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3화 〉치마바람 불어온다! (53/158)



〈 53화 〉치마바람 불어온다!

“…..하?”

공주를  성녀가 기가 막힌 것처럼 코웃음을 쳤다.
그걸 몰라서 지금 묻는 거냐는 표정.
아직까지는 살아 있는 그녀의 정치 감각이 가까스로 그녀의 입을 틀어막고 있었지만, 눈으로는 이미 온갖 욕설을 쏟아내는 중이었다.
그리고  욕설을 받아내는 공주는 진짜로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성녀를 보는 중이었다.

“아무리 성녀 님이라고는 하지만, 공주님께  무슨 무례입니까?”


공주의 옆에 늘어  있는 놈들 중, 가장 뺀질 거리게 생긴 남자 하나가 성녀를 향해 그렇게 말했다.
아마도 이 기회를 틈타 공주에게 줄을  보려는 모양.
하지만, 공주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리는 것을 보니, 그 결과는 그리 좋지 못할 것처럼 보였다.

“무례? 내가 무슨 말을 했다고, 그딴 소리를 나에게 하나요?”

성녀는 앞으로 나선 뺀질이를 보며 그렇게 말했다.
뺀질이가 움찔 하는 것을 본 성녀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공주에게로 향했다.

“공주님. 보시다시피 남작님도 아닌 남작가의 자제분께서 성녀인 저를 겁박할 정도로 데메테르교가 우습게 보이는 것 같습니다만?”

성녀의 말에, 호기롭게 앞으로 나섰던 뺀질이의 표정이 굳어졌다.
성녀가 다소 불손한 표정을 짓기는 했어도, 딱히 말 실수를 한 것은 아니었다.
대화라는 것은 묘해서,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상대에게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상대가 느끼게 할 수도 있었다.
상대는 그런 태도에 분함을 느끼겠지만, 말로 꺼내지는 않았기에 그냥 넘어갈 수 밖에 없기도 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자면, 남작가의 자제라는 놈은 매우 성급하게  일에 끼어들었다는 소리였다.


“……그렇군요.”


성녀의 말에 공주는 어떤 감정도 없는 눈길로 뺀질이를 바라봤다.
공주의 그 차가운 시선에 뺀질이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후. 무례를 범한 왕국의 귀족을 대신해, 성녀님께 사과를 드리도록 하지요.”


공주는 살짝 입술을 달싹여 성녀에게 그렇게 말했다.
분명 귀로는 사과를 받았는데, 눈에 보이는 것은 전혀 사과를 하는 것 같지 않은 공주의 모습에 성녀는 인상을 찌푸렸다.
어쨌거나  공주가 사과를 한 이상 이 일을 더 물고 늘어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그나저나, 니스를 구한 분께서는 왜 교실에  오시는 건가요?”


성녀와의 일을 말 한마디로 담판 지은 공주는 나를 향해 그렇게 물었다.
나는 공주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를 바라봤다.
내 그런 태도에 공주의 옆을 지키고 있는 추종자들이 상당히 입이 간지러운 듯 몸을 움찔거렸지만, 앞선 남작의 자제의 일 때문인지 신중하게 몸을 사리는 것이 보였다.


“그, 저는 교실에 있다가 성녀님 때문에 나온 참인데요?”
“…그럴리가요? 교실에서 뵙지 못했는데?”


공주의 얼음 같은 얼굴에 의아함이 물들었다.
태어나서  번도 실수를 하지 않았던 이가, 마치 처음으로 실수를 한 것만 같은 얼굴.
나는 그런 공주의 반응에, 혹시나 하는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뭔가 오해가 있으신 듯 한데, 저 D반 입니다.”
“……..”


공주의 표정이 급변했다.
세상 일에 무관심한 사람처럼 무표정으로 고정되어 있던 그녀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진 것이었다.

“….이런 답답한 작자들이!”

공주가 차가운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나는 분노한 공주의 표정을 보며, 나름 놀라고 있는 중이었다.
정도를 지나칠 정도로 예쁜 여자는 얼굴을 찌푸리고 화를 내도 예쁘다는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에?”

공주의 그런 반응에 가장 놀란 것은 성녀였다.
애초에 내가 D반이 된 것이 공주의 입김이 작용했다고 생각했던 것이 성녀였으니까.

“…저와 함께 가시죠. 이 문제는 왕국 차원에서도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요.”

공주는  팔목을 붙잡으며 그렇게 말했다.
순간, 그녀를 따라 다니던 수 많은 추종자들의 얼굴이 시기와 질투로 일그러지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그 공주가 분노를 토해낸 상황이라 그런지, 누구 하나 나서는 이는 없었다.
그저, 눈으로라도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거, 앞으로 귀찮아 지겠는데?’


나는 시기와 질투로 얼룩진 공주의 추종자들을 보며 몰래 한숨을 내뱉을 뿐이었다.

**


“공주님과 성녀님께서 저를 찾아주시다니, 가문의 영광입니다.”

교장실.
교장은 갑자기 자신을 찾아온 공주와, 성녀, 그리고 나를 보며 열심히 손바닥을 비비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공주와 나만이 교장실을 찾으면 될 일이었지만, 성녀는 끝까지 자신도 함께 가겠다고 주장했고 공주는 끝내 성녀의 주장을 인정했다.
앞 전에 있었던 상황을 전혀 모르고 있는 교장은 공주와 성녀가 자신을 찾은 이유가 자신의 명 연설 때문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교장은 뿌듯한 표정으로 공주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녀가 교장실을 찾은 이유를 알고 있는 나로서는 눈앞의 아저씨가 불쌍하게 보일 뿐이었다.


“리테인 교장. 나는 지금 아카데미의 학생이 아니라, 공주로서 당신을 찾은 겁니다.”

공주는 교장을 향해 자신의 입장을 정확히 밝혔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교장은 처음부터 공주를 학생으로 본 적이 없었다.


“네, 넵. 물론이지요.”


교장이 공주의 차가운 목소리에 땀을 닦으며, 눈알을 굴리는 것이 보였다.
어쨌거나 아카데미의 수장까지 올라선 몸으로, 기본적인 눈치는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 옆에 있는 이 분을 아십니까?”
“아니요. 이 분이 누구신지…?”

교장은 의아한 표정으로 내 얼굴을 뜯어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내 얼굴을 들여다 봐도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인지 교장의 미간이 좁아지기 시작했다.

“하아….누구인지조차 모른다?”


공주가 실망감이 가득한 목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교장은 다급히 자신의 자리로 찾아가 서류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죄송, 죄송합니다. 제가 요즘 입학 준비 때문에 바빠서…”

교장은 서류를 넘기며, 내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노력을 했지만 생각보다 그 시간은 길어지고 있었다.
교장으로서는 당연히 공주와 성녀를 대동하고 나타난 내가, 어느 명망 높은 집안의 자제일 것이라 유추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교장은 A반의 학생 정보부터 찾기 시작했고, 필연적으로 내 정보를 확인한 것은 한참이나 시간이 지난 후였다.

“…D반의 본. 이 자가 왜?”

교장은 이해가 되지 않는 다는 표정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순간, 공주의 미간이 좁아지는 것을 살핀 교장은 다급히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혹시, 이 자가 공주님께 무슨 실수라도 저지른 겁니까?”

교장이 머리를 굴려 얻은 결론은 그거였다.
모든 사람을 신분과 배경으로 나누는 그의 머리가 상상할 수 있는 고작 거기까지가 한계였으니까.
하지만 그의 그 말이 공주의 뒤틀린 심사를 더욱 자극하고 말았다.

“실수? 실수는 당신이 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니스의 아카데미 교장이라는 자가 어찌 니스의 영웅을 모른다는 말입니까? 니스에 역병이 퍼진 순간, 도대체 뭘 하고 있었길래!”


공주는 전에 없이 감정을 드러내며 교장에게 그렇게 소리쳤다.
그런 공주의 기세에 억눌린 교장은 연신 손수건으로 자신의 땀을 닦아내기 바빴다.


“…아, 이분이 그 니스를 구한…아, 제가 그 당시에 타지에 나가 있어서…그것이 도망을 친 것은 아니옵고, 마침 일이 생겨서…어째서 그런 분이 D 반에?”

궁지에 몰린 교장은 횡설수설하며 자신을 변호하기에 바빴다.
하지만 공주는 그런 교장의 모습에 더욱 실망한 듯,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일단, 이 분은 A반으로 다시 배정하세요. 그리고 이 일은 아버님께 따로 보고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그건 교장에게는 사형 선고나 다름 없는 말이었다.
왕국의 국왕이 어떤 성격을 지녔는지는 몰라도, 공주씩이나 되는 인물의 보고를 무시할 리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잠깐 저도  말씀 올려도 될까요?”


 때까지 상황을 지켜보던 성녀가 그렇게 운을 뗐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터질 것 같은 교장의 왕방울 같은 눈이 성녀에게로 향했다.


“어쨌거나 이 분은 저희 교단에서 성자로 인정한 분입니다. 데메테르 교에서는  문제를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습니다. 어떤 연유로 이 분이 D반에 배정이 되었는지, 그 이유를 조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것이  배정은 제가 다 하고 있는데. 말씀 드린 것처럼 제가 미처 확인을 하지  해서…”
“아카데미 반 배정을 한 사람이 한다고요?”

성녀는 교장의 말에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리고, 그 말에 인상을 구긴 것은 공주 또한 마찬가지였다.

“제가 다른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학과를 맡은 선생님들이 대부분 방학 기간 동안은 개인 업무를 보기 때문에…”


교장은 아예 사색이 된 얼굴로 그렇게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교장의 반응에 대충 일이 어떻게 흘러간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알렌이 모신다는 그 아가씨가 C반이 아닌 B 반에 배치된 것은 샤일록이라는 거상의 재력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재력이 통했다는 것은 콩고물이 어딘가에 잔뜩 떨어졌다는 소리.
교장 혼자서  배정을 맡는다는 것은 그 콩고물을 교장이 혼자서 열심히 퍼먹었다는 소리나 다름 없었다.


“후, 도대체가…”

공주는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평소에는 별다른 표정이 없는 그녀였지만, 자신이 마주한 왕국의 불합리 앞에서는 그 얼음 같은 얼굴도 아무런 소용이 없는 듯 했다.


“당장, 이 분을 A반으로 옮기…”
“잠깐만요.”

결국, 백기를 들고 항복한 교장을  나는 입을 열었다.


“저는 지금 이대로가 좋은데요?”


나는  바라보는 공주와 성녀, 그리고 교장을 향해 그렇게 말했다.
그 백작가의 하녀가 있는 이상, 굳이 D반을 떠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그건!”

성녀가 당장 발끈하고 나섰지만,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성녀님께도 말씀 드렸지만, 니스에서 행한 일을 통해 따로 이득을 얻을 생각은 없습니다. 애초에남작님의 추천이라면,  D반에 배정되는 것이 이상한 것도 아니고요.”

내 말에 교장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지옥 앞까지 끌려갔다가, 탈출할 수 있는 루트를 발견한 표정.
굳이 마음에 드는 인간은 아니었지만, 나는 교장에게도 나름의 동아줄을 내밀어 주기로 했다.

“그러니  문제는 없던 일로 했으면 좋겠습니다.”

내 말에 교장이 몰래 주먹을 꽉 쥐는 것이 보였다.
내 말이 통할 거라고는 장담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면피는 될 거라고 판단한 모양.
나는 그런 교장의 모습을 보며, 속으로 웃음을 흘렸다.


‘그래 적당히 썩은 인물이니까, 이용해 먹을 가치도 있겠지.’


즐거운 캠퍼스 라이프를 생각한다면, 교장을 뒷배로 두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을 듯싶었다.


“정말 그런 결과를 원하십니까?”

공주가 나를 빤히 보며 그렇게 물었다.
나는 그런 공주와 눈을 마주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곳에 속했는지가 뭐가 그리 중요하겠습니까? 내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가  중요한 법이지요.”


 대답에 공주의 눈이 반짝였다.
기대하지도 않았던 어떤 것에서 새로운 가치를 발견한 것만 같은 눈빛이었다.


“본인이 그렇게 말하니, 그럼 저도 이 문제는 넘어가도록 하지요.”

공주는 교장을 매서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교장이 살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내뱉는 그 순간, 공주의 말이 이어졌다.

“하지만, 앞으로 지켜보도록 하겠습니다. 리테인 교장.”
“넵. 공주님!”

교장은 자신의 딸보다도 어릴  같은 공주에게 머리를 숙이며 그렇게 대답했다.


“….하아, 혼자 날뛰어봐야 저만 우스워지겠군요?”


성녀는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나를 보며 그렇게 말했지만, 못 이기는 척  말을 따라주기로 했다.
아무래도 내가 그렇게 우기는 것에 어떤 이유가 있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그렇게 입학 첫날부터 학교를 발칵 뒤집어 놓을 스캔들을 무마한 나는 다시금 D반 교실로 돌아갔다.


“….어떤 개념 없는 친구가,  수업부터 땡땡이를 쳤을까?”

그리고 그 교실에서 나를 마주한 것은 딱 보기에도 성질이 더러워 보이는 여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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