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화 〉태평함의 이유
“….뭐냐, 이건?”
드미트리가 날 향해 그렇게 물었다.
황당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 드미트리 주변엔 여기저기 육쪽 마늘이 떨어져 있었다.
‘….효과가 없어?’
나는 드미트리를 보며, 인상을 구겼다.
흡혈귀라기에 당연히 마늘이 효과가 있을 거라 생각했건만, 드미트리의 인상만 구기게 만들었을 뿐 별다른 효과는 없는 것처럼 보였다.
‘하긴…햇볕 아래도 잘 만 돌아다니는 놈이니까.’
나는 드미트리가 낮에도 아무렇지 않게 활동했던 것을 떠올리며, 이내 그 상황을 납득해 버렸다.
그러니까 흔히 흡혈귀에 관계된 속설들은 다 헛소리였던 것이다.
“….나하고 장난치자는 건가?”
내가 손으로 십자가를 만들자, 드미트리가 화가 난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는 것이 보였다.
놈이 기다란 손톱으로 자신의 손바닥을 그었다.
손톱에 의해 갈라진 상처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렸고, 놈은 곧장 나를 향해 그 핏방울들을 날리기 시작했다.
고작 핏방울에 불과하지만, 하나 하나가 마치 총알처럼 위협적으로 보였다.
“제운종.”
나는 보법을 밟으며, 놈이 날린 핏방울들을 피해내기 시작했다.
자주 사용했기 때문인지 제운종의 성취는 점점 더 깊어졌고, 나는 어찌어찌 놈이 날린 핏방울들을 피해 낼 수 있었다.
문제는 내 몸을 빗나간 그 핏방울들이 다시 허공에 떠올랐다는 것 뿐이었다.
‘씨발. 그러니까 실탄이 떨어질 일은 없다는 거지?’
나는 다시금 방향을 돌려 나에게 날아오는 핏방울들을 보며 급히 마법을 날렸다.
어쨌거나 피 또한 수분이 있기 마련이었고, 그 수분에 맞서기 가장 좋은 것은 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파이어 볼!”
내 손바닥에서 뻗어나간 붉은 색의 구체가, 놈의 빨간 핏방울과 공중에서 부딪쳤다.
예상대로 불을 사용하는 것이 효과가 있었던 모양.
놈의 피가 지저분한 소리를 내며 타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이 놈, 불이 약점이구나!’
나는 재빨리 드미트리를 노려보며, 다시금 화염구를 만들어 냈다.
어차피 그 순간에도 마력은 끊임없이 차오르는 중이었다.
그러니까 이쪽 또한 실탄이 떨어질 일은 없다는 소리.
이대로만 상황을 끌고 간다면 오히려 자신의 피를 소모하는 드미트리 쪽이 더 빨리 지칠 것이라는 계산이 나왔다.
“설마, 이걸로 끝은 아니겠지?”
“아직 시작도 안 했다.”
드미트리는 그렇게 대꾸하며, 손의 상처를 더 벌리기 시작했다.
벌써 아물어 가던 놈의 손에서 다시 한 덩이의 피가 쏟아져 나왔고, 그 피는 사방으로 흩어지며 나를 압박해 오기 시작했다.
“파이어 월!”
나는 나에게 쏟아지는 피의 비를 바라보며, 다급히 주문을 외쳤다.
눈 앞에 거대한 불의 장막이 나타났고, 거기에 부딪친 놈의 핏방울들이 지직 거리는 소리와 함께 역겨운 냄새를 풍기며 사라져 버렸다.
“흐응. 그러다 빈혈 오는 거 아니냐?”
나는 놈의 피가 다 사라진 것을 확인한 뒤, 놈에게 이죽거리기 시작했다.
예상대로 놈의 피는 무한한 것이 아닌 모양.
드미트리가 짜증이 가득한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는 것이 보였다.
“글쎄, 네 놈 마력이 먼저 소진하지 않을까 싶은데?”
놈은 나를 노려보며 그렇게 말했다.
일반적인 마법사라면 마력에 한계가 있을 테지만 나는 예외였다.
놈은 그걸 몰랐고, 그게 아마도 놈의 패인이 될 것이었다.
“그리고, 피야 얼마든 보충할 수 있지.”
하지만 놈에 대해 모르는 것은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드미트리는 허공에 손을 뻗자, 샬롯의 몸이 허공으로 떠오르는 것이 보였다.
엉덩이를 다 깐 채로 공중을 날아다니는 그녀의 모습은 그것 자체로 꽤나 그럴듯한 볼 거리였지만, 구경이나 하고 있을 만큼 상황이 좋지는 못했다.
“매직 에로우.”
나는 다급히 마나로 이루어진 화살 하나를 만들어 놈의 고간을 향해 날렸다.
마음이 급하자, 미친 엘프와 싸울 때 했던 행동이 고스란히 나온 것이었다.
“하아, 치졸하군.”
하지만, 상대가 다르기 때문인지 이번에는 그 성과가 그리 좋지 못했다.
드미트리는 자신의 피를 뿌리기 시작했고, 내 매직 에로우는 그 피의 막을 뚫지 못하고 그대로 공중에서 흩어져 버렸다.
내 공격이 무위로 돌아가자, 드미트리는 자신이 끌어 온 샬롯의 몸을 뒤에서 껴 안았다.
“제, 제발 이러지 마세요…”
샬롯이 잔뜩 두려움에 질린 목소리로 애원을 해 봤지만, 드미트리는 그 말에 눈 하나 깜짝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더러운 이빨을 샬롯의 목에 콱 박아 버릴 뿐이었다.
“.....제길.”
드미트리가 모기마냥 샬롯의 피를 빨아 먹는 것이 보였지만, 나로서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마법을 날려 견제를 하자니, 드미트리의 몸 대부분을 샬롯이 가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흐으으읏…!!”
드미트리에게 피를 빨린 샬롯이 야릇한 신음 소리를 내뱉었다.
순간, 샬롯의 표정에서 두려움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피가 빠져나가는 중임에도, 샬롯의 볼은 오히려 붉게 달아오르는 중이었다.
샬롯의 입이 살짝 벌어지며, 목이 타는 것처럼 혀로 입술을 핥는 것이 보였다.
“하아아……더, 더…”
샬롯은 스스로의 가슴을 문지르며, 드미트리를 향해 그렇게 소리쳤다.
이미 알몸이나 다름없는 샬롯의 하반신에 음탕한 액체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아마도 피를 빨리는 그 행위 자체가 그녀에게 엄청난 쾌감을 주는 모양.
나는 침을 꿀꺽이며, 그런 샬롯의 표정을 바라보고 있었다.
뭔가를 애타게 갈구하는 그녀의 눈빛이 너무나도 야하게 보였기에, 자연스럽게 하물이 반응했다.
그 순간, 피를 보충한 드미트리는 볼 일이 끝났다는 것처럼 샬롯을 내팽던졌다.
놈은 나를 향해 예의 그 끔찍한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그럼 2차전을 시작해볼까?”
**
드미트리와의 전투는 조금 지루하게 흘러갔다.
놈은 피를 이용한 간접적인 공격 외에도 손톱을 늘어뜨려 직접적으로 공격 해 오기 시작했고, 나는 그에 맞춰 적절히 몸을 빼며 마법을 난사하는 것이 전부였다.
“하하. 왜 그러지? 벌써 지친 건가?”
드미트리는 신이 나서 나에게 그렇게 외쳐댔지만, 사실 나는 지치긴커녕 첫 전투를 시작할 때와 비슷한 상태였다.
드미트리가 그렇게 상황을 오판한 것은 내가 일부러 그에게 지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괜찮은 건가?’
나는 드미트리의 뒤에 쓰러져 있는 샬롯을 바라봤다.
솔직히 다 잡은 고기를 놓친 것 같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그래도 아직 미세하게나마 꿈틀거리는 것을 보면 살아 있는 것이 분명했다.
“오? 곧 죽을 놈이 여자를 신경 쓰고 있나?”
내가 샬롯을 신경 쓰는 것을 눈치 챈 드미트리가 나를 향해 이죽거렸다.
내가 지친 연기를 하고 있었기에, 놈은 방심을 한 상태였다.
그리고 그 방심은 당연히 필연적으로 실수를 불러 오기 마련이었다.
“크윽!”
핑-.
드미트리가 날린 핏방울이 내 발목을 뚫고 나갔다.
정신이 아찔해질 정도의 통증이었지만, 나는 일부러 놈의 공격에 당해준 것이었다.
슬슬 방만해지는 놈의 반응을 보니, 승부를 낼 순간이 온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하, 이제 그 빠른 몸놀림도 끝이군. 조금 싱겁네. 그래도 그 백작을 잡아 죽였다기에 기대를 했는데 말이야.”
드미트리는 그렇게 말하며 나에게 천천히 접근하기 시작했다.
나는 놈이 다가서는 것을 기다리다가, 내가 목표한 위치에 놈이 다가서는 것을 확인하고는 곧장 주문을 외쳤다.
“익스플로젼!”
예상대로 놈의 머리가 갑작스러운 마나 폭풍에 휩싸이며 터져나가 버렸다.
머리 부분이 사라진 놈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보였다.
“….너야 말로, 싱겁다. 이 모기 새끼야.”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조금 싱거운 결말이었지만, 어쨌거나 마왕의 수하 하나를 해치운 것이다.
아무리 흡혈귀라도 대가리가 터지면 살아남기 힘들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선 채로 죽어버린 드미트리의 옆을 절뚝이며 걸어가던 그 순간, 놈의 손톱이 내 어깨를 뚫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크악!”
나는 어깨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통증에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놀랍게도 대가리가 날아간 드미트리의 몸이 날 공격해 왔던 것이다.
‘씨발…무슨 바퀴벌레도 아니고.’
나는 어깨를 움켜 잡으며, 놈과의 거리를 벌렸다.
그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가 목 위에서 덩어리지기 시작하며 하나의 형체를 갖추는 것이 보였다.
그랬다.
그 형체는 드미트리의 얼굴이었다.
붉은 핏덩이가 놈의 얼굴로 변하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렇게 변한 놈의 얼굴을 재미있다는 듯이 웃음을 보이고 있었다.
“기대했나? 설마 이 몸을 이길 거라고?”
드미트리는 이를 반짝이며, 나에게 그렇게 물었다.
나는 분한 눈으로 놈을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쉽게도 말이야, 고작 6서클 마법 가지고는 이 몸에게 어떤 해도 입히지 못하지. 적어도 인간의 한계라는 7서클은 되어야만 어느 정도 상대가 되겠지.”
드미트리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나를 보며 그렇게 말했다.
마치 지금껏 나와 놀아주고 있었다는 듯한 말투.
나는 그런 놈의 태도에 분노하면서도, 속으로 비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그…혹시 지금이라도 마왕군에 들어가는 건 가능한가?”
나는 드미트리를 향해 그렇게 질문을 던졌다.
어차피 주위에는 눈치를 볼 사람도 없는 상황이었고, 살기 위해서라면 어떤 말이든 할 수 있었다.
내 말에 드미트리는 의외라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다 웃음을 터트렸다.
“확실히 인간이란 종족은 재미있다니까? 그래, 원한다면 받아주지.”
“….잠시 생각을 좀 해보겠다.”
나는 드미트리에게 그렇게 말하며, 고심하는 척 연기를 시작했다.
실은 녀석에게 그런 말을 한 것 자체가 시간을 끌기 위해서였으니까.
완전히 자신이 우위에 섰다고 착각한 놈은 내게 시간을 줬고, 나는 그 사이 남은 포인트들을 마력에 갈아 넣기 시작했다.
‘7서클이랬지?’
현재까지 쌓인 선작수는 2310.
사실 진작에 7서클로 올릴 수 있는 스탯을 쌓아두고 있던 상황이었다.
다만 그 동안 서클을 올려 놓지 않은 것은 내 나름의 생각이 있어서였다.
일단 너무 강해진다는 것은 그럴듯한 위기를 겪기 힘들다는 소리였고, 위기가 없는 이야기는 죽은 거나 다름이 없었으니까.
그러니까, 독자의 흥미를 유발하기 위해서는 적당한 강함이 필요했고, 내 기준에 그건 6서클이었다.
굳이 왜 6서클이냐고 묻는다면, 로잘린의 성취가 그 정도였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지금처럼 위기 상황에는 언제든 강해질 수 있으니, 굳이 미리 이지 모드를 경험할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지금의 드미트리처럼, 나를 상대하는 적들에게는 그것이 비장의 한 수가 될 수도 있는 법이었다.
나야 포인트를 몽땅 갈아 넣으면 강해지지만, 보통의 인간이 강해지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법이었으니까.
‘뭐, 이 정도면 7서클로 넘어가도 되겠지.’
[사용자의 마력이 수치를 초과합니다.]
[또 하나의 서클이 개방됩니다.]
나는 단전 부근에 다시 하나의 고리가 생기는 것을 느끼며, 재빨리 상첨창을 열었다.
검색 조건은 7서클, 대인 마법, 화속성.
머릿속에 조건을 입력하자마자 눈 앞에 딱 알맞은 마법이 떠올랐다.
[헬 파이어 2만 G]
화염계 최강 마법으로 불리는 헬 파이어가 등장했던 것이다.
그 마법이 고작 7서클이라는 것이 믿기지는 않았지만, 어쨌거나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나는 곧바로 마법을 구입했고, 눈 앞에서 여유를 부리고 있는 드미트리를 바라봤다.
“그래, 결정은 했는가?”
드미트리는 내 미소를 다른 뜻으로 받아들인 것인지, 꽤나 기분 좋은 목소리로 나에게 물었다.
나는 그런 드미트리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 아무리 생각해도 안 될 것 같아. 헬 파이어!”
나는 거절과 동시에, 마법의 시동어를 곧 바로 외쳤다.
놈의 발 밑에서 검은 불꽃이 피어 올랐고, 그 불꽃은 곧장 놈의 몸을 잡아 삼키기 시작했다.
“마, 말도 안돼!! 크아아아악!!!”
드미트리는 고통에 비명을 질러 대면서도 그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나는 불에 타들어 가며, 어깨춤을 추는 드미트리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마법의 위력이 얼마나 강대한지는 빠져 나간 마력의 양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총합 175라는 마력 수치가 절반으로 뚝 떨어진 것이 보였다.
토룡 덕분에 천천히 마력이 차오르는 중이었지만, 다른 마법들과는 달리 연달아 사용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크아아아아아악!!!!”
뭐, 비명을 질러대며 바닥을 구르는 드미트리를 보자, 연비가 그리 나쁘지는 않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