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9화 〉하얀이 (29/158)



〈 29화 〉하얀이

“이, 이게 무슨 일입니까?”

토마스는 나와 알렌을 보며 기겁한 표정으로 그렇게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던전을 탐험하겠다고 나가서는 여자들만 잔뜩 데리고  상황이었다.
던전 공략이 끝나자 마자 토마스를 찾아온 것은 내 결정이었다.
여자들을 구했다고 하지만, 그냥 알아서 살아남으라고 버리고 올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내가 그녀들을 하나하나 집으로 돌려보낼 수도 없었으니까.
토마스에게는 미안한 일이었지만, 이런 상황을 처리하는 것은 나보다 그가 훨씬 나을 듯 싶었다.

"갑자기 다크 엘프라니요?"


알렌은 그런 토마스에게 대략적인 상황을 설명했고, 토마스는 그 설명을 들으며 시시각각 표정이 변했다.
다크 엘프의 참담한 짓을 들었을 때는 분노를 터트렸고, 여자들의 사연을 들었을 때는 눈물을 짜내기도 했다.

“이런,  같은 놈을 봤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여자들 모두 원래의 집을 찾아주겠습니다. 아니, 상황을 생각해보면 일상으로의 복귀가 불가능할 수도 있지요. 그런 여자들이 있다면 상단 차원에서라도 먹고 살 길을 열어줄 겁니다.”


‘아니,  장사를 하고 있냐고! 출마해, 출마!’

나는 정의감을 불태우는 토마스를 보며 속으로 그렇게 외쳤다.
물론, 귀족제인 왕국에서 출마를 할 곳은 없었지만, 아마도 한국이었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소중한 한표를 그에게 투척했을 것이었다.
어쨌거나 사후 처리는 토마스가 맡았다.
토마스는 여자들과 면담을 통해 원래 살던 곳으로 갈 사람과 자신의 상단에서 일을 할 사람을 구분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인간도 아닌 이종족에게 납치당한 것이었다.
거기다 납치를 당한 걸로 끝이 아니라, 미친 다크엘프에게 계속 강간을 당한 상황.
나는 당연히 대부분의 여자들이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선택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트라우마가 심할 테니까.’

그건 그럴지도 모른다가 아니라 확신에 가까운 것이었다.
알렌이 던전에서 여자들을 구해낼 당시, 나에 대한 여자들의 반응은 한결 같았다.

“하윽….제, 제발 떨어져 주세요.”
“하아…하아…”

그런 여자들의 반응에 알렌은 의아함을 느꼈지만, 나는 그 이유를 정확히  수 있었다.
그 모든 것이 내가 가진 아이템, [비치의 비취 반지] 때문이었다.
아이템의 기능은 상대방에게 섹스 어필을 하는 단순한 기능.
이미 다크 엘프에게 당할 대로 당했던 여자들의 신체는 내 아이템의 효과에 자연스럽게 반응했다.
심지어는 나와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하반신을 잔뜩 적실 정도로 애액을 흘려대는 여자조차 있을 정도였다.
문제는 그 여자들이 섹스에 엄청난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
인간도 아닌 뭔가에게 짧게는 몇 개월에서 길게는 몇 년을 시달려  이상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아…제, 제발…나한테 서  떨어…”
“아아아….!!”


정신적으로는 거부감을 느끼면서도 신체는 솔직하게 반응하는 여자들의 모습은 여러 의미로 대단했다.
개중에는 버티지 못하고 스스로의 음부를 손으로 문지르는 여자들 조차 보일 정도.
그 미친 상황에 알렌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아니, 아예 눈을 감고는 귀를 막아, 세상과 단절된 느낌을 즐기는 중이었다.


‘까투리도 아니고…’

나는 알렌의 그런 모습을 보며 인상을 구겼다.
솔직히 수십명의 여자들이 나 하나를 원하는 광경이 자극적이기는 했다.
아무리 내가 섹스에 미친 놈이라고 해도, 깔려 있는 상황을 알고 있는 이상 거기에 넘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다급히 반지를 빼 내어 인벤토리에 넣었고, 그러고 나서야 여자들이 조금씩 진정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유일하게 벗어나 있는 것은 다크 엘프의 딸 하나뿐이었다.
그녀는 여자들이 잔뜩 흥분을 하는 와중에도 다른 이유로 흥분을 하고 있었다.
고작 10살 정도로 보이는 외모.
하지만 나는 그 어린 아이에게 섬뜩함을 느끼고 있었다.
바닥에 굴러 다니는 제 아비의 손가락과 귀를 주워 들고는 묘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대부분은 원래 마을로 돌아갔고, 일부는 상단에 취업하기로 했습니다.”

토마스는 나에게 그렇게 보고했다.
굳이 나에게 보고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어쨌거나 내가 여자들을 데리고 온 이상 끝까지 상황을 파악해 두는 것도 나쁠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어쨌거나 대부분의 여자들이 자신이 살던 마을로 돌아가는 것을 선택한 것은 의외였다.
그리고 나는 그를 통해 이곳 사람들의 인식이 나와는 조금 다르다는 것을 깨달을  있었다.
어디든 몬스터가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은 세상.
그런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내 상식보다 조금 더 열린 사고를 지니고 있었다.
이종족에게 수십 차례나 강간을 당했다고 해도, 그저 불행한 일을 겪은 것으로 여길 뿐 그 피해자를 더럽다고 여기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그 소녀는 어떻게?”

토마스는 나를 향해 그렇게 물었다.
다크 엘프의 딸의 위치는 조금 애매했다.
태어난 것이 죄는 아니니, 그녀가 어떤 잘못을 했다고 볼 수는 없었지만 살아남은 생존자들이 소녀를 보는 눈은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다.
어쨌거나 그녀의 뾰족한 귀가 그 다크 엘프를 떠올리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뭐, 남기로 한 여자들과는 다른 곳에 둬야 하겠지만…이쪽에서 맡아서 키워도 됩니다.”

토마스는 나를 향해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일에 도움도 되지 않는데다, 이종족의 피가 섞인 여자애를 어떻게 키워야 할지 난감한 것은 토마스 또한 마찬가지인 듯 보였다.

“그 아이라면, 제가 맡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토마스를 향해 그렇게 대답했다.
물론 당장 그 어린 것을 키워서 잡아먹겠다는 천인 공노할 생각을 품은 것은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어린애인지 조차 확신 할 수 없었지만.


“아…괜찮으시겠습니까?”
“뭐, 어떻게든 되겠죠.”

나는 토마스를 향해 쓰게 웃으며 답했다.
솔직히 잘린 손가락을 들고 웃던 소녀의 모습이 내 뇌리에 깊이 남아 있었다.
누가 봐도 정상은 아닌 모습.
나는 그런 불안요소를 토마스의 곁에 둘 정도로 양심이 없는 인간은 아니었다.
결국, 토마스는 그 다크 엘프의 딸을  앞으로 데리고 왔다.
새까만 눈동자의 소녀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서 있었다.

“이름은?”

나는 소녀를 보며 그렇게 물었다.
하지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내가 인상을 구기고 있는 사이, 소녀가 조심스럽게 입술을 달싹이는 것이 보였다.


“없어, 그런 거.”
“….하아. 이름도  지어줬다고?”


나는 속으로 도망친 다크 엘프에게 쌍욕을 퍼부으며 소녀를 바라봤다.
아무리 제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도 딸인데, 이름 조차 지어주지 않았다니.
눈 앞의 소녀가 아주 조금은 안쓰럽게 보였다.

“….계속,  너 할 수도 없으니까 이름은 내가 지어주도록 하지.”

내 말에 소녀의 눈이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 같아도, 그 올망졸망한 얼굴에 한 껏 기대감이 어린 것이 보였다.

“삼순이.”
“……뭐야, 그게?”
“뭐긴 뭐야, 네 이름이지.”


나는 소녀를 향해 그렇게 말했다.
내가 애를 낳아본 것도 아니고, 당장 그럴듯한 이름이 떠오르는 것도 아니었다.
물론 웹소설 작가인 만큼 그럴 듯한 이름을 지어주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한국적인 이름이 낫지 않겠나 싶었던 것이다.


“……..싫어.”

하지만 검은 눈의 엘프 소녀는  네이밍 센스가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그녀의 말에 턱을 긁적이며 머리를 굴렸다.

“제시카. 샤론. 엠마. 샤를리즈. 마릴린. 스칼릿.”


내 입에서 유명한 여배우들의 이름이 줄줄 흘러나왔다.
결국, 이름 짓기를 포기한 나는 원래 세계에서의 유명인들의 이름을 가져다 붙여주려고 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대단한 이름들에 대한 소녀의 반응은 그리 좋지 못했다.


“….넌 이름이 뭔데?”

소녀가 나를 보며 그렇게 물었다.

“봉영기. 보통은 본, 이라고 부르더군.”
“….봉영기.”


소녀는 이세계에서 와서 처음으로 내 한국 이름을 또박또박 발음했다.
어린애라 그런지, 발음 같은 것이 굳어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 그럼 하얀이는 어때?”

나는 문득, 소녀를 보다 그렇게 말했다.
아빠가 다크 엘프였지만, 소녀의 피부는 그 어떤 여자들보다 밝은 하얀 색이었다.
나름 소녀의 아이덴티티가 녹아 있는 이름이니,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뜻은?”

‘아. 더럽게 까다롭네.’

나는 이름의 어감이 마음에 들었는지, 뜻을 물어오는 소녀를 보며 대충 하얀색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그러자, 소녀가 환하게 웃기 시작했다.
언제 폭발할 지 모르는 미친 사람 같다가도,  세상  잃은 음울한 표정을 기본으로 탑재하고 있던 소녀의 웃음은 그야말로 엄청난 파급력을 지니고 있었다.


‘아…씨발. 조금 설렜다.’


나는 아이처럼 웃는 소녀를 보며,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 페도 따위가 아닌 이상, 그 웃음에 성적인 뭔가를 느낀 것은 아니었다.
그냥 귀여운 동물을 봤을 때 느끼는 심장에 안 좋은 뭔가를 느낀 것 뿐이었다.

“좋아. 하얀이.”

소녀는 심장을 부여잡은 나를 보며, 그렇게 말했다.


**

‘응? 얘, 조금 키가 컸나?’


던전에서 빠져 나온 지 꼬박 하루가 지난 상황.
나는 첫 만남 때보다 하얀이의 키가 조금 커진  같은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무슨 식물도 아니고, 하루 만에 키가 자란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잔뜩 움츠려 있던 애가, 허리를 피자 조금 더 커 보이는 거라는 것이 더 합리적인 생각이었다.

“자, 들어가서는 무조건 말 잘 듣겠다고 해야 돼.”
“왜?”

내 말에 하얀이가 나를 보며 그렇게 물었다.
왜냐고 물으니, 딱히 대답을 할 거리는 없었다.
아니, 다시 생각해보니 애초에 내가 여급의 눈치 따위를 살필 필요가 없었다.

‘아니, 무슨 바람 피다 낳은 애 데리고 온 컨셉을 잡고 있어?’

나 스스로도 경악할 정도로 이상하게 주눅이 들어 있던 상황.
나는 여급의 무서움을 느끼며,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서 있는 하얀이의 얼굴을 바라봤다.


‘응?’


그 순간, 내 눈에 이질적인 뭔가가 들어왔다.
하얀이의 귀에 낯선 귀걸이 하나가 걸려 있었던 것이다.

“….이건 뭐야?”
“내 거야! 건들지 마!”

내가 귀걸이에 손을 뻗자, 하얀이가 질색을 하며 두 손으로 자신의 귀를 가리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런 하얀이의 반응에  귀걸이의 정체를 떠올릴 수 있었다.
바로  다크 템프…아니, 다크 엘프가 차고 있던 귀걸이였다.
아마도 알렌에 의해 잘린 귀에 붙어 있던 모양.

‘피는 물보다 진하다더니, 그 꼴을 당하고도 아빠라고 좋아하는 건가?’


나는 마치 소중한 물건이라도 되는 것처럼 귀걸이를 뺏기지 않으려고 난리치는 하얀이를 보며 묘하게 씁쓸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아니, 사실은 그런 기분을 느끼는 내 자신이 이상했다.


‘뭘 상처를 받고 있어? 얘랑 아무 사이도 아니잖아. 거기다 생긴 것만 꼬맹이지 알맹이는 나보다 연상일수도 있다고!’

나는  자신을 그렇게 타이르며, 하얀이를 바라봤다.
아무래도   그 미소 한 방에 제대로 저격을 당한 모양.


“안 뺏어. 그냥 너 해.”

나는  손을 번쩍 들고는 하얀이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런 내 모습을 보던 하얀이가 조금씩 경계를 풀기 시작하는 것이 보였다.

“서방? 여기서 뭐해?”


여관 문 앞에서 벌어진 소란에, 여급이 문을 열고 나타났다.
나를 보고 그렇게 묻는 여급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하얀이에게로 향했다.
순간, 여급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지는 것이 보였다.


“….쟤는 누구야?”


여급은 가히 흉신악살과도 같은 표정으로 하얀이를 보며 그렇게 물었다.
딱히 여급과 어떤 관계도 아니었건만, 그 표정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심장이 얼어 붙는 것 같은 느낌을 느꼈다.

“그, 그게…”

내가 뭐라 변명을 하려던  순간.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귀걸이 때문에 나에게 악을 쓰던 하얀이가 조심스럽게  손을 붙잡는 것이 느껴졌다.

“….하?”

여급은 더욱 싸늘한 눈빛으로 나를 보기 시작했다.
눈 빛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벌써 나를 백 번은 더 죽이고도 남았을  같은 분위기.
내가 다시금 여급의 오해를 풀기 위해 말을 꺼내려던 순간.
하얀이가  뒤로 고개를 파묻으며 중얼거렸다.

“무서워, 아빠.”
“…..아빠?”


여급의 눈에서 레이저가 나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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