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화 〉자연경
“하하…이건, 그러니까, 별 뜻 없이…”
나는 공주를 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공주가 너무 태연하게 발기한 내 물건을 바라보았기에, 더욱 민망함이 느껴졌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공주를 앞에 두고 발기했다는 것 따위가 아니었다.
[죽여라! 죽여!]
[다 죽여 버려어어엇!]
[바크. 그 빌어먹을 놈의 핏줄을 죽여라!]
머릿속에서 토룡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울리고 있었다.
“괜….찮으세요?”
공주의 옆에 있던 실비아가 나를 보며, 걱정스럽게 물어 오는 것이 보였다.
그저 머릿속에서 같은 목소리가 반복될 뿐이었지만, 당하고 있는 내 입장에서는 죽을 맛이었다.
토룡의 능력인지 뭔지는 몰라도, 눈 앞의 공주의 목을 비틀고 싶다는 충동이 자꾸만 튀어 나오는 중이었다.
‘미, 미친…이건 부작용치고 너무 심하잖아!’
나는 계속해서 들려오는 토룡의 목소리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누, 눈에서…피가.”
실비아가 놀란 얼굴로 내 얼굴을 보며 중얼거리는 것이 보였다.
손으로 슬쩍 눈가를 닦아 보니, 붉은 피가 손에 묻어 나왔다.
‘그랬지. 이 새끼 얌전한 듯 굴었지만 본질은 마수였어.’
조금이나마 토룡에게 느꼈던 친밀감이 순식간에 다 날아가 버렸다.
![토룡이 분노합니다]
![마력 친화 지체의 마력이 토룡에게 반응합니다]
토룡의 분노에 정신이 아득해지던 그 순간.
눈 앞에 메시지 창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마력 친화 지체와 당신의 마력이 토룡에 대항합니다.]
![놀라운 결과]
![당신의 마력이 토룡을 흡수하기 시작합니다.]
나는 멍한 표정으로 눈 앞에 떠오르는 메시지를 바라봤다.
[크아아악!! 이건 또 뭐냐! 인간, 눈 앞의 여자를 죽…]
![토룡이 소멸됩니다.]
![당신의 마력이 강화됩니다.]
![마력이 땅의 정수를 흡수합니다.]
그 메시지를 끝으로 토룡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나는 황당한 표정으로 메시지를 바라봤다.
이렇게 될 거였다면, 애초에 토룡의 에고를 내 몸에 남겨둔 이유가 이해가 되지 않아서였다.
“……괜…찮은 거 같습니다.”
나는 실비아를 향해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갑자기 토룡이 완전히 흡수된 이유 따위야 알 수 없었지만, 어쨌거나 위기를 잘 넘긴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 코피 나시는데요?”
하지만, 실비아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유지한 채로 나에게 그렇게 말했다.
쿵-.
그리고 그것이 내가 기억하는 마지막 장면이었다.
**
“으으으....머리야.”
다시 눈을 떴을 때 보인 것은 익숙한 내 방 천장이었다.
그리고 내 옆에는 하얀이와 여급이 또 별 일 아닌 것으로 싸우고 있었다.
“나도, 나도 물수건 할래!”
“하아? 할 줄도 모르잖아. 아픈 사람 간호하는 게 장난처럼 보여?”
그러니까 내 머리에 물수건을 누가 얹느냐로 싸우는 중이었다.
나는 힘겹게 몸을 세우고는, 그런 둘을 보며 말했다.
“물수건은 됐고, 물이나 좀 줘.”
내 말에 하얀이가 잽싸게 방 밖으로 뛰어나가는 것이 보였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내가 아프다는 생각에 뭐라도 해주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어떻게 된 거야?”
“….나도 잘 몰라. 공주님이 왔다 갔다는 거 밖에는.”
생각해보니, 여급은 공주가 온 당시에 2층에 실신해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나는 공주랑 대화를 하다 실신을 한 거였고.
“여기 물.”
나는 나에게 물컵을 내밀며 뿌듯해 하는 하얀이에게 같은 질문을 던졌다.
공주와의 대화 도중에 성녀도 방으로 들어가 버린 탓에, 상황을 끝까지 지켜 본 것은 하얀이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얀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줄래?”
“응? 그게, 아저씨가 쿵 하고 넘어지니까, 예쁜 공주랑 여자 기사가 깜짝 놀라서 난리가 났어.”
나는 하얀이의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공주는 나를 현자의 제자로 알고 있었고, 실비아는 나를 무려 천족으로 오해하는 중이었다.
그들 앞에서 온갖 허풍을 다 떨어 놓은 탓에 기절을 했다는 것 자체를 어떻게 무마해야 할 지부터 걱정이 되는 상황이었다.
“그, 토룡이라는 놈이 그렇게 세?”
내가 미간을 좁히며 일을 수습할 생각을 하던 그 순간, 하얀이가 나를 향해 그렇게 물었다.
“어어? 세지. 그건 왜?”
나는 하얀이의 말에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렇게 대답했다.
솔직히 직접 상대할 때는 하나도 세다고 생각하지 않던 놈이었지만, 몸 속에 들어와 발악을 하는 순간 놈의 진짜 무서움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아니, 예쁜 공주가 그러던데? 아저씨가 토룡이랑 싸워서 후유증이 나타난 거라고.”
나는 하얀이의 말에 눈을 반짝였다.
그러니까, 내가 굳이 변명을 하지 않아도 어떻게 상황이 좋게 흘러간 모양이었다.
‘그렇군. 토룡은 전설 속의 존재니, 현자의 제자건 천족이건 기절 정도는 할 수 있는 거였어.’
나는 알아서 내 변명 거리를 찾아준 공주와 실비아에게 고마움을 느끼며,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웃었다.
하얀이와 여급은 내가 깨어 났음에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괜찮다는 말로, 그 둘을 방에서 내보내고 생각에 잠기기 시작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타이밍에 너무 급발진을 했단 말이지.’
나는 토룡의 마지막 행동에 의아함을 느끼고 있었다.
아무리 공주가 토룡을 봉인한 용사의 후손이라지만, 놈이 거기서 지랄 발광을 한 것은 확실히 이상했다.
애초에 그럴 놈이었으면, 나한테 지랄을 먼저 떨었어야 이치에 맞았다.
‘연재창.’
나는 오랜만에 연재창을 열어, 상황을 확인하기로 했다.
가끔씩 소설에 내가 직접 겪지 않은 일들이 연재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 단서를 찾기 위함이었다.
-좀 많이 역겨운데요?
-이거 NTR 아니냐?
습관처럼 댓글 창을 열어 본 나는 굳이 소설을 읽을 것도 없이 토룡이 급발진을 한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반응이 안 좋아서 급 전개를 하셨다?’
나는 기가 막힌 표정으로 댓글 들을 읽어 내려갔다.
내 자지에 토룡이 봉인됐다는 설정의 반응은 최악에 가까웠다.
결국 나를 여기다 떨어뜨린 놈은 그 반응에 빠르게 태세 전환을 한 것이었다.
“뭐, 나야 이득만 챙기면 되지만.”
나는 연재창을 닫으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어차피 토룡이 발작하고, 내 마력에 흡수되기까지 내가 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핏발이 잔뜩 선 눈으로 코피를 흘리다 기절한 것이 전부.
하지만 나는 분명 마력이 강화되었다는 메시지를 읽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마력 수치 자체는 변화가 없는데?’
혹시나 싶어 내 능력 치를 확인했지만, 수치 자체는 100에 고정되어 있었다.
수치가 그대로라면, 어떤 성질 변화라도 있을 것이 분명했다.
나는 곧장, 마법을 사용했다.
방 안이라서 공격 마법은 쓰지 못했지만, 그것 외에도 보조 마법들이 얼마든 있었으니까.
그렇게 선택한 것은 라이팅.
그러니까 쉽게 말해 공중에 환한 빛을 띄우는 마법이었다.
“음…뭐가 변한거지?”
허공에 라이팅 마법을 구현해봐도, 평소와 다른 느낌은 찾을 수 없었다.
나는 실망감에 마법을 지우려 했지만, 그 순간 발 끝이 간지러운 것 같은 묘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응? 이거 설마?’
나는 재빨리 내 능력치가 있는 창을 열었다.
그리고 내 예상대로 마력수치가 불 붙은 주식창처럼 계속해서 변하고 있었다.
’99로 내려가면 곧 100으로 올라가네? 그러니까, 일종의 마력 회복인건가?’
나는 멍하니 깜빡이는 마력 수치를 보며, 허탈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사용한 것이 겨우 라이팅 마법이기에 마력이 빠지는 속도는 느렸지만, 차오르는 속도는 무시무시할 정도였다.
그리고 그건 거의 무한에 가깝게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는 소리였다.
‘이거…거의 자연경 아니냐?’
조화경, 신화경, 그리고 자연경.
뭐, 무협 소설마다 설정은 제 마음대로였지만, 내가 기억하는 자연경의 일반적인 특징은 마르지 않는 내공이었다.
이세계의 마력은 무협으로 따지자면, 내공과 비슷한 개념인듯 했고, 그게 계속 차오른다는 것은 따지고 보면 내가 자연경의 고수나 별 다를 것이 없다는 걸 의미하지 않을까 싶었다.
물론, 그거야 무협 배경일 때의 소리였고, 나는 마법사이니 할 수 있는 게 한계가 있겠지만 어쨌든 존나 좋은 옵션이 붙은 것만은 확실했다.
“뭐, 마나통 채우는 아이템은 어느 게임에서든 비싼 법이지.”
나는 새로이 얻은 능력에 뿌듯함을 느끼며, 연재창을 닫았다.
몸 상태도 괜찮은 것 같으니, 이제 원래 하려던 일을 할 참이었다.
‘성녀는 방에 있으려나?’
그랬다.
기절까지 하고 눈을 뜬 나는 곧장, 성녀를 먹을 생각부터 하고 있었다.
**
“….나가요.”
성녀의 방.
나는 싸늘한 성녀의 말에 당황스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나름 화기애애했던 분위기가, 한 순간에 얼음장처럼 차가워진 탓이었다.
나는 이내 성녀가 나를 차갑게 대하는 이유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러니까 성녀는 내가 공주 앞에서 자신의 편을 들어주지 않아서 삐친 거였다.
“삐쳤어요?”
“…..누가, 삐쳐요!”
성녀가 발끈하며 나에게 소리쳤다.
원래 삐친 사람에게 삐쳤냐고 물어보면 화를 내기 마련이었다.
“아니, 아까는 상황이 조금 그랬잖아요. 어쨌든 공주인데.”
“…그래도, 그래도 거기서 날 모른 척 하는 건 너무했잖아요.”
내 말에 성녀가 서운한 표정으로 날 향해 그렇게 말했다.
원래부터 제 멋대로인데다 제 잘난 맛에 살아온 성녀였지만, 잔뜩 토라진 모습은 나름 귀엽게 보였다.
나는 독기가 가득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는 성녀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래도 약은 먹어야 하는데…”
“…하. 죽든 말든 내 마음대로 할 테니까, 나가라고요!”
예상외의 강수를 두는 성녀의 모습에 나는 난감한 표정으로 웃음을 흘렸다.
삐칠 만하다고는 생각했지만, 그 정도가 조금 심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거기서 나 모른 척 했다고 이러는 것만은 아니에요.”
“….예?”
나는 황당한 표정으로 성녀를 향해 그렇게 물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따지다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뒤집는 것이 놀라웠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나만 모를 수가 있어요? 현자님 일도, 그리고 토룡도!”
나는 화가 난 듯 나를 쏘아붙이는 성녀를 보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솔직히 내가 따로 공주에게만 그 사실을 말한 것도 아니고, 그냥 둘 사이의 정보력의 차이일 뿐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무리 맞는 말이라도 할 상황이 있고, 아닌 상황이 있는 법이었다.
그리고 내 날카로운 감이, 지금 이 상황은 입을 꾹 다물고 있어야 하는 상황이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아, 그럼, 이건 좀 다른 이야긴데…”
원래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인 법.
나는 자신만 정보를 알지 못했다는 것에 토라진 성녀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듣기 싫어욧! 나가란 말이에요!”
하지만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성녀는 나를 방 밖으로 떠밀기 시작했다.
“아니, 진짜 중요한 일이에요, 성녀님만 도와줄 수 있는!”
내 말에 성녀의 눈이 반짝였다.
“나만…도울 수 있는 일이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잔뜩 토라져 있던 성녀의 표정이 급변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얼굴에 있던 서운함과 야속함 대신 호기심이 그 자리를 비집고 들어왔다.
‘하. 진짜 변덕이 심한 여자라니까?’
나는 그렇게 금방 기분이 변한 성녀를 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래서, 그게 뭔데요?”
성녀는 나를 떠미는 것을 멈추고는 나에게 그렇게 물었다.
나는 그런 성녀를 보며, 진중한 얼굴로 주위를 살폈다.
굳이 누가 엿들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지만, 이런 사소한 행동들이 성녀를 조금 더 들뜨게 만들 수 있을 터였다.
“그, 이건 매우 중요한 일인데, 혹시 마족에 대해 아시는 게 있습니까?”
“마, 마족이요?”
성녀는 내 말이 꽤나 의외였는지,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랬다.
실비아에게는 조금 미안한 일이었지만, 나는 지금 성녀에게 그녀의 사연을 팔아먹는 생각이었다.
물론, 나름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기에 결심한 일이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