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83화 〉영지전 (83/158)



〈 83화 〉영지전

‘어쩔 수 없는 마망이란 건가?’

나는 아들을 꾸짖는 테나를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가  중요하게 여기든 나와는 크게 상관이 없는 것이 사실.
나는 이벤트를 구매한 대로 그녀를 도와주고  이득만을 챙기면 그만일 뿐이었다.

“현자님의 제자라고 하셨나요?”

아서를 혼내는 일을 끝낸 테나가 나를 빤히 바라보는 것이 보였다.
지금껏 내가 현자를 팔아먹고 다니며 만났던 사람들 중, 그녀가 가장 태연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네. 부족하지만 그렇습니다.”
“역시, 젊은 나이에 백작까지 오르시더니, 평범한 분은 아니시군요.”


테나는 차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입으로는 좋은 말을 내뱉고 있었지만, 그녀의 눈은 의혹이 더욱 짙어졌을 뿐이었다.

“현자님의 제자인 분이 어째서 제 남편 같은 이에게 추천장을 받았는지도 대답해 주실 수 있을까요?”


테나가 나를 더욱 의심하는 이유는 그거였다.
그 대단한 현자의 제자가 뭐가 부족해서 고작 남작 따위의 인물에게 추천장을 받았을까, 하는 의문.
꽤나 합리적인 의문이었지만, 나는 테나를 향해 태연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간단합니다. 현자가 스승이라고 해도, 아카데미에 입학할  있는 방법은 귀족의 추천장과, 그 지역의 유지의 추천장뿐이기 때문입니다.”


내 말에 테나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테나는 모르고 있는 듯 했지만, 그건 사실이었다.
물론 현자의 제자가 왕국이 세운 아카데미에 입학하겠다고 한다면, 어떻게든 방법이 있겠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현자 스스로가 자신이 현자임을 증명해야 하고, 입학하려던 이도 그 현자라는 이의 정식 제자라는 것을 증명해야 할지도 몰랐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남작에게 추천장을 받는 게 훨씬  편했다고 변명한 셈이었다.


“….그렇습니까?”
“정 의심스러우시다면, 왕국이나, 아카데미에 서신을 보내 확인하셔도 됩니다.”


나는 남작 부인 테나를 향해 그렇게 말했다.
어차피 왕국이나 아카데미 모두 나를 현자의 제자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상태였기에, 하나도 꿀릴 것이 없었던 것이다.


“의심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여자 혼자 몸이 되다 보니, 조심성이 많아져서요.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테나가 나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그렇게 말했다.
순간, 그녀의 풍만한 가슴 골이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나는 급하게 시선을 돌리며, 괜히 헛기침을 내뱉었다.


“큼, 기분이 상하기는요. 남작님이 베푼 은혜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 일도 아니죠.”
“…은혜랄 것이 있겠습니까? 현자의 제자이시니 남작님이 아니라 그 어떤 귀족이라도 추천장을 내어 드렸을 것입니다.”

테나가 다시 한 번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나에게 그렇게 물었다.
확실히 미망인이라 그런지, 남자에 대한 경계심이 엄청나게 높은 느낌이었다.

‘이거, 도와준다고 먹을 수는 있는 건가?’

솔직히 지금 그녀의 태도를 봐서는 그 쪽으로 분위기를 만들기가 거의 불가능해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시스템이 보증한 일이기에 나는 일단 테나를 돕기로 했다.
그리고   번째 단계는 테나에게 완벽하게 신뢰를 얻는 일이었다.

“남작 님과는 산에서 우연히 만났습니다. 남작님은 제가 현자의 제자인지도 몰랐지만, 제 재능을 눈 여겨 보시고는 아카데미 추천장을 주신 겁니다. 후에 현자님과 제가 연이 있음을 알고 부끄러워하셨지만, 현자님은 이것도 인연일지니 남작님의 추천장을 사용하라고 하신 겁니다.”


 입에서 꽤나 자세한 증언이 쏟아지자, 테나의 눈에 깃든 의문이 조금씩 가시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대신 머리를 굴려 내 증언 속의 남작과 자신이 알고 있는 남편을 대조해 보는 듯 했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자세하게 말한 것처럼 들리겠지만, 나는 남작에 대해 어떠한 설명도 하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내가 말한 것은 남작을 산에서 만났다는 것뿐이었고, 그가 어떤 이유로 나에게 추천장을 주었다는 정도뿐이었다.
즉, 테나가 평소 남편을 24시간 내내 감시한 것이 아니라면,  증언에 맹점을 찾을 수는 없다는 소리였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결국 테나는 이상한 점을 찾지 못한 얼굴로 나에게 그렇게 말했다.
아직 의심을 완전히 털어낸 것 같은 얼굴은 아니었지만, 잔뜩 경계하던 방금 전과는 많이 달라진 모습에 나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미망인 주제에 꽤나 난이도가 있는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원래 힘들게 얻은 과실일수록 맛이 좋은 것은 만고의 진리였다.


“그나저나, 그 영지전이라는 것에 대해 설명을 해주시겠습니까?”

**

“저쪽 놈들 숫자가 상당한데요?”

알렌이 나를 향해 그렇게 말했다.
알렌의 말처럼 넓은 농지 건너편에는 무기로 무장한 수많은 남자들이 이 쪽을 쏘아보고 있었다.
가문의 표식이 새겨진 갑옷을 입은 기사들도 보였지만, 개성 가득한 복장의 무리도 있는 것으로 봐서는 용병까지 불러 온 모양.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놈들을 바라보는 알렌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왜? 쫄려?”
“….그런 건 아니지만요. 상대가 너무 많으니까요.”
“이 본 백작의 기사가 이 정도로 겁을 먹어서야 쓰나.”
“아뇨, 겁 먹은 건 아닌데요? 그냥 상대도 인간이니까, 조금 망설여질 뿐입니다.”


나는 알렌의 말에 만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영지전의 개념은 간단했다.
이쪽이나, 저쪽이나 가용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상대를 침략하거나 방어 하면 되는 것이다.
그야말로 전쟁이나 다름 없는 일이었지만, 굳이 다른 점을 찾자면 상대를 끝까지 죽이려는 행위는 하지 않는다는  정도였다.
국가로서도 병사들이나 기사들 훈련에 도움이 되는데다 귀족들의 욕심을 어느 정도 해소시킬  있는 일이기에 허락한 영지전에서, 그 병사들이나 귀족이 죽어나간다면 그야말로 본말이 전도된 것이나 다름 없는 일이었다.
많은 이들이 몸으로 직접 싸우는 일이니 사상자가 전혀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지만, 영지전을 일으키는 양  모두, 최대한 적을 포박하려 하거나 전투 불능 정도로만 만드는 것이 국룰이었다.

“저쪽은 그런 사정을  봐준다고요!”

죽은 아버지를 대신해 전장에 나온 아서가 나를 향해 그렇게 말했다.
이제 막 소년 티가 나는 그는 어디서 맞췄는지, 전신 갑옷까지 갖춰 입고는 적진을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아서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룰이라는 것은 깨어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었으니, 안 지키는 놈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물론 대부분의 귀족들은 정치적 입지를 생각하거나, 별 이득이 없다는 이유로 상대를 죽음으로 내모는 행위를 하지 않지만, 찰슨 자작이라는 놈은 달랐다.
놈은 정치적으로는 후작이라는 든든한 줄을 잡고 있었고, 이쪽을 죽음 끝까지 내몰아야만 딸 수 있을지도 모를 과실을 노리는 중이었다.

“걱정 하지마라, 아서. 이 쪽도 막상 전투가 벌어지면 사정을 안 봐주긴 마찬가지일 테니까.”

나는 아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렇게 말했다.
알렌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놈의 머릿속에 있는 정령은  말을 알아 들었을 것이었다.

‘그나저나, 진짜 사람을 죽일지도 모르겠는데?’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솔직히 나라고 아무 걱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멀리서 보아도 적의 수는 상당했고, 사정을 봐줬다가는 이쪽이 당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더욱이 내가 아무리 힘 조절을 한다고 해도 마법사라는 내 특성이나, 적의 실력이 들쭉날쭉한 것을 보면 충분히 죽는 사람이 나올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나는 표정을 굳히며 마음을 다잡았다.
아직도 사람을 죽이는 일에 거부감이 느껴지기는 했지만, 살육이 일반적인 세상에서 언제까지 피하고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이거야 원, 이쪽은 완전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새끼들 눈깔을 하고 있구만.’

나는 아서의 뒤에  있는 병사들을 보며 인상을 구겼다.
대부분이 늙은 노병으로 구성된 오드왈 영지의 병사들은 이 끔찍한 영지전이 빨리 끝나기만을 바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백작이 그나마 인덕을 쌓은 것인지, 어찌어찌 전장까지는 잘도 따라 나왔지만 싸워 보기도 전에 적의 위세에 잔뜩 눌려 있는 느낌.
아마 나와 알렌이 합류하지 않았다면,  전쟁은  것도 없이 찰슨 자작의 승리로 끝이 났을 것이었다.

“엇? 누가 나오는데요,  님?”


나는 알렌의 말에 고개를 돌려 다시 적진을 바라봤다.
화려한 갑주를 입은 남자가 백색의 깃발을 등에 메고는 앞으로 말을 달려 나오는 것이 보였다.

“찰슨, 찰슨 자작이에요!”


내가 누구인지 궁금해할 틈도 없이, 아서는 나에게 그의 정체를 일러줬다.
나는 흥미로운 눈으로 앞으로 나선 찰슨을 바라봤다.
도대체 옆 영지의 영주가 죽자마자  아내에게 탐욕을 드러내는 인간의 낯짝이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영지전을 치르기 전에, 대표와 이야기를 하고 싶다!”


말을 몰고 나온 찰슨은 잔뜩 겁을 먹은 이쪽의 병사들을 보며, 만족한 표정으로 그렇게 외쳤다.

‘관상은 과학이라더니.’

양 옆으로 쭉 찢어진 탐욕스러운 눈.
얇고 선이 희미한 입술과 삐죽한 턱에 경박스러운 콧수염.
마치 악역 엑스트라란 이렇게 생겼다의 전형을 보여주는  같은 찰슨의 모습에 나는 쓴 웃음을 머금고 그를 바라봤다.


“…본님?”

아서가 나를 부르는 것이 보였다.
찰슨에 비하면, 이름도 그리고 생김새도 주인공에 가까운 모습.
나이가 어린 것이 흠이기는 했지만, 어차피 세월이 지나면 아서 또한 장성한 사내가 될 것이었다.


“왜?”
“…대표자를 부르는데요?”
“내가 왜 대표냐? 네가 대표지. 나가 봐.”


나는 찰슨을 향해 그렇게 말했고, 찰슨은 놀란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바라봤다.
그 작은 머리로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잠시 머리를 굴리던 아서는 이내 결연한 표정으로 찰슨의 앞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상대가 말을 타고 나선 것과는 달리 아서는 걸어서 찰슨의 앞으로 향했는데, 아직 말을 타는 것이 서툴기 때문이었다.


“오호, 부인이 아니라, 그 아들이 나왔구나!”


아서를 발견한 찰슨은 이 상황이 무척이나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그렇게 말을 꺼냈다.
아서는 분한 표정으로 찰슨을 노려보고 있었고, 나는 가만히  상황을 지켜볼 뿐이었다.

“적과 나눌 이야기는 없다.”
“적이라? 이제  아비가  지도 모르는데, 말이 험하구나, 꼬마야.”

찰슨은 아서를 보며 그렇게 말했다.
그의 도발적인 말에 멀리서 용병들이 킥킥대며 웃는 것이 보였다.
아무리 테나를 노리고 영지전을 일으킨 것이라지만, 그 말을 직접 내뱉는 것은 완전히 다른 개념의 일이었다.
일단 이쪽 영지와 저쪽 영지의 병사들이 모두 동원된 상태였고, 용병들이 있는 것을 생각하면  소문이 어디까지 퍼질지 예상조차 하지 못할 정도.
그럼에도 찰슨은 아무 거리낌 없이 자신의 추악한 욕심을 드러내는 중이었다.


‘이거, 난 놈이네.’


생긴 것은 전형적인 악역 똘마니인데, 하는 짓은 최종 보스 급이었다.
그 뻔뻔함이 나로서도 보고 배우고 싶을 정도.
나는 조금 신기한 표정으로 찰슨이라는 놈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더러운 속셈을 잘도 떠드는 구나. 내 아버지가 너에게 원한을 산 적이 없거늘, 고작 더러운 욕심으로 영지전을 일으킨 죄, 내가 죽어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나에게 대표자의 자리를 양보할 때와는 달리, 아서는 꽤나 뚜렷하게 자신의 뜻을 찰스에게 밝혔다.
고작 10살 남짓이라고는 믿을  없는 기개였다.
덕분에 몇몇 노병이 한숨을 쉬며 무기를 꼬나 쥐는 것이 보였다.
오늘 이 자리가 죽을 자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끝까지 도망치지 않겠다는 의미 같았다.
10살 남짓한 아이의 용기가 노병들의 마음에 어떤 파문을 불러 일으킨 것이었다.
하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모습이 고작 10살이기에 할 수 있는 무모한 말로 들릴 지도 몰랐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찰슨 자작이었고, 찰슨은 아서가 지금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지껄인 말인 것처럼 반응했다.

“우습구나. 저런 노병들을 가지고 나와 맞서는 것뿐이 아니라, 나를 용서하지 않겠다는 말을 하는 것이. 좋다. 굳이 네가 권주가 아닌 벌주를 들겠다면 말릴 이유는 없겠지. 남편에 이어 자식도 잃은 여자를 품는 맛이 꽤나 기대가 되는군.”

찰슨은 아서를 향해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빠득.
아서가 이를 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릴 정도.
그냥 두었다가는 아서가 찰슨에게 달려들 수도 있는 상황이었기에, 나는 그 상황에 개입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맛있는  좋으면 뒤지고 나서,  어미나 맛보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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