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화 〉운디네, 1 어시스트
“아앗! 운디네, 갑자기 어딜 가자는 거야?”
얼굴을 붉히고 있던 데이나가 갑작스레 혼잣말을 했다.
그녀의 시선이 멍하니, 어딘가로 향하는 것이 보였다.
내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물의 정령이 어디론가 향한 모양.
“일단, 따라가 보죠.”
나는 흘끗 교실의 아이들을 바라보고는 목소리를 낮춰 데이나에게 그렇게 말했다.
정령이란 신비한 존재가 또 뭔가를 찾아냈을지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데이나는 교실을 나섰고, 나는 그녀의 뒤를 따랐다.
몇몇 아이들이 나와 데이나를 흘끔거리는 것이 보였지만, 말을 걸어오는 아이는 찾을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D반 아이들의 입장에서 나는 상당히 부담스러운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여기로 들어갔어요.”
데이나가 멈춰 선 곳은 아카데미 건물 내부의 어느 교실 앞이었다.
‘이런 곳이 있었나?’
나는 문을 열고 교실 안으로 들어갔다.
지금은 쓰지 않는 공간인 듯, 마치 창고처럼 온갖 잡동사니가 가득한 내부의 모습이 보였다.
“운디네? 어디 있어?”
교실 안으로 따라 들어온 데이나가 주변을 둘러보며 운디네를 불렀다.
하지만 이 장난꾸러기 정령은 무슨 속셈인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분명 여기로 들어 갔는데…”
나와 시선이 마주친 데이나가 움찔하며 그렇게 말했다.
딱히 그녀를 재촉한 것도 아니었지만, 데이나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미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괜찮아요, 어차피 시간이야 많은데, 뭐.”
나는 데이나를 향해 그렇게 답하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아카데미에 속한 교사들 대부분이 자신의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낸 실력자들이었다.
당연히 백작의 사건은 그들에게도 꽤나 중요한 일이었고, 덕분에 대부분의 교사들은 회의실에 모여 있는 상태였던 것이다.
“아뇨. 그래도 죄송해서…”
데이나는 울상이 된 표정으로 나를 향해 그렇게 말했다.
확실히 백작가의 하녀 출신이라 그런지, 필요 이상으로 상대의 눈치를 살피는 그녀였다.
‘자존감이 무척 낮은 편이네.’
나는 계속해서 나를 흘끔거리는 데이나를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신분제가 확실한 세상에서 아무 것도 내세울 것 없는 집안에서 태어났으니, 그녀가 그런 성향을 띄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마치, 내가 살던 곳에서 가난한 아이들이 대부분 자존감이 낮은 것처럼.
하지만, 데이나의 자존감이 낮은 것은 내 입장에서는 나쁘지 않았다.
당장, 내가 다리를 벌리고 보답을 하라고 말하더라도, 데이나라면 고개를 끄덕이고 옷을 벗을 지도 몰랐다.
‘물론, 그럴 생각은 없지만.’
한 번 먹고 끝낼 관계라면, 그런 방법도 나쁘지는 않았다.
하지만 데이나는 정령술사였다.
비록 지금은 하급 정령만 조금 다를 수 있을 정도라고는 하지만, 그녀의 성장이 어디까지 이뤄질 수 있을 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몬스터가 존재하고, 나름 복잡한 정치 상황이 펼쳐진 이 세계에서 가진 패가 많을수록 생존 확률이 높아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나는 데이나를 내 패 중 하나로 삼을 생각이었고, 그걸 생각해서라도 데이나와의 관계는 단발성으로 끝낼 생각이 없었다.
다행히 이벤트를 통해
‘자, 그럼 이걸 어떻게 먹는다?’
나는 초조한 얼굴로 교실을 돌아다니며 정령을 찾는 데이나를 보며,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
“그러니까, 로하임 백작님, 아니 백작의 사건은 그냥 넘어갈 문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걸 누가 모릅니까? 하지만, 그 성자…라는 분이 처리를 한 상황이니, 이제와서 뭘 어쩐다는 말입니까?”
“백작 하나만 마왕의 꼬임에 넘어갔다고 확신할 수 없잖습니까? 지금이라도 도시 내의 경계를 강화하고, 수상한 자들을 찾아내야 합니다.”
“후우. 도대체 니스에 왜 이런 일들이 계속 발생하는 것인지.”
성녀는 지루한 얼굴로 회의실에 모인 면면들을 확인했다.
공주가 이곳에 있었기 때문인지, 아카데미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귀족이나 관료들도 회의실 자리를 채우고 있는 것이 보였다.
회의실을 채운 것은 그 뿐만이 아니었다.
마탑을 대표하는 로잘린과, 용병 여제 트리샤를 비롯한 교사진들과, 아카데미의 학생 신분이지만 예외적으로 공주와 성녀 자신이 함께 하는 자리였다.
모인 면면만 봐도, 왕실의 회의보다 더 중요 인사들이 많이 참석한 자리였다.
그럼에도 회의는 지지부진했고, 성녀는 계속 빙빙 도는 이야기에 눈살을 찌푸리는 중이었다.
“상황 다 끝난 뒤에 뒷북은…”
결국 참다 못한 성녀가 중얼거린 말에, 자신에게 시선이 집중되는 것을 느꼈다.
왕국 쪽 인사들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들은 불만이 있어도 감히 털어 놓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굳이 성자가 처리했다고 얼버무리는 중이었지만, 백작의 일을 해결한 데 성녀의 공이 적지 않음은 모두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지금이라도 강력하게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굳이 니스 뿐 아니라 왕성에도 마왕의 추종자가 있을지 알 게 뭡니까?”
“왕성에 마왕의 추종자라니요! 말을 삼가세요. 아직 확인되지도 않은 일을 그렇게 떠들어 대다가는 타국에 빌미만 마련해 줄 뿐입니다.”
성녀를 잠시 노려보던 왕국 쪽 인사들은 다시 저들끼리 싸움을 시작했다.
성녀는 공주를 그리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지만, 그 모습을 보며 머리를 꾹꾹 눌러대는 공주를 보자 조금은 그녀가 불쌍하게 느껴졌다.
“….이거 그 놈, 진짜 보통이 아닌데?”
“현자님의 제자라고 했잖아요.”
지루한 표정으로 귀족들을 보던 성녀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향했다.
평균적으로 수준이 높은 아카데미의 교사진 들 중에서도 완전히 다른 차원을 보여주는 여자 둘이 소근거리는 것이 보였다.
‘흐음…현자의 제자라.’
성녀가 보고 있는 것은 바로 로잘린과 트리샤였다.
앙숙이라는 세간의 소문과는 달리, 둘은 생각보다 자주 붙어 다니는 중이었다.
성자가 현자의 제자였다는 사실은 이미 알려질 대로 알려진 사실.
하지만 성녀는 그 호칭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무리 현자가 대단하다고 해도, 여신님에 비할 바는 아니잖아?’
성녀가 그 호칭을 싫어하는 이유는 그것이었다.
여신의 뜻을 받드는 성자와, 현자의 제자라는 이름의 무게 중 더 무거운 쪽은 당연히 전자라는 것이 성녀의 생각이었으니까.
성자인 그가 현자의 제자라는 것은 그러니까 부수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
“야, 뭘 봐?”
못 마땅한 표정으로 로잘린과 트리샤를 바라보던 성녀에게 용병여제가 말했다.
성녀는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는 용병 여제를 보며, 휙 고개를 돌려 버렸다.
절대로 무서워서 피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짐승이나 다름 없는 여자와 시비를 붙는 것 자체가 고귀한 자신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저….이런 말씀 드리기는 좀 그렇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갈피를 못 잡고 서로 비난만 하는 왕국 쪽 인사들의 모습에, 교장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순간, 왕국의 귀족들은 물론이고, 피곤한 표정으로 싸움을 지켜보던 공주 또한 교장을 바라봤다.
교장은 공주의 그런 시선이 황공하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숙이고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 백작가의 추천으로 입학한 아이가 있는데, 이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교장이 눈알을 굴리며, 공주에게 그렇게 물었다.
“아아, 그 아이인가?”
“제법 미색이 뛰어나다지?”
교장의 화제 전환에 귀족들은 언제 싸웠냐는 듯, 음흉한 표정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공주는 그런 귀족들을 보며 표정을 굳혔고,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성녀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 아이는 신전에서 후원할 겁니다.”
공주가 뭐라고 말을 꺼내기 직전, 성녀가 대뜸 말했다.
물론 따로 허락을 받은 상황은 아니었지만, 성녀는 데이나라는 여자의 가치가 그리 낮지는 않다고 판단했다.
‘어쨌거나, 대륙에 몇 없는 정령술사니까 말이야.’
어릴 때부터 온갖 진귀한 것은 다 보고 자란 성녀였지만, 눈 앞에서 정령을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신전에서요? 왜요?”
“그 아이에게도 뭔가 특별한 것이 있습니까?”
성녀가 나서자, 귀족들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렇게 질문을 던졌다.
성녀는 그런 귀족들을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대부분 점잖을 떨고 있었지만, 그 새까만 속이 너무나도 잘 보였기 때문이었다.
“성자님의 지시입니다.”
성녀는 그렇게 성자의 이름을 팔았다.
어쨌거나, 백작의 일을 처리한 것은 성자였으니 왕국의 법에 따라도 그 상황에서 떨어진 물건을 얻는 것은 성자가 되어야만 했다.
데이나는 사람이었지만, 어차피 그녀의 신분을 생각하면, 물건 취급을 당해도 할 말은 없을 거였다.
“그거, 확실한 건가요?”
성녀는 눈을 반짝이며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는 공주를 바라봤다.
당연히 성녀는 마음대로 본을 팔아먹은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회의가 열리기 전부터 본은 이런 상황이 올 것을 알고 있었고, 성녀에게 대략적인 대응법을 일러 둔 상태였다.
“제가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성녀는 공주를 보고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공주가 모르는 어떤 언질이 자신과 성자 사이에 있었다는 것이 꽤나 뿌듯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지금 그 데이나라는 하녀는 어디에 있습니까?”
공주는 묘한 표정으로 성녀를 보며, 그렇게 물었다.
**
드르륵- 쾅.
갑작스럽게, 교실 문이 닫혔다.
나와 데이나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교실 문을 바라봤다.
그리고 닫힌 교실 문 앞에는, 그때까지 모습을 감추고 있던 물의 정령이 익살스런 표정으로 우릴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데이나를 향해 입을 뻐끔거리는 물의 정령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운디네가 데이나에게 뭐라고 말을 하는 것 같았지만, 내 귀에는 전혀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야?”
운디네의 말에 데이나는 얼굴을 붉히며, 그렇게 소리쳤다.
나로서는 더욱 정령이 무슨 말을 한 것인지 궁금해지는 상황.
나와 눈이 마주친 물의 정령이 천천히 나에게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하, 하지마! 운디네!”
당황스러운 목소리로 데이나가 정령의 행동을 저지했지만, 물의 정령은 아랑곳 하지 않고 내 코 앞까지 날아왔다.
그녀는 나와 눈을 마주치고는 싱긋 웃음을 짓기 시작했다.
‘가까이서 보니까 꽤 예쁘군.’
정령을 가까이서 본 내 소감은 그랬다.
솔직히 반쯤은 투명한 상태였기에, 그 윤곽만 나타날 뿐이었지만 그럼에도 꽤나 미형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대충 내 중지 정도의 크기.
그럼에도 나는 마치 잘 만들어진 피규어를 바라보듯 정령의 온 몸을 구석구석 관찰하는 중이었다.
정령이 움직인 것은 그 순간.
정령은 나를 향해 입을 뻥긋거리며, 뭐라고 말을 하기 시작했다.
“뭐! 뭐라는 거야!!!”
순간, 나와 조금 떨어져 있던 데이나가 기겁한 채 소리를 질렀지만, 정작 내 귀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고개를 갸웃거린 정령은 이내 내가 자신의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하는 것을 깨닫고는 내 주위를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다시금 내 코 앞에 멈춰선 정령이 이상한 행동을 보인 것은 그 다음이었다.
내 눈앞에 떠 있는 정령이 갑자기 허리를 앞 뒤로 흔들었다.
손으로 어딘가를 붙잡고 허리를 흔들어대는 그 모습은 나로 하여금 한 가지 생각만을 하게 만들었다.
‘섹스?’
하지만, 나는 감히 그 단어를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내가 뭔가 가당치도 않은 오해를 하는 중일 수도 있었고, 무엇보다 정령에 대한 내 환상이 그 말을 내뱉는 것을 망설이게 만들었다.
내가 아무 말도 없이 자신을 바라보자, 정령은 답답한 표정으로 제 가슴을 두드렸다.
나는 그런 정령의 모습에 슬쩍 데이나를 바라봤다.
정령의 말을 알아듣는 그녀라면, 지금 이 정령이 나에게 뭘 말하고 있는지를 통역해 줄 수 있을 테니까.
“으으…”
하지만 데이나의 상태는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양 손으로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감싸 쥐고 있는 상태였으니까.
굳이 나와 데이나 사이로 다시 날아온 정령은 내 눈 앞에서 뭔가 또 다른 동작을 취하기 시작했다.
손가락으로 원을 만들고, 다른 손의 검지를 이용해 쑤시는 듯한 동작.
‘뭐 하자는 거지?’
내 눈썹이 꿈틀거리는 것을 확인한 정령이 기쁜 듯 웃는 것이 보였다.
정령은 나를 향해 손가락으로 다시 원을 그리며, 뭔가를 묻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섹스 좋아?’
얄궂게도 나는 정령의 행동을 그런 의미로밖에 해석할 수 없었다.
“하, 하지마! 제발.”
그리고 그런 정령의 행동에 대한 데이나의 반응은 내 해석에 더욱 힘을 실어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