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화 〉매력적인 패가 되다
‘공주가 여긴 왜 온 거지?’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공주를 바라봤다.
드디어 나왔다는 말을 들어보면,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
나름 인연이 있기는 했지만, 공주씩이나 되는 이가 나를 찾아올 정도는 아니었다.
“저…무슨 일로?”
나는 공주를 향해 그렇게 물었다.
공주는 예의 그 감정이 없는 듯한 말투로 내게 대답했다.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현자의 제자시라고요?”
“뭐?”
공주의 말에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것은 성녀 세라 였다.
그녀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나와 공주를 번갈아 가며 바라보는 중이었다.
성녀와는 달리 나는 그제야 공주가 날 찾아온 이유를 깨달은 태연한 얼굴로 공주를 바라봤다.
‘거짓말은 뻔뻔함 싸움이야.’
“그렇습니다만?”
나는 공주를 향해 뻔뻔한 얼굴로 그렇게 대답했다.
거의 표정이 없어 가면 같은 공주의 얼굴에 살짝 금이 가는 것이 보였다.
“그랬군요. 어쩐지 갑자기 나타난 이가 니스를 구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뭔가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했습니다.”
공주는 나에게 그렇게 말하며, 흘끗 성녀를 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런 공주의 행동에, 성녀는 분한 표정으로 주먹을 꽉 쥐고는 애꿎은 나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나는 성녀의 그 눈빛에 한 발 물러서야 할 타이밍임을 느꼈다.
“아, 제자라고는 하지만 그저 제가 현자님을 그리 여길 뿐, 정식으로 사제 관계를 맺은 것은 아닙니다.”
나는 공주에게 그렇게 선을 그었다.
아무리 내가 생각이 없다지만, 지금의 상황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는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건 일종의 스카우트였다.
성녀의 신탁 사건으로 인해, 공주는 나를 완전히 데메테르 교단에 속한 인물로 파악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내 배경에 현자가 있다는 것이 드러나면서 내 소유권이 애매해진 것이다.
물론, 그건 새빨간 거짓말이었지만.
‘근데, 현자면 왕국과는 별로 관련이 없지 않나? 오히려 마탑이라면 몰라도…’
나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공주를 보며 그렇게 생각을 이어갔다.
아쉬움과 경계가 뒤섞인 표정으로 날 바라보던 공주가 갑자기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선 이유가 쉽게 납득이 되지 않아서였다.
“네. 현자의 제자시라는 것도 놀랍긴 했지만, 제가 당신을 찾은 건 다른 이유에서입니다.”
공주는 선을 긋는 나를 보며 전혀 놀랍지 않은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결국, 그 때까지 대화를 듣고만 있던 성녀가 나서기 시작했다.
“공주님이 우리 성자님을 찾을 이유가 뭐죠? 성자님께서 현자의 제자시라고는 하나, 어차피 데메테르 여신님의 뜻을 따르는 분입니다. 왕국과는 따로 할 말이 없을 텐데요?
성녀는 마치 내가 현자의 제자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투로 말했다.
하지만, 그럴 거였으면 애초에 날 그렇게 죽일 듯 노려보면 안 되는 일이었다.
공주는 성녀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고는 나를 보며 붉은 입술을 달싹였다.
“토룡.”
“…..음.”
“토룡을 잡으셨다고 들었습니다.”
공주의 말에 성녀가 도끼눈을 하고 고개를 휙 돌려 나를 바라보는 것이 보였다.
이번에도 자신은 모르는 이야기가 나오자, 어지간히 분한 모양.
성녀의 도끼눈 끝에 물기가 어리는 것이 보였다.
“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나는 공주의 말을 순순히 인정했다.
알렌과 좋다고 관청까지 가서 보고를 마친 상황이니, 이제와 아니라고 둘러댈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갑작스럽게 공주의 관심을 사버리긴 했지만, 상황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어차피 공주도 결국엔 먹을 생각이었고, 그녀와 이런 식으로 관계를 터 나가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으니까.
다만 아쉬운 것은 공주가 들이닥친 타이밍이 하필이면 성녀를 따려던 지금이라는 것뿐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토룡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공주는 눈을 반짝이며, 나를 향해 그렇게 물었다.
**
‘곤란하네.’
나는 공주를 보며, 눈알을 굴리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공주에게, 사실은 토룡이 제 자지에 들어 있습니다 라고 말할 수는 없었으니까.
“왕국…을 못 믿으시는 겁니까?”
내가 대답을 회피하자, 공주는 눈을 가늘게 뜨고는 나에게 그렇게 물었다.
그야말로 침소봉대를 하는 격이었지만, 나는 공주의 말에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성녀는 그 타이밍을 가만 두고 볼 성격이 아니었다.
“흥! 당연한 거 아닙니까? 성자님께서 정치적 이득만을 따지는 왕실과 거리를 두는 것은 여신님의 뜻입니다.”
나는 이 자리에서 가장 정치적인 인간이 성녀라고 단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성녀는 아무런 부끄러움도 없는 표정으로 공주에게 그렇게 떠들었다.
뻔뻔하기로는 거의 나와 막상막하, 아니 조금 더 심한 듯 보였다.
“후. 성녀님. 지금 유치한 편 가르기나 할 때가 아닙니다.”
“뭐요? 유치? 아무리 공주님이라지만, 그게 할 말입니까?”
“애초에 저와 본씨의 대화에 끼어든 것은 성녀님이 아닙니까?”
나는 성녀와 말다툼을 벌이는 공주를 보며 입을 헤 벌렸다.
평소에는 얼음처럼 표정이 없는 주제에, 화가 난 표정 하나는 제대로 짓는 모습이 꽤나 신기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좋아요. 그럼 상관 없는 전 빠지죠!”
결국 말다툼에서 진 쪽은 성녀였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성녀가, 어째서인지 나를 바라보는 것이 보였지만 나는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가 자신의 편을 들어달라고 하는 느낌은 받았지만, 나는 왕국과 마찰을 일으킬 생각이 손톱만큼도 없었다.
결국, 아무도 붙잡지 않는 것을 느낀 성녀가 쾅쾅거리며 2층으로 올라갔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공주는, 이제야 이야기가 될 것 같다는 얼굴로 나를 보며 물었다.
“왕국에 불신을 가지고 계셔도 할 말은 없습니다. 확실히 문제가 많은 곳이니까요. 하지만, 현자님의 제자라면 더더욱 저에게는 토룡의 행방을 말해주셔야 합니다.”
“….어째서 그렇죠?”
나는 공주를 보며 그렇게 물었다.
공주가 근거로 든 것이 하필이면 내가 현자의 제자라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대부분 요즘 세상에 현자가 어디 있냐는 반응이었지만, 공주 정도가 되면 접근할 수 있는 정보의 질 자체가 다를 것이 분명했다.
자신 있게 현자를 거론하는 공주를 보며, 나는 혹시 그녀가 현자와 모종의 연관이 있지는 않을까 생각했다.
‘진짜 그러면 나가린데…’
당연히 난 현자의 제자도 뭣도 아니었다.
아마 지금 현자가 등장하기라도 한다면, 사기꾼으로 몰려 화형, 아니 교수형을 당하기 딱 좋은 상태라는 소리다.
나는 잔뜩 긴장된 표정으로 공주를 바라봤고, 그녀 또한 긴장된 표정으로 나에게 설명을 이어가긴 마찬가지였다.
“이미 아실 테지만, 저희 왕국의 시작은 과거 마왕을 물리친 영웅이 이 땅에 자리를 잡으면서부터입니다. 그 당시에 데메테르 교의 성녀 또한 그 영웅의 동료였고, 당시의 현자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나는 공주의 말에 흥미가 동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공주는 그런 내 시선을 느끼며, 조근 조근 설명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많은 세월이 흘렀다고는 하나, 그 당시의 맹약이 모두 잊혀진 것은 아닙니다. 비록 성녀님과는 여러 정치적 문제 때문에 대립하고 있지만, 그 또한 제가 해결을 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초대 왕이자, 영웅의 피를 이은 자의 책무이니까요.”
“….그래서요? 그게 제가 현자의 제자인 것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나는 조금 안심이 되는 것을 느끼며, 공주에게 그렇게 물었다.
대충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녀가 현자와 직접적인 관련은 없는 듯 보였다.
“현자의 지혜는 일인 전승으로 이어진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그 지혜를 이어받은 자이고요. 영웅의 피를 이은 자이자, 왕국의 제 1 계승권자인 미네르바 바크의 이름을 걸고, 저는 당신에게 과거의 맹약을 지키겠다고 맹세하겠습니다.”
공주는 나를 향해 꽤나 엄숙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문제는 내가 그 맹약에 대해 개뿔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현자의 제자 어쩌고 해 놓고 지금 와서 그 맹약이 뭐냐고 물을 수도 없는 노릇.
나는 공주를 보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저는 옛날의 그 고리타분한 약속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맹약의 내용이 뭔지도 모르니 고리타분한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지만, 벌써 수백 년 전의 인간들이 한 약속이 신선해 봤자 얼마나 신선할 까 싶어서 한 말이었다.
내 예상대로 맹약의 내용은 꽤나 고리타분 했던 것인지, 공주의 미간이 좁아지는 것이 보였다.
[바크! 그래, 그 놈 이름이 바크였다!]
그 순간, 내 안의 토룡이 나에게 발작하듯 말을 걸어왔다.
나는 토룡의 말에 빠르게 머리가 굴러가는 것을 느꼈다.
그러니까, 바크라는 왕국의 창립자이자 용사 또한 나처럼 이계에서 넘어온 인간이라는 소리.
거기다 바크라는 이름은 어쩐지 나에게 그리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봉씨인데 본이니까, 바크면…박씨인 건가?’
나는 아주 오래 전 나보다 먼저 이세계를 다녀갔다는 바크라는 용사에게 흥미가 일기 시작했다.
“그…맹약은 그렇게 함부로 거절할 만한 것이…”
공주는 내가 맹약을 지키는 것을 거부할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것처럼, 충격을 받은 얼굴로 나에게 그렇게 말했다.
나는 그런 공주의 말을 끊고는 다른 쪽으로 화제를 돌렸다.
“그것보다, 그 용사라는 분은 어떻게 됐습니까?”
“네?”
“마왕을 물리치고, 국가를 건설하고, 그리고 공주님이 피를 이었으면, 이곳에서 늙어 죽은 건가요?”
내 질문에 공주는 의도를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그녀가 원하는 정보는 내가 쥐고 있는 상황.
결국 공주는 내 질문에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내용입니다만,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셨습니다.”
“…사라져요?”
“네. 자신과 친했던 동료들과 신하들에게 나타나 인사를 하고는 그날 갑자기 사라지셨다고 합니다.”
나는 공주의 말에, 눈을 부릅떴다.
용사가 이세계에서 죽지 않았다는 것은, 결국 원래의 세상으로 돌아갔을 가능성이 있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누군가 이 세계로 흘러 왔다가 다시 원래의 세상으로 돌아갔다면, 나 또한 그럴 수 있다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좋아. 방법이 있긴 있는 모양이군.’
나는 꽤나 흡족한 정보를 얻었다고 생각하며 공주를 바라봤다.
“그랬군요. 어쨌든 저는 초대 영웅과의 맹약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토룡에 관한 문제라면 안심하셔도 됩니다. 그 존재는 더 이상 세상에 나오지 못할 테니까요.”
나는 좋은 정보를 얻은 대가로 공주가 가장 궁금해하는 토룡에 대한 정보를 넘겨주었다.
순간, 공주의 눈이 가늘어지기 시작했다.
공주는 내 말이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나를 향해 물었다.
“그 토룡은 비록 힘이 예전만 못하다고는 하지만, 불사의 존재입니다. 영웅이신 바크님과 그 동료들 조차도 결국 죽이지 못하고 힘을 봉인해 놓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네. 그래서 저도 봉인했습니다.”
나는 공주의 말에 대수롭지 않게 그렇게 답했다.
어쨌거나 토룡을 봉인한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공주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나를 향해 재차 질문을 던져왔다.
“봉인했다고요? 어디에요?”
“그걸 왜 공주님이 궁금해 하십니까?”
“….네?”
“봉인된 장소를 왜 다른 이들에게 알려야 하는 지를 모르겠군요. 저는 아무도 찾지 못할 곳에 그 흉물을 봉인했습니다. 그리고 누구에게도 그 장소를 말할 생각은 없습니다.”
나는 공주를 향해 그렇게 설명했다.
솔직히 기껏 봉인해 놓고, 왜 여기 저기 봉인한 장소를 남겨 놓는지가 나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렇게 봉인된 장소의 단서를 남겨 놓으니까 이번처럼 엉뚱한 놈들의 손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뜻은 알겠습니다만, 봉인이 유지되는 지 확인할 이들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봉인은 풀리지 않을 것이고, 그 누구도 봉인의 위치를 확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나는 공주의 말에 다시금 같은 말을 반복했다.
내 몸에 토룡이 봉인되었으니, 풀리지 않을 것은 당연했고, 내가 떠들고 다니지 않는 이상 그 어떤 누구도 토룡이 한낱 인간의 자지에 봉인되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할 것이었다.
[….저년, 죽이자.]
‘뭐?’
[…그 빌어먹을 용사의 후손이잖아. 죽여다오! 소원이다!]
순간, 내 안에 봉인된 토룡이 급 발진을했다.
당연히 그 토룡의 분노에 영향을 받은 자지가 발기했고, 공주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내 바지로 향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