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화 〉정치 놀음
‘으으, 머리야. 머리 짜개지겠어!’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인상을 찡그렸다.
전날, 병사들에게 끝까지 붙잡힌 탓에 밤이 다 샐 때까지 술을 퍼먹었기 때문이었다.
“새끼, 약해가지고는. 일어나, 인마.”
전날 밤 같이 술을 마셨던 병사 하나가 나에게 물 주머니를 내미는 것이 보였다.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그는 숙취 따위는 전혀 없는 것처럼 쌩쌩한 얼굴로 야영지를 정리하는 중이었다.
‘역시 아저씨는 위대하구만.’
나는 그 병사의 모습에 감탄을 하면서도 물을 받아 먹었다.
시원한 물을 마시자, 머리가 조금씩 돌아가는 것이 느껴졌다.
일단 목격자가 여기사, 실비아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도 없는 진실.
문제는 그 실비아가 왜 입을 다물고 있는지를 모르겠다는 거였다.
‘어떻게든 둘이 이야기 할 시간을 만들어봐야 할 것 같은데…’
나는 멀찍이서 병사들을 지휘하는 실비아를 바라봤다.
어젯밤 술자리에서도 느낀 것이었지만, 그녀를 따돌리는 기사들과는 달리 병사들은 실비아를 그리 싫어하지 않았다.
맹하고, 덜 떨어졌다고 욕을 할 지는 몰라도, 그 안에는 요령 없이 우직하게 사는 아가씨에 대한 안타까움이 잔뜩 묻어 있었다.
‘저래서야, 원…’
순간 나는 실비아와 눈이 마주쳤다.
야영지의 정리를 확인하던 실비아가 우연히 내 쪽을 바라봤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누가 봐도 부자연스러울 듯한 움직임으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녀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 쉽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나마 잠잠해지던 머리가 다시금 지끈거렸다.
‘정 안되면 성녀한테라도 부탁을 해야지.’
실비아가 멀리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니고, 붙잡고 대화를 할 생각이라면 지금 당장이라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전 날, 기겁하는 그녀의 반응을 떠올리면 절대로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그녀에게 말을 걸면 안됐다.
그녀는 그러니까 폭탄.
건들기만 하면 다 터트리는 폭탄 같은 존재였다.
‘뭐, 터지면 나만 죽을 뿐이겠지만 말이지.’
나는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는 일어나 병사들을 돕기 시작했다.
어쨌거나 전날의 술자리로 마음을 연 것은 병사들만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 세계의 사람들도 지구와 다를 것 없이 하루 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일 뿐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그렇게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은 누구라도 존경을 받을 가치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병사들 대부분이 아저씨인 이상에야, 한국에서 자란 나로서는 그냥 구경만 하고 있는 것이 더욱 불편했다.
“어이, 본. 거기 그 불 꺼야 해.”
“본이야, 나무 치워, 나무.”
어쩐지 그 아저씨들이 나를 마구잡이로 부려대는 것 같기는 했지만, 기분 탓일 것이었다.
**
“뭐해요, 지금?”
내가 병사들과 함께 야영지를 정리하고 있자, 마차에서 나온 성녀가 나에게 다가와 물었다.
언제 씻었는지, 얼굴에 약간의 물기가 감도는 모습.
‘이렇게 보면, 그냥 예쁘게 생긴 여자앤데.’
나는 성녀를 보며 그렇게 감탄을 터트렸다.
조금 많이 꼬인 성격의 소유자였지만, 막 씻은 모습은 딱 스무 살의 예쁘장한 여자아이 그 자체였다.
물론, 예쁘장하다고 표현하기에는 조금 화려한 외모기는 했지만.
“그냥 병사들 돕고 있습니다. 왜요?”
나는 괜히 성녀를 보며 틱틱 거리며 말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내가 방금 전 그녀에게 심장이 두근거렸다는 사실을 들킬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역시 성녀는 성녀.
그녀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고선, 내 주위에 있는 병사들을 째려보기 시작했다.
순간, 그런 성녀의 태도에 주위에 늙수그레한 병사들이 빠르게 자리를 뜨는 것이 보였다.
나는 기가 막힌 표정으로 성녀를 바라봤다.
눈 빛 한 방으로 그 막 나가는 아저씨들을 제압한 것도 우스웠지만, 사실은 눈 앞의 조그만 여자애한테 겁을 먹고 자리를 피하는 아저씨들의 태도도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사실이었다.
“하아, 저기요. 성자님. 본인이 누구인지 자각은 있는 거에요?”
성녀는 한숨을 푹 내 쉬며 나에게 그렇게 말했다.
“….뭐가요?”
“그 쪽 성자라고요, 성자. 그것도 성녀가 공식으로 인정한 성자. 그런 사람이 병사들이랑 어울려요? 도대체 우리 교단의 체면은 생각이나 하고 있는 거예요? 진짜 여기서 믿을 거라고는 딱 우리 둘 뿐이라고요!”
나는 성녀의 말에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전날 내 정액을 달라고 사정하던 때와는 태도가 너무나도 달라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그거야 성녀님 입장이고, 저는 상관 없지 않습니까?”
나는 성녀를 보며 그렇게 말했다.
그녀가 기사들이나 병사들과 사이가 좋지 못한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나까지 그럴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잘 들어요. 왕성 쪽 사람들은 우리를 싫어해요. 그러니까 혹시라도 그 쪽한테 뭔가 잘 해주는 거 같으면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거라고요. 웃으며 다가온다고 믿지 마요. 적이니까.”
나는 성녀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녀의 말을 잘 듣겠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저, 지금까지는 그냥 타고난 성격이 잔뜩 꼬인 거라고만 생각했던 그녀의 행동이 이제는 어느 정도 이해가 됐기 때문이었다.
‘말을 배우기도 전에 정치 질부터 배운 모양이군.’
나는 약간 안쓰러운 얼굴로 성녀를 바라봤다.
그녀에게는 세상에 내 편과, 남의 편 둘 밖에 존재하지 않는 듯이 보였다.
무척이나 편협한 생각이었지만, 그렇다고 내가 그걸 바꿔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20년을 그런 세상 속에서 자라 온 그녀에게, 내가 아무리 바른말을 떠들어 봤자 먹힐 리 없었으니까.
“성녀님은 그렇게 하십시오. 저는 제가 편한대로 하겠습니다.”
“…내 말 무슨 뜻인지 못 알아 들었어요? 저 사람들 당신 약점만 찾고 있다니까?”
내 태도가 답답했던 탓인지, 성녀의 목소리가 정도 이상으로 커졌다.
기사들과 병사들이 귀가 먹지 않은 이상, 그 목소리를 못 들을 이유는 없었다.
순간, 야영지를 치우던 병사와 기사들 모두가 성녀를 바라보았다.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눈치 챈 성녀가 얼굴을 붉히는 것이 보였다.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아주 살짝 들기는 했지만, 대 놓고 적이라고 떠든 성녀의 말을 수습할 방법 따위는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무슨 일입니까?”
그때, 은쟁반에 옥구슬이 구르는 것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봤다.
여전히 아름다운 얼굴의 공주가 무심한 눈길로 야영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공주의 뒤에 서 있는 기사단장이 못 마땅한 표정으로 성녀를 노려보는 것이 보였다.
그 반응으로 봐서는 공주 또한 성녀가 한 말을 들었을 것이 분명했다.
‘무슨 속셈이지?’
나는 시침을 떼고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는 공주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순간, 머릿속에서 퍼즐이 조립되듯 어제 공주가 날 보고 지었던 아쉬운 표정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공주는 내가 성녀 쪽, 아니 데메테르 교단 쪽의 사람이라는 것을 아쉬워한 것이었다.
‘이쪽이나, 저쪽이나 정치 노름을 하느라 정신이 없구만.’
나는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공주를 흘끗 바라봤다.
그녀에 대해 아는 거라고는 개뿔도 없었지만, 어쩐지 그녀는 그런 더러운 협작질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잘 나신 성녀님께서 저희들 따윈 못 믿으시겠답니다.”
상황을 지켜보던 기사 하나가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공주를 향해 그렇게 말했다.
순간, 성녀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이 보였지만, 아무리 그녀라도 공주 앞에서는 어쩔 수가 없는 모양.
성녀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는 공주에게 말했다.
“약간, 아주 약간의 오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공주님.”
“오해는 무슨!”
기사 중 누군가 성녀를 비난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녀는 그깟 비난에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니, 어차피 자신이 조심해야 하는 것은 공주뿐이라는 듯, 누군가의 그 비난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모습이었다.
“하아. 성녀. 그대가 우리 왕국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저는 그대를 적대할 생각이 없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공주는 무심한 눈길로 성녀를 보며 그렇게 말했다.
“물론 공주님의 말씀이야 믿습니다만, 왕국의 기사들은 상황이 조금 다르지 않습니까?”
성녀는 방금 전 자신이 무릎을 꿇었다는 것도 잊은 것처럼 공주에게 그렇게 물었다.
그런 성녀의 말에 기사들이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몸을 움찔거렸지만, 공주는 한 손을 살짝 들어 그들을 제지했다.
“어차피 니스까지 얼마 남지 않았어요. 그리고 저는 문제가 일어나길 바라지 않습니다.”
공주는 기사들을 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마법이라도 쓴 것처럼 그 자리의 모든 사람들이 공주의 목소리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명을 받듭니다.”
가장 먼저 기사 단장이 무릎을 꿇으며, 그렇게 외쳤다.
그에 이어 기사들이, 그리고 모든 병사들이 무릎을 꿇었다.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나는 공주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공주는 아주 잠시간 나를 바라보다 그대로 몸을 돌려 마차로 향했다.
‘카리스마 개 쩔어!’
공주는 정치 혐오증에 걸린 나 조차도, 한눈에 반할 정도로 멋있게 보였다.
**
“야, 깡 좋다? 우리 공주님 앞에서 멀뚱히 서 있고?”
“아니, 그게 타이밍을 놓친 거라니까요?”
마차는 다시 출발했고, 나는 병사들과 어울려 마차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어제 술을 마셨기에 제법 친해진 병사들이 농담을 걸어왔지만, 솔직히 내 신경은 앞서 가고 있는 실비아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실비아 또한 그런 내 시선을 느꼈는지, 몇 번인가 뒤를 돌아봤지만 그녀는 나와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고개를 앞으로 다시 돌렸다.
‘하아…어떻게 해야 둘이 이야기를 할 순간을 만들지?’
나는 복잡한 표정으로 그런 실비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공주의 말 때문에 상황은 더 복잡하게 꼬여 버렸다.
기사들은 아예 나나 성녀를 없는 사람 취급했고, 성녀 또한 그런 분위기에 만족을 한 듯 싶었다.
문제는 그 기사들 중에 실비아도 당연히 포함이 되어 있다는 것.
이 분위기 대로라면, 아마도 내가 실비아에게 말을 거는 순간, 모든 기사들이 나와 그녀를 감시하듯 바라볼 것이었다.
‘모르겠다. 일단 능력치나 업 시켜 두자.’
나는 병사들 사이에서 걸으며 자연스럽게 연재창을 열었다.
봉영기 [32세/작가] (+38)
[근력]10 [민첩]10 [체력]10 [마력]35 [행운]12
그간 능력치 배분을 게을리 한 덕분에 포인트가 잔뜩 쌓여있는 것이 보였다.
‘아니, 선작은 계속 느는데, 왜 조회수는 왜 이 따위?’
나는 연재창을 보며 그렇게 불평을 늘어 놓았지만, 그런다고 바뀌는 것은 없었다.
‘하아. 빨리 빨리 뚫을 테니까, 많이들 좀 봐 주십쇼!’
나는 독자들을 향해 그렇게 외치며, 스탯을 분배하기 시작했다.
마법사가 내 적성에 가장 알맞다는 것을 확인한 나는 마력에 스탯을 하나씩 넣기 시작했다.
한번에 스탯을 넣지 않은 이유는 마력 능력치와 서클의 상관관계를 파악하기 위함이었다.
‘35에 2서클이면…계산을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마력이 오른다고 꼭 서클이 오를 것이라는 보장은 없었지만, 작가로서의 감이 분명 둘이 연관이 있을 것이라고 외치고 있었다.
[마력 수치가 일정치를 초과했습니다.]
[새로운 서클을 해방합니다.]
그리고 마력 스탯이 정확히 45가 된 순간, 나는 3서클 마법사가 되었다.
마력 수치 45가 기준점이라는 것은 알게 된 나는 마력 15당 서클이 하나씩 느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래, 아예 4서클로 올리자. 그래도 한 6서클쯤 되면 사람 노릇은 하겠지.’
아직 남은 스탯 포인트는 28개.
나는 다시 하나씩 마력 능력치에 포인트를 갈아 넣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력을 60까지 찍어 보았지만, 4 서클에 오를 거라는 기대와는 달리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뭐야? 이거…개 씨발!’
나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아무 변화가 없는 연재창을 바라봤다.
다 늙어서 수열이라니.
아까 아침에 다 깬 술기운이 다시금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오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일단, 달린다.’
나는 남은 포인트를 마력에 다 꼴아박기 시작했다.
[마력 수치가 일정치를 초과했습니다.]
[새로운 서클을 해방합니다.]
그리고 마력 수치가 딱 70을 찍은 순간, 눈 앞에 다시금 메시지가 떠올랐다.
‘이거, 도대체 뭐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