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화 〉샬롯
“여기다 무슨 꿀들을 발라놨나?”
방으로 돌아온 나는 빠르게 니스로 다가오는 붉은 점을 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역병이 일어난 것도 니스.
성녀가 출현한 것도 니스.
멀쩡한 왕국 수도를 놔두고 공주가 선택한 아카데미도 니스.
거기다 토룡이 등장하는 곳도 니스.
그야말로 니스가 모든 사건의 중심지였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거의 다 나 때문이네.’
나는 오늘도 열심히 하루를 살아가는 니스의 시민들에게 심심한 사과를 하며, 맵을 껐다.
이동 속도로 봐서 토룡이 니스에 도착하는 것은 내일이나, 모레.
마침 아카데미 또한 쉬는 날이었다.
내가 아무리 강해졌음을 자각했다고는 하지만, 나는 원래 조심성이 많은 사람이었다.
당연히 토룡씩이나 되는 존재를 잡는데, 혼자 갈 생각은 없었다.
성녀와 동행을 해볼까 생각했지만, 빠르게 기각.
아무리 나라도, 정력 강화를 하는데 여자를 끌고 가는 것은 조금 쪽 팔렸기 때문이었다.
“이럴 때는 또 만만한 놈이 있지.”
한 번 빡이 치면, 감당이 안되긴 하지만 실력만큼은 확실한 녀석을 생각하며, 나는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
“여어! 알렌.”
다음날 아침.
나는 일어나자마자 알렌을 찾아갔다.
당연히 나는 알렌이 사는 곳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나에게는 무엇이든 물어보면 답을 해주는 토마스가 있었고, 결국 그를 통해 알렌의 집을 찾을 수 있었다.
“…여기는 어쩐 일이세요?”
마당에 나와 검을 휘두르고 있던 알렌을 나를 발견하자마자 그렇게 물었다.
나는 알렌의 질문에 난감한 표정으로 내 옆을 바라봤다.
“너야 말로 팔자 좋구나, 옆에 여자를 끼고 훈련이라니.”
나는 알렌을 향해 그렇게 말했다.
아닌 게 아니라, 알렌이 검술 수련을 하는 와중에도 웬 여자 하나가 자리를 잡고 앉아 아련한 눈길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알렌에게 시비조로 말한 것은 그 여자가 상당한 미인이었기 때문이었다.
뭔가 조금 못되게 생긴 것이 흠이긴 했는데, 그 못된 얼굴이 묘하게 또 괜찮아 보였다.
“누구야, 저 남자는?”
허름한 마당에는 어울리지 않는 고급스러운 천을 깔고 앉아있던 여자가 알렌에게 와서 물었다.
나를 흘끔 바라보는 여자의 눈빛은 상당히 아니꼬워 보였다.
‘이 년 봐라?’
나는 뜬금없이 나를 흘기는 여자를 보며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가뜩이나 배가 아픈 상황에, 여자가 나를 그렇게 바라보자 기분이 더 상한 것이었다.
“아, 아가씨는 모르시겠군요. 이 분이 제가 말씀 드린 그 분입니다. 본 씨, 인사하세요, 이 쪽은 저희 주인님의 따님이신 샬롯 아가씨입니다.”
“아아! 이 분이 바로 그 트리샤 씨를 이겼다는? 죄송해요. 몰라 뵀습니다.”
알렌의 말에, 샬롯이라는 여자가 다급히 눈빛을 바꾸고는 나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재미있는 것은 샬롯이 나에 대해 가장 처음으로 언급한 것이 그 트리샤의 일이라는 것이었다.
‘하, 용병 여제 이름 값이 상당하긴 했나 보군.”
샬롯이 꽤나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보면 그건 확실했다.
제 아무리 잘 나가는 상단주의 딸이라도, 용병 여제를 이긴 남자 앞에서는 잘난 척을 하기 힘든 모양.
나는 어깨에 뽕이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알렌을 바라봤다.
“알렌, 나랑 어디 좀 같이 가자.”
“네? 어딜…?”
알렌은 순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그렇게 물었다.
마치 나는 호구 입니다, 라고 외치는 것 같은 알렌의 표정을 보며 나는 기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보면 알 거야.”
나는 알렌의 질문에 대답 같지도 않은 말을 했다.
하지만 우리의 호구 알렌은 내 말에 잠시 뭔가를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알렌이 그렇게 나오자, 당황한 것은 샬롯이라는 여자였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황당한 얼굴로 알렌을 바라보았다.
“잠깐, 그냥 간다고?”
나는 알렌의 소매를 붙잡는 그녀를 보며, 어떤 기묘한 감각을 느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이 어떤 한 사람을 몰래 짝사랑하고 있을 때의 달콤 쌉싸름한 느낌?
나는 한 눈에 샬롯이 알렌을 마음에 품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호오. 주인집 딸이 하인을 마음에 품었다라?’
나는 신기한 표정으로 알렌을 바라봤다.
나만큼은 못하지만, 객관적으로는 꽤나 잘 생긴 얼굴.
생긴 놈은 다 얼굴 값을 한다더니, 진짜로 별다른 노력도 없이 제 주인집 아씨를 꼬신 것이었다.
사실 샬롯 또한 미인인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이 세계 기준에서 압도적으로 외모의 평균치가 높은 성별은 여자뿐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이 망할 세계에 떨어져서 만난 남자들은 대부분 평범하거나 그 아래를 밑도는 외모를 가졌다는 소리다.
대표적으로 여급의 기둥서방 노릇을 하던 대머리는 우리 옆 집 아저씨를 똑 닮아 있었다.
“네.”
“아니, 어디 가는지도 모르잖아.”
“그래도, 본 씨가 가자고 하는 거니까요.”
그나마 샬롯이라는 여자는 정상적인 사고가 가능한 듯 했지만, 우리 알렌은 아니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상단의 도움을 받고 자라서 그런지 노비 근성이 뼛속까지 새겨져 있었다.
‘그러니까, 원망을 하려면, 네 아빠를 원망하라고.’
나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나를 흘끔거리는 샬롯을 보며, 상쾌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어쨌거나, 그 용병 여제마저 이겼다는 소문 때문인지 샬롯은 나에게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순진하게 내 뒤를 따라 나서는 알렌을 보며, 복장이 터질 것 같다는 표정을 보여주기는 했지만 우리 알렌은 그 마저도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었다.
‘와우! 완벽해! 완벽한 호구야!’
나는 그런 알렌의 모습에 속으로 감탄을 터트렸다.
알렌과는 꽤나 오랫동안 가깝게 지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성 밖으로 나가는 겁니까?”
니스의 성문 앞.
알렌은 성 밖으로 나서려는 나를 보고는 그렇게 물었다.
그랬다.
나는 굳이 우리 토룡이가 성 안으로 들어올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 없었다.
내가 구매한 이벤트는 [토룡 토벌전]이었지만, 나는 요격 전을 펼칠 생각이었다.
‘굳이 성 안에서 문제를 일으킬 필요는 없으니까.’
지금껏 니스에 수 많은 재앙을 가져온 당사자로서, 나는 이번 일 만큼은 성에 사는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정력에 좋다는 우리 토룡이를 빨리 잡아먹고 싶어서는 절대로 아니었다.
아니, 아주 조금 그런 마음이 없잖아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니스 시민을 위해서 요격 전을 펼치려는 것은 진심이었다.
“응. 성 밖으로 나가서 조금만 더 가면 돼.”
“으음. 그렇군요.”
내 말에, 알렌은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반짝였다.
그렇게 쉽게 납득을 할 거면, 애초에 왜 질문을 하는 건지가 궁금했지만 딱히 따져 묻지는 않았다.
아무리 알렌이 호구라도, 너무 대놓고 무시하면 눈치를 챌 수도 있으니까.
“그나저나, 그 샬롯이라는 아가씨 괜찮더라?”
나는 성문을 나서며 알렌에게 그렇게 말을 걸었다.
어차피 토룡이한테 가려면 한참이나 걸릴 터였고, 남자 둘이 걸으며 할 이야기라고는 여자 이야기 말고는 딱히 없었으니까.
“네? 뭐가 말입니까?”
내 말에, 알렌은 질문의 의도를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엉큼한 자식이 또 모른 척 하기는, 나한테 전에 그렇게 욕을 하더니만 오늘 보니까 그 정도는 아니던데? 은근히 너 챙겨주는 거 같기도 하고 말이야. 잘해 봐 인마. 혹시 알아? 샤일록 상단을 네가 물려 받을지?”
나는 알렌을 향해 그렇게 수다를 떨었다.
솔직히 샬롯이라는 여자가 아주 조금 아쉽기는 했지만, 앞으로 날 위해 열심히 굴러 줄 알렌이라면 충분히 양보를 해 줄 생각이 있었다.
물론, 샬롯이 듣는다면 황당하다 못해 기가 막혀서 목을 잡고 쓰러질 소리였지만.
“….본 씨.”
“응? 왜?”
“….아무리 본 씨라도, 그런 거지같은 농담은 하면 안 되는 겁니다.”
“…어?”
나는 황당한 표정으로 알렌을 바라봤다.
알렌은 그야말로 눈이 휘까닥 뒤집히기 직전의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사람이 건드려도 될 것이 있고, 건드리면 안 될 것이 있는 겁니다. 샬롯 아가씨와 저를 그런 식으로 엮다니요. 생각만 해도 토악질이 나올 것 같습니다.”
알렌은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보며 그렇게 말했다.
아마, 샬롯이 이 말을 들었다가는 삼일 밤낮을 이불만 끌어 안고 울 정도의 소리였다.
“아니, 내가 보기엔 그 여자가 너 좋아…”
“본 씨! 개 소리는 더 안 참습니다.”
나는 서슬 퍼런 알렌의 기세에 황급히 입을 닫았다.
진짜로 한 마디라도 더 했다가는 칼부림이라도 날 것 같은 기세.
나는 그런 알렌의 반응에 한숨을 푹 쉬었다.
꽤나 재수없는 여자이긴 했지만, 샬롯이라는 여자가 조금 불쌍해졌기 때문이었다.
‘어, 이거 어쩌면…?’
나는 갑자기 떠오른 아이디어에 눈을 번쩍였다.
알렌이 둔치라는 것은 샬롯에게는 최악의 상황이었지만, 나에게는 더 없이 좋은 호재였다.
나는 침을 꼴깍이며 알렌을 바라봤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그, 알렌. 혹시 저기 말이야, 그냥 이건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또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실 거라면…”
“아니, 그게 아니라 그 샬롯 말이야. 혹시 내가 만나도 상관 없어?”
나는 알렌을 보며 그렇게 물었다.
그러니까 내가 하려는 것은 NTL.
쉽게 말하자면 뺏어 먹기다.
매니악한 독자층만 있는 NTR과는 달리 꽤나 범용적으로 먹히는 아이템.
더군다나 그 상대 여자가 겉으로는 싸가지 없이 굴면서도, 속으로는 하인을 짝사랑하고 있다는 설정이면, 이건 거의 백 프로 먹히는 이야기였다.
‘이건 뜬다. 백 프로 떠!’
나의 작가로서의 감이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문제는 그 상대 여자가 알렌과 얽혀 있다는 것 정도.
앞으로 알렌의 도움을 쭉 받을 생각을 하면, 그에게 적의를 사는 일은 웬만하면 피하고 싶었다.
“후, 본 씨. 전에도 말씀 드렸지만, 저희 아가씨는 얼굴만 멀쩡하지, 완전 개차반입니다. 말 한마디 한마디가 상대의 기분을 더럽게 만드는 것은 기본이고, 욕심은 많아서 사람들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으면 직성이 안 풀리는 여자입니다. 거기다 욕심은 많고, 허영 덩어리에, 멍청하고, 폭급 한데다, 지랄 맞고, 또….”
알렌은 예전 던전에서 나에게 했던 이야기를 토시 하나 틀리지 않고 반복하고 있었다.
마치 샬롯의 인간성에 대해 정리를 해 두고, 달달 외운 것 같은 느낌.
이미 들었던 이야기를 또 듣는 것만큼 지루한 일은 세상에 없는 법이지만, 이번만큼은 예외였다.
“그러니까, 넌 상관 없다는 거지?”
내가 말을 끊고 그렇게 묻자, 알렌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자기가 갖기에는 부담스럽지만, 남 주기는 아까운 건가 싶었던 그 순간.
알렌이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뭐, 본 씨 같은 사람을 만나면, 아가씨도 조금은 나아질지도 모르겠네요.”
정말로 샬롯에 대한 마음이 손톱만큼도 없는 모양.
나는 알렌의 말에 웃음을 터트리며, 그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하하, 뭘 그런 소리까지. 그리고, 내가 전에도 말하지 않았나? 여자는 모름지기 톡 쏘는 맛이 있어야 한다고.”
나는 기분 좋은 목소리로 알렌에게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알렌은 그런 내 말이 조금도 납득이 가지 않는듯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모르겠네요. 여자란 자고로 남자를 잘 따르고, 집안일을 잘 하는 게 최고죠.”
“뭐?”
“아, 그리고 아이도 잘 키우는 게…”
알렌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자신이 생각하는 여성관을 나에게 떠들었다.
뭐, 그런 여자가 결혼 상대로는 나쁠 것이 없다고는 하지만, 알렌의 입에서 그런 말이 튀어나오자,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판타지 세계에서 조선시대 선비를 만난 느낌이랄까?
“알렌, 너 이 새끼. 생각보다 엄청 꼰대구나?”
“꼰대? 그게 뭡니까?”
내 말에 알렌이 다시금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렇게 물었다.
하지만 나는 굳이 알렌에게 꼰대의 사전적 의미를 설명해 줄 생각이 없었다.
대신, 알렌을 위해 조금 더 현실적인 조언을 해주기로 결심했다.
“알렌. 어디 가서 그런 소리 하지마. 특히 여자들 앞에선.”
“…왜요?”
“욕 먹어, 새꺄. 그냥 형 말 들어.”
나는 알렌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그렇게 말했다.
뭔가 납득이 되지 않은 표정이었지만, 알렌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본 씨가 하는 말이라면, 그게 맞겠죠.”
우리 왕 호구, 꼰대 씨는 생각보다 내 말을 잘 들었다.
그것도 엄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