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06화 〉제국 사신 (106/158)



〈 106화 〉제국 사신

“왕녀, 이곳에  문제의 남자가 있다고 들었소만?”


아카데미의 교장실 안.
미네로바 공주는 당황스러움을 애써 감추며  앞의 남자를 바라봤다.
반쯤 벗겨진 머리에 뱀처럼 교활한 눈을 가진 남자가 자신에게 무례하게 굴고 있었지만, 공주는 차마 화를 내지도 못한 채 상대를 향해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사람을 보냈으니, 잠시 기다려 주시지요.”

공주는 남몰래 어금니를 꾹 깨물며 눈 앞의 남자에 대한 분노를 억누르는 중이었다.
아무리 상대가 제국의 사신이라지만, 자신은 왕국의 공주였다.
제국과 왕국의 국력의 차이가 심하다지만, 눈 앞의 사신은 선을 넘어서고 있었던 것이다.
실비아가 본을 데리고 오기 위해 빠져나가자 사신은 음탕한 시선으로 자신의 몸을 훑어보는 것이 보였다.

“으음…외모는 아름다우나, 아직 몸은 덜 영글었군.”


사신은 혼잣말처럼 그렇게 중얼거렸지만, 교장실 안에 있는 모두가  소리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오죽했으면, 엉겁결에 자리에 동석하게 된  교장마저도 부들거릴 정도였다.

“아무래도 내 타입은 농익은 여자인 듯 하네.”

사신은 이시디나 왕국의 사람들이 부들거리는 것을 무시하고는 자신을 호위하기 위해 따라 온 기사를 보며 그렇게 농지거리를 던졌다.
음흉한 미소를 지어 보인 기사는 사신의 귀에 뭔가를 속닥이기 시작했다.

“아, 그래 왕국에, 테나 부인이라는 여자가 그리 미인이라던데. 혹시 한 번 볼 수 있겠소? 왕녀.”

사신의 말에 미네로바 공주는 주먹을 꼭 쥐었다.
아마도 테나 남작 부인이 남편인 오드왈 남작을 잃었다는 것을 알고 찔러본 것이리라.
미네로바의 가슴이 분노로 쿵쾅거렸지만, 그녀의 머리는 오히려 차갑게 현 상황을 파악하는 중이었다.
불과 몇  전에 왕국을 찾아왔던 사신도 지금처럼 무례를 범하지는 않았다.
제국 특유의 오만한 태도가 거슬리기는 했지만, 주위 왕국의 시선을 의식해서라도 꼬투리가 잡힐 만한 행동은 하지 않았던 것이다.
미네로바는 차가운 눈으로 사신을 바라봤다.
그가 특별히 쓰레기 같은 놈이라, 지금 같은 행동을 하는 것이라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었다.
제국은 모든 것이 힘의 논리로 돌아가는 나라.
사신이라는 지휘를 얻은 남자는 비열하기는 해도, 무능한 인물은 아닐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 그가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은 필시 어떤 의도가 숨어 있을 것.


“….테나 님은 남편을 사별하고 지금 누구와도 접견을 거부하시는 중입니다.”


공주는 사신을 향해 아쉽다는 듯이 거절의 말을 돌려주었다.
그런 공주의 반응에 사신은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쩝 다시고는 자신의 가느다란 수염을 손가락으로 베베 꼬았다.


“이거야, 원. 아쉽게 됐구만.”

사신의 그 말에, 공주는 심장이 차갑게 얼어붙는 것이 느껴졌다.
아쉽다는 사신의 말이 테나를 보지 못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도발에 넘어가지 않았다는 듯한 말로 들렸기 때문이었다.

“….그나저나,  자는 왜 이렇게 늦는 것이오?”

사신이 짜증이 가득한 목소리로 공주에게 그렇게 물었다.
방금 전까지의 음흉했던 모습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모습.
도발이 먹히지 않자, 다시 다른 부분을 걸고 넘어지는 사신을 보며 공주는 더욱 제국이 어떤 흉계를 감추고 있음을 확신할  있었다.

‘하아…이를 어쩐다. 아르카 왕국이야 어떻게든 한다고 해도, 지금 상황에서 제국과 척을 지는 것은 어떻게든 피해야 하는데?’

공주가 그렇게 머리를 굴리던 그 순간, 교장실의 문이 열리며 사신이 기다리던 남자가 나타났다.
마음에 들지 않는 남자였지만, 지금껏 믿을  없을 정도로 큰 일들을 해결해 온 남자.
공주는 자신이 해결하기 어려운 일도 그가 해결해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미한 기대를 걸고  남자를 바라봤다.

“오셨군요, 본 백작님.”

**


“공주, 나를 찾았다고?”

나는 공주를 향해 뜬금없이 반말을 툭 내뱉었다.
순간, 교장실 안의 모든 사람들이  말투에 멈칫하는 것이 느껴졌다.
평소 그런 사이가 아니었기에, 공주 또한 당황한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그녀는 눈치껏 내 말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네. 제국의 사신분이 당신을 뵙기를 원하십니다.”

나는 장단을 맞춰 오는 공주를 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확실히 까칠하기는 해도 머리 하나는 기똥차게 굴러가는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네가 그 마왕의 주구를 잡았다는 남자인가?”

나는 거만한 표정으로 나를 향해 질문을 던진 남자를 바라봤다.
반쯤 머리가 까진 남자가 턱을 한껏 치든 채로 나를 내려다 보는 것이 보였다.
그 남자의 뒤에 서 있는 기사가 자신의 기세를 감추지 않고 나를 압박해 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인간의 한계라는 7서클에 다다른 몸.
남자가 흘려오는 흉흉한 기세는 내 근처에도 닿지 못하고 소멸해 버렸다.

‘오오, 마나를 이런식으로 운용할 수 있는 건가?’


나는 방금 전 남자가 했던 행동을 그대로 흉내내기 시작했다.
딱히 관련된 마법을 배우지는 않았지만, 마력 그 자체를 이용하는 것이기에 그리 어려운 느낌은 들지 않았다.
100이 훌쩍 넘는 마력이 나를 향해 기세를 쏘아 낸 남자의 몸으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제국 기사로 보이는 남자의 얼굴이 무참히 일그러지는 것이 보였다.
마치 금방이라도 피를 토할 듯 얼굴을 일그러뜨린 남자가 몸을 바들바들 떨어대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가 어떻게든 내가 쏘아낸 마력에 저항하려 한다는 것을 느꼈다.


‘하아? 약해 빠졌군.’

기사란 존재는 왕국이나, 제국이나 쓰레기인 모양.
나는 거의 저항감도 느껴지지 않는 상대의 마력을 무시하며, 기사의 몸에 내 마력을 그대로 투사하기 시작했다.


“컥!!”

결국 내 마력이 몸을 두드리자, 제국의 기사는 신음 소리를 토해냈다.
그리고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 앉아, 왈칵 피를 뱉어내기에 이르렀다.


‘아닌가? 어쩌면 내가 강한 것일지도.’


나는 피를 토하는 기사를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그냥 기운만으로 상대가 피를 토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 쉬울 리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게 무슨 짓인가!!!”


제국의 사신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나에게 소리를 지르는 것이 보였다.
애써 감추고는 있었지만, 그가 당황하고 있다는 것이 뻔히 보였다.
아니, 당황한 것은 사신 뿐만이 아니었다.
그 공주는 물론이거니와, 나를 데리고 온 실비아, 그리고 교장까지 마치 미친놈을 보듯 나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뭐가?”
“…..감히 제국에 반기를 드는 것인가?”

당황스러움을 억누른 사신은 분노를 드러내며 나에게 그렇게 물었다.
사신의 눈에 어떻게든  문제를 물고 늘어지겠다는 강렬한 의지가 엿보였지만, 그걸 그대로 보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내가? 내가 뭘 했는데?”
“…..지금 네가 제국의 기사를 공격한 것을 모두가 보았거늘!”

제국의 사신은 황당한 표정으로 나를 향해 그렇게 소리쳤다.
하지만 나는 그 사신의 말에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제국 기사가 처음에 나에게 자신의 기운을 쏘아낸 이유는, 그렇게 하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일 것이었다.
아무리 제국이라고는 하나, 여신의 종복이자 현자의 제자인 나에게 무턱대고 시비를 걸어 온 것은 내 실력을 확인하기 위함이기도 하겠지만, 그 뒷감당을 할 충분한 자신이 있다는 소리.
물론 아무리 제국이 대륙에서 깡패나 다름 없는 위치를 고수하고 있더라도 내가 뒷배로 삼은 현자나 여신을 무시할 정도는 아니었다.
즉, 기사가 나에게 기운을 쏟아낸 방식은 충분히 없던 일로 만들 수 있다는 소리였다.

“진짜, 봤어?”

나는 사신을 향해 그렇게 물었다.
순간, 사신의 눈동자가 요동을 치는 것이 보였다.


“여기 있는 사람 중에 내가 제국 기사를 공격하는 것을 본 사람이 있어? 진짜로?”


내 말에, 공주는 물론이고 교장도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그랬다.
마력을 이용한 공격이 좋은 것은 그 증거가 남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물론, 어느 정도 마력을 사용하는 자라면, 공기 중에 흐르는 마력의 움직임을 감지할 수 있겠지만 그건 그저 그가 느끼는 개인적인 감각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눈으로   있는 증거가 없다는 것은,  힘이 있는 자가 우기는 것이 진실이 된다는 소리.
제국 사신은 자신이 강자라고 생각했겠지만, 이 자리에서 가장 강한 놈은 다름 아닌 나였다.

“진짜로 봤어? 정말?”


나는 당황한 제국 사신을 향해 계속해서 그렇게 질문을 던졌다.


“크으…네가 공격한 것이 아니라면, 이 자가 왜 여기서 피를 토한다는 말이냐!”

제국 사신은 날 향해 분한 표정으로 그렇게 소리쳤다.
그야말로 정론에 가까운 반격.
아마도 자신들이 이런 짓을 벌였을 때, 상대가 했던 말을 그대로 나에게 써먹는 듯 보였다.

“글쎄? 제국 기사들은 신검도 안하나?”
“신검? 그게 뭐지?”
“신체 검사 말이야. 뭔 놈의 기사가 갑자기 서 있다가 피를 토해? 아무리 격무에 시달리는 자리라고 해도 건강 관리는 좀 신경을 써야지. 문관이 아니라 기사잖아?”

내 말에 제국 사신의 수염이 다시 부르르 떨리는 것이 보였다.
그러니까 나는 내가 공격한 적이 없으며, 놈이 그냥 몸이 약해서 쓰러진 거 아니냐고 물은 것이었다.


“개소리! 이런 식으로 그냥 넘어갈 수 있을 성 싶으냐!”

저러다 터지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이마에 혈관이 도드라진 제국 사신이 날 향해 그렇게 고함을 쳤다.
나는 시끄럽다는 표정으로 귀를 막으며 제국 사신을 바라봤다.

“어이, 그렇게 열 내다 쓰러진다고. 나이도 꽤 많이 잡수신 양반 같은데…”
“뭐, 뭐라? ….헙!!”

나는 향해 화를 내던 사신의 눈이 커지는 것이 보였다.
무슨 생각인지는 몰라도, 사신은 내 말에 겁을 집어 먹은 것처럼 내 눈을 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사신의 반응을 보고,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전혀 그럴 의도로 한 말이 아니었지만, 사신은 내 말을 협박으로 받아들인 것이었다.
나이 많은 사신이 머나먼 타국까지 왔다가 과로사 하는 상황이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어이, 사신 아저씨.”

나는 대머리 사신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그렇게 그를 불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기세가 등등하던 사신은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눈을 피하기 바빴다.


“사람이 말을 하면, 눈을 봐야지.”

내 말에, 사신이 고개를 들어  눈을 보는 것이 보였다.
그래도 일말의 기개는 있는 것인지 입술을 아득 물고는 나를 노려본 사신이 다시금 반항을 시작했다.


“나, 나를 겁박한다고 해서, 네 놈이 얻을 것이 무엇이냐? 제국과 척을 지면 아무리 네 놈이 대단하다고 해도 무사할 수는 없을 것….”
“진짜로 그럴까?”

나는 사신의 말을 끊으며, 손가락으로 볼을 긁적였다.

“…무슨 뜻이냐?”
“아니, 내가 여기서 뭔 짓을 한다고 해도, 진짜로 제국이 나랑 척을 질까?”

나는 사신을 향해 그렇게 물었다.


“당연한 소리를! 제국은 은원을 절대로 잊지 않는다!”
“아, 그렇지. 그런데 말이야, 나 이래 보여도 현자의 제자라고, 그리고 그 데메테르 교단과는 막역한 사이고 말이야. 그런데 황제가 고작 늙은이 하나 죽였다고 나랑 척을 지려고 할까? 나 같으면  그럴 거 같은데 말이지…”
“네 놈이 황제 폐하를 알  못해서…”


사신은 내 말에 벌벌 떨리는 목소리로 그렇게 대답을 했다.
애써 황제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주장을 하고 있었지만, 이미 사신의 눈에도 황제에 대한 의심이 깃들고 있는 중이었다.
아니, 오히려 황제를 잘 알기에, 나와 자신의 목숨의 가치를 저울에 달았을 때 황제가 어느 쪽을 택할 지를 더욱 불안해 하는 듯 보였다.


“물론 모르지. 근데 말이야, 최근에 마왕 졸개 놈들이 나타났잖아? 그건 곧 마왕도 튀어나온다는 소린데,  척지는 것은 그리 현명한 행동은 아니지 않나?”

 말에 사신의 눈에 절망감이 깃들었다.
결국 그도 황제의 저울 추가 어디로 기울지를 확신한 것이었다.

“좋은 눈빛이네. 이제 이야기가 좀 통할 거 같은데?”

나는 한풀, 아니 백 풀은 기세가 꺾인 사신을 향해 상쾌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는 황당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공주를 향해 살짝 윙크를 보냈다.

‘봤나? 협상은 이렇게 하는 거야, 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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