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화 〉공주
“뭣!”
순간 엘프 놈이 고개를 돌려 자신의 등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건 비단 엘프 만이 아니라 나를 호위하듯 서 있는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당연히 엘프의 뒤에서는 아무것도 튀어나오지 않았다.
내가 목놓아 부른 알렌은 아마도 니스에서 누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건가 하는 표정으로 귀를 후비고 있을 테니까.
‘적을 속이려면, 아군부터 속여라!’
아니, 이 경우에는 적을 속이려 했는데, 아군도 속은 것이나 다름 없었다.
하지만 나의 필사의 연기 덕분에 아주 짧은 틈이 만들어졌고, 나는 그 틈을 무척이나 유용하게 활용했다.
정신이 흐트러진 엘프 놈의 마법은 어느 기사의 방패에 부딪쳐 사그라 들었고, 내가 쏘아 보낸 마법 화살은 엘프 놈의 다리 사이를 정확히 노리고 날아들고 있었다.
“이런 비겁한!!”
그제야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안 엘프가 재빨리 몸을 뒤로 날려 화살을 피하려 했다.
하지만 마법의 방향을 조종할 수 있는 것은 놈만의 특기가 아니었다.
나는 화살의 방향을 조종해 집요하게 놈의 자지를 노리기 시작했다.
엘프는 귀찮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중요 부위를 노리고 날아오는 화살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나는 이미 엘프의 그 움직임을 예상하고 있었다.
놈이 자신의 물건에 엄청나게 집착을 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다리 사이를 노리고 날아가던 화살이 급격히 방향을 틀었고, 엘프의 검은 목적을 잃고 허공을 갈랐다.
내가 날린 빛의 화살은 그대로 엘프의 턱 밑을 노리고 날아갔다.
‘맞아! 맞아라, 제발!’
화살을 만들어 쏘아 보내는 것에도 마력이 소모됐지만, 그 화살의 방향을 조정하는 것도 마력을 잡아먹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지금처럼 급격한 방향 전환은 그야말로 마력을 깡그리 소모시키기 딱 좋았다.
나는 내가 가진 마력이 바닥을 치는 것을 느끼며, 공격이 성공하기를 빌고 또 빌었다.
이 마지막 수가 먹히지 않으면, 더는 엘프를 막을 방법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놈은 고개를 틀어 내 마지막 공격을 피해냈다.
내가 기껏 날린 마지막 한 방은 엘프 놈의 귀에 걸린 귀걸이만을 박살내고 하늘 높이 사라져 버렸을 뿐이었다.
“…..제길. 끝났네.”
나는 절망감에 물든 얼굴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갑자기 이세계에 끌려와서 이제 좀 빛을 보나 했는데, 이렇게 끝나다니 허탈함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그래도 여급이나, 하얀이, 그리고 성녀 같은 미녀들을 상대해 본 것을 추억하면, 그리 나쁘지 않은 삶이었지 싶었다.
‘그 동안 감사했어요, 독자님들.’
나는 그간 재미도 없는 내 이야기를 봐 준 독자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
아무리 어이 없이 끝나는 이야기라지만, 그래도 유종의 미는 거둬야 하지 않겠는가!
쿠폰과 댓글, 선작을 박아준 독자들이 보기에는 어이가 없는 마무리겠지만, 그래도 나는 나름 최선을 다했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죽으면, 현실로 돌아가려나? 아니면 끝?’
나는 허탈한 표정으로 그렇게 죽음 이후를 대비하고 있었다.
현실로 돌아간다면 그리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닐 것이었고, 그대로 끝난다면 조금 많이 억울할 것 같기는 했다.
내가 원해서 이런 세계에 온 것은 아니었으니까.
“음머?”
하지만 그 순간, 이변이 일어났다.
이변이 일어난 것은 엘프의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소, 아니 미노타우르스들이었다.
미노타우르스는 큼직한 눈깔을 굴리며, 주변을 살폈다.
도저히 지금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
잠시 눈깔을 굴리던 미노타우르스들은 화가 난 표정으로 자신의 도끼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도끼에 갈려 나가는 것은 같은 편인 오크들이었다.
거기다, 한 놈은 아예 자신을 수족처럼 부리던 엘프를 향해 도끼를 날리는 중이었다.
“이, 무슨 미친 상황이란 말인가!”
나는 황당한 표정으로 아비규환이 된 적진을 바라봤다.
미노타우르스가 날뛰기 시작하자, 오크들도 반응하기 시작했다.
미노타우르스에게 당한 동료들을 본 오크들은 결사 항전…을 하지 않고 그대로 줄행랑을 쳤다.
그야말로 약육강식, 적자생존에 확실히 길들여진 몬스터 다운 반응.
“빌어먹을!!!!”
오크들이 달아나는 것을 본 엘프는 낭패한 표정으로 고함을 질렀다.
미노타우르스의 도끼가 그의 시미터에 부딪쳐 튕겨 나가는 것이 보였다.
순식간에 상황이 변했지만, 이쪽이라고 편한 상황은 아니었다.
오크들이 도망치기 시작하자, 미노타우르스들이 기사들과 공주의 마차를 향해 돌격해 왔기 때문이었다.
기사들은 아까처럼 둘씩 짝을 이뤄 미노타우르스를 상대했다.
거기에 손이 빈 병사들까지 창을 꼬나 쥐며 달려드는 것이 보였다.
그 아무리 대단한 미노타우르스라고 해도 쪽수 앞에는 장사가 없는 법.
나는 하나 둘 쓰러지는 미노타우르스를 보며, 한숨을 돌렸다.
“살았….”
그 순간, 검은 창 하나가 날 향해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나는 다급히 제운종을 일으켜 화살을 피해냈다.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바라보자, 이미 엘프는 사라지고 난 뒤.
그곳에는 목이 반쯤 잘린 미노타우르스 한 마리만이 피를 뿜어내고 있는 중이었다.
‘도망친 건가?’
나는 미친 엘프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이 차라리 다행이다 싶었다.
솔직히 더는 싸우려고 해도 싸울 힘이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오크들까지 다 빠져나간 전장은 마지막 미노타우르스가 쓰러지며 정리되기 시작했다.
**
“….정체를 밝혀라!”
미노타우르스의 피로 칠갑을 한 기사가 내 목에 칼을 들이밀며 말했다.
칼을 들이민 기사 뿐만이 아니라 병사들도 나를 향해 창을 앞세우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도와달라는 시선으로 여기사를 바라봤지만, 그녀는 어이없게도 내 시선을 피했다.
가장 강대한 적을 처리했으니, 초대받지 않은 손님을 도울 이유는 없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저기, 일단 이것 좀 치우고…”
내가 손가락으로 살짝 검을 밀어내려 하자, 기사는 팔을 움직여 검을 더욱 바짝 내 목에 붙여왔다.
동시에 손가락과 목이 따끔하며, 피가 배어 나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인상을 찌푸리며, 기사를 노려봤다.
하지만 기사는 수틀리면 언제든 내 목을 베어 버리겠다는 기세로 다시금 질문을 던져왔다.
“두 번 묻지 않는다. 정체를 밝혀라.”
이미 두번 물었다는 것을 지적할까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진짜 목과 몸이 영원히 바이바이를 할 것 같은 상황.
나는 무슨 말로 이 위기를 넘길까 고민하며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성자님?”
그 순간, 다시 한 번 기적이 일어났다.
이곳에서 들릴 리 없는 목소리가 내 귀에 들려온 것이었다.
나는 놀란 표정으로 목소리가 들린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공주가 타고 있던 마차.
그 마차의 문을 열고 나타난 것은 공주가 아닌, 성녀였다.
성녀가 왜 공주의 마차를 타고 있는 지는 몰라도, 나에겐 지금 그녀가 지옥에서 만난 부처님 만큼이나 반갑게 느껴질 뿐이었다.
“성녀님!”
나는 벌떡 일어서며, 성녀를 불렀다.
내가 성녀와 아는 사이라는 것을 눈치챈 기사가 황급히 칼을 거두기 시작했다.
기사는 찜찜한 표정으로 성녀를 보며 물었다.
“아는 분입니까?”
“네. 이 분께서 제가 말씀 드렸던 니스의 성자십니다.”
성녀는 꽤나 날카로운 눈으로 기사를 쏘아보며 그렇게 말했다.
어딜 감히, 성자의 목에 검을 들이미냐는 듯 흉흉한 기색이 성녀의 몸에서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나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 더할 나위 없는 안도감을 느꼈다.
‘멋졍!’
솔직히 성녀의 원래 성격을 알지 못했다면, 이 순간 그녀에게 반해버렸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원래 그녀가 누구에게나 막 대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로 인해 자연히 감동은 반감되는 중이었다.
“괜찮으세요, 성자님?”
성녀는 기사를 한 번 노려보고는 나에게 달려와, 180도 달라진 목소리로 나를 향해 그렇게 물었다.
거기다 품에서 손수건까지 꺼내 내 목을 닦아오는 그녀의 모습은 누가 보더라도 성녀 그 자체라고 착각할 만 했다.
“….괜찮습니다. 그나저나, 왜 저 마차에 성녀님이?”
나는 내 목에 흐르는 피를 닦는 성녀의 손길을 받아들이며, 그렇게 질문을 던졌다.
“아, 그것이…”
“공주님을 뵙습니다!”
성녀가 뭔가를 말하려던 그 순간.
기사들과 병사들이 마차를 향해 하나같이 무릎을 꿇으며 큰 소리로 외치기 시작했다.
수십 명의 사람들이 마차 하나를 둘러 쌓고 동시에 무릎을 꿇는 장면은 나름 장관이라면 장관이었다.
하지만, 그 장관도 마차 밖으로 등장한 공주의 미모 앞에서는 그 힘을 잃었다.
달빛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만 같은 화려한 금발.
그 아래 작은 티조차 찾을 수 없는 아름다운 얼굴이 자리하고 있었다.
눈은 하늘의 별을 박아 놓은 것처럼 반짝였으며, 그 코 끝은 마치 세상을 가로지르는 산맥처럼 오똑 솟아 있었다.
입술은 아주 잘 익은 제철의 과일처럼 탐스러웠고, 그녀의 몸매는 마치 여신의 그것을 그대로 옮겨온 것처럼 흠잡을 곳이 없었다.
‘저게….공주?!’
나는 마치 세상의 아름다운 것이란 아름다운 것은 모조리 훔쳐다 놓은 것처럼 완벽한 얼굴을 한 여성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이 세계의 여자들이 지구에 비해 압도적인 미모를 지니고 있음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공주는 그 기준을 한참 초월해 있었다.
“….공주 전하를 뵙습니다.”
성녀가 한 템포 늦게 마차에서 내린 공주를 향해 예를 갖췄다.
어차피 같은 마차에 타고 있었으니, 이제 와서 예를 갖추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지만 공주의 외모는 그런 상황을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순간, 공주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하는 것이 느껴졌다.
내가 멍하니 서 있자, 성녀가 다급히 나를 팔로 치는 것이 느껴졌다.
그제야 내 실책을 눈치챈 나는 다급히 공주를 보며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이세계의 예법 따위 무시해도 그만이라는 생각 같은 것은 들지 않았다.
가만히 서 있는 내 모습을 기사들이 죽일 것 같은 눈빛으로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공주님을 뵙습니다.”
나는 얼른 성녀의 말을 따라 했다.
어려서부터 눈치 밥을 먹고 자란 효과가 나타난 것이었다.
공주는 내가 그렇게 예를 갖추고 나서야, 천천히 걸음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그녀의 발이 조금씩 나에게 가까이 오는 것이 보였다.
“….그대가, 니스를 구한 영웅이신가요?”
마치 하프를 연주하는 것 같은 아름다운 목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이끌려 멍하니 고개를 든 나는, 호기심이 넘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공주의 모습에 또 다시 넋을 잃었다.
솔직히 공주의 외모는 그만큼 아름다웠다.
“….고개를 숙여라!”
내 모습을 흘끗 거리며 확인한 기사 하나가 노한 목소리로 그렇게 소리쳤다.
이 얼굴이 앞에 있으면 누구라도 멍을 때리기 마련이었지만, 기사는 그런 사정 따위는 조금도 봐 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고개를 드세요.”
내가 다급히 고개를 숙이자, 공주가 나를 향해 그렇게 말했다.
한 쪽은 고개를 숙이라 하고, 한쪽은 고개를 들라고 하는 상황.
나는 당연히 더 높은 이의 말을 따라 고개를 들었다.
“공주님!!”
기사가 깜짝 놀란 목소리로 공주를 향해 그렇게 말했다.
나는 입술을 삐죽이며, 그런 기사를 바라봤다.
애초에 고개를 어떻게 하는 가보다 감히 공주에게 고함을 치는 것이 더 결례였지만, 기사 놈은 뇌가 근육으로 이루어진 것인지 그런 생각 따위는 조금도 하지 않는 듯 보였다.
“제가 얼굴을 뵙고 묻고 싶은 것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하지만 공주는 역시 공주였다.
그녀는 자신을 향해 고함을 친 기사를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타일렀다.
결국 공주의 그 부드러운 기세에 눌린 기사는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는 것으로 분을 풀었다.
“그대가 니스를 구한 영웅이신지 물었습니다.”
공주는 기사의 눈치를 살피는 날 보며 다시금 그렇게 질문을 던져왔다.
나는 재빨리 시선을 돌려 공주를 올려다 봤다.
보통 아래에서 올려다 보면, 사람이 원래 얼굴보다 못나 보이기 마련인데 공주는 그런 것도 없었다.
그냥 어디서 보든, 어떻게 보든 아름다운 얼굴.
나는 또 다시 멍해지려는 정신을 붙잡으며, 공주의 질문에 답했다.
“영웅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니스에 퍼진 병을 치료한 것은 제가 맞습니다.”
“그렇군요.”
공주는 별 감흥이 없는 표정으로 나를 보며 그렇게 말했다.
이럴 거면 왜 질문을 했냐 싶을 정도의 김이 빠지는 반응.
하지만 그 순간, 공주가 눈을 반짝이며 나를 향해 다시금 질문 하나를 던졌다.
“하나 더 질문을 던지지요. 이곳엔 무슨 이유로 계신 겁니까?”
나는 공주의 그 질문에 침을 꼴깍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