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화 〉신탁
“으음…..”
다행히도 데메테르 교의 성기사들은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갑작스러운 성녀의 말에 의구심을 가진 눈길로 서로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그러면, 그렇지. 이 개 소리를 믿어 줄 리가…’
“신탁. 신탁입니까?”
하지만 그 순간.
믿음이 충만해 보이는 늙은 성기사 하나가 눈을 반짝이며 성녀에게 말했다.
마치 눈 앞에서 기적을 목도한 것처럼 반짝이는 늙은 성기사의 눈빛에, 그 성녀 또한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제발, 지금이라도 농담이라고 해.’
나는 당황한 성녀를 보며, 속으로 그렇게 외쳤다.
언젠가는 그녀를 꼭 따 먹을 계획이기는 했지만, 대륙을 구할 용자가 될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미 뇌절을 친 우리의 성녀는 물러나지 않았다.
“….그, 그렇습니다.”
누가 봐도 성녀가 지금 거짓말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목소리는 떨리는 대다, 말까지 더듬었고, 무엇보다 그녀의 눈동자는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리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늙은 성기사는 눈이 아니라 옹이 구멍을 달고 있던 모양.
아마, 이곳이 지구였다면 나는 그 늙은 성기사에게 진지하게 안과 검진을 받아보라고 말했을 지도 몰랐다.
“오오…백년 만의 신탁이라니. 여신님께서, 드디어…..”
늙고 믿음이 깊은 성기사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성녀를 향해 다가서기 시작했다.
눈에 빤히 보이는 구라를 치는 성녀와는 달리, 늙은 성기사의 모습은 꽤나 진실됐다.
세월의 흔적이 가득한 주름진 얼굴로 기쁨과 환희의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성기사는 성녀의 앞으로 나아가 겸허하게 무릎을 꿇었다.
이름 모를 노장이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리는 모습은 그 자체로 어떤 경건한 느낌을 주었다.
그리고 거기에 감화된 다른 성기사들이 천천히 늙은 성기사의 뒤에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은색의 갑주를 입은 십 수명의 성기사가 기도를 올리는 장관이 펼쳐졌다.
비록 그 앞의 성녀가 이게 아닌데 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옥의 티였지만.
**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개뻥을…”
신전 앞으로 나온 나는 황당한 표정으로 성녀에게 그렇게 물었다.
신탁이 내려오고 난 뒤, 성기사들이 나를 대하는 태도는 그야말로 180도 변해 있었다.
물론, 개중에는 뭔가 미심쩍은 눈길을 보내는 이도 있었지만, 신실하고 가련한 늙은 성기사는 진심으로 내가 대륙을 구할 용자라도 되는 것처럼 나에게 깍듯한 모습을 보였다.
“그럼 어떻게 해요? 내가 여기 오려면, 방법이 그것밖에 없는데!”
성녀 또한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
그녀는 꽤나 신경이 곤두선 표정으로 나에게 그렇게 빽 소리를 쳤다.
“아무리 그래도….”
“그럼, 그냥 죽으라는 말이에요?”
나는 황당한 표정으로 성녀를 바라봤다.
색정증이라고 구라를 치기는 했지만, 그 결과가 죽음이라는 말은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으니까.
“아아. 알겠습니다. 뭐, 성녀님이 알아서 잘 처신하시겠지요.”
나는 성녀에게 그렇게 말하며 선을 그었다.
어쨌거나 원인이 나 인 것은 사실이었고, 신탁 드립이야 그녀가 어떻게든 감당하면 될 일이었으니까.
“무슨 개소리에요? 이걸 나 혼자 어떻게 책임져? 당신도 공범이잖아요.”
“공범?”
나는 어이가 털린 얼굴로 성녀를 바라봤다.
“무려 100년 만에 신탁이라고요. 거짓말이라는 거 들키면 나는 물론, 당신도 종교 재판에 회부될거고, 결과는 보나마나 화형이야.”
화형.
다시 말하지만 나는 분명 어디선가 사람이 가장 고통스럽게 죽는 방법이 불에 타 죽는 다는 것임을 본 적이 있었다.
로잘린의 화염 마법을 피해 여기까지 왔더니, 결국 다시 제자리.
나는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성녀를 보며 말했다.
“내가 왜 공범이야! 나는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진짜 치사하게 이럴 거에요?”
“치사? 목숨이 걸린 일에 치사한 게 있습니까?”
“하아-. 엉겁결에 그런 소릴 했지만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에요.”
성녀는 실망했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며 자신이 생각한 방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말하는 방법은 무척이나 황당했다.
그러니까 나보고 용사 노릇을 하라는 소리.
“그게 말이 됩니까?”
“왜 말이 안 되지? 어차피 용사가 어디 사람들 앞에서 싸우는 것도 아니잖아요. 몇 년 대충 뻐기다가 던전 몇 개 돌고, 그럴싸한 아이템 하나 주워와서 마왕을 물리쳤다고 하면 될 것을.”
“……그걸 누가 믿어요?”
나는 성녀의 황당한 계획에 얼이 빠진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아무리 스무 살 여자애라지만, 세상 돌아가는 것을 너무 몰랐다.
그녀의 어설픈 계획대로 될 거라면, 진작에 용사라고 주장하는 것들이 판을 치고 다녔을 것이었다.
“잊었어요? 내가 성녀라는 거?”
성녀는 인상을 찌푸린 채 나에게 그렇게 말했다.
나한테 속아 보지를 벌렸다고는 하나, 그녀는 어쨌거나 성녀였다.
그녀가 하는 말의 무게가, 어중이 떠중이가 하는 말과 같을 수는 없는 노릇.
나는 성녀의 황당하기만 했던 주장이,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쪽으로 변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무려 100년 만에 여신이 내려준 용사가 되는 일이라고요. 당신한테도 결코 손해는 아닐 거에요.”
성녀는 나에게 달콤한 목소리로 그렇게 속삭였다.
그녀야 그저 자신의 질병을 치료하겠다는 일념으로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겠지만, 그녀의 말대로 나에게 나쁠 것은 없어 보였다.
지구에서는 방구석에서 웹소나 쓰던 내가 용사라니.
여사제와 여마법사, 그리고 엘프 활쟁이, 거기다 마른 근육의 여자 전사.
머리 속에서는 벌써 그럴듯한 팀을 구성하는 중이었다.
‘먹힌다. 이건 그야말로 왕도니까!’
예쁘고 싸움 잘하는 능력 있는 여자 동료들을 모아, 마왕과는 상관없이 떡이나 열심히 치는 이야기.
이건 내가 연재하던 웹 소설 사이트의 독자들의 입맛에 꼭 들어맞는 이야기 플롯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나는 진중한 얼굴로 성녀를 보며 말했다.
“좋습니다. 성녀님. 같이 대륙을 구합시다!”
**
“던전이요?”
토마스는 뜨악한 표정으로 나를 보며 그렇게 되물었다.
갑자기 내가 던전 이야기를 꺼내자,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내가 토마스에게 던전의 이야기를 꺼내게 된 것은 불과 몇 시간 전 일어난 일 때문이었다.
성녀와 헤어지고 여관으로 돌아온 나는 평소처럼 연재창과 댓글들을 살피고 있었다.
그리고 그 댓글들 중에는 단번에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이 있었다.
-아카데미가면 최하위 권.
-이대로 아카데미 들어가면 씹찐따 되는 거 아니냐?
꽤나 거슬리는 말이었지만, 내 능력치를 생각하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어쨌거나 나는 아카데미를 들어갈 생각이었다.
무려 10 쿠폰이나 주고 산 아케데미 입학 추천장을 그대로 버릴 생각은 없었으니까.
어차피 성녀의 계획도 몇 년간은 아무 것도 안 하고 대충 뻐기는 것이었으니까.
성녀에게 아카데미에 들어갈 거라는 것을 이야기하자, 성녀 또한 그런 내 계획에 반색을 했다.
“좋네요. 아카데미라니. 용사가 성장하기 딱 좋은 환경이네요.”
성녀의 그 말에, 여기선 용사도 학벌을 따지는 구나 싶었지만 굳이 태클을 걸지는 않았다.
“그럼, 저도 아카데미에 입학을 해야겠군요. 잘 됐어요.”
성녀는 뭔가 일이 잘 풀린다는 표정으로 교황에게 보고를 하고 돌아오겠다고 말했다.
어째서인지, 그녀가 아카데미에 들어가는 일 자체를 기뻐하는 것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나는 거기에도 별 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다.
‘싸가지는 없어도 호기심은 많은 애니까.’
내가 파악한 성녀는 그랬으니까.
성녀가 교단의 사람이 아닌 일반인들과 어울릴 수 있는 아카데미 생활을 동경하는 것은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결국 나와 성녀가 아카데미에 들어가는 것은 기정사실.
문제는 그녀와 나의 능력치 차이가 어마 어마 하다는 것.
물론 성녀라는 빽과 니스를 구한 성자라는 명성이 있으니 씹찐따 취급까지야 받지 않겠지만, 그래도 내 능력치가 형편 없는 것은 사실이었다.
거기다 이후의 가짜 용사 노릇까지 생각하면, 내 미천한 실력이 드러나서는 곤란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나는 그간 쌓인 선작수를 내 능력 치에 갈아 넣으려 했다.
봉영기 [32세/작가] (+18)
[근력]10 [민첩]9 [체력]6 [마력]0 [행운]7
현재 내 상태는 이 모양 이 꼴.
그간 바쁘게 지낸 탓에 능력치를 배분할 포인트가 18개나 쌓여 있었지만, 이걸 어디다 투자해야 할 지 도저히 감이 오지 않았다.
‘그냥 근력에 몰빵해?’
이미 이런 저런 상황으로 근력에 들어간 능력치가 꽤 되기에 힘기사를 키워볼까 싶었지만, 고블린을 때려 잡던 그 순간의 손맛을 떠올리면 근접 전투는 내 성향과는 전혀 맞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제와 마력에 투자하기도 애매한 상황.
내가 그렇게 어중간한 능력치를 고민하고 있던 그 순간.
![특별 상점에 신규 던전 입장권이 등장했습니다.]
![작가님을 위한 맞춤 아이템으로, 기간 한정 판매중입니다.]
아주 타이밍이 적절하게도 시스템이 나에게 메시지를 보내왔다.
뭔가 심히 의심스러운 타이밍이기는 했지만, 나는 그 떡밥을 그냥 흘려 보낼 수는 없었다.
무려 추천 수 50을 소모해 특수 상점을 연 나는 마침 새롭게 생성된 던전 입장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알의 던전 (미개척) 입장권 (50쿠폰) /30일 이내]
나는 별 고민 없이 던전의 입장권을 구매했다.
50쿠폰이면 꽤나 비싼 값이었지만, 어쨌거나 기간 한정이라는 단어는 마법 같은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거기다 지금 나에겐 던전 행이 필요하기는 했다.
내 성장 방향을 결정하기 위해서는 다시 한 번 실전을 경험해 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으니까.
그것이 내가 토마스에게 던전에 대해 질문을 던진 이유였다.
“던전이라, 갑자기 왜 그런….?”
나를 그저 약초에 대한 지식이 깊은 인물로 파악하고 있는 토마스로서는 내 던전행이 꽤나 의문스러울 것이었다.
“아카데미 입학 전에 제 실력을 제대로 확인해보고 싶어서요.”
내 말에 토마스의 눈이 반짝였다.
아마도 내가 약초학 이외에도 뭔가 숨겨둔 수가 있다고 판단한 모양.
“던전행이라, 실력만 갖춰져 있다면 나쁘지 않죠. 이 근처에 그래도 알려진 던전들이…”
토마스는 니스 근처의 이름 난 던전들을 나에게 알려주기 시작했다.
상인인 그가, 던전들의 위치나, 거기서 출몰하는 몬스터에 대해 빠삭한 것이 이상하기는 했지만, 눈치 빠른 토마스는 그것에 대해서도 나에게 설명해 주었다.
“몬스터의 가죽이나, 뼈, 그리고 혈액 등은 꽤나 값비싼 재료들입니다. 대부분의 용병이 몬스터를 퇴치하고, 그 부산물들을 통해 돈을 벌죠. 물론 인기 없는 던전 같은 경우에는 국가에서 따로 토벌 의뢰를 하기도 하지만요.”
나는 토마스의 설명을 통해 대충 이 세계의 던전의 개념을 파악할 수 있었다.
쉽게 말하자면, 이 세계의 던전은 몬스터 소굴 정도로 취급되는 모양.
“물론 대륙이 넓으니 아직도 발견되지 않은 던전이 있을 겁니다만, 니스 같은 대도시 주변에는 미개척 던전은 없습니다. 알려진 던전에서 새로운 루트가 발견되는 일도 거의 20년 전이 마지막이었죠.”
토마스는 자신감이 넘치는 표정으로 나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러니까 대부분의 던전이 안에 보상이란 보상은 이미 다 발굴된 빈 깡통 같은 상태라는 것이다.
순간, 나는 자연스럽게 로잘린 일행에 대해 떠올렸다.
겨우 고블린이나 나오는 던전에 마탑의 기대주가 찾아온 이유가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캐서린의 무덤은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루트.
그러니까 토마스가 말한 20년 전에나 마지막으로 발견된 신규 루트였던 것이다.
‘로잘린이 직접 던전에 나선 것도 그런 이유였던가?’
내가 그렇게 로잘린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에도 토마스는 설명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야말로 최고의 설명충이자, 스피드 웨건의 화신과도 같은 모습.
“니스 근처에서 가장 안전한 던전이라면…”
“아니요.”
나는 나에게 맞는 던전을 추천해주려는 토마스의 말을 끊었다.
그리고는 의아한 표정을 짓는 토마스를 향해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저는,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던전을 탐험할 생각입니다.”
순간, 토마스의 표정이 묘하게 변하는 것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