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화 〉오드왈 남작가의 사정
“그러니까, 네가 오드왈 남작의 자제라고?”
“네.”
나는 마차 안에서 나를 찾아온 소년과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소년은 자신이 오드왈 남작의 아들이라고 말했지만, 문제는 내가 오드왈 남작이 누구인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래서라니, 그런!”
내 말에, 소년의 얼굴이 울상으로 변했다.
마치, 믿고 있던 마지막 보루가 무너진 듯한 표정.
갑자기 오드왈 남작의 자제라고 자신을 소개한 소년의 그런 표정에 나는 살짝 미간을 좁혔다.
‘뭐지, 도대체?’
“무, 물론, 아버님과 본 님이 어떤 관계인지는 저도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본 님이 아버님께 추천장을 얻었다는 것은, 필시 두 분 사이에 어떤 인연이 있다는 뜻. 그래서 염치 불구하고 도움을 청하러 온 것입니다.”
소년은 나를 향해 그렇게 말했다.
나는 그제야 오드왈 남작이 누군지를 기억해 낼 수 있었다.
그러니까, 특별 상점에서 구매한 남작의 추천서가, 오드왈 남작의 것이었던 모양이었다.
‘아니, 그렇다고 해도 그 사람이랑 나랑 무슨 인연이 있는 것도 아닌데?’
나는 난감한 표정으로 마차에 탄 소년을 바라봤다.
엄밀히 말해서 나는 그 오드왈 남작과 남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일면식도 없는 상태로 추천서를 받은 상황이기에, 오히려 남작을 만나면 안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눈 앞의 소년의 절박한 표정은 묘하게 내 시선을 잡아 끌고 있었다.
뭐랄까, 절로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느낌이었다.
“도움이라…무슨 사정인지, 들어나 볼까?”
나는 소년을 향해 그렇게 말했다.
오드왈 남작과 만나는 상황은 어떻게든 피해야 할 것이지만, 남작이 아닌 소년이 나를 찾아 온 이유가 있을 듯 했기 때문이었다.
순간, 나름 당돌한 표정을 짓고 있던 소년의 얼굴에서 또르르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나는 당황한 표정으로 소년을 바라봤다.
“저희 오드왈 가문의 영지는 지금 이웃한 찰슨 자작과 영지전을 치르는 중입니다. 물론 귀족들 사이에 영지전을 벌이는 경우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찰슨 자작이 노리는 것은 영토가 아닌 저희 어머니입니다. 아버지가 살아계실 당시만 해도, 찰슨이 그런 행동을 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지만 저희 아버지가 돌아가시자마자 놈은 안면을 바꾸고 온갖 시비를 걸어대며…”
나는 멍한 표정으로 소년의 설명을 들었다.
그러니까, 요는 소년의 아버지인 남작이 얼마 전 죽었다는 것이었고, 소년의 어머니는 이웃 영지의 귀족이 노릴 정도의 미인이라는 것이었다.
‘이것 봐라?’
이야기는 상당히 나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내 정체를 의심할만한 백작은 죽어 버렸고, 목표물인 미망인은 위기에 몰려 있는 상태.
“찰슨 자작이라고 했나? 자작 따위가 어떻게 남작의 영지를 노리는 거지?”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소년에게 그렇게 질문했다.
영지전의 개념은 알고 있었다.
실제 역사에서 그런 일이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꽤 많은 소설들에서 귀족들이 영지전을 벌이는 내용을 봤었으니까.
얼핏 생각하면, 같은 국가의 귀족끼리 싸움을 하는 것이 용인될 리 없을 것 같지만, 왕국의 입장에서도 귀족들이 평화에 길들여져 있는 것보다, 영지전을 통해 병사와 기사들을 훈련시키는 것이 더 이득이 되기에 인정되는 문화였다.
물론, 그냥 방치만 하면 계급의 권위가 무너질 수도 있기에 대부분의 영지전은 체급이 비슷한 귀족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이 국룰.
그러니까 공후백남자, 오등 작에 따르면 자작 따위가 남작을 치는 것은 하극상이나 다름 없었다.
“….예? 자작이 남작보다 높습니다만.”
소년이 나를 보며 그렇게 말했다.
마차 안에 잠시 정적이 감돌았다.
그리고 나는 순간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이건 맨날 헷갈리더라니….’
그랬다.
흔히 오등작이라 불리는 귀족 체계는 ‘공후백남자’ 순이 아니라 ‘공후백자남’ 순이었다.
‘내가 유럽인도 아니고, 그 딴 거 알까 보냐?’
나는 속으로 그렇게 변명을 늘어놓아 봤지만,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소년의 모습에 더욱 얼굴이 빨개질 뿐이었다.
“큼. 그래, 그렇지. 누가 뭐라고 하더냐? 그저 자작 정도의 위치로 영지전을 일으키는 것이 의아해서 한 말이다.”
“아! 그것은 찰슨 자작이 웬만한 백작 못지 않은 위세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찰슨은 그 오로시우스 후작의 오른팔과 같은 사내로…”
“누구라고?”
“찰슨이요?”
“아니, 후작 이름 말이야.”
“…오로시우스 후작입니다만, 아십니까?”
소년이 나를 보며 그렇게 물었다.
혹시라도 내가 후작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를 살피는 듯한 눈빛으로.
꽤나 불안한 듯한 모습이었지만, 나는 그런 소년을 보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알지, 아주 잘.”
오로시우스 후작이라면, 방금 전에 만난 참이었다.
국왕의 앞에서 계속해서 날 물어 뜯던 늙은이가 바로 그였으니까.
이벤트를 구매한 뒤라, 어차피 소년을 도와줘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오로시우스 후작까지 얽혀있다니 생각지도 못한 이득을 얻은 느낌이었다.
“그래, 소년. 넌, 이름이 뭐냐?”
“…이름이요?”
“그래. 네 사정은 들었으니, 도와주마. 내가 남작님에게 도움을 받았던 것을 갚을 수 있다면 필히 그리 해야겠지. 그러니, 네 이름을 알려 주겠느냐?”
나는 소년을 향해 그렇게 말했다.
어차피 소년의 입장에서는 제 어미를 노리는 것이 자작에서 나로 바뀐 것뿐이었다.
하지만, 내 검은 속내를 전혀 모르는 소년을 해맑은 얼굴로 웃으며 자신의 이름을 나에게 알려 주었다.
“아서, 아서 오드왈입니다!”
**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본 님.”
“…네. 이거, 제 쪽이 더 영광이군요.”
나는 눈 앞의 여자의 미모를 구경하느라, 그녀의 인사에 조금 뒤늦게 답했다.
내 앞에 서 있는 여자는 테나.
오드왈 남작의 부인이자, 아서 오드왈의 어머니였다.
‘이게 말이 되나?’
하지만, 그녀는 절대로 누군가의 어머니로는 볼 수 없을 만큼 눈부신 미모를 지니고 있었다.
물론, 그녀가 전설 속에 등장하는 드래곤이 아닌 이상 세월의 흐름을 전부 피할 수는 없는 법이었고, 자세히 바라보면 작은 주름들이 보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 주름 조차도 그녀의 압도적인 분위기 앞에서는 어떠한 흠도 되지 않았다.
세월이 흘렀기에, 풋풋함은 찾아 볼 수 없었지만 그 세월 덕분에 그녀는 풋풋함을 대신해 기품이라는 선물을 얻은 듯 보였다.
온화한 듯한 미소와, 상대를 절로 조심하게 만드는 우아함은 어떤 상대라도 그녀를 함부로 대하기 어렵게 만들 무기였다.
“제 아들이 바쁘신 분께 실례를 범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테나는 나를 보며 그렇게 말했다.
은쟁반 위를 구르는 옥구슬 같은 목소리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만 같은 영롱한 음색.
거기다 그 말을 하는 테나의 몸짓이나, 말투 모두 감히 흠 잡을 곳이 없었다.
‘이거야, 그 자작 놈이 영지전을 걸어온 이유를 알겠구만.’
나는 테나를 보며, 남편이 죽자마자 그녀를 노렸다는 자작의 심경을 내심 이해할 수 있었다.
아마, 내가 그 자작이었더라도 안면몰수 하고 그녀를 노렸을 지 모를 정도로 테나의 아름다움은 가치가 있었다.
“아닙니다. 도움을 받았으면, 갚는 것이 사람의 도리지요. 남작 님과 저는 인연이 깊으니, 아무리 먼 거리에 있더라도 달려 왔을 겁니다.”
나는 테나를 향해 그렇게 답했다.
솔직히 죽은 남작의 얼굴 조차 몰랐지만,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라면 그 정도의 거짓말 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었다.
“어머니, 놀라지 마세요. 오다 들은 건데, 본 님이 백작이 되셨대요!”
“아서, 어른들이 대화를 나눌 때는 함부로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잖니?”
아까 전부터 입이 가려운 것처럼 몸을 꿈찔거리던 아서가, 제 어미를 향해 그렇게 말했다.
테나는 버릇 없이 대화에 끼어든 아서에게 그렇게 따끔하게 쏘아 붙이고는, 착 가라 앉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죽은 남편의 추천을 통해서나 아카데미에 들어갔던 남자가, 백작이 되어 돌아오다니 믿지 못할 기적을 목격한 듯한 눈빛이었다.
“….젊은 나이에 대단하시네요.”
테나는 그렇게 짧은 감상을 나에게 말했다.
하지만 그 짧은 말과는 달리, 그녀의 눈에 의구심이라는 것이 피어 오르는 것이 보였다.
남편을 잃은 슬픔을 다 추스르기도 전에, 다른 남자가 자신을 노리고 전쟁을 걸어 온 상황.
그런 상황에서 갑자기 나타난 구원자에 대한 의심을 하는 것은 그녀가 꽤나 현명한 여자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실례지만…제 남편과는 어떤 인연이 있으신 지 물어도 될까요?”
테나는 그 의심을 조심스럽게 감추며, 나에게 그렇게 물었다.
그녀의 눈에 얼핏 스쳐 지나간 의심스러운 눈빛만 아니었다면, 나 조차도 별 생각 없이 던진 질문으로 착각할 정도의 말투였다.
“저야 말로 여쭙고 싶군요. 남작님과 제 관계는 알려진 바 없는데, 어떻게 저와 남작님이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인지 말입니다.”
죽은 오드왈 남작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나로서는, 곧장 그녀의 질문에 대답을 할 수는 없었다.
괜히 어설픈 거짓말을 했다가, 의심을 사는 것 보다는 차라리 이렇게 질문을 던지는 것이 나았다.
남작 조차 자신이 쓴 추천서가 있다는 것을 모를 확률이 높았고, 그렇다면 그가 자신의 아내에게 내 이야기를 했을 확률 또한 극히 떨어졌으니까.
“아, 공주님 때문입니다.”
“….공주님이요?”
나는 예상치도 못한 인물의 등장에 놀란 표정으로 남작 부인에게 그렇게 되물었다.
“네. 얼마 전 공주님께서 사람을 보내오셨습니다. 한 장의 추천 서류 사본을 들고 말이지요.”
남작 부인은 날 향해 그렇게 말했다.
나는 난처한 표정으로 웃음을 흘리며 그녀를 바라봤다.
공주가 남작 부인에게 사람을 보낸 이유는 쉽게 짐작이 됐다.
갑자기 툭 튀어나온 내 정체가 궁금했을 것이고, 어떻게 아카데미에 입학했는지를 조사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일 것이었으니까.
“아, 그랬군요. 공주님도 참….”
나는 공주의 행동이 곤란하다는 것처럼 그렇게 말했고, 내 말에 남작 부인인 테나의 눈빛은 조금 더 깊게 가라 앉기 시작했다.
“그…제 남편과는 어떤 관계셨습니까?”
테나는 아까보다 조금 더 의심스럽다는 목소리로 나를 향해 그렇게 물었다.
하지만 사정을 몰랐다면 모르되, 그녀와의 대화를 통해 대충 돌아가는 상황은 파악한 상황.
이미 그 의심 많은 공주까지 속인 나에게, 남작 부인 하나 정도를 속이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제가 이 근처에서 수련을 하던 사이, 우연히 만나게 되었습니다.”
“수련이라고요?”
“네. 제 스승님께서 이 근처의 산에 은거해 계셨거든요.”
이미 아서와 함께 오드왈 영지로 오면서, 근처에 산이 있는 것을 눈 여겨 봐둔 상태였다.
사람은 원래 자신이 알고 있는 어떤 정보와 연관된 거짓말에 쉽게 속아넘어가기 마련이었고, 나는 남작 부인에게 그 방법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 스승님이라는 분은 어떤 분이신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하지만 현명한 여자답게, 테나는 내 거짓말에 쉽게 속아넘어가지 않았다.
그녀는 날 향해 그렇게 질문을 던졌고, 나는 그녀의 질문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성함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만….”
“그렇습니까?”
내 말에 테나의 눈에 떠 있던 의심이 확신으로 변하는 것이 보였다.
아마 내가 거기서 말을 멈춘다면, 그녀는 내 도움을 거절하고 어떻게든 자신의 힘으로 찰슨 자작과의 일을 해결하려 할 지도 몰랐다.
그러나, 한국 사람의 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하는 법.
나는 차분한 표정으로 감정의 동요를 추스르는 테나를 보며, 남은 이야기를 내뱉었다.
“세간에서는 현자라고 하는 분입니다.”
“현자님이요?”
내 말에 반응한 것은 테나가 아니었다.
옆에서 자신의 어미와 내가 대화를 나누는 것을 듣고 있던 아서였다.
아서는 지금 자신이 물려 받을 영지가 위기에 빠졌다는 것도 잊어버린 표정으로 나에게 물었다.
확실히 현자라는 칭호에 파급력이 엄청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테나의 반응은 자신의 아들과는 조금 달랐다.
“아서, 예의 바르게 행동을 해야지.”
테나는 또 대화에 끼어든 아서의 행동을 꾸짖었다.
당장 자작이 자신을 노리고 영지전을 걸어왔음에도, 그녀는 아들을 훈육하는 일을 등한시할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