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2화 〉입학 (52/158)



〈 52화 〉입학

“친애하는 왕국 아카데미의 입학생 여러분. 왕국 아카데미는 위대하신 초대 국왕 전하의 명으로 설립되었으며…”

나는 아카데미의 운동장에 서서 인상을 구기고 있었다.
대충 지구나 이 세계나 비슷한 점이 많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입학식마저 비슷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무슨 초딩도 아니고, 운동장에서 교장의 연설을 듣고 있으려니 좀이 쑤셔 미칠 노릇이었다.
솔직히 기대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아카데미면, 당연히 대학 아니야?’


대학.
캠퍼스. 새터. 동아리. 캠퍼스 커플.
그랬다.
나는 단어만으로도 사람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할 그 어떤 캠퍼스의 낭만을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결과가 겨우 대머리 아저씨의 장황한 연설이라니, 어찌 실망을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럴 거면 차라리 토룡이나 잡게 해주던가!’


나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그렇게 생각했지만, 사실 그 쪽도 기대와 다르긴 마찬가지였다.
전 날 나는 개학을 하루 앞둔 상태에서도 토룡을 잡는 이벤트를 구매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정력에 관련된 이벤트라는 데 굳이 거부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내 정력이 문제가 있다는 것은 아니었고, 그냥 다다익선이랄까?
대한민국에 정력 강화 싫어할 남자는 없는 법이었다.
하지만, 무려 50쿠폰이나 지불하고 [토룡을 잡아라!]라는 이벤트를 구매했음에도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다못해 공주를 습격할 때처럼 토룡이 있는 장소가 나타나거나  줄 알았건만, 놀랍게도 아무 변화가 없는 상황.


‘사기 아니냐고!’

시스템에 사기가 아니냐고 따져 보았지만, 돌아오는 것은 묵묵 부답뿐이었다.
결국, 따로  일이 없는 나로서는 그냥 아카데미 교장의 지루한 훈화 말씀을 듣고 있는 수밖에 없었다.

“물론 아무 소득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카데미 신입생의  인원은 40명 가량.
무척이나 소수의 인원이었지만, 운동장에 나와 있는 다른 학년의 학생들을 봐도 그 수는 대동소이해 보였다.
꼴에 선배라고 이쪽을 신병 보듯 바라보는 눈길을 보내는 것이 거슬렸지만, 어디가나  군기를 좋아하는 놈들은 있기 마련이었기에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
나는 하품을 쩍 하며, 열심히 떠들어 대는 교장을 바라보았다.
땀을 질질 흘리면서도 왕국의 위대함을 찬양하는 그의 모습이 조금은 안쓰럽게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신입생들 중 한 명이 그 위대한 왕국의 공주였던 것이다.

“고로, 교육생 여러분께서는 늘 왕국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학업에 임하여야 하며, 그렇게 얻은 지식과 능력을 바탕으로 왕국에 멸사봉공 하겠다는 각오로…”

그야말로 국왕조차 낯짝이 뜨거워  정도의 명연설이었다.
나는 멀리 서 있는 공주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위치가 멀어 그녀의 반응을 확인할 수 없는 것이 아쉬웠지만, 점점 더 무리수를 두는 교장을 보면  반응이 그리 좋은 것 같지는 않았다.


“국왕폐하! 만세!”

**

길고 긴 연설이 끝난 나는 배정받은 반으로 이동했다.
당연히 내가 배정받은 반은 가장 등급이 떨어지는 D반.
다행스럽게도 D반에는 나와 안면이 있는 녀석이 있었기에, 적응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본 님. 안색이  좋아 보이시는데, 무슨 일 있으세요?”
“….아니다.”

나는 살갑게 말을 걸어오는 알렌을 보며 그렇게 대답했다.
확실히 토룡을 빨리 얻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당장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나는 지루한 시간을 참기 위해, D반의 친구들을 바라보았다.
알렌을 통해 대충 짐작했겠지만, 말이 D반이지, 실상은 A, B반의 종자들을 위한 대기실이나 다름 없었다.
대부분이 유력 가문이나 상단의 추천을 받아 입학한 상황이었고, 덕분에 반에 속한 녀석들끼리도 어느 정도 안면은 있는 모양이었다.


“알렌, 너도 역시 들어왔구나. 메이핀 아가씨는 C반?”
“아니, B반이야.”
“역시, 샤일록 상단답네. 우리 도련님은 겨우 C반인데.”

그 중에서도 나름 유명인사였던지, 꽤 많은 녀석들이 알렌에게 말을 걸어오는 상황.
나는 약간의 소외감을 느끼며, 일부러 관심이 없는 듯 행동하고 있었다.


“….이 사람은?”
“몰라?  성자님이시잖아.”


하지만 나에 대한 무관심도 그리 오래 가지는 않았다.
알렌이 내 정체를 까발리자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 집중되었기 때문이었다.
딱히 감추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 성자님?”
“역병을 물리친  분이 이분이라고? 그런데 왜 D반에…?”


날 보는 반 애들의 분위기는  둘로 나눌 수 있었다.
내가 만든, 아니 만물상에서 구입한 포션의 도움을 받아 감사함을 느끼는 쪽과, 호기심이 가득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 쪽.
어느 쪽에 속해있건, 그저 종자에 불과한 애들이 나를 어려워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알렌, 저 분이랑 잘 알아?”
“응. 우리 어머니 구해주신 분인걸.”


나름 목소리를 죽여서 대화를 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원래 사람이란 것이 제 이야기는 귀신 같이 듣게 되는 법이었다.
나는 반 애들과 나 사이에 묘한 경계가 생기는 것을 느끼며 인상을 구겼다.
아카데미에 오자마자 따돌림을 당하는 불상사가 생긴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이런 분위기 또한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

‘하아. 나의 짜릿한 캠퍼스 라이프는 어떻게  거냐고!’

나는 속으로 그렇게 비명을 지르면서도 반 내부의 수준을 살피기 시작했다.
당연히 그건 여자들의 평균 외모 수준이었다.
어쨌거나, 내가 독자들에게 가장 쉽게 어필할  있는 것은 섹스였으니까.
여자들의 평균적인 외모 수준이 아득히 높은 이세계답게, 반에 있는 애들의 수준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
다만 여급과 비슷하거나 조금  나은 수준일 뿐, 성녀나 공주, 아니 하다 못해 기사 실비아 에게도 그 미모가  미친다는 것이 아쉬울 뿐이었다.

‘음?’


하지만 진흙 속에도 진주는 있는 법.
나는 교실 구석에 앉아 있는 미녀를 보고 눈을 번쩍 떴다.
은은한 하늘색이 감도는 머리.
상대는 하얀 피부 톤과 대비되는 새빨간 입술을 가지고 있었고, 그 빨간 입술 아래에는 유독 시선을 끄는 점 하나가 딱 박혀 있었다.
객관적으로는 실비아랑 비슷한 정도의 외모였지만, 그 점 하나가 여자의 인상을 완전히 바꿔 놓고 있었다.

‘묘하게 색기있네…’


나는 교실 구석에 앉아 주위의 눈치를 살피는 여자를 보며 하물이 반응하는 것을 느꼈다.
서로 친분을 과시하는 다른 애들과는 달리, 아무런 말도 없이 눈치만 보고 있는 여자.
어딘가 주눅이 잔뜩 들어 있는 것 같은 표정이 남자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보호 본능, 아니 껄떡 본능을 일으키고 있었다.
뭔가  건드리면, 쉽게 줄 것 같은 그런 느낌?


“알렌,  알아?”


나는 내 근처에 딱 붙어 있는 알렌을 향해 그렇게 물었다.
알렌의 시선이 여자에게 향했고, 이내 난감한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는 것이 보였다.

“네. 알긴 압니다…”
“그래? 쟤는 왜 저리 죽상이냐?”

나는 알렌을 향해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그리 물었다.
니스를 구한 영웅이자, 성자로서의 이미지가 있었기에 첫 날부터 껄떡 쇠로 보이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로하임 백작가의 하녀인데….그게 좀.”


알렌은 백작가의 하녀라는 여자에 대해 설명하기 곤란한  애매한 표정으로  꼬리를 흘렸다.
그러면서 주위의 시선을 살피는 꼴이 여자에게 뭔가가 있기는 있는 모양.
나와 알렌의 대화를 들은 다른 애들 또한 어딘가 찝찝하면서도 안쓰러워하는 듯한 표정으로 그 하녀를 흘끗 거리는 중이었다.


“….아!”


그제야 자신에게 시선이 집중 된 것을 느낀 하녀가 다급히 고개를 숙였다.
나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 묘하게 시선이 가는 것을 느꼈다.
뭐랄까? 자연스럽게 남자의 음심을 자극하는 듯한 몸짓이었다.

“성자님!”

내가 그렇게 특이한 하녀를 관찰하고 있는 사이, 교실의 문이 열리며 낯 익은 존재가 등장했다.
그리고 수업 시작도 전에 나를 찾아올 만한 이는 딱 한 명밖에 없었다.

“서, 성녀님이다.”


그랬다.
등장만으로도 평범한 소시민인 D반의 애들을 얼어붙게 만드는 여자, 바로 성녀 세라였다.


“무슨 일입니까? 세라 성녀님.”
“무슨 일이냐구요? 도대체 성자님이 왜 여기에 있는 겁니까?”

성녀는 꽤나 화가 난 표정으로 D 반 교실 안으로 난입하며 그렇게 외쳤다.
그녀의 짜증이 가득한 목소리에, D반의 애들이 더욱 겁을 집어 먹는 것이 보였다.

“….그러니까, D반에 배정됐으니까요?”

나는 성녀를 향해 그렇게 말했다.
당연히 성녀는 A반을 배정 받았다.
아무리 왕국과 데메테르 교단의 사이가 좋지 못하다고는 해도, 성녀라는 배경은 절대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으니까.
아니, 애초에 왕국과 교단의 사이가 나쁘다는 것은 어느 정도 위치에 있지 않는 이상은 제대로 알 지도 못하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그게 말이 안 된다고요! 성자님이시잖아요! 니스를 구하셨잖아요! 그리고 무엇보다 저 성녀 세라가 인정한 분인데, D반이라니요!”

성녀는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나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러니까, 성녀는 지금 자신이 인정한 내가 겨우 D반에 배정을 받아서 열이 뻗친 것이었다.


“이건 외압이 있었던 것이 틀림 없어요! 분명히 공주 ㄴ…”

나는 다급히 성녀의 입을 틀어 막았다.
순간, 성녀의 눈이 커지는 것이 보였지만, 그녀도 이내 자신의 말 실수를 깨닫고는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공주와 성녀의 사이가 좋지 못하다고는 하나, 사람들 앞에서 공공연히 떠들만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얘, 정치 감각 하나는 좋았잖아?’


나는 갑자기 지능이 훅 떨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행동하는 성녀를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성녀님. 여기는 다른 학우들이 불편해하니, 밖으로 나가서 따로 이야기를 하시죠?”


끄덕.
성녀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보였다.
다행히 반 애들은 성녀가 공주를 년이라 부르려고 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분위기였다.


“방금 성녀님이….공주 …녀….언이라고 하지 않았냐?”
“공주님이라고 했겠지? 너 미친 거 아냐?”


교실 한 쪽에서 그런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애써 무시하며 성녀를 끌고 도망치듯 교실을 나섰다.


**


“알았으니까, 이제 이것  놔요.”


성녀는 내가  붙잡은 팔을 가리키며 그렇게 말했다.
평소보다 얼굴이 살짝 붉어져 있는 것을 보니, 몸 상태가 그리 좋지는 못한 모양.
나는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살피고는 성녀를 향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겁니까?”
“열 받지도 않아요? 니스 정도로 큰 대 도시를 구했는데, 겨우 D반이라니.”

성녀는 자신이 실수를 했다는 것을 인정했지만, 그렇다고 화가 풀린 것은 아니었다.
사실, 나 또한 학급 배정에 약간의 기대를 했었기에 막상 D반이라는 것을 알고는 김이 빠졌던 것도 사실이었다.


“어차피 니스를 구한 것은 개인적인 일일 뿐입니다. 저는 남작님의 추천을 받아서 들어왔고, 원래의 기준대로라면 D반에 가는 것이 옳지요.”


나는 성녀를 향해 그렇게 대답했다.
그건 내가 D반이 되고 난 뒤, 이유를 따져 본 것이었기에 나름의 설득력은 가지고 있었다.


“하아, 그건 그렇지만…그래도 니스의 성자가 D반이라니. 공주도 생각이 있으면, 성자님을 신경 썼어야 했어요.”

나름대로 펼친 정론에 성녀는 공주를 물고 늘어졌다.
그러니까 원칙대로는 내가 D반에 가야 하더라도, 니스를 구한 공을 생각하면 공주가 알아서 날 신경  줬어야 한다는 논리였다.

‘물론, 그것도 그렇긴 하지만…’


나라고 A 반에 가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어쨌거나 그 공주가 속한 반이었고, 니스의 유력인사들의 자제들이  속해 있는 반이었으니까.
지구나 이세계나 돈 많고 권력 있는 집안의 자제들의 외모가 빼어난 것은 마찬가지였다.
일단 유전자의 힘이라는 것을 무시할 수 없었고, 또한 그들은 자신을 꾸미는 것에 돈을 아낄 이유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그 백작가의 하녀라는 여자를 생각하며, 피식 미소를 지었다.

‘솔직히 지금은 A반에 가라고 해도 못 가지.’


이미 D반에 보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상, 굳이 반을 옮길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왜 웃어요?”
“아니, 저는 일단 반을 옮길 마음이 없습니다. 당장 반 친구들도 마음에 들고요.”


나는 성녀를 향해 그렇게 말했다.
마음에 드는 반 친구야 한 명뿐이었지만, 원래 인생이라는 것이 친구 하나라도 제대로 건지면 수지 맞는 장사인 법이었다.

“아, 답답하네! 이건 성자님뿐만이 아니라, 데메테르  자체를 무시한 처사라고요!”


성녀가 제 가슴을 탕탕 두드리며 그렇게 소리쳤다.


“….누가 데메테르 교를 무시했다는 건가요?”

그리고 그 순간,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아카데미 복도에 울려 퍼졌다.
나와 성녀는 그 목소리에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렸고, 거기에  있는 여자의 모습에 얼굴을 굳히기 바빴다.


“다시 묻죠. 감히 어느 누가 왕국의 국교인 데메테르 교를 무시했다는 말씀이시죠?”

복도에 나타난 인물은 다름 아닌, 공주였다.
그리고 그녀의 옆에는 처음 보는 낯선 이들이 잔뜩 도열해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