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화 〉개전
“….뭐냐, 네 놈은?”
제운종을 사용해 아서의 옆에 서자, 찰슨이 나를 노려보는 것이 보였다.
꽤 찰진 폐드립에 대한 반응 치고는 조금 약한 감이 있는 것 같았지만, 핏발이 선 눈깔을 보니 데미지는 착실히 들어간 것 같았다.
“이 분은..!!”
나는 내 정체를 털어놓으려는 아서의 입을 급하게 막았다.
적에게 전력을 먼저 드러낼 필요도 없거니와, 괜히 경계심을 키워서 전투가 지루해져도 곤란하기 때문이었다.
“용병이다.”
“용병? 감히 용병 따위가 나에게 그딴 소리를 한 것이냐?”
찰슨은 부들부들 떨며 나를 향해 그렇게 물었다.
나는 찰슨의 말에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했다.
“제 어미가 귀하면, 남의 어머니도 귀한 줄을 알아야지.”
“….네 놈, 필히 죽여주마!”
찰슨은 어금니를 꾹 씹으며, 그렇게 말했다.
나는 그런 찰슨의 말에 또 좋은 드립이 떠올랐고, 그걸 그대로 입 밖으로 내뱉었다.
“죽을 생각은 없지만, 혹시나 죽게 되면, 네 어미 맛은 내가 대신 봐주마.”
내 말에 말의 고삐를 쥔 찰슨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보였다.
그대로 나한테 덤벼 준다면 그야말로 땡큐인 상황이었지만, 찰슨은 악당 졸개답게 조심성이 많았다.
“….크읏. 언제까지 그렇게 이죽거리나 보자!”
‘안 넘어오네. 제길.’
나는 말을 돌려 본진으로 돌아가는 찰슨의 모습에 아쉬움을 느꼈다.
대규모 전투를 겪어 본 일이 없었기에, 찰슨을 도발해 단순간에 그를 제압하려던 것이 내 작전이었다.
하지만, 도발은 실패했고, 찰슨은 본진으로 돌아가고 있는 상황.
뭐, 지금이라도 놈의 뒤통수에 마법을 갈겨 주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만, 문제는 이곳이 내 영지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내 영지였다면, 누가 뭐라고 하든 사고를 쳤겠지만 어디까지나 여기는 오드왈가의 영지.
아마, 그런 식으로 당장의 위기를 벗어나더라도 오드왈 가문이 그 후에 이어질 비난과 다른 귀족들의 공격을 버텨내리란 쉽지 않아 보였다.
“가자, 아서. 우리도 전투 준비해야지.”
“…예? 아, 예.”
아서는 얼이 빠진 표정으로 나를 보다가 그렇게 대답했다.
그제야 나는 찰슨에게 뱉은 폐드립이 애 앞에서 할 말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애 앞에서 전쟁을 치르는 것 자체가 미친 짓이었다.
**
“자, 상황은 이렇게 됐다. 용맹하게 싸우다 전사하란 개소리 따위는 하지 않는다. 그러니 각자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해라.”
아서와 함께 본진으로 돌아온 나는 병사들을 향해 그렇게 말했다.
대표자의 자리에는 아서를 내보냈지만, 오드왈 영지의 나이 많은 병사들은 내가 아서를 대신해 이 전투를 이끄는 이라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굳이 상황을 알고 있는 자들에게까지 아서를 내세울 필요는 없었기에, 나는 자연스럽게 노병들에게 명령을 내린 것이었다.
어차피 노병들에게 기대하는 것은 없었고, 동방예의지국에서 자란 나로서는 다 늙은 영감들이 다쳐서 절규하는 모습은 그다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까 내 말은 소극적으로 전투에 임해도 처벌하지 않겠다는 말이나 다름 없었다.
“아니, 뭐 살아봐야 얼마나 더 산다고, 목숨을 아끼겠습니까?”
“그러게요. 저 찰슨 놈은 어릴 때부터 밉살스런 짓만 하더니, 나이를 처먹어도 변한 게 없네요. 내 죽더라도, 오늘 저 놈 볼기짝은 한 대 치고 죽겠습니다.”
“그나저나, 찰슨 놈 애미가 꽤나 박색이었는데, 괜찮으시려나 모르겠습니다.”
“하아, 이 놈아. 여자란 얼굴이 전부가 아니다, 찰슨 애미 년이 우유 통 하나만큼은 왕국 최고라고 소문 났던 걸 모르냐? 그 젖을 빨고 자란 애새끼가 저 모양이니, 상태가 조금 의심스럽기는 하지만 그래도 맛은 궁금할 만 하지.”
하지만 내 예상과는 달리, 노병들은 낄낄대며 나에게 농 짓거리를 던져왔다.
아까 전처럼 긴장한 표정 없이 자연스럽게 야한 농담을 주고 받는 노병들을 보며 나는 쓴 웃음을 흘렸다.
그들의 눈에 죽음을 각오한 어떤 각오 같은 것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아니, 굳이 그렇게 목숨 거실 필요는 없습니다. 불리하면 도망치셔도 따로 처벌하지 않을 테니까.”
나는 조금 더 직설적으로 말했지만, 노병들의 태도는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어떤 분께서 찰슨 놈을 살살 긁어댄 통에, 전투에 졌다가는 저희 마을 출신이라는 이유로 싹 다 교수형 당할 상황인데요?”
“찰슨이라면 그러고도 남지요. 살 길을 끊어놓고 도망치라고 하면 어쩌라는 건지…”
나는 노병들의 말에 쓴 웃음을 지었다.
반은 농담이고, 반은 진담인 듯한 말투였지만, 어쨌거나 노병들은 끝까지 싸우겠다는 소리를 하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다들 감사합니다.”
그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아서는 허리를 숙여 노병들에게 감사를 표했다.
아직 10살 남짓한 아이라고 해도 아서는 귀족.
노병들은 자신에게 머리를 숙이는 아서를 보며, 어색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아니, 뭘 저희 같은 놈들에게 머리까지 숙이고 그러십니까?”
“그러게, 이거 죽으라는 말 보다 더 무섭네.”
“확실히 찰슨 놈 애미보다는 남작님 부인이 더…”
“이, 미친놈아!”
나는 왁자지껄하게 들뜬 노병들을 보며 한숨을 푹 쉬었다.
사실 그들이 있으나, 없으나 나에게는 큰 상관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뭐, 그래도 아서가 클 때까지를 생각하면, 이 관계가 유지되는 것이 낫겠지.’
나는 이제 아서를 둘러 쌓고 농담을 던지는 노병들을 보며, 천천히 연재창을 열었다.
대규모 전투에 쓸만한 마법을 몇 개 구입하기 위해서였다.
**
“괜찮으십니까, 자작님?”
“안 괜찮을 건 뭐냐!”
본진으로 돌아온 찰슨 자작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보는 기사에게 짜증이 가득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애초에 아서, 그 꼬맹이가 나설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었다.
찰슨은 당연히 영지 전에 테나가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고, 오드왈 영지의 병사들의 목숨을 걸고 그녀에게 항복을 권할 생각이었다.
자애롭다고 소문난 테나라면, 그깟 정절을 지키는 것보다 병사들의 목숨을 더 소중히 여길 거라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아서가 나왔고, 찰슨은 그 아서를 모두가 보는 앞에서 모욕했다.
그건 자신의 예상이 틀린 것에 대한 분풀이에 가까운 행위였다.
‘도대체 그 새끼는 누구지?’
찰슨은 갑자기 나타난 미친놈의 얼굴을 떠올렸다.
갑작스럽게 자신의 죽은 어머니를 모독하며 나타난 정체불명의 남자.
뿌득-.
찰슨의 어금니가 자연스럽게 듣기 싫은 소리를 만들어냈다.
대부분의 나쁜 놈들이 다 그렇듯이, 찰슨은 자신이 남에게 하는 나쁜 짓은 괜찮아도, 남이 자신에게 하는 나쁜 짓은 참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더군다나 찰슨이 그런 나쁜 놈으로 큰 것은 그 어미가 오냐오냐 키웠던 탓.
어머니에 대한 애정 하나만큼은 각별했던 찰슨은 그 어머니를 모욕한 놈을 잡아 죽여도 시원치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어차피 이 주변에 쓸만한 용병단 놈들은 다 이쪽으로 데리고 온 상황이야. 어차피, 놈은 그 쓸만하다는 기준에도 들지 못하는 어중이 떠중이일테지.’
찰슨은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그는 악당 치고는 꽤나 소심한 편이었고, 생각지도 못한 변수에 조금 불안함을 느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봐도 모든 상황이 자신이 유리했고, 죽은 어머니를 생각해서도 이 전투에서는 물러설 수 없었다.
“마탑은?”
찰슨은 자신에게 쿠사리를 먹고 의기소침해 진 기사를 보며 그렇게 물었다.
조심성이 많은 찰슨은 용병단원뿐만 아니라, 마탑에도 손을 뻗었고 오로시우스 후작의 도움으로 마탑의 도움을 이끌어 내는 것에 성공했다.
고작 오드왈 영지 정도와 대결하는 것에 마탑을 끌어들이는 것은 닭 잡는 것에 소 잡는 칼을 쓰는 격이었지만, 찰슨은 그만큼 조심성이 많은 사내였다.
마법사 하나가 전장에서 어떤 위력을 보이는 지를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찰슨이 애초에 마탑에 손을 뻗은 것은 혹시라도 적에게 마법사가 달라 붙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에 가까웠다.
“….그, 아직 도착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여튼 이 놈이나, 저 놈이나!”
기사의 대답에 찰슨은 인상을 구기며 소리쳤다.
마탑의 지원이 오지 않은 것은 사실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어차피 이쪽의 전력이 압도적으로 우위였고, 설혹 마탑이 약속을 어긴다고 해도 자작 따위가 그 마탑에게 불만을 표출할 수도 없는 일이었으니까.
그저, 마탑 쪽의 인물이 오드왈 영지 쪽에 붙지 않는 것.
그것 하나만으로도 찰슨으로서는 손해 볼 것이 없는 일이었다.
“마탑은 기다리지 않는다. 선두는 용병단원들을 내세운다. 그리고 그 뒤를 기사단이 받치고, 마지막으로 병사들이 돌격한다.”
찰슨은 꽤나 능숙하게 자신의 군대에게 명령을 내렸다.
용병단을 앞세운 것은, 그들이 돈을 주고 고용한 이들이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이 쪽이 입는 손해는 그리 크지 않겠지만, 그 작은 손해도 아까웠던 찰슨은 그 모든 손해를 용병단원들에게 돌렸던 것이다.
일단 용병단원들의 피로 적진을 뚫고, 실력이 높은 기사들이 난입해 적을 완전히 붕괴시킨 뒤에 병사들을 투입해 완전히 적을 굴복시키는 작업을 끝내는 나름 정석적인 작전이었다
“용병단의 단장이 드릴 말씀이 있다고 합니다.”
기사의 말에, 찰슨은 자신을 찾아온 용병대의 단장을 바라보았다.
찰슨이 고용한 용병단만 10개 조직이 넘었고, 그들이 알아서 뽑은 대표자가 찰슨의 앞으로 나섰다.
“무슨 일이지? 이제 와서 딴 소리를 하겠다는 것인가?”
내심 찔리는 것이 있는 찰슨은 용병단의 대표자에게 그렇게 말했다.
“뭐, 좀 치사하긴 하지만 돈 받고 하는 일이 다 그러니 따질 생각은 없소. 그것 때문이 아니라, 어느 정도까지 해야 할지 확인을 해달라고 나선 것이오.”
“어느 정도?”
찰슨은 용병단의 대표자를 보며 말했다.
고작 용병 주제에 자신을 건방지게 대하는 말투가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아직은 놈들을 이용해 먹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영지전이니, 적당히 해야 할 것 아니오? 우리 애들이 좀 거칠어서, 정확히 선을 잡아주지 않으면 사고가 날 수도 있소.”
“아, 그런 문제 말이군.”
찰슨은 용병단 대표의 말에 기분 좋게 웃음을 보였다.
애초에 오드왈 영지를 완전히 짓밟을 생각까지는 없었지만, 아까 전 감히 자신의 어머니를 모독한 놈을 떠올리자, 찰슨의 잔혹함이 깨어났다.
“정해진 선은 없다. 마음껏 날뛰어라. 뒷 일은 모두 이 찰슨이 책임진다.”
“…..그럼, 그렇게 전하리다.”
찰슨의 말에 용병단의 대표는 꺼림직한 표정으로 그렇게 대답하고, 자신의 무리로 돌아갔다.
“개전의 신호를 알려라!”
용병단 대표가 자신의 무리로 돌아간 것을 확인한 찰슨은 자신의 기사를 향해 그렇게 말했고, 그의 명령에 기사는 곧 바로 어디론가 뛰어갔다.
잠시 후, 찰슨 진영에서 웅장한 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전쟁의 개시를 알리는 이시디나 왕국 특유의 나팔 소리였다.
**
“시작하려나 봅니다.”
알렌이 나팔 소리를 듣고는 나에게 그렇게 말했다.
아니나 다를까, 적진의 병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이 보였다.
가장 앞에 나선 것은 각기 각색의 복장을 한 용병들.
나는 야유회라도 나온 것처럼 무기를 어깨에 걸치고, 이쪽을 향해 어슬렁 거리며 다가오는 용병대를 보며 인상을 구겼다.
‘음, 쟤들한테는 딱히 원한이 없는데?’
당연히 나로서는 용병여제라는 트리샤가 떠오를 수밖에 없는 상황.
괜히 용병들에게 해코지를 했다가, 그녀의 원한을 사는 것은 최대한 피하고 싶었다.
“온다! 다들 긴장해!”
오드왈 가문 쪽의 병사들이 창을 손에 쥐고는 용병 단원들을 노려보는 것이 보였다.
다 늙은 노인들이 그렇게 전의를 다지는 것을 본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고작 누군가의 원한을 살까 봐 조심하기에는 이쪽도 딸린 목숨들이 하나 둘은 아니었던 것이다.
“우아아아아!!”
“죽여, 죽여!!”
천천히 걸어오던 용병대들이 조금씩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어슬렁거리던 걸음걸이가 조금씩 빨라졌고, 나들이를 온 것처럼 태연하던 표정에 살기가 깃드는 것이 보였다.
나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가까워지는 용병대를 보며, 나지막이 주문을 읊조렸다.
“샌드 스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