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화 〉술이 들어간다, 쭉~쭉쭉쭉!
“크읏, 이맛이지!”
내가 시스템을 이용해 구매한 술을 들이킨 병사 하나가 탄성을 터트리며 그렇게 말했다.
병사의 익숙한 듯한 반응을 봐서는 이 세계에서 흔한 술인 모양.
나는 호기심을 가지고 술잔에 찰랑이는 노란 빛깔의 술을 입에 털어 넣었다.
‘빼갈?’
혀가 타오를 듯 화끈한 맛이 혀를 자극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알 수 없는 향이 내 입 안에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빼갈과는 확연히 다른 맛이었지만, 굳이 내가 아는 술 중 비슷한 느낌을 찾자면 고량주와 가장 흡사했다.
목을 넘길 때 한 번, 그리고 다시 향이 위로 역류할 때 한 번.
거꾸로 두 번 타는 보일러처럼 독한 술의 기운이 내 위장을 타고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하하, 이 친구. 자기가 마시자고 하더니, 술도 잘 못 하는구만!”
병사 하나가 괴로운 듯 인상을 구긴 나를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지금껏 날 향해 묘하게 적대감을 가지던 모습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호쾌한 웃음이었다.
그랬다.
지구에서나, 이 세계에서나 사람이 친해지는 데 술 만큼 좋은 수단도 드물다는 것은 진리였던 것이다.
“아니, 니스를 구한 성자씩이나 되는 이가 이런 싸구려 술 맛을 알겠어? 당연한 거지.”
“니미. 성자라고 입에 금칠했냐? 자고로 높은 이 일수록 밑 바닥에 머물러야 하는 거야.”
“또 개똥철학 나왔네.”
술기운이 돌자, 병사들은 슬슬 말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멀리서 기사들이 못 마땅한 표정으로 이쪽을 노려보는 것이 보였지만, 딱히 제지를 하는 이는 없었다.
아무래도 기사단장이 웬만한 일은 그냥 넘어가라고 언질을 준 모양.
“적당히들 마셔라. 너희들은 공주님의 호위라는 중요한 일을 맞고 있다.”
끝내 참지 못한 기사 하나가, 그런 소리를 했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이미 술 맛을 본 병사들은 그런 기사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으니까.
“지랄이야, 지랄. 지나 잘할 것이지. 아까 봤어? 저 놈 미노타우르스한테 쫄아서 제일 먼저 마차로 달려갔다고.”
“술 먹었더니 기사가 만만하냐? 새꺄, 말 가려서 해.”
“하아, 씨발. 솔직히 쟤가 기사냐? 어? 좋은 집에서 태어나서 기사가 된 거지, 아니었으면 내 쫄다구였을걸?”
병사들은 오히려 자신들에게 주의를 주러 온 기사에 대한 험담을 한참이나 늘어 놓을 뿐이었다.
나는 적당히 분위기가 무르익은 것을 느끼며, 가장 목소리가 큰 병사에게 말을 걸었다.
“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응? 그래? 뭐든 물어봐. 숲 속에서 술까지 척척 내어주시는 성자님 말씀이라면, 내 뭐든 협조해야지.”
나는 그런 병사의 반응에 쓴 웃음을 지으며 질문을 던졌다.
고작 싸구려 술 한 병이 니스의 수많은 시민들의 목숨보다 더 값진 취급을 받는 느낌이었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어쨌거나 병사들이 나에게 마음을 열었다는 것이었다.
“그, 실비아 부단장님은 어떤 사람입니까?”
“실비아 부단장?”
“그 여자는 왜? 관심있어?”
술도 돌았겠다, 갑자기 나온 여자 이야기에 병사들이 눈을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런 병사들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우습게도 병사들의 평균적인 연령은 기사들보다 오히려 많았다.
대부분이 30대 후반에서 40대 정도로 보이는 병사들과 달리, 기사들은 단장을 제외하고는 거의가 20대의 외양을 하고 있었다.
어쨌거나 중요한 것은 병사들이 아저씨 부대라는 것이었고, 술 취한 아저씨들의 입담은 이쪽이나 저쪽이나 비슷하기 마련이었다.
“캬, 여자 볼 줄 아네. 실비아 부단장 괜찮지. 좀 작아서 그렇지, 예쁘잖아?”
병사 하나가 자신의 가슴에 양 손을 가져다 대며 낄낄 거렸다.
당장 목이 잘려도 할 말이 없을 정도의 실언이었지만, 이 자리에서 그걸 꼬집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걔 별로. 애가 좀 맹하지 않냐? 괜히 기사들이 따돌리는 게 아니라니까?”
“하아, 씨발. 그게 맛이라고. 응? 동료들한테 따돌림 당하는 여기사. 조금만 잘해줘도 넘어오게 돼 있다니까?”
“지랄한다. 걔가 미쳤냐? 너 같은 늙다리한테 넘어오게?”
질문에 대한 정확한 답은 아니었지만, 나는 병사들의 잡담을 통해 대충이나마 실비아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래요? 애가 좀 맹해요?”
“아아, 그게 맹하다고 해야 할지 애가 좀 유도리가 없다고 해야 할 지. 아무튼 좀 특이해. 그게 언제였더라? 한 이년 전쯤이었나?”
병사들은 나에게 실비아가 그간 벌인 기행들을 떠들기 시작했다.
그녀가 신입 기사 시절 법대로 해야 한다며 비리를 저지른 고위 귀족에게 들이 받았던 일부터, 잠시 기다리고 있으라는 상관의 명령에 며칠이나 그 자리에서 가만히 대기하고 있었던 일 등 하나같이 평범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들이었다.
“근데, 그거 기사의 표본 같은 거 아닌가요?”
나는 신이 나서 실비아의 사건들을 읊어대는 병사들에게 그렇게 물었다.
물론 정도를 지나친 일들이 많았지만, 대부분은 실비아의 행동이 옳은 쪽에 치우쳐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아, 뭔 개소리를….?”
“아니네. 맞네. 생각해보니까 얘 말대로 실비아가 잘 못한 건 없잖아?”
“응?”
“기사라면 원래 실비아 같아야지. 내가 어릴 때 읽던 소설들에 나오는 기사들과 가장 비슷한 건 오히려 실비아야.”
“….그러네, 씨발? 그렇게 생각하니까 또 그 정신 나간 애가 가장 멀쩡한 기사잖아? 하아, 이 놈의 왕국이 진짜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모르겠구만.”
내가 던진 작은 돌멩이가 병사들 사이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실비가 정상이냐 아니냐를 놓고 설전을 펼치던 병사들이, 이제는 왕국의 미래까지 걱정하는 상황이 된 것이었다.
당장이라도 공주가 뛰쳐나와 칼춤을 춰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이었지만, 이미 술에 취한 병사들은 두려움이라는 것 자체를 망각하고 있었다.
“근데, 그 실비아는 어떻게 부단장까지 된 겁니까? 따돌림을 당한다면서요?”
나는 왕국의 미래를 걱정하는 아저씨들을 보며 그렇게 물었다.
“뭘 물어? 당연히 걔 집안이 잘 나가니까 그렇지.”
“예?”
나는 얼빠진 표정으로 병사를 보며 물었다.
정의감 넘치는 얼치기 기사님의 집안이 잘 나간다니, 또 묘한 배경이 툭 튀어나온 탓이었다.
“실비아네 집안이 그 왕실과 얽혀 있거든. 사실은 그 고위 귀족도 실비아네 집안에 비비면 조금 힘이 딸렸지. 아, 생각해보니, 걔가 그래서 들이받은 거네. 지 집안 힘 믿고.”
“개소리 하네. 야, 그 때 실비아 걔 정직 당했잖아. 걔네 집안 사람들도 골칫덩이로 여기는 구만 무슨.”
“아니, 내 말은 그래도 믿는 구석이 있으니까 대거리 한 번 해 본거라는 거지.”
“믿는 구석은 씨발. 그 집구석이나 저 집구석이나 서로 구린 건 마찬가진데. 솔직히 실비아 걔가 오바한 거야. 걔네 집안도 온갖 더러운 짓 다하는 곳이잖아.”
나는 다시 시끄러워진 병사들을 가만히 지켜봤다.
나는 그제야 대충이나마 실비아라는 여자에 대해 감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운 좋게 힘 좀 쓰는 집안에서 태어난 열혈 기사, 그게 내가 파악한 실비아의 정체였다.
‘이거, 걸려도 된 통 걸렸네.’
나는 암담한 표정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조금이라도 더러운 일에 몸을 담은 적이 있는 상대라면 타협의 여지가 있겠지만, 실비아의 행적을 생각하면 그게 통할 가능성은 희박해 보였다.
‘아니. 다시 생각해보자. 어쨌든 지금까지 조용한 걸 보면, 일단 아무에게도 말을 하지 않았다는 건데….뭔가 이유가 있을 거야.’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어쨌거나 폭탄이 알 수 없는 이유로 터지지 않는 상황.
그 이유만 알아낸다면, 영원히 터지지 않게 막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닐 듯 했다.
“참, 그나저나 기사단장님은 왜 그렇게 성녀님을 싫어하는 겁니까?”
하지만 실비아가 입을 다물고 있는 이유는 병사들을 통해 알아낼 수 없었다.
결국 그 문제를 뒤로 미뤄 둔 나는 이왕 만든 술자리에서 최대한 많은 것들을 얻기로 결심한 나는 아까 전 마음에 걸렸던 기사단장의 행동을 물었다.
“에?”
“너, 어디 딴 세상에서 왔냐?”
나는 꽤나 날카로운 병사의 지적에 숨을 급히 들이켰다.
하지만 이내 병사가 별 생각 없이 던진 말이라는 것을 파악한 나는, 사람들에게 알려진 대로의 변명을 늘어놓았다.
“제가 산 속에만 있다 나와서요.”
“아아, 그래? 참, 약초꾼인가 뭔가라고 했었지? 진짜였나 보네.”
내 설명에 병사 하나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나는 그 병사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지금껏 왜 병사들이 나에게 묘한 시선을 보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병사들 사이에는 내가 교황의 사생아라는 소문이 돌았던 모양이었다.
“흐흐. 약초꾼이 여신님의 신탁을 받는 세상인데, 교황 그 늙은이도 묘자리 봐둬야 하는 거 아냐?”
“내가 여신이라도 그 음흉한 늙은이랑 말 섞기는 싫겠다.”
다시 이야기가 중구난방으로 흘러갔다.
그리고 데메테르 교에 대한 병사들의 감상은 조금 특이했다.
데메테르 여신에 대한 믿음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교황이나 교단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왕국이랑 데메테르 교단이랑 사이 안 좋아.”
“그래. 공주님이랑 성녀님이랑 같은 마차에 타고는 있지만, 마차 안 분위기 살벌할 걸?”
병사들은 한참동안 교황을 씹고 나서야 내 질문에 그렇게 대답을 해 주었다.
“왜 안 좋아요? 데메테르가 왕국의 국교 아닌가요?”
“아아, 진짜 너 산 속에만 살았구나! 예전에는 좋았던 적도 있었지. 그러니까 그 예전이 몇 백 년 전이긴 하지만 말이야. 데메테르 교가 국교가 된 것도 왕국이 만들어질 때였거든.”
“그 건국신화 말이지? 그거 어차피 뻥 아니냐?”
나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병사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왕국, 그러니까 로엔 왕국의 건국신화는 흔해빠진 영웅담과 닮아 있었다.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바로 왕국의 시조인 로엔이라는 용사였고, 그 로엔의 동료가 바로 데메테르 교의 최초의 성녀였다.
모험을 끝낸 일행의 리더가 왕국을 세우고, 동료가 믿던 종교는 그 나라의 국교가 됐다는 이야기였다.
“조금씩 사이가 틀어지긴 했는데, 이번 교황이 즉위하고부터는 최악으로 치달았지.”
시작은 사이 좋은 동료 사이였지만, 그 후대까지 동료인 것은 아니었다.
왕국을 물려받은 로엔의 후대들은 자신들이 왕국의 온전한 주인이 되길 원했고, 데메테르 교의 교황들은 왕권 위에 신이 있다는 것을 인정받길 원했다.
결국 두 세력의 권력 다툼은 계속되었고, 그 결과 한 때는 목숨을 맡기던 동료가 이제는 원수가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진짜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네.’
이세계에 와서 벌써 몇 번을 느끼는 것이지만, 나는 사람 사는 곳이 다 비슷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실감하고 있었다.
어쨌거나 왕국과 데메테르 교단의 사이가 좋지 못하다는 것은 나에게는 호재였다.
‘교단에는 쫓겨도, 왕국에서는 날 안 쫓을지도 모른다는 소리니까.’
내가 한 일.
그러니까 정확히는 성녀의 입에다 사정을 해댄 것이 밝혀지면 가장 큰 타격을 입는 것은 당연히데메테르 교단이었다.
그저 성녀 하나의 일탈로 치부하기에는, 성녀라는 이름이 가지는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았다.
당연히 신자들은 성녀를 비난할 것이고, 그런 성녀를 인정한 교단에 의문을 품을 것이었다.
국왕이 평범한 정치 감각 정도만 지녔어도, 그것을 빌미로 삼아 신권을 찍어 누르는 것도 가능할 정도의 사안이었다.
‘도대체, 난 무슨 일을 벌이고 다니는 거냐!’
스스로 한 일을 되돌아보니, 꽤나 거창한 짓을 했구나 싶었지만 애초에 나는 살아 남는 것 외에는 별다른 생각 없이 했던 일들이었다.
물론 거기에 약간의 사심이 포함되기는 했지만, 근본적으로는 그렇다는 소리였다.
‘음…그런 상황이라면, 실비아 부단장이 입을 닫고 있는 게 더욱 이해가 안 되는군.’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실비아의 얼굴을 떠올렸다.
어딘가 얼 빠진 표정의 미녀의 얼굴이 떠올랐지만, 그게 그녀가 멍청하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아무리 실비아라고 해도, 나와 성녀의 일이 어떤 파급 효과를 지니고 있을 리 모를 수는 없었다.
하다못해 내 눈앞에서 술에 취해 떠드는 병사들마저도 알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
아마도 성녀와 나의 염문설을 증언하는 순간, 그녀의 가문은 떡상을 할 수도 있었다.
가장 큰 정적을 치워준 가문에 콩고물을 나누어주는 것 정도야, 국왕도 마다할 이유가 없을 테니까.
‘일단, 이유부터 찾는다.’
나는 실비아가 입을 닥치고 있는 이유를 찾는 것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장 처음으로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상기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