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화 〉훼방꾼
“네, 네놈이 후작님이 말했던 그 자라니…”
찰슨은 허망한 표정으로 나를 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애초에 대가리가 나쁘지는 않은 놈이었는지, 그는 빠르게 현실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내가 아니었다면, 아서가 영지전에서 이겼다고 하더라도 찰슨을 죽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가 무서워서가 아니라, 그 뒤의 후작이 무서웠을 테니까.
“호오. 벌써 후작이 내 이야기를 하고 다닌 모양이지?”
내 말에 찰슨이 다급히 자신의 입을 틀어막는 것이 보였다.
그는 그 상태로도 눈알을 굴리며, 자신이 살아날 가능성을 타진해보는 것 같았다.
“크읏…이런 빌어먹을. 내가 이딴 최후를 맞게 되다니!”
하지만 찰슨은 어떤 방법으로도 자신이 살아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표정이 되었다.
나는 너무 싱겁게 삶을 포기하는 찰슨의 모습에 약간의 허탈함을 느끼고 있었다.
“벌써, 포기하는 건가?”
“네 놈, 아르카 왕국 출신이라고 했겠다? 어차피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살려주지 않을 셈 아니더냐!”
찰슨은 나를 향해 그렇게 소리쳤다.
찰슨의 말에 주위의 병사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오드왈 영지의 병사들에게도 아르카 왕국이라는 곳에 대한 이미지가 거의 최악인 모양이었다.
‘이거, 그 아르카 왕국이 어떤 놈들이 사는 곳인지 궁금해질 정도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찰슨을 바라봤다.
“아르카 왕국이랑 상관 없다니까, 끝까지 안 믿어주는 구만.”
“개소리! 네 놈이 그 천한 출신을 숨긴다고 후작님께서 속아넘어가실 줄 알았더냐!”
나는 의외로 후작에 대한 충심을 보이는 찰슨을 보며, 입 꼬리를 살짝 말아 올렸다.
꽤나 재미있는 생각이 났기 때문이었다.
“이봐 찰슨. 뭔가 오해가 있나 본데 말이야, 나는 아무렇게나 사람을 죽이는 그런 사람이 못돼.”
“….뭐, 뭐라?”
나는 살짝 쪼그려 앉아 찰슨의 어깨에 손을 얹고 그렇게 말했고, 찰슨은 구미가 당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당장 목숨을 살려줄 지도 모른다는데, 솔깃해지는 것은 사람으로서 당연한 본능 같은 거였다.
“굳이 널 죽인다고 나한테 이득이 되는 것도 없고 말이지.”
“……그, 그럼 나를 살려주겠다는 뜻?”
찰슨의 말에 오드왈 영지의 병사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서 또한, 찰슨을 노려보고 있었지만, 분한 표정으로 입술을 꾹 깨물고 있었을 뿐이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대충 이세계 사람들의 사고 방식이 어떤지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어쨌거나, 찰슨을 잡은 것은 나의 공.
그러니까, 그를 처분하는 일도 내 몫이었고 누구도 그것에 토를 달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재밌네.’
나는 살아날 희망을 발견하고는 빠르게 눈알을 굴리는 찰슨의 모습을 보며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어차피 나에게 그렇게 위협이 될 놈도 아니고 그냥 죽이기에는 조금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사, 살려다오. 살려만 준다면, 뭐든 하겠다.”
한참 머리를 굴린 찰슨은 나에게 그렇게 답했다.
나는 그런 찰슨의 대답에 쾌재를 부르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 말 진심이야?”
“그래…네가 영지를 포기하라면, 포기하겠다.”
찰슨은 이를 악물며 그렇게 대답했다.
모든 것을 다 잃게 되더라도, 자신의 목숨만 부지한다면 다시 한 번 재기를 노릴 수 있다는 믿음.
그런 믿음이 찰슨의 눈에 떠오르는 것이 보였다.
“아니, 나 백작이라고. 고작 자작령 따위 얻어서 뭐에 쓰겠어?”
“그, 그럼…내가 뭘 하면 되는가?”
찰슨은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보며 그렇게 물었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주겠다고 해도 싫다고 하는 상대를 보며, 무엇을 거래의 대가로 내밀어야 하는지를 궁리하는 중인 것 같았다.
“간단해. 나, 오로시우스 새끼가 마음에 안 들거든. 그 새끼 욕 좀 해 봐.”
“….뭣?”
찰슨의 얼굴이 하얗게 변하는 것이 보였다.
나한테는 오로시우스 후작이 욕심 많고 무능한 늙은이에 지나지 않았지만, 찰슨에게는 그렇지 않았던 모양.
찰슨의 얼굴이 덜덜 떨리는 것이 보였다.
‘….흠? 그 인간이 이 정도로 밑에 놈들을 잘 다뤘나?’
나는 신기한 표정으로 찰슨을 보며 생각했다.
굼뱅이도 구르는 재주는 있다더니, 오로시우스 후작도 나름 자신의 밑에 놈들을 제대로 굴려 먹고 있던 모양.
하지만 인간이란 대게, 제 목숨 앞에 비굴해지기 마련이었다.
“후, 후작님…아니 오로시우스 그 작자는 쓰레기입니다.”
“호오? 그래?”
“네. 그 자는 욕심만 많은데다가 무능한 주제에 제국에 붙어 왕가에 반역을 일으킬 음모를 꾸미고 있습니다.”
나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찰슨을 바라봤다.
그저, 심심풀이로 찔러 본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가 툭 불거져 나왔기 때문이었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나이는 많은데 여자는 어찌나 밝히는지, 몰래 잡아들인 평민 여자들도 부지기수입니다. 그런 주제에 거기는 시원치 않아서, 저에게 정력에 좋은 약재를 구해오라는 명령을 내린 적도 있습니다. 아, 거기다 만성 변비를 앓고 있으며, 입냄새 또한 지독합니다. 그리고 이건 같이 나쁜 짓을 할 때 본 건데, 거기가 상당히 작습니다. 또…”
찰슨은 살기 위해 자신이 알고 있는 오로시우스 후작의 약점들을 모조리 털어놓는 중이었다.
아마 이 자리에 오로시우스 후작이 있었다면, 당장 혈압이 올라서 뒤지거나, 쪽팔려서 뒤졌을 거라고 생각될 정도의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오는 중이었다.
나는 찰슨의 이야기를 빠르게 종이에 받아 적기 시작했다.
그런 내 모습을 불안하게 바라보면서도 찰슨은 입을 놀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아…거기다 무좀도 앓고 있는데다, 또….”
아무리 오로시우스가 인간 쓰레기라도 그 험담은 언젠가 끝이 나기 마련.
찰슨의 말은 조금씩 느려지기 시작했고, 나는 그런 찰슨을 보며 싱긋 미소를 지어보였다.
“잘 들었다, 찰슨. 그만해도 좋아.”
“그, 그럼, 제 목숨은….?”
“약속을 했으니, 당연히 지켜야지. 자, 여기 서명만 하도록.”
나는 찰슨에게 내가 열심히 그의 이야기를 받아 적은 종이와 펜을 내밀었다.
찰슨의 표정이 찝찝함으로 물들었지만, 그는 목숨을 구걸 받기 위해 기꺼이 그 종이에 서명을 했다.
나는 찰슨이 서명한 종이를 받아들고는, 재빨리 잡화점에서 사람이 들어갈만한 상자 하나를 구매했다.
병사들이 갑자기 허공에서 튀어나온 나무 상자에 동요하는 것이 보였지만, 이내 그들은 내가 마법사라는 것을 떠올리고는 대수롭지 않게 그 상황을 받아들였다.
“저기, 모두 좀 도와주겠어?”
나는 병사들에게 시켜 찰슨을 나무 상자에 집어 넣었다.
“이, 이건 약속과 다르지 않습니까?”
“아니, 살려준다니까? 적어도 나는. 물론 오로시우스 후작은 어떤 결정을 내릴지는 모르지만 말이야.”
나는 그렇게 말하며, 상자에 담긴 찰슨의 위에 그가 서명한 종이를 떨어뜨렸다.
오로시우스 후작의 온갖 비밀스러운 이야기가 잔뜩 적혀 있는 일종의 치부록.
그랬다.
나는 찰슨을 상자에 잘 담아, 그 치부록과 함께 오로시우스에게 전달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아니, 그래도 이건 좀….”
내 딴에는 꽤 괜찮은 복수가 아닌가 싶었지만, 병사들의 입장에서는 조금 잔인하게 보였던 모양.
몇몇 병사들이 찰슨을 안됐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것이 보였지만, 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나무 상자에 못을 박을 것을 명했다.
‘흐흐. 알렌한테 시키면, 자연스럽게 방해꾼도 치울 수 있다는 말이지.’
나는 속으로 음흉한 미소를 띄우며, 그렇게 생각했다.
어쨌거나 오로시우스 후작에게 상자를 전달할 사람이 필요했고, 그걸 믿고 맡길만한 이는 내 주위에 알렌 밖에 없었다.
“이거….제가 너무 늦은 모양이군요.”
상자 뚜껑에 마지막 못을 박아 넣는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갑작스러운 누군가의 등장에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거기엔 뜻밖의 인물이 서 있었다.
**
“도대체 여긴 무슨 일입니까?”
나는 로잘린을 향해 그렇게 물었다.
“별 건 아니에요. 그냥 마탑의 영감들이 작은 심부름 하나를 시켰을 뿐.”
나는 로잘린의 말에 뚜껑이 닫힌 상자를 바라봤다.
아마도 찰슨이 용병뿐 아니라 마탑에도 손을 뻗었던 모양.
나는 새초롬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로잘린을 향해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 마탑의 총애니 뭐니 받는다면서요? 고작 자작 따위가 영지전을 일으키는 데도 참여합니까?”
그래도 왕국의 세 개의 권력 중 하나를 차지하는 곳이 마탑이었다.
그런 마탑의 기대주가 고작 찰슨 자작 따위의 영지전까지 알바를 뛰는 상황이 나로서는 이해가 잘 되지 않았던 것이다.
“아, 이 쪽도 복잡한 사정이 있어서요.”
“그래서? 지금이라도 해 보자는 겁니까?”
나는 로잘린을 노려보며 그렇게 말했다.
솔직히 그녀의 실력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로잘린은 부담스러운 상대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제 6서클에 오른 이상 그녀에게 질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마음 편하게 붙을만한 상대도 아니었던 것이다.
“뭐, 그럴 가치는….없어 보이네요.”
로잘린은 내가 바라보는 상자를 보며 그렇게 말했다.
그러니까 당장, 나와 싸움을 벌이지는 않겠다는 소리.
나는 속으로는 가슴을 쓸어 내리면서도, 겉으로는 태연한 표정으로 로잘린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살펴 돌아가세요.”
“…..그것보다, 당신 6서클에 올랐나요?”
기다리고 있는 보상이 있는 나로서는 어떻게든 빨리 로잘린을 쫓아 보낼 생각이었지만, 그녀는 그렇게 쉽게 물러날 생각이 없는 듯 했다.
“….그렇습니다만?”
그녀가 어떻게 내 경지를 알아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나는 경계심을 한껏 끌어 올린 채 로잘린을 향해 그렇게 답했다.
내 대답에 로잘린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역시, 현자의 제자라는 게 아무나 되는 건 아닌 모양이네요.”
혹시라도 다시 싸움을 걸면 어쩌나 싶었지만, 말하는 투로 보아 당장은 그럴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문제는 그러면서도 그녀가 돌아갈 생각이 없어 보인다는 것.
로잘린은 아무 말도 없이 나를 빤히 바라보는 중이었고, 나는 그녀의 시선에 불편함을 느끼는 중이었다.
“….그래서, 뭡니까? 뭐 할 말 있어요?”
“별로요. 그나저나, 이제 니스로 돌아갈 거 아닌가요?”
나는 로잘린의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또 나를 교통 수단으로 쓸 생각인 모양이었지만, 테나와의 오붓한 시간을 위해 알렌까지 떨쳐 낸 내가 그녀를 받아줄 이유 따위는 없었다.
“아, 이거 죄송하게 됐네요. 저는 여기서 조금 볼 일이 남아 있어서 말이죠.”
나는 로잘린에게 그렇게 완곡한 거절의 표현을 했다.
그러니까, 훼방꾼은 눈치껏 빠져 달라는 소리.
하지만, 로잘린은 내 말에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그런가요? 그럼, 저도 당분간 여기서 묵도록 하죠. 괜찮을까요? 아서 오드왈님?”
로잘린의 시선이 내가 아닌, 아서에게로 향했다.
로잘린의 말에 뺨을 붉히는 것을 보니, 아서는 그녀의 정체를 이미 알고 있었던 모양.
“그, 로잘린님이 저희 영지에 찾아주신다면, 저야 영광이지요.”
아서는 로잘린을 향해 그렇게 말했고, 영지의 주인인 아서가 허락을 한 이상 내가 그녀를 쫓아 낼 명분은 없었다.
‘이거….내가 싫어하는 거 알면서도, 일부러 여기 있겠다는 거네.’
나는 날 향해 묘한 미소를 보내는 로잘린을 보며, 인상을 구기고 있었다.
**
“정말이지,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할지…”
오드왈 가문의 응접실.
남작 부인이자, 오드왈 가문을 실질적으로 책임지고 있는 테나는 나를 향해 그렇게 인사를 했다.
내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가슴 쪽으로 향했지만, 내 옆에는 그녀의 아들인 아서와 불청객까지 있는 상황이었다.
“별 것 아닙니다. 그저, 신세를 진 것을 갚았을 뿐…”
나는 테나를 향해 그렇게 말하고는 입맛을 쩝 다셨다.
솔직히 이번 일을 빌미로 그녀를 어떻게든 해 보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당장 그 욕심을 드러내기에는 로잘린의 눈치가 보이는 상황이었다.
‘아니, 나랑 뭔 사이도 아닌데, 필요 이상으로 의식하는 거 아닌가?’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지만, 왠지 감이 좋지 않았다.
로잘린의 앞에서 테나에게 품은 음흉한 마음을 드러냈다가는 그 끝이 그리 좋지 못할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던 것이다.
“아서, 옆에 여성분은…”
“놀라지 마세요, 어머니! 이 분이 그 유명한 마탑의 로잘린 양이시랍니다!”
아서는 잔뜩 신이 난 표정으로 테나에게 로잘린을 소개했다.
현자의 제자에 이어, 마탑의 기대주라는 로잘린까지 찾아오자 자신에게도 뭔가 행운이 깃드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는 모양이었다.
‘아아….이 마음에 안 드는 꼬맹이 같으니라고.’
나는 로잘린을 받아들인 아서를 노려보며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하지만 아서가 로잘린을 알아 본 것은, 내가 그녀를 보자마자 마탑의 총애를 받는다느니 하는 말을 떠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결국 내 탓이었으므로, 온전히 아서를 원망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는 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