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화 〉드미트리의 성
“후, 장난 아니네.”
나는 실신한 듯 축 늘어진 샬롯을 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드미트리의 영향인지 몰라도, 샬롯은 그야말로 끊임없이 나에게 매달려 왔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토룡이 아니었다면, 먼저 떨어져 나간 것은 그녀가 아니라 나일지도 몰랐다.
격렬한 섹스를 끝낸 나는, 그제야 머리가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눈 앞에 보이는 것은 드미트리의 을씨년스러운 성 하나.
그리고 끝도 없이 펼쳐진 광야뿐이었다.
“이거, 집에는 어떻게 가냐?”
나는 끝없이 펼쳐진 광야를 보며 그렇게 말했다.
드미트리가 만들어낸 포탈로 공간 이동을 한 탓에, 지금 내가 있는 곳이 어디쯤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당황스러움에 식은땀이 흘러내렸지만, 그리 걱정을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그래, 설마 7서클씩이나 돼서 조난당해 죽지는 않겠지.’
그렇게 상황을 낙관한 나는 천천히 바지를 고쳐 입기 시작했다.
웬만하면 샬롯도 제대로 옷을 입혀주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그녀의 하반신을 가릴만한 것은 보이질 않았다.
나는 검은 불길에 다 타버리고는 숯덩이가 되어 버린 드미트리에게로 다가갔다.
검은 재는 그럭저럭 사람의 형상을 갖추고 있었고, 나는 발끝으로 놈의 몸을 뒤집었다.
놈이 혹시나 일어나 나를 공격하는 것은 아닌가 싶었지만, 그런 반전은 없었다.
나는 숯덩이가 되어 버린 놈의 몸 아래에 무언가 반짝이는 것을 찾을 수 있었다.
“음….”
바닥에서 반짝이는 것을 주워 든 나는 이내 그것이 열쇠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열쇠를 주웠으면, 써야 제 맛.
나는 천천히 드미트리의 성을 돌아보았고, 이내 그 성 안으로 들어가야겠다고 결론을 내렸다.
나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샬롯을 어깨에 들춰 매고는 천천히 성으로 다가섰다.
성문에 가까이 다가서자, 작은 열쇠 구멍이 보였고 나는 습득한 열쇠를 그 구멍에 꽂아 넣었다.
끼이익-.
열쇠가 꽂히자, 거대한 성문이 활짝 열리며 나를 맞이하기 시작했다.
“….찜찜한데?”
성문을 연 것까지는 좋았지만, 솔직히 들어가는 것이 꺼림직하기는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드미트리의 성은 마치 폐가처럼 음산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고, 안에 무엇이 있을지 예상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당장 어느 방향으로 움직여야 하는 지도 알 수 없는 상황.
나는 어쩔 수 없다는 생각에 천천히 성 안으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
“으음…여, 여기는?”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침대에서 일어난 샬롯이 머리를 짚으며 그렇게 말했다.
나는 그런 샬롯을 바라보며 활짝 웃었다.
“일어났어요?”
샬롯이 멍한 표정으로 나를 보는 것이 보였다.
“꺄아아아악!!”
이내, 자신의 아랫도리를 확인한 샬롯이 비명을 질러댔다.
나는 허둥거리며, 이불로 자신의 하반신을 가리는 샬롯의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평소의 그녀로 돌아온 듯 보였다.
“나,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예요?”
샬롯이 울먹이는 표정으로 나를 보며 그렇게 물었다.
그 표정을 본 순간, 나는 그녀가 모든 일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오히려 내가 물을 말인데요?”
“….뭐요?”
“나는 분명 선택권을 줬다고요. 덮친 건 그쪽이지, 내가 아닌데?”
내 말에 샬롯의 볼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분한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다 다급히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 그러니까 그건 정상이 아닌 상태였잖아요. 그런 상태인 사람을 그렇게 하는 법이 어디 있어요?”
“그런 상태라는 게, 발정난 거 말하는 건가요?”
내 말에 샬롯의 얼굴이 확 찌푸려졌다.
일부러 직접적인 단어를 피해서 말했음에도, 내가 그걸 정확히 꼬집자 기분이 상한 모양이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주위를 둘러봤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뭐라고요? 그게 지금 할 말이에요?”
“아, 샬롯 양의 순결이 중요하지 않다는 소리는 아니에요. 다만, 지금 우리 상당히 곤란한 상태인 거 같거든요.”
나는 화를 내는 샬롯을 보며 그렇게 말했다.
한 번 몸을 섞었기 때문인지, 그녀가 나를 대하는 태도가 전보다 훨씬 유해진 것 같았지만 그래도 그 싸가지가 어디 가는 것은 아니었다.
“….그게 무슨 소리죠?”
“길을 잃은 거 같거든요.”
나는 샬롯을 보며 그렇게 말했다.
뭔가 문학적인 표현이다 싶었지만, 은유가 아니라 진짜로 길을 잃은 상태나 다름 없었다.
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샬롯에게, 그간의 일들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녀도 대부분을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내가 왜 그런 소리를 했는지 이해시키려면 그 방법이 제일 간단했다.
“….그러니까 돌아갈 방법도 없는데, 그냥 그를 죽였다고요?”
샬롯이 차가운 눈으로 나를 보며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안 죽였으면, 이쪽이 죽었을걸요?”
나는 샬롯에게 그렇게 대답했고, 그녀 또한 그 말에는 이견을 달지 않았다.
“잠깐만요.”
샬롯은 나에게 그렇게 말하고는 이불로 자신의 하반신을 가린 채 침대 옆의 창문으로 다가섰다.
창문을 활짝 연 샬롯이 고개를 내밀어, 멍하니 하늘을 보는 것이 보였다.
졸지에 드미트리의 성에서 평생을 살아야 할지도 모를 상황에 빠진 나는 그런 그녀의 행동이 궁금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천천히 그녀의 뒤로 접근했고, 그녀의 귀에 속삭이듯 물었다.
“뭐해요, 지금?”
“꺄악! 다, 다가오지 마요!!!”
샬롯은 이불을 끌고는 내 곁에서 도망치며, 그렇게 소리를 질러댔다.
누가 보면, 내가 강제로 추행을 했다고 해도 믿을 것 같은 상황.
나는 억울함이 가득한 표정으로 샬롯을 바라보았다.
“….그, 창문 밖에 별자리를 살폈어요.”
“….그래요?”
나는 샬롯을 보며 그렇게 말했다.
꽤나 감상적인 여자구나 싶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자, 샬롯의 미간이 다시 좁아지는 것이 보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위치를 확인하려고 본 거 거든요?”
“위치요?”
“….별자리를 보면, 대략적인 위치를 파악할 수 있으니까요.”
나는 새삼스러운 표정으로 샬롯을 바라봤다.
별을 보고 위치를 가늠하는 방법이 있다는 것은 나도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구굴맵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살던 나로서는 그런 방식이 있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 어떤 원리인지는 알지 못했다.
사람은 원래 자신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자를 우러러 보기 마련.
“과연, 잘 나가는 상단주의 딸! 대단하네요.”
“….별 것도 아닌 걸로 호들갑은.”
내 말에, 샬롯은 떨떠름한 얼굴로 그렇게 대답했다.
하지만 내가 그녀를 대단하게 여기는 것은 사실이었고, 그녀 또한 그런 내 반응이 싫지는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니스로 가려면 어느 쪽으로 가야 합니까?”
나는 샬롯을 보채듯 물었다.
샬롯과 드미트리의 성에서 사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만, 니스에는 그녀 말고도 수많은 여자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게….”
“그게?”
“….어딘지 모르겠어요.”
“뭐요?”
나는 인상을 구기며 샬롯을 바라봤다.
잔뜩 잘난 체를 해 놓고 이제 와서 모르겠다고 말하는 그녀가 무척이나 뻔뻔하게 보였던 것이다.
내 표정을 살핀 샬롯은 짜증이 가득한 목소리로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별자리가 완전히 다르다고요! 저런 별 본 적도 없다는 말이에요!”
“모르는 건 아니고요?”
“아니거든요! 완전 잘 아는데, 저건 우리 아빠도 모르는 거거든요?!”
조금 유치한 말다툼이 벌어졌다.
하지만 샬롯과 나는 이내 그 말이 의미하는 바를 알아차렸다.
“….그렇다는 것은.”
“네, 여기는 제가 살던 대륙이 아닐 수도 있어요.”
나는 샬롯의 말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가 있는 것이 다른 세상이라니 조금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어차피 지구에서 이세계로 끌려온 경험이 있는 나로서는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일이었다.
“이제 어쩌죠?”
샬롯은 나를 향해 그렇게 물었다.
내가 자신의 순결을 빼앗아 간 것에 대한 원망을 다 털어낸 것은 아니겠지만, 이제 그녀가 의지할 곳은 나밖에 없었다.
당장 그녀가 좋아하는 알렌 또한 앞으로 볼 수 있을지 조차 확신할 수 없는 상황.
샬롯은 내 눈치를 살피고 있었고, 나는 그런 그녀의 태도가 꽤나 흡족하게 느껴졌다.
“나도 모르죠.”
나는 샬롯을 향해 그렇게 말했다.
솔직히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으니까.
“….뭐예요, 그게.”
“일단은 성부터 살펴보자고요, 먹을 게 있는지도 봐야 하니까.”
나는 불안한 표정으로 나를 보는 샬롯에게 그렇게 말했다.
기절한 그녀를 방에 데려다 놓느라, 제대로 성을 살피지 못했었고 드미트리와의 전투 때문인지 허기가 졌기 때문이었다.
아니, 어쩌면 계속해서 달라붙던 샬롯 때문일지도.
“….지금 무슨 생각했어요?”
“아무 생각 안 했는데?”
“….거짓말. 표정이 되게 이상했는데?”
“…그걸 꼭 듣고 싶어요?”
“됐어요! 먹을 거나 찾죠.”
나는 샬롯과 실 없는 대화를 주고 받으며, 드미트리의 성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
“…마땅히 먹을 만한 건 없는 것 같은데요?”
성의 크기가 꽤 크긴 했지만, 신혼집을 구경하는 기분으로 돌아다니자 금방 다 둘러볼 수 있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요기를 할 만한 음식은 찾지 못한 상태.
원래의 주인이 흡혈귀인 것을 생각하면, 인간의 음식이 있는 것도 이상하기는 했다.
“하아….이렇게 굶어 죽는 건가?”
“무슨 남자가 그렇게 금방 포기해요! 뭐라도 좀 해보라구요!”
내 말에 샬롯이 당장 발작을 하고 나섰지만, 그녀도 달리 방도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딘지도 모를 공간.
먹을 것조차 구하기 힘들다는 사실이 눈앞의 깜깜하게 만들었지만, 실은 그리 걱정이 되지는 않았다.
‘빵이랑 우유 정도면 되려나?’
나는 시스템 상점을 열어, 빵과 우유를 구매했다.
조회수를 지불하자마자 인벤토리 창에 빵과 우유가 나타났고, 나는 아무렇지 않게 그것을 꺼내들었다.
“뭐, 뭐야? 그거 어디서 났어요?”
“미리 챙겨둔 건데요?”
“…….”
내가 김이 폴폴 올라오는 빵을 한 조각 뜯어 입에 넣자, 샬롯이 묘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이 보였다.
먹고 싶은 표정은 간절한데, 막상 달라고 말을 하자니 민망한 눈치.
나는 그런 샬롯의 표정을 관찰하며, 천천히 우유를 마시기 시작했다.
“….설마 혼자 먹을 건 아니죠?”
결국 침을 꼴깍 삼킨 샬롯이 나를 향해 그렇게 물었다.
그녀 또한 지금 상황이 얼마나 최악인지를 알고 있었기에, 먹을 것을 쉽게 달라고는 하지 못하는 듯 보였다.
“음, 나중을 생각하면 식량을 아껴둬야 할 거 같은데요?”
나는 샬롯을 놀리듯 빵 한 조각을 다시 씹으며, 그렇게 대답했다.
물론 그녀를 굶길 생각은 없었지만, 파리하게 질려가는 반응을 보니 장난을 멈출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너무하잖아요. 나도 좀 줘요!”
샬롯이 빠르게 손을 뻗어왔지만, 그래봐야 일반 여성의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나는 제운종을 사용해 그녀의 곁에서 벗어나며 샬롯을 놀리듯 말했다.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다고. 상인의 딸이면서 그걸 모르지는 않겠죠?”
내 말에, 샬롯은 주먹을 꼭 쥔 채로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무척이나 화가 난 것 같았기에 장난을 멈출까 싶었지만, 들려온 샬롯의 대답은 내 예상 외의 것이었다.
“…..했잖아요. 나하고.”
“….네?”
“….그러니까, 먹을 것 좀 나눠 달라고요.”
그러니까, 그녀는 지금 나와 잔 것을 빌미로 먹을 것을 요구하는 중이었다.
마치 화대라도 요구하는 것 같은 그녀의 모습에 기가 막혔지만, 지금의 상황을 생각하면 그런 반응이 나오는 것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그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샬롯이란 여자가 더 이성적이고 삶에 집착이 강한 것뿐이었다.
“그건, 이 빵을 대가로 받겠다는 소리죠?”
“…..네.”
“나중에 다른 소리 하기 없어요.”
나는 수치심에 얼굴을 붉히면서도 고개를 끄덕이는 샬롯의 모습에 웃음을 머금었다.
나는 샬롯에게 빵을 내밀었고, 그녀는 허겁지겁 그 빵을 뜯어 먹기 시작했다.
아마도 그녀 또한 허기짐이 심했던 모양.
고작 빵 한 덩이에 자신의 순결을 팔아먹은 샬롯을 묘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원래 사람이란 한 번이 어렵지, 그 뒤는 쉬운 법이었다.
‘뭐, 당분간은 여기서 지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네.’
나는 목이 막힌지 가슴을 퉁퉁 두드려대는 샬롯에게 우유를 내밀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