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화 〉투명화
“여기가 니스로군.”
병사 하나가 니스의 성문 입구를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듣기로는 그 병사는 왕국의 수도에서 태어나 다른 도시를 한 번도 가 본적이 없다고 했다.
나는 물끄러미 니스의 성문을 바라보며 감회에 젖었다.
순간, 마지막에 여관 앞에서 나를 배웅하던 하얀이와 토마스, 그리고 여급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 세계에서 맺은 인연들.
그리고 우습게도 나는 그들이 있는 여관을 집이라고 느끼고 있었다.
‘일단, 여관에 가서 씻고 잔다. 무조건 잔다!’
하지만 감회에 젖은 시간은 무척이나 짧았다.
온 몸을 덮쳐오는 피로감이 그 감상을 급속도로 사그라들게 만든 것이었다.
‘어젠, 진짜 미쳤었지.’
나는 전날 밤 숲에서 있던 일을 떠올리며 몸서리를 쳤다.
스위치가 들어온 실비아는 그야말로 미친 여자나 다름 없었다.
그녀는 질색을 하는 나에게 끝없이 안겨 왔다.
아니, 정확히는 그녀가 나를 마음대로 품었다.
총 4번에 이르는 사정으로 나는 거의 영혼까지 빨리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런 경험이 처음은 아니었다.
희대의 비치 캐서린에게 당했을 때도 비슷한 느낌을 느꼈었으니까.
‘어엇? 쟤 왜 또 날 보냐?’
나는 멀리서 야릇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 실비아의 모습에 절로 몸이 떨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마치 초식 동물이 육식 동물을 만났을 때의 본능적인 공포감과 크게 다르지 않을 듯싶었다.
전날 까지는 실비아가 내 시선을 피했다면, 이제는 상황이 완전히 반대가 되어버린 상황.
나는 나를 계속 흘끗 거리는 실비아의 시선을 피하기 바빴다.
**
성문 앞.
공주의 마차가 나타난 것 때문에, 니스의 성문앞은 그야말로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나 혼자서 움직일 때는 하루 하고도 반나절이 걸렸던 거리가, 공주의 마차와 함께 움직일 때는 3일이나 걸린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물론, 제운종을 사용했을 때의 움직임이 병사들의 이동 속도보다 훨씬 빠르다는 것도 그 이유였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공주라는 존재를 호위하는 기사들의 방식이었다.
이미 미친 엘프놈에게 한 번 습격을 당해서인지, 기사들은 호위에 더욱 신중을 기했다.
대충 기사들이 한 짓을 설명하자면, 마차가 움직이기 전에 병사들을 보내 수상한 것이 없는 지 확인하고 약속된 포인트까지 마차를 이동시키는 행위를 반복했다.
당연히 움직임은 더뎌질 수밖에 없었지만, 공주는 그런 기사들의 행위에 어떠한 불만도 나타내지 않았다.
덕분에 이미 니스의 성문에 먼저 도착한 병사들이 공주의 마차가 도착할 것임을 알렸고, 그 공주의 눈에 들어보려는 온갖 어중이떠중이 들이 싹 다 성문 앞에 모여 있는 상황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몰려든 인파 때문에 공주의 마차는 성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럼 저는 이만 따로 움직이겠습니다.”
시장 통이나 다름 없는 니스의 성문 앞을 보며, 나는 기사단장을 향해 그렇게 말했다.
가뜩이나 나를 마음에 들지 않아 하던 기사단장은 반색하며 나를 바라봤다.
“그러시겠습니까?”
아무래도 내가 알아서 빠져준다니 기쁜 모양.
기사단장의 얼굴에 떠오른 웃음에 괜한 심통이 나기는 했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공주 일행과 함께 저 수많은 군중들을 뚫고 들어갈 생각은 없었으니까.
그러니까, 절대로 아까부터 나를 먹이 감 보듯 바라보는 실비아가 무서워서는 아니었다.
“음…”
기사단장과 이야기를 끝낸 나는, 슬쩍 실비아를 바라봤다.
그녀는 나에게 뭔가 말을 하고 싶어 하는 표정이 역력했지만, 주위의 시선을 의식한 것처럼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래도, 말 하나는 잘 듣네.’
나는 그런 실비아의 반응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4번이나 따 먹은…아니, 따 먹힌 대가로 나는 그녀에게 나에 관해 함구해 달라는 부탁을 한 보람이 있었던 것이다.
‘천족이 세상에 나왔다는 것은 아직 알려지면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러니 실비아 부단장. 나에 대한 어떤 정보도 다른 이들에게 말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오늘 있었던 일도 마찬가지고요.’
나는 내가 그녀에게 했던 어설픈 거짓말을 떠올리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실비아와 대충 눈 인사를 마친 나는 천천히 마차로 다가갔다.
그래도 잠깐이라도 동료로 있었던 이상, 공주에게 아무런 말도 없이 떠날 수는 없었으니까.
내가 마차로 다가서자, 기사 단장이 마차의 문을 열고 뭔가를 보고하는 것이 보였다.
“혼자 간다고요?”
기사 단장은 곧 바로 마차 문을 밀며 뛰어 나온 성녀에게 밀려 몇 걸음이나 뒷걸음질을 쳐야만 했다.
기사단장의 표정이 불쾌함으로 물들었지만, 성녀는 그에게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날 닦달하기 시작했다.
“그냥 이렇게 간다고요? 신탁은 어쩌고?”
“제가 뭐 도망가는 것도 아닌데요. 볼 일이 있으면 찾아 뵙겠습니다.”
“아니…그게 지금 말이 되는 소리에요?”
성녀는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순간 병사들과 기사들의 시선이 집중되는 것을 확인한 성녀가 얼굴을 붉혔다.
사람들의 시선에 기세가 조금 누그러진 성녀가 나를 향해 귓속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럼 내 병은 어쩌고요?”
“….그건, 당분간은 괜찮을 겁니다.”
나는 성녀를 향해 그렇게 말했다.
당분간이 아니라 아마 영원히 그대로 두어도 별 탈은 없을 것이었다.
내가 당분간이라고 한 것은 전날 밤 실비아와 있었던 일의 여파로 당분간 휴식이 필요하기 때문.
‘진짜 정력제라도 사서 먹어야 하나?’
내가 그렇게 생각을 하는 사이, 성녀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리고는 아무 말도 없이 마차로 다시 들어갔다.
마치 삐친 여자친구처럼 행동하는 성녀의 모습에 조금 어이가 없었지만, 나는 마차 앞에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직은 공주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공주님이 허락했네.”
이내 마차 안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인 기사단장이 나에게 다가와 그렇게 말했다.
공주는 따로 내 얼굴을 보지 않을 생각인 모양.
순간 서운한 감정이 들기는 했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공주가 마차에서 내리면 안 그래도 정신이 없는 성문 앞이, 그야말로 지옥으로 변할 것 같았다.
“네.”
나는 그렇게 말하며, 슬쩍 제운종을 사용했다.
몸이 한 없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끼며, 나는 빠르게 공주 일행과 멀어졌다.
니스는 나름 왕국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의 대도시였다.
당연히 도시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하나가 아니었고, 나는 한적한 문을 골라 니스의 안으로 들어섰다.
익숙한 골목 몇 개를 지나자, 내 스위트 홈인 로엔하임 여관이 눈에 들어왔다.
“아저씨이이잇!!!”
내가 여관 앞에 다다르자, 자동으로 문이 열리며 조그마한 인영 하나가 튀어나왔다.
내 허리를 간신히 넘는 키의 인영은 조금도 속도를 줄이지 않은 채로 내 품에 달려 들었다.
나는 간신히 두 손을 뻗어 그 작은 몸을 껴안았다.
‘강아지냐?’
그렇게 내 품에 안긴 인물의 정체는 하얀이.
사실 나이로 따지자면 몇 살 차이도 안 나는 상대였지만, 굳이 그걸 꼬집을 필요는 없을 듯 했다.
하얀이가 열고 나온 여관 문 너머로 여급의 모습이 보였다.
고작 며칠을 안 봤을 뿐이지만, 꽤나 반가운 얼굴이 아닐 수 없었다.
여급은 여러모로 복잡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다, 한숨을 푹 쉬고는 밖으로 나왔다.
“왔어?”
“응.”
담백한 여급의 인사에, 나 또한 담백한 대답을 했다.
마치 근처 시장에라도 다녀온 것처럼 대수롭지 않은 인사였지만, 어쩐지 그런 인사가 더 내 마음을 편하게 만들고 있었다.
“…나 좀 씻고 싶어. 물 좀 준비해줘.”
나는 여급에게 그렇게 말했고, 그녀는 별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공주를 습격하러 떠났던 내 모험은 나름 훈훈한 결말을 맞이하고 있었다.
**
“뭐야? 그러니까 100까지 채워야 5서클이 된다고?”
피곤함을 덜어내기 위해 샤워를 했지만, 여급의 스페셜 서비스로 인해 오히려 피곤함은 더 심해진 상태였다.
하지만 피곤함이 지나쳐서인지 잠은 오지 않았고, 그냥 시간을 버리기 아까웠던 나는 연재창을 열어 놓고 있었다.
그리고 평소처럼 댓글들을 먼저 읽던 나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댓글을 하나 발견했다.
나 혼자서는 절대로 풀지 못했을 마력과 서클의 상관관계를 독자 하나가 풀어 놓은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집단 지성의 힘!’
물론 집단 지성이라고 표현하기엔 어느 독자 한 명이 혼자서 푼 것뿐이지만, 어쨌거나 덕분에 모르고 있던 사실을 하나 알게 된 것은 나에게 상당한 이득이었다.
![선물이 도착했습니다.]
![독자님이 당신에게 [투명화] 마법을 선물했습니다.]
순간 눈 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꽤나 갑작스러운 타이밍이었지만, 나는 놀라지 않았다.
‘이게 이렇게 적용된다고?’
독자 중 하나가 쿠폰을 보내며, 나에게 마법을 배우게 해달라는 댓글을 남긴 것을 이미 본 뒤였기 때문이었다.
어쨌거나 선물을 받았으면, 쓰는 것이 도리.
나는 피곤함을 억누르며, [투명화]를 사용했다.
순간, 내 눈 앞에 보이던 손이 투명하게 변하는 것이 보였다.
‘된 건가?’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거울 앞으로 향했다.
분명 거울 앞에 서 있었지만, 거울 속에는 내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꽤나 생소한 그 느낌이 자못 섬뜩하게 느껴졌지만, 나는 조금씩 장난끼가 발동하는 것을 느꼈다.
내가 없을 때, 하얀이와 여급이 어떻게 지냈는지 호기심이 동한 것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는 밖으로 향했다.
운이 좋게도 1층 로비에 하얀이와 여급이 함께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발소리를 죽여 1층 로비의 구석진 자리에 앉아 둘을 관찰했다.
그리고 그 관찰 결과, 나는 전혀 예상하지도 못했던 둘의 진 면목을 볼 수 있었다.
“밥 내놔라. 여급아.”
“…..하아? 내가 네 식모야? 나한테 밥 맡겨놨니?”
“흥! 나는 아저씨가 반짝이는 금덩이를 너한테 준 것을 다 알고 있다!”
하얀이의 모습은 사실 조금 충격적이었다.
내 앞에서는 귀여움을 떨던 애가, 여급을 상대할 때는 마치 왕이라도 된 것처럼 굴고 있었다.
나는 그제야 여급이 왜 복잡한 표정으로 날 바라봤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하아? 도대체 왜 나만 만만하게 여기는 건데?”
“그것은 내가 너보다 나이가 많기 때문이지!”
“아니, 정작 밥 주는 건 난데, 왜 걔한테만 살살거리냐고! 그리고 나이 타령 할 거면, 그 아저씨 소리부터 집어 치우라고!”
여급은 잔뜩 서운한 표정으로 하얀이를 향해 그렇게 소리쳤다.
여급의 그 표정이 마치 애정을 다 해 키웠지만, 정작 꾹꾹이는 다른 사람에게 해주는 고양이를 발견했을 때의 집사 같은 느낌이었다.
“시끄러워! 배고파!”
나는 빽빽 소리를 지르는 하얀이와, 그런 하얀이에게 휘둘리는 여급을 보며 정신이 혼미해짐을 느꼈다.
뭐랄까.
봐서는 안 될 장면을 봐 버린 느낌이었다.
‘….그래도 사이가 좋다면, 좋은 건가?’
내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둘의 사이가 좋다고 하기엔 다소의 문제가 있어 보이긴 했지만, 그래도 머리채를 잡고 싸우는 것 보다는 나았으니까.
이 정도면 아슬아슬하게 세이프가 아닌가 여기던 그 순간.
여관의 문이 벌컥 열렸다.
하얀이의 밥을 만들고 있던 여급이 다급히 주방 밖으로 튀어나오는 것이 보였다.
“어서 오세요?”
오랜만에 손님인가 싶었지만, 문을 열고 들어온 상대는 나도, 그리고 여급도 익히 잘 알고 있는 상대였다.
나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문을 열고 들어온 여자를 바라봤다.
“성녀님?”
그 여자를 본 여급이 놀란 표정으로 그녀의 신분을 확인했다.
그랬다.
느닷없이 여관에 들이닥친 여자는 바로 성녀, 세라였다.
세라는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으로 여관의 이곳 저곳을 살펴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얀이는 그런 세라의 모습에 마치 영역을 침범 당한 고양이처럼 날카로운 눈을 번쩍이는 중이었다.
‘쟤는 여기 뭐 하러 온 거야?’
하지만 나 또한 갑자기 들이닥친 성녀가 의외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녀와 헤어진 지, 반나절도 지나지 않은 상태였으니까.
하지만 여관을 한참이나 살핀 성녀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그 의외를 아득히 뛰어 넘는 것이었다.
“…여기, 혹시 빈 방 있어요?”
성녀 세라는 멀뚱히 서 있는 여급을 보며 그렇게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