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81화 〉백작이 되다 (81/158)



〈 81화 〉백작이 되다

“이런 무엄한 자를 봤나!”
“당장 폐하에게 예를 갖추지 못할까?”
“네 어느 알량한 배경을 믿고 오만 방자하게 구는 것이냐!”


제국 소속이 아니라는 말에 당장 귀족들의 노성이 쏟아져 나왔다.
판에 박힌 듯이 한심한 모습이기는 했지만, 이시디나 왕국의 입장에서 보면 그럴 수 밖에 없는 상황이기는 했다.
대충 조사한 바에 의하면, 이 대륙은 거대한 에페우스 제국을 중심으로 약소 왕국들이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상태였다.
에페우스 제국의 입장은, 얼마든  왕국들을 강제로 병합할 힘이 있었지만 굳이 그럴만한 가치가 없어 내버려 두는 상태.
가장 좋은 토지와  많은 자원들이 제국의 땅에 몰려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수 많은 왕국들 중에서도 이시디나 왕국은 따지자면 1군에 속하는 나라였다.
용사가 세운 나라라는 점에서 제국도 이시디나 왕국을 경시할 수는 없었고, 왕국의 인사들 대부분이 친 제국파였기에 딱히 견제를  이유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말 잘 듣는 동생 같은 느낌이 이시디나 왕국의 상태였다.
제국의 시민이냐는 황제의 질문에 귀족들이 일제히 입을 다문 것은 그런 정치적 상황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그만들 하라!”
“하지만 폐하! 이것은 왕국의 권위가 달린 일이옵니다!”
“맞습니다. 저 무도한 이가 아르카 왕국의 사람이 아니라는 보장도 없지 않사옵니까?”

국왕이 귀족들을 향해 그렇게 소리쳤지만, 귀족들의 입은 다물어질 줄을 몰랐다.
나는 황당한 표정으로 그런 귀족들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정작 국왕의 권위는 자신들이 다 깎아 먹으면서 나한테 다 뒤집어 씌우는 모습이 기가 찼기 때문이었다.
국왕 또한 그런 귀족들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인상을 찌푸렸지만, 더 이상 제지를 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말을 듣지 않을 귀족들에게 괜히 말을 꺼내봐야 자신의 권위만 깎이기 때문이었다.


‘이거 허수아비 왕이 따로 없군.’

나는 자신의 신하들을 저지하지도 못하는 무능한 왕을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그 아비를 보니, 공주가 왜 그렇게 자랐는지, 그리고 어떤 이유로 인재에 그렇게 집착하는 것인지를 조금쯤은 이해할 수 있었다.


“진짜, 아르카 왕국 출신인가?”
“흥, 저렇게 예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족속은, 그 나라 놈들 말고는 없다!”


국왕이 그러거나 말거나 왕국의 귀족들은 나를 향해 그렇게 떠들어 대는 중이었다.
아르카 왕국은, 이시디나 왕국의 이웃한 나라로, 야만인들이 세운 국가였다.
 야만인이라는 표현도 어디까지나 이시디나 왕국의 책에 기록된 것이었기에 그리 신빙성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두 왕국의 사이는 거의 최악에 가까웠다.
아르카 왕국인들은 이시디나 왕국을 제국에 아부하는 아첨꾼들이 모인 나라라 평했고, 이시디나 왕국은 아르카 왕국을 힘만 좋은 멍청이들이 가득한 나라라고 떠들었다.
그러니까 지금 귀족들이 나에게 아르카 출신이냐고 묻는 것은 그들의 입장에서는 최고의 모욕을 쏟아내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하아, 저는 아르카 왕국과도 관련이 없습니다.”


나는 아예 나를 아르카 왕국의 사람으로 못 박으려는 귀족들을 향해 그렇게 대답했다.
하지만 제국의 시민이 아니라고  했을 때는  바로 믿어 의심치 않던 귀족들이, 이번에는  태도를 달리 하고 있었다.


“그대가 아르카 왕국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어찌 믿는가?”
“증거를 대라!”

나는 목에 핏대를 세우고 소리치는 귀족들을 가만히 바라봤다.
국왕이 백작 작위를 하사하면서까지, 나를 왕국의 편으로 끌어들이려 했지만, 귀족들의 입장은 달랐다.
그들은 국왕이 아닌 제국의 눈치를  살필 뿐이었고, 오히려 국왕의 곁에 힘있는 자가 붙는 것을 원치 않았다.
솔직히 그냥 마법을 난사해 버릴까 싶을 정도로 짜증이 나는 상황이었지만, 나는 차분한 표정으로 나를 몰아붙인 귀족을 바라봤다.

“어리석은 질문을 하시는군요.”
“뭐라?!”


내 말에 귀족은 얼굴을 붉히며 노성을 터트렸다.
나는  귀족을 향해 이죽거리는 얼굴로 질문을 던졌다.

“성함과 직위를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나는, 오로시우스 후작이다.”


스스로를 후작이라 칭한 귀족은 꽤나 자랑스러운 듯 가슴을 펴며 그렇게 대답했다.


“아, 오로시우스 후작님.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너 따위가 무슨 말을 들었다는 것이냐?”
“제가 로하임 백작과 전투를 벌일 때, 그가 말하길 자신의 동료들이 저를 가만 두지 않을 거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동료들의 이름을 하나씩 열거했는데 거기에 후작님의 성함이 분명히 있었지요.”

 말에 귀족들이 웅성거리며 나를 바라봤다.
그래도 다들 대가리는 달려 있는 양반들이었기에, 내 어설픈 말을 믿지는 않는 눈치였다.


“개소리! 어떤 미친 종자가 죽어가면서 제 동료들을 다 털어 놓는다는 말이냐! 감히 나를 모함하는 것이냐?”


후작은 이마에 힘줄까지 튀어 나온 상태로 날 향해 그렇게 말했다.
나는 그런 후작을 보며 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차피 내 허접한 증언이 먹힐 거라고는 생각지도 않았었으니까.

“물론 개소리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들었는데요?”
“뭐?”
“너도 들었지 알렌?”


나는 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있는 알렌을 발로 툭툭 치며 그렇게 말했다.
적어도 눈치가 조금이라도 있는 놈이라면, 지금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알고 있을 테니까.

“….네? 아, 네.”


알렌은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보다가 그렇게 답했다.
순간, 오로시우스 후작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지는 것이 보였다.


“이제 보니  놈 모두, 왕국에 분탕을 치러 온 놈들이구나!”
“….증거 있습니까?”
“뭐라?”
“아니, 증거 있냐고요? 내가 왕국에 분탕을 치려 했다는 증거, 그리고 당신이 마왕과 어떤 연관도 없다는 증거 말입니다.”

나는 오로시우스 후작을 보며 그렇게 물었다.
그제야 내 말의 뜻을 알아들은 오로시우스 후작은 얼굴을 붉히며 나를 노려보기만 할 뿐이었다.


“증거를 대라. 말은 쉽지만, 그것이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은 이제 아시겠지요? 제가 아르카 왕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할 증거는 없지만, 저로서는 그냥 아니라고 답하는  외에는 드릴 말씀이 없군요.”


나는 귀족들을 보며 그렇게 대답했다.
그 순간,  때까지 상황을 지켜보던 국왕이 웃음을 터트렸다.
마치, 아주 오랜만에 재미난 구경거리를 봤다는 듯이 경쾌한 웃음소리였다.

“폐하!”


당장 오로시우스 후작이 반발을 하고 나섰지만, 국왕은 그를 향해 살짝 손을 내 저었다.


“어차피 그가 아르카 왕국인이던 아니던 상관은 없지 않은가? 아니, 오히려 저 자가 아르카 인이라면 더욱 우리 쪽으로 포섭해야 옳은 일이지. 상대는  현자의 제자요, 여신께 신탁까지 받은 인물이 아닌가!”

국왕의 말에 오로시우스 후작은 입술을 깨물며 뒤로 물러섰다.
어쨌거나 허수아비 왕이라도 왕은 왕이었으니, 명분에서 밀린 이상 무턱대고 들이 받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 왕국의 법에 공을 세운 자는, 그 공으로 얻은 것들을 모두 가질 수 있다네. 그대, 이름이 뭐라고 했지?”
“본, 본이라고 합니다.”

나는 이제서야 이름을 묻는 국왕을 보며 그렇게 답했다.


“그래, 본. 우리 이시디나 왕국의 백작위를 받을 생각은 있는가?”


국왕의 말에 다시금 궁성 안의 귀족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백작이면 나름 고위 귀족직이었고,  자리에 있는 이들 대부분은 백작보다 품계가 낮을 것이었다.
그럼에도 왕은 백작의 자리가 마치 떨이 물건이라도 되는 것처럼 나에게 받을 생각이 있냐 물었고 그건 내세울 것이라고는 혈통밖에 없는 귀족들에게는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나 다름 없었다.

“폐하! 어찌 그런 말을 하십니까?”
“이시디나 왕국은 용사께서 만든 국가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자라도 왕국의 백작 위를 거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백작들의 반발에 왕의 눈빛이 변했다.
기운이 빠진 듯, 초라해 보이던 노인의 눈에 묘한 번뜩임이 스쳐 지나간 것이었다.


“그런가? 그럼 자네가 가서 제국의 황제에게 내가 백작의 자리를 내리겠다고 전하게. 내 그가 내 아래로 들어온다면, 백작이 아니라 공작위도 얼마든 줄 테니 말이야.”
“….어찌 그런 황공한 말씀을!”


국왕의 말에 귀족은 당황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나는 생각지도 못한 모습을 보여준 국왕에게 호기심을 느끼며 그를 바라봤다.
그저 아무 힘도 없는 헛개비 왕이라고 생각했더니, 나름 날카로운 발톱을 감추고 있었던 것이었다.


‘하긴, 그 공주를 생각하면 무리도 아니지만.’


나는 공주의 얼굴을 떠올리며, 천천히 국왕을 바라봤다.
국왕은 간만에 즐거운 일을 찾은 것처럼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는 중이었고, 나는 천천히 그런 국왕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현자께서 이르길, 기회가 제 문을 두 번 두드릴 거라고 생각지 말라고 하시더군요.”


내 말에 국왕은 호쾌한 표정으로 웃어 보였고, 귀족들의 표정은 그와 반대로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

‘이게 끝이야?’

백작이 되는 것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내가 상상했던 것처럼, 검으로 어깨와 머리를 두드리는 등의 요식 행위 따위는 찾아 볼  없었기에 나는 조금 시시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국왕은 자신의 시종을 시켜, 나에게 어떤 문서를 내밀었고 나는  문서에 이름을 적어 넣었다.
그리고 그걸로 끝.

“이로서, 본을 이시디나 왕국의 정식 백작으로 인정한다. 봉토는 기존 로하임 백작의 것을 그대로 양도한다.”

내 서명을 확인한 국왕은 그렇게 말했고, 나는 그 순간 백작이 된 것이었다.

“이제는 본 님이 아니라, 백작님이라고 불러야겠네요?”

왕궁을 빠져 나오며, 알렌이 나를 향해 그렇게 말했다.
알렌 또한 얻은  완전히 없었던 것은 아닌데, 국왕이 나에게 백작이 된 기념으로 알렌을 기사로 서임하라고 권했던 것이었다.


“뭐, 그렇지.”


내가 시큰둥하게 대답하자 알렌이 눈알을 굴리며,  눈치를 살피는 것이 보였다.
국왕이 말한 기사 서임에 대해 묻고 싶어하는  뻔했다.
마차밖에 모르는 놈이라고 생각했지만, 검을 쥔 이상 기사라는 신분을 얻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저…기사 서임은 어떻게 하실…”
“아, 해. 해줄게. 니스로 돌아가서 제대로 하자.”


나는 귀찮은 표정으로 알렌에게 그렇게 답했다.
어차피 앞으로 두고 두고 써먹을 놈이니, 이 기회에 기사 자리를 주고 제대로 부려먹는 게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아싸!!”

나는 흥분한 표정으로 주먹을 쥐고 기뻐하는 알렌의 모습에 허탈한 웃음을 내뱉었다.
솔직히 백작을 잡은 것은 알렌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백작의 위를 받았듯이, 알렌 또한 귀족의 자리를 받았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그럼에도 알렌과 내가 받은 포상이 달라진 것은, 아무래도 배경의 영향일 것이었다.
현자의 제자라는 입장과, 상단에서 큰 평민이라는 배경 차이가 그 성과마저 바꿔 놓은 것이었다.


‘뭐, 일단 현자의 제자라는 것도 뻥이지만.’

나는 고작 기사 서임에 흥분하는 알렌을 보며, 참 속도 좋은 놈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순간, 내 눈앞에 새로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이벤트 발생]
![미망인 사냥꾼 (50쿠폰)]


나는 메시지를 보며 야릇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최근 강제로 이벤트를 떠넘긴 이후에, 오랜만에 뜬 이벤트였다.

‘아마, 그 댓글 때문이겠지?’

나는 언젠가 독자  한명이 미망인 캐릭터를 만들어달라는 댓글을 남긴 것을 기억해냈다.
아마도 그에 적합한 인물이 근처에 있는 모양.
저번에 강제로 이벤트를 떠넘긴 일도 그렇고, 이번엔 그냥 시스템이 만든 이벤트를 무시해볼까 싶었지만….

‘미망인 사냥꾼이라니, 너무 궁금하잖아!’


나는 홀린 것처럼 50 쿠폰을 갈아 넣어 이벤트를 구매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왕성 앞으로 누군가 뛰어 오는 것이 보였다.

“하악. 하악. 혹시, 본 님 되십니까?

내 앞에 멈춰와 숨을 다급히 몰아 쉬는 남자 아이가 나를 보며 그렇게 물었다.

‘미망인이라니, 사내새끼잖아?’

나는 기가  표정으로 남자 아이를 바라봤다.
이제 막 소년 티가 나기 시작하는 듯한 모습.
역변만 일어나지 않는다면 여자 꽤나 울리고 다닐  같은 외모에 절로 적개심이 불타올랐다.

‘아니지,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얘 엄마도 미인일 거 아냐?’


나는 최대한 친절한 표정으로 남자 아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 그런데 무슨 일로 나를 찾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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