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화 〉현자의 제자
“음…그렇군. 넌 그런데 그걸 다 어떻게 아는 거냐?”
나는 알렌의 설명을 다 듣고 난 후, 그렇게 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상단의 심부름 꾼이나 다름 없는 알렌이 알만한 정보들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게, 저희 아가씨가 이런 거에 민감해서요.”
알렌은 민망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나에게 그렇게 대답했다.
상단의 심부름 꾼이라면 알기 어려운 정보들이지만, 대도시를 지배하는 상단주의 딸이라면 이 정도의 정보를 알아내는 것이 그리 어려울 것 같지는 않았다.
알렌이 설명한 내용은 대충 이랬다.
마탑의 기대주인 로잘린이 니스 아카데미의 A반을 맡았고, 평소 로잘린과 앙숙으로 유명한 용병 여제가 아카데미를 찾아와 자신에게 D반을 맡기라고 협박을 했다는 것이었다.
‘로잘린이라…’
알렌의 설명을 들은 나는 처음 이세계에 떨어졌을 때 만났던 여자의 얼굴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그녀가 니스로 향했다는 것은 연재창을 통해 확인하고 있었지만, 설마하니 아카데미에 교사로 들어올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었다.
갑자기 튀어나온 로잘린이라는 이름에 심장이 덜컥 내려 앉기는 했지만, 나는 머지 않아 태연함을 되찾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의 라이벌이라는 용병여제조차 내 마법에 무릎을…꿇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도망친 상황이었다.
그러니까, 제 아무리 마탑의 기대주라고 해도 나를 함부로 핍박할 수는 없다는 소리였다.
‘그래. 일단 성녀라는 든든한 빽도 있으니까.’
물론 로잘린이 나에게 던전에서 얻은 아이템을 내 놓으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 나는 그녀에게 [비치의 비취 반지]를 건넬 생각 따위는 눈꼽 만큼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까 요즘은 반지의 효용이 조금 약해진 것 같은데?’
나는 주머니 속에서 손가락에 끼운 반지를 만지며 그렇게 생각했다.
아이템을 처음 얻었을 때만 해도, 효과는 확실했다.
나를 동네 거지 보듯 바라보던 여급이 스스로 스페셜 서비스를 하게 만들었으니까.
하지만 그 처음, 이후를 생각하면 아이템의 효과는 애매했다.
성녀에게는 약간의 호감을 산 것 같았지만, 그게 전부였으니까.
다른 여자들을 생각하면, 더더욱 아이템의 효과는 미궁에 빠졌다.
하얀이가 날 잘 따르긴 하지만, 특별했던 첫 만남을 생각하면 아이템의 효과라고 생각하기엔 약간 애매했다.
실비아의 경우에는 묘하게 계속 나를 주시하긴 했지만, 그게 내 매력 때문이라고 보기는 힘들었으며, 공주는 솔직히 무슨 생각을 하는 지 표정만으로는 읽어내기 힘들었다.
‘으음…굳이 추리를 해보자면, 상대의 정조 관념에 영향을 받는 거 같기는 한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미간을 좁혔다.
지금껏 먹은 여자와 안 먹은 여자를 구분해 보자면, 먹은 쪽이 압도적으로 정조 관념이 망가져 있는 편이었다.
하얀이는 엘프의 번식장에서 자랐고, 실비아 또한 마족에게 능욕을 당한 경험이 있었으니까.
여급이야, 뭐 굳이 따질 필요도 없었다.
반지의 아이템 설명을 봐도 내 추리는 나름 근거가 있었다.
반지가 올려주는 것은 매력도.
그러니까, 매력이 올라가는 것뿐이지 최음 마법 같은 게 걸려 있지는 않다는 소리였다.
매력적인 이성을 본다고 모든 여자가 다리를 벌리는 것은 아닐 테니, 개인의 성 관념에 영향을 받는다는 추리는 꽤나 그럴 듯 하게 보였다.
‘뭐, 앞으로 더 따먹다 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겠지.’
나는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알렌을 바라봤다.
“혹시, 너 D반에 그 여자에 대해서도 알아?”
“그 여자요?”
“그 백작가의 하녀인가 하는 여자 말이야.”
나는 알렌을 향해 그렇게 물었다.
아까 전 교실에서 반 아이들의 반응을 보면, 그 여자에 얽힌 이야기는 꽤나 유명한 이야기인 듯 싶었다.
그러니까, 그 소문에 민감하다는 알렌이 모시는 아가씨가 그 정보를 모를 리 없다는 소리.
알렌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슬쩍 운동장에 멍하니 앉아 있는 여자를 보고는 나에게 소근거리기 시작했다.
“그, 확실한 건 아닌데요. 백작의 첩이랍니다.”
“첩?”
내 목소리에 몇몇 애들이 반응을 하는 것이 보였다.
알렌은 곤란한 표정으로 나를 보다가, 다시 목소리를 죽이고는 내 귀에 소근거렸다.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이긴 한데요. 그렇다고 본인 앞에서 떠들 이야기는 아닌데요.”
“…..미안.”
“어쨌거나, 소문일 뿐인데. 백작이 첩으로 삼으려고 학교에 밀어 넣었다더군요.”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알렌을 바라봤다.
고작 첩실을 삼을 계집 따위를 아카데미에 넣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서였다.
“아가씨의 말에 의하면, 그 백작이 조금 괴팍하답니다. 자기 씨를 받을지도 모를 여자가 무식한 건 용납할 수 없다고…”
나는 알렌의 말에 그만 설명해도 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더 들을 필요도 없는 정보였다.
어쨌거나 그렇게 괴팍한 백작의 눈에 들어 첩실자리까지 따낸 인물이라는 소리.
나는 묘하게 색기가 흐르는 여자를 보며, 입 꼬리를 말아 올렸다.
눈 앞에 반지의 성능을 시험하기 딱 좋은 상대가 있다는 것을 그제야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저기, 안녕?”
나는 색기가 흐르는 그 백작가의 하녀에게 다가가 상큼한 인사를 건넸다.
그 순간, 알렌을 비롯한 D반의 인물들 모두가 기겁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주위의 시선이 꽤나 따갑게 느껴졌지만, 나는 그 상큼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내 다른 사람들보다 반응이 조금 느린 그 하녀가 나를 빤히 올려다 보기 시작했다.
“….아, 안녕하세요. 성자님.”
하녀는 한 템포 느리게 몸을 숙여 인사를 했다.
천천히 날 향해 고개를 돌리는 움직임도, 그리고 멍한 표정으로 날 올려다 보는 눈빛도, 거기다 가슴을 반쯤 드러낼 듯 몸을 숙이는 그 각도도.
눈 앞의 여자의 별 것 없는 움직임에도 남자의 시선을 끄는 묘한 분위기가 흘러 나왔다.
나뿐만이 아니라, D반의 남자 애들 대부분이 멍하니 그 하녀를 바라볼 정도.
“성자님은, 같이 수업 받는 입장인데.”
“아…”
그저 탄성을 터트렸을 뿐인데도, 뭔가 야릇한 기분이 들었다.
살짝 벌어진 하녀의 입술 사이로 보이는 가지런한 치아와 붉은 혀가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미치겠네. 얘야 말로 최음 마법 같은 거 배운 거 아냐?’
나는 눈 앞의 하녀를 바라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애초에 내 반지의 성능을 시험하기 위해 접근을 한 것이었지만, 오히려 내가 자제력을 시험 받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묘하게 나를 자극하는 하녀의 모습에 그냥 떠올린 생각이었지만, 가능성이 완전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왕국의 수도에도 마족이 숨어 있었으니, 니스라고 마족이 숨어 있지 말란 법은 없으니까.
“제 이름은 데이나. 데이나 입니다.”
‘일단 보류.’
나는 자신을 데이나라고 소개하는 하녀를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백작의 첩실 정도라면, 꽤나 정조 관념이 희박할 거라는 계산에 말을 걸어본 것뿐이었지만, 데이나의 반응에는 특이점이 없었다.
그저 그 대단한 니스의 영웅이 왜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는지를 의아해 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렇군. 앞으로 친하게 지내 보자.”
나는 데이나를 향해 그렇게 말했다.
일단 보류라는 판정을 내렸지만, 어쨌거나 색기를 줄줄 흘려 대는 여자를 놓칠 생각은 없었으니까.
“……네. 저야 영광입니다.”
데이나가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보다, 방긋 웃으며 그렇게 대답했다.
‘섰다. 씨발.’
나는 하물이 꿈틀거리는 것을 느끼며, 어색한 얼굴로 데이나를 향해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
“다들 여기서 뭐하시는 겁니까?”
아카데미 직원이 운동장에 있는 우리 반을 보며 그렇게 말했다.
착한 D반의 학생들이야, 담임 교사인 트리샤가 시키는 대로 운동장에 모여 있을 뿐이었지만, 직원은 해괴한 장면을 목격했다는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아, 트리샤님이요? 그래서 그냥 가셨다고요?”
D반 학생에게 일련의 상황을 전달받은 직원이 미간을 좁히고는 한숨을 내 쉬는 것이 보였다.
교사가 도망을 친 초유의 사태에 이걸 어떻게 수습해야 하는 지 고민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일단은 집으로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네?”
“어차피 오늘은 간략하게 인사만 하는 자리였으니까요. 본격적인 수업은 다음 주부터입니다.”
직원의 말에 D반 아이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직원은 그런 아이들을 바라보며 다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참고로, 다른 반은 이미 다들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직원은 아이들을 보며 그렇게 말했고, 그 말에 D반 아이들의 웅성거림은 더욱 커져 버렸다.
“으악. 나 죽었다. 우리 도련님 또 난리 치겠네.”
“아니, 일단 트리샤님 핑계를 대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그랬다.
D반의 아이들 대부분이 유력 가문 자제들의 시중을 들기 위해 입학한 애들이었다.
자신이 모시는 주인이 벌써 집으로 돌아갔다는 말에, 똥줄이 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개중에도 머리가 좋은 녀석은 있기 마련.
“저, 성자님. 오늘 있었던 일을 저희 주인님에게 전해도 될까요?”
촉새라는 별명이 잘 어울릴 것 같은 녀석 하나가 나에게 다가와 물었다.
나는 녀석이 나와 트리샤의 대결을 면피용으로 삼을 속셈이라는 것을 간파했지만, 그냥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힘숨찐도 아니고, 굳이 내가 강하다는 걸 감추고 살 생각은 없었으니까.
“감사합니다!”
촉새는 그렇게 외치고는 다급히 운동장을 벗어나기 시작했고, 이에 눈치 빠른 애들 몇 몇이 급하게 어디론가 뛰어가는 것이 보였다.
정보의 가치는 원래 많이 퍼질수록 떨어지기 마련.
머리가 좋은 녀석들은 나와 트리샤의 이야기가 다른 사람을 통해 주인의 귀에 들어가기 전에, 자신이 먼저 그 정보를 전달하고 면피를 할 생각인 듯 보였다.
‘여기나, 저기나 사는 건 참 빡빡하구나.’
나는 고작 스무 살을 넘은 애들이 치열하게 살아가는 현장을 보며, 씁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애들이 다급히 운동장을 빠져나갔고, 운동장에 남은 것은 아카데미의 직원과 나, 그리고 알렌 뿐이었다.
“넌, 안가도 괜찮냐?”
“이미 늦었어요. 저희 아가씨 귀에는 벌써 이야기가 들어갔을 걸요?”
알렌의 대답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문에 민감한 아가씨라니, 언젠가 한 번 얼굴이나 구경했으면 싶었다.
‘그나저나, 이제 용병 여제라는 이름도 똥 값이 되겠군.’
나는 트리샤의 얼굴을 떠올리며, 그렇게 생각했다.
D반 아이들 대부분이 귀족 가문에 속한 인물들이었다.
걔들이 떠든 이야기는 귀족들 사이에 금방 퍼질 것이 분명했다.
내가 아무리 니스의 영웅이자, 성자라는 소리를 듣는다고는 하지만 그건 전투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로 얻은 명성이었다.
겨우 아카데미 신입생에게 용병여제가 쳐 발렸다는 이야기의 파급력이 약할 리 없었다.
나는 이번 일을 통해 트리샤는 그야말로 개 망신을 당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거야 말로 자업자득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상황은 내 예상과 전혀 다르게 돌아갔다.
나는 모르고 있었지만, 현자라는 칭호가 가지는 무게가 생각보다 엄청났기 때문이었다.
**
쾅!
로잘린은 미간을 좁힌 채, 자신의 방 문을 부술 듯한 기세로 열고 침입한 상대를 바라보았다.
“무슨…일인가요, 트리샤?”
로잘린은 상대를 보며 그렇게 말했다.
세간에는 라이벌이라고 평가 받고 있는 두 사람이었지만, 로잘린은 딱히 트리샤를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상대는 마법사도 아니고, 검을 쓰는 칼잡이였으니까.
“하하. 네 년이 잘난 척 하는 세상도 이젠 끝이다!”
로잘린은 미간을 찌푸리며 트리샤를 바라보았다.
딱히 라이벌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트리샤가 거슬리는 것은 로잘린 또한 마찬가지였다.
“제가 언제 잘난 척을 했다는 말이죠?”
“뭐? 이 썅년, 시치미 떼는 것 좀 보소! 10년 전, 네 년이 나를 처음 만났을 때, 그 오만 방자하던 표정을 나는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는데? 거기다 3년 전, 이시디나 왕국이 쳐들어 왔을 때! 너, 그 때 일부러 내 주변에 범위 마법 터트렸잖아! 거기다 1년 전인가? 제국 사신이 왔을 때는 대 놓고 용병들 따위는 무뢰배라고 지껄였지?”
“기억력도 참 좋으시네요.”
로잘린은 시시콜콜한 옛 기억까지 소환하는 트리샤를 보며 그렇게 대답했다.
사실 기억력이 좋은 것은 로잘린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마탑의 기대주인 그녀가, 용병이나 하는 여자보다 머리가 나쁘다는 것은 애초에 말이 되지 않는 소리였다.
10년 전, 트리샤를 처음 본 로잘린은 한 눈에 보기에도 무식함이 드러나는 트리샤를 무시했던 것이 사실이었고, 3년 전 전쟁에서도 일부러 트리샤 주변에 범위 마법을 사용한 것도 맞았다.
그리고 제국 사신단에게 용병들을 험담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로잘린은 그 일에 대해 한 점 부끄러움이 없었다.
무식한 것을 혐오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범위 마법을 썼다고는 하지만, 눈 앞의 무식한 년은 잘만 살아 남았으니까.
거기다 용병들이 무뢰배인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었다.
“그래서, 지금 그 일을 따지러 오신 건가요?”
“뭐?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내가 왜 왔더라?”
트리샤가 멍청한 표정으로 멍청한 소리를 늘어 놓는 것을 보며, 로잘린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확실히 눈 앞의 여자는 전시에 이용해 먹는 것 외에는 무시하는 것이 상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 맞다. 현자, 현자의 제자가 나타났다고!”
“….네?”
하지만 로잘린도 이번 만큼은 눈 앞의 무식한 여자를 무시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