장난이 아니었던 것이다.
순식간에 나를 데메테르 여신이 보낸 사자로 만드는 그녀의 말에, 순진한 니스의 시민들이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리는 것이 보였다.
“아아,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성녀의 말을 가볍게 인정해 주었다.
내가 데메테르 여신의 사자던 아니던, 그 딴 것 따위는 나에게 아무런 상관도 없었으니까.
내가 자신의 말을 호의적으로 받자, 성녀는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그런 성녀를 보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여신님이 그리고 저에게 말씀하셨지요. 성녀를 만나서 자신의 선물을 받으라고요.”
“….여, 여신님이요?”
성녀의 표정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자신이 신나게 팔아 먹던 여신을 내가 팔아 먹을 줄은 생각도 못했던 모양.
나는 그런 성녀를 보며 확인사살을 가했다.
“설마, 성녀님이 여신님의 뜻을 거역하지는 않겠지요? 그리고 저와 한 내기도 있지 않습니까?”
순간, 성녀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자신의 아랫입술을 깨무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런 그녀의 반응에 확신을 할 수 있었다.
성녀라는 자가, 사실은 여신이라는 존재에 대한 믿음 따위는 한 푼어치도 없다는 것을.
“오오, 여신님의 선물이라니, 뭘까?”
“그 내기 자체가 여신님의 안배였던 모양이야!”
아무것도 모르는 니스의 시민들이 나와 성녀를 보며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런 사람들의 반응을 즐기며, 성녀를 바라보았다.
‘자, 이제 어쩔래?’
**
“누구도 제 방 근처에 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습니다.”
신전 안으로 나를 데리고 들어온 성녀는 자신을 호위하는 기사들에게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성녀님! 위험하실 수도 있습니다!”
“저 자가 무슨 악독한 마음을 품었을 줄 알고, 단 둘이 계신다는 말입니까?”
당장 성기사들의 반발이 터져 나왔다.
아무리 싸가지 없는 성녀라고는 하나, 자신들이 지켜야 할 존재.
당연히 그들은 나 같은 정체 불명의 남자와 성녀가 단 둘이 있는 것을 용납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시민들에게 성자라 불리는 분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니스를 구하신 분이고요.”
“하지만, 불가합니다. 저희들이 있는 앞에서 대화를 나누면 될 일 아닙니까?”
성녀의 고집에도 성기사들은 물러나지 않았다.
물론 성기사들이 나를 의심하거나 하는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성녀의 말처럼 어쨌거나 나는 니스를 구한 영웅이었으니까.
아니, 그들의 굳은 뇌로는 성녀를 따먹는 다는 발상 자체가 불가한 것일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성기사 들이 버티는 이유는 순전히 호위의 문제 때문.
그런 성기사들의 마음도 몰라 준 채, 성녀는 답답해 돌아가시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남들이 보면, 내가 그녀를 조종해 성기사들을 따돌리려는 것이라 오해할 지 모르겠지만, 사실 나는 그녀에게 성기사들에 대해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지금 그녀가 자신의 방 근처에 접근을 막는 것은 순전히 성녀 자신의 의지.
‘흐흐, 내기에서 진 게 그 정도로 쪽 팔렸다는 거지?’
나는 성녀가 그러는 이유를 손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누군가에게 패했고, 그 결과를 받아들이는 장면을 어떤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 것뿐이었다.
“별 일 없다니까요!”
“불가합니다!”
대화는 계속 평행선.
나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성녀와 성기사들의 대립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차피 성녀가 어디로 도망치는 것도 아니었고, 시간이야 넘칠 정도로 많았으니까.
“하아. 광장에서 듣지 못했습니까? 여신님의 뜻입니다.”
결국, 답답함을 참지 못한 성녀가 가불기를 사용했다.
다시 한 번 여신을 아무렇지도 않게 팔아먹는 성녀의 모습에 나는 웃음을 참느라 죽을 맛이었지만, 성기사들은 입을 꾹 다문 채로 성녀를 바라보았다.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여신의 뜻이라는 것에 대해 감히 반기를 들 수는 없었으니까.
심지어 어떤 늙은 성기사는 가슴에 성호를 그리며, 신전의 천장을 바라보기까지 했다.
‘확실히 이 날라리 성녀님 보다는 저 쪽이 믿음이 깊어 보이네.’
내가 그렇게 교단의 성기사들의 면면을 파악하는 사이, 드디어 설전을 끝낸 성녀가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가죠.”
“그러시죠.”
어쨌거나 성기사들의 앞.
나는 꽤나 성녀를 존중해주며, 그녀의 말에 살짝 고개를 숙였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절대로 제 방 근처에 다가서는 것을 금합니다.”
불안증이라도 있는 것인지, 성녀는 성기사들을 향해 그렇게 엄포를 놓고는 앞장 서 걷기 시작했다.
‘일이 잘 풀리려니, 이렇게도 풀리나?’
나는 신의 안배를 느끼며, 살랑이는 성녀의 엉덩이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멀리서 볼 때는 몰랐는데, 가까이에서 보니 데메테르 교의 사제복도 꽤나 야한 디자인이구나 싶었다.
**
쾅-.
거칠게 문을 닫은 성녀는, 문에 달린 잠금 장치를 하나씩 잠그기 시작했다.
그 잠금 장치의 수만 해도 다섯 개.
그 수많은 잠금 장치들이 의아하긴 했지만, 성녀씩이나 되는 여자가 머무르는 방이니 그런 조치를 취하는 것도 이해하지 못할 것은 아니었다.
“자, 이제 단 둘이 되었으니, 말씀해 보시죠. 저한테 원하는 게 뭡니까?”
성녀는 자존심이 잔뜩 상해 분한 표정으로 나에게 물었다.
나는 그런 그녀의 표정을 보며, 조금 골려 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말씀 드렸다시피 여신님의 뜻인 걸요. 선물을 주십시오.”
“장난치시나요, 지금?”
내 말에 성녀는 짜증이 가득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그녀를 진지한 표정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순간, 성녀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진정…여신님이 저에게..?”
“물론, 농담입니다.”
나는 자기만의 세계로 빠지려는 성녀를 보며 그렇게 말했다.
진짜로 자신이 여신의 사랑이라도 받는 것이 아닐까 싶은 표정으로 감동하던 성녀의 얼굴이 무참히 구겨졌다.
“하아-. 당신이란 사람은 정말. 용건이나 말하세요. 돈입니까? 아니면, 귀족 분들에게 연을 대 드려요? 아님, 공식적으로 니스의 영웅이라는 칭호라도 부여해 줄까요?”
나는 성녀가 제시하는 것들에 시큰둥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기사들과 달리 꽤나 열린 사고를 한다고 생각했지만, 겨우 생각하는 수준은 그 정도.
그녀 또한 내가 자신을 범할 것이라고는 조금도 생각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아뇨. 그것 말고 전 성녀님을 원하는데요?”
“뭣?”
순간, 귀찮음이 가득하던 성녀의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런 성녀의 귀여운 반응을 바라보며, 음흉한 표정으로 입 꼬리를 말아 올렸다.
“다른 것은 필요 없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성녀님 그 자체이니까요.”
“…..그렇게 말한다고 해도, 저를 어떻게 가진단 말입니까?”
성녀는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보며 그렇게 대답했다.
나는 진짜로 내가 한 말이 무슨 소리인지 모르는 것 같은 성녀의 반응에 당황했다.
여급에게 듣기로는 그녀의 나이 스무 살.
알 거 다 알고 직접 경험을 해봐도 이상할 것이 없는 나이였다.
당장 같은 나이인 여급만 해도, 펠라 기술이 거의 하늘에 닿아 있을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나는 그제야 내가 간과한 것을 깨달았다.
그녀가 일반 여자가 아니라 성녀라는 점.
싸가지는 없지만, 어릴 때부터 교단에서 자랐다면, 성적인 부분에 대해 학습할 기회 자체가 없었을지도 몰랐다.
“세에엑스.”
“?”
내 말에 성녀의 눈에 깃든 의혹이 더욱 진해졌다.
“자지, 보지.”
“….그게 무슨 뜻입니까?”
성녀는 고개를 갸웃 거리며 날 향해 그렇게 물었다.
성적인 부분에 대한 지식이 거의 미취학 아동 수준.
절로 한숨이 나오는 것을 느꼈지만, 생각해보니 꼭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았다.
그녀가 성적인 지식이 없다는 것은 결국 경험이 없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었고, 그깟 지식이야 내가 주입해 넣으면 될 일이니까.
아니, 닳고 달은 여급을 상대하다 보니, 오히려 성녀의 그런 속성이 묘하게 날 꼴리게 만들었다.
“보지가 뭐냐 하면 말이지요…”
나는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성녀의 다리 사이에 빠르게 손을 쑤셔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