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77화 〉소유권 (77/158)



〈 77화 〉소유권

“….지금 회의실은 그런 상황입니다.”

공주가 있다는 회의실로 향하는 길.
실비아는 나에게 자신이 지켜 본 회의의 내용들을 간략하게 설명해주었다.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대책다운 대책은 하나도 못 내 놓는 왕국쪽 인사들이 감히 데이나에게 눈독을 들였다는 소리.

‘늙다리들이 감히 누구 여자를?’


이미 한  잤기 때문인지, 나는 데이나에게 눈독을 들인 귀족들이 그리 곱게 보이지는 않았다.
나는 불안한 표정의 데이나를 보며, 가볍게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순간, 깜짝 놀란 데이나가 내 쪽을 바라보는 것이 보였다.

“걱정 말아요, 데이나. 누구도 당신을 해치지 못할 테니까요.”

나는 데이나에게 그렇게 말하고는, 슬쩍 실비아를 바라보았다.
어지간히 욕구가 쌓인 모양이었지만, 나는 그녀를 전적으로 신뢰할 수는 없었다.
어쨌거나 실비아는 그 공주의 호위기사였기 때문이었다.


“실비아?”
“네, 처….본 님.”

나를 천족이라고 말하려다 황급히 말을 바꾸는 실비아의 모습이 보였다.
그런 실비아의 반응에 나는 그녀를  번  보기로 했다.

“공주께서는 무슨 뜻으로 데이나를 부르신 건가요?”
“아, 아마도 데이나 양에게 앞으로 어떻게 하실 것인지 의중을 묻기 위해서…”
“의중이요?”


나는 불쾌한 표정으로 그렇게 대답했다.
어쨌거나 실비아가 공주에 관한 이야기도 나에게 술술 털어놓는 것은 긍정적이었지만, 그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졸지에 주인을 잃은 하녀에게 의중을 묻는 다는 말이, 새로운 주인을 직접 선택하라는 소리로 들렸기 때문이었다.
그런 내 기분을 읽은 것인지, 실비아가 다급히 공주를 변호하듯 말을 덧붙였다.

“아니, 생각하시는 그런 의미는 아닐 겁니다. 어차피 신전 쪽에서 데이나 양을 후원하겠다고 말이 나온 상황이니까요.”
“세라 성녀님이요?”

나는 의외라는 표정으로 그렇게 물었고, 이내 데이나는 세라가 회의에서 어떤 말을 했는지를 나에게 알려 주었다.
미리 언질을 주긴 했지만, 생각보다 데이나에 대한 커버를 열심히 치고 있었던 모양.
나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천천히 실비아의 귀에 얼굴을 가져다 댔다.

“흡…”

갑작스러운  행동에 실비아가 어깨를 움츠리는 것이 보였지만, 그녀는  접근을 막지 않았다.
나는 그런 실비아의 모습에 만족감을 느끼며, 그녀의 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조만간, 실비아 님의 몸도 봐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말에, 실비아의 뺨이 붉어지는 것이 보였다.
어쨌거나 그 공주의 이야기 까지도 내게 털어 놓은 상은 주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네. 가, 감사합니다.”


실비아는 나를 향해 가볍게 머리를 숙이며 그렇게 말했다.
뭐, 상이니 뭐니 했지만 사실 그녀를 다시 한  먹고 싶은 것도 사실이었다.
나는 귀엽게 머리를 숙이는 실비아를 보며, 속으로 음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

“찾으셨다 들었습니다.”
“네, 이년. 공주님이 기다리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느냐!”
“정말이지 가당치 않은 일 아니오? 기껏 하인  하나가 공주님을 비롯해 우리 전부를 기다리게 만들다니!”


문이 열리고 데이나의 모습이 보이자 마자, 회의실 안쪽에서 비난이 쏟아져 나왔다.
나는 기가 막힌 표정으로 그 장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너무 예상대로 흐른 장면에 어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왕국의 귀족이라는 놈들이 어떤 인간들인지 직접 마주하자 공주가  그렇게 자랐는지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일부러 문  쪽에 모습을 감추고 있던 나는 천천히 데이나의 옆으로 다가섰다.


“네 년이 감….!!”


데이나를 몰아 붙이던 귀족 중 하나가 나를 발견하고는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가 내 얼굴을 알고 있었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조금만 머리가 돌아가더라도 이 상황에 데이나와 함께 나타난 남자가 누구인지를 눈치 채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일 것이었다.

“네 놈은 또 누구냐?”


하지만, 세상엔 꼭 머리가 잘 안 돌아가면서도 행동력은 끝내주는 이들이 있기 마련이었다.
귀족  하나가 데이나의 옆에 서 있는 내 모습을 꼬라보며 그렇게 소리쳤다.

“미쳤어요?!”

내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쪽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성녀였다.
성녀는 자리까지 박차고 일어나 나에게 네 놈을 시전한 귀족을 노려보는 중이었다.


“성녀님, 아무리 교단의 위세가 대단하다고 해도 회의 중에 왕국의 귀족인 저에게 미쳤냐니요? 이 문제는 절대로 가볍게 넘어갈 수 없습니다!”

귀족은 성녀를 향해 그렇게 쏘아 붙이고는 공주를 바라봤다.
아마도 자신이 왕국과 기 싸움을 벌이는 성녀의 콧대를 제대로 눌러줬다고 생각한 모양.
그런 귀족의 표정이 굳어진 것은 공주의 얼음장 같은 표정을 확인한 직후였다.


“하? 그거야 말로 이 쪽이 하고 싶은 말이거든요? 여신님의 충실한 종이자, 그 마왕의 끄나풀을 없앤 성자님께 뭐요? 네 놈? 이게 왕국의 답인가요?”
“에…?”


성녀의 말에 귀족은 얼 빠진 소리를 내며 나를 바라봤다.
하지만 그렇게 바라본다고 해서 내가 딱히 뭔가를 해 줄 건 없었다.

“하아. 호드르 자작님.”
“넵!”


결국, 상황을 정리한 것은 공주였다.
공주는 호드르 자작이라는 귀족의 이름을 불렀고, 귀족은 구원을 바라 마지 않는 눈길로 공주를 바라봤다.


“사과 드리세요.”
“네?”
“로하임 백작가의 일은 왕국으로서도 은혜를 입은 일. 그런 분께 망발을 한 것을 사과하란 말입니다.”


공주의 말에 호드르 자작은 하얗게 질린 안색으로 나를 다시 바라봤다.


“그…저, 죄, 죄송합니다.”

나는 호드르 자작의 말에 굳이 대꾸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고작 사과  번 하는 것뿐이었지만, 아마도 이번 일을 통해 호드르 자작의 정치적 입지는 상당히 위협을 받을 것이었다.
당장, 공주의 눈 밖에 난 것부터가 그에게는 감당하지 못할 타격일 테니까.

“오는 길에 대충 상황은 들었습니다.”

나는 공주를 향해 그렇게 말했고, 그녀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데이나 양의 의중을 물으신다고 하신  같은데, 그거라면 굳이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데이나 양은 제가 맡을 거니까요.”
“그게….무슨 의미죠? 그녀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는 건가요?”

공주가 살짝 미간을 좁히며 나에게 물었다.
 말에 회의실 안에 정적이 찾아왔다.
데이나를 노리고 있던 귀족들은 적의가 가득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고, 세라 성녀는 내 의중을 몰라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아카데미의 교사들만이 예상 밖으로 돌아가는 상황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 그녀를  곁에 두겠다는 의미지,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공주를 향해 그렇게 대답했다.
애초에 사람에게 소유권 따위를 주장할  없는 세상에서 살다 온 나로서는 공주가 떠올린 발상 자체를 할 수조차 없었다.

“흥, 말만 그럴 듯 하게 둘러댔을 뿐, 그대도 결국은 여자가 욕심난다는 뜻 아닌가? 여신의 종이니, 성자니 떠들더니만, 당신도 그저 남자일 뿐이군!”


방금 전, 공주의 명령으로 나에게 사과를 했던 귀족이 날 향해 그렇게 말했다.
아마도 어차피 망한 판에, 최후의 발악이라도 해보려는 심리인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번엔 호들갑, 아니 호드르 자작의 그 발악이 통했다.
공주는 물론이고, 다른 왕국 쪽 인사들이 은근히 그의 말에 동조하는 듯한 행동을 했기 때문이었다.
성녀가 인정한 성자가 사실은 호색한이었다는 것은 충분히 교단의 입지를 깎아낼 만한 파급력이 있었다.
하지만 나로서는 그걸 걸고 넘어지는 호드르 자작이나, 공주나 귀찮게 느껴질 뿐이었다.
성자라는 칭호가 이래저래 편리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굳이 거기에 목을 맬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호색한이라는 말도 사실이긴 하고…’

대충 인정해 주고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심각한 표정으로 눈을 굴리는 성녀를 본 나는 귀찮아도 호드르 자작을 상대해 주기로 했다.

“뭐 눈엔 뭐만 보인다더니…”
“뭐라? 아무리 백작을 해치운 공이 있다고는 하나, 나는 왕국의 정식 인정을 받은 귀족이다! 이 무슨 무례인…”
“방금 전까지 나한테 사과하지 않았소?”

나는 흥분한 자작을 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사과를   고작 1분도 되지 않아 화를 내는 꼴이 우스웠기에 한 말이었고, 자작은 내 말에 얼굴을 붉혔다.


“데이나, 괜찮다면 운디네를 불러 줄 수 있겠어요?”


내 말에, 눈치만 살피고 있던 데이나가 운디네를 소환했다.
데이나의 앞에 하얀 색의 정령이 몸을 드러냈다.

‘미친…’

나는 백색의 정령을 보며 인상을 구겼다.
그러니까 눈 앞의 물의 정령은 굳이 수 많은 물들을 내버려 두고  좆물로 몸을 구성한 것이었다.

“….정령술사라니!”
“그랬군, 그래서 백작이 저 아이를….”

갑작스러운 정령술사의 등장에 술렁인 것은 아카데미의 교사진들이었다.
그들 모두가 각자의 분야에서 나름 두각을 나타내는 인재이니 만큼, 생전 처음 보는 정령술사에 대한 호기심을 제어하지 못했던 것이다.
심지어 개중에는 신이 나서 회의실 안을 돌아다니는 정령을 만져보는 이도 있었다.

‘또…쟤네.’

그리고 하필이면, 그 정령을 만져본 인물은 로잘린이었다.
로잘린은 마법사답게 호기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정령의 몸을 손가락으로 건드리고는, 이내 불쾌한 얼굴로 자신의 손가락에 묻은 액체의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어째서인지, 그 냄새를 확인한 그녀가 나를 쏘아보는 것이 보였지만 지금은 로잘린을 상대할 때가 아니었다.


“보시다시피 그녀는 정령을 다룰 줄 압니다. 저는 그녀의 재능이 제대로 빛을 볼 수 있게 옆에서 도와줄 생각입니다.”
“하? 대륙에도  없다는 정령술사를 당신이 어떻게 도와!”

호드르 자작이 나를 향해   번 최후의 발악을 했다.
질긴 놈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번 발악은 완벽한 미스.
내가 대답할 것도 없이, 다시 아카데미 교사진들에게서 대답이 흘러 나왔다.


“현자의 제자니까 정령 쪽도 어느 정도 지식은 있을  아냐?”


시기 적절하게 태클을 걸고 들어온 것은 트리샤.
구태여 집착할 필요는 없었지만, 명성이라는 것이 꽤나 유용한 것은 확실했다.

“이 문제로 아직도 할 말이 남았나요?”


세라 성녀가 공주를 향해 그렇게 쏘아 붙였다.
자작의 함정 카드로 인해, 제대로 똥을 밟은 공주는 싸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녀의 붉은 입술이 천천히 열리는 것이 보였다.

“아직…데이나 양의 의중을 확인하지 못했습니다만?”


공주는 마지막 기대를 버리지 않고, 데이나를 보며 그렇게 말했다.
공주 답지 않은 발버둥이었지만, 그냥 물러나기엔 여러모로 모양이 빠지는 상황이기는 했다.

“데이나, 어떻게 할 건가요? 그의 도움을 받아도 되지만, 왕실 또한 당신을 보호할 생각이 있습니다. 거기다 이번 일이 백작의 소행이었던 만큼 왕실은 당신에게 어떤 보상이든 할 생각입니다.”

공주는 데이나를 보며 그렇게 말했다.
그녀 나름으로는 필사적으로 데이나를 붙잡으려고 하는 것이었다.


“공주님, 배려는 감사하지만, 저는 본 님의 곁에 있고 싶습니다.”

하지만 이미 승부는 기울어 있는 상황.
데이나는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공주를 향해 그렇게 대답했다.
마지막까지 기대를 버리지 않았던 공주의 눈이 착잡하게 가라앉는 것이 보였다.
공주의 심경이 복잡해 보이는 것은 어설프게 날 건드린 것 때문만은 아닐 것이었다.
어쩌면 공주의 입장에서는 어렵게 발견한 정령술사마저 회유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더 클지도 몰랐다.

“뭐, 그렇게 됐군요. 공주님.”


나는 공주를 놀리듯 그렇게 말하고는, 데이나를 향해 살짝 손을 뻗었다.
데이나는 마치 강아지처럼 빠르게 내 손을 붙잡았다.
어쩐지 나와 데이나를 바라보는 성녀의 표정이 좋지 못했지만, 일단 지금은 데이나를 칭찬해 주어야 하는 순간이었다.

‘너도 조만간 아껴 줄 테니까, 너무 그렇게 보지는 말라고.’


나는 아무에게도 밝힐 수 없는 음흉한 생각을 하며, 그렇게 성녀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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