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9화 〉전장으로
“패퇴라니…얼마 전까지만 해도 계속 승전보가 오지 않았나요?”
공주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실비아를 향해 그렇게 말했다.
그 반응을 보니, 진짜로 아르카 왕국쯤은 충분히 막아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
공주가 나보다야 왕국의 전력을 더 잘 알고 있을 테니, 지금은 공주의 판단을 믿는 것이 옳았다.
문제는 그럼에도 왕국군이 패배를 했다는 것.
“그것이, 전장에 마물들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마물이요?”
“네. 아르카 왕국에서 마치 마물들을 조종하는 것처럼 전장에 투입시켰다고…”
“말도 안돼! 인간이 어찌 마물을 길들인다는 말입니까?!”
실비아의 보고에 공주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나는 자연스럽게 예전 공주를 습격했던 미친 엘프의 모습을 떠올렸다.
비록 인간은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마물을 조종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은 확실했다.
“공주, 기억이 안 나시는 모양인데, 예전 습격 당했던 일을 떠올려 봐.”
“아….!!”
내 말에 힌트를 얻은 것인지, 공주의 눈이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마물의 습격으로 왕국군이 패퇴했다고는 하지만, 냉정히 생각하면 상황이 안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이시디나 왕국이 핀치에 몰려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마왕의 수족이 튀어나왔기 때문.
하지만 아르카 왕국에서 마물들을 전쟁에 이용한 이상, 이시디나 왕국을 향해 쏟아지던 화살은 아르카 왕국을 겨냥할 수밖에 없었다.
“전황, 전황은 어떻지?”
“기사단 두 개가 궤멸. 그리고 용병 여제인 트리샤 님도 실종 상태라고 합니다.”
“….뭐?”
나는 분노가 깃든 목소리로 실비아를 향해 물었다.
순간, 놀란 실비아가 나를 바라보는 것이 보였지만, 나는 화를 감추지 않고 있었다.
물론, 트리샤와 나의 관계는 관계라고 부르기도 애매할 정도로 뭐가 없기는 했다.
내 실력을 의심한 트리샤가 나에게 승부를 제안했던 것과 그 승부에서 이긴 내가 그녀에게 빚을 지워둔 것이 전부.
아직 그 빚을 받아내지도 못한 상태에서 그녀가 없어졌다는 것이 내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죽었을 리 없어.’
나는 억지로 화를 누르며,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어쨌거나 이 세계에서 지금껏 벌어졌던 일들을 생각하면, 트리샤가 죽었을 가능성은 현저하게 낮았다.
이게 소설 속의 세상인지, 아니면 그냥 다른 차원의 이 세계인지는 몰라도, 인간을 초월한 어떤 의지가 아직 맛보지도 않은 여자를 죽게 내버려 둘 리 없었으니까.
물론, 그건 내 짐작일 뿐이었고 확실한 것 따위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나는 그 가설을 믿기로 했다.
“여기서 전장까지는 얼마나 걸리지?”
“…..설마, 가시려고요?”
내 질문에 공주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날 향해 그렇게 물었다.
“왕국을 지켜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나는 공주에게 그렇게 대답하고는 실비아를 바라봤다.
잠시 머뭇거리던 실비아는 공주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내 질문에 답을 했다.
“….마차를 이용해서 간다면 이틀 거리입니다.”
나는 실비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녀에게 당장 알렌과 데이나를 데리고 와 달라고 말했다.
자연스럽게 내가 명령을 내린 상황이었지만, 실비아는 곧 바로 D반 교실로 달려갔다.
“어쩌실 생각이신가요?”
실비아가 떠나자, 공주가 나를 향해 그렇게 물었다.
그녀 또한 내가 범상치 않은 힘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전쟁에서 개인의 무력이 통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고 느끼는 듯 보였다.
“전에 수도에 갔더니, 저를 아르카 왕국 사람이 아니냐고 묻더군요.”
“….갑자기 그게 무슨? 그것보다 누가요?”
공주는 불쾌한 표정으로 내 말에 그렇게 대답했다.
왕국의 입장에서 나는 어떻게든 잡아야 할 인재였다.
하지만 공주는 그 인재를 영입해도 모자를 판에, 누군가 모욕을 줘서 쫓아내려 했다는 것에 분노한 것처럼 보였다.
“이번 기회에 보여줄 참입니다. 저에게 그 말을 했던 이시디나의 귀족들에게는 제가 아르카 왕국 출신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공주를 향해 그렇게 대답했다.
굳이 그녀에게 나를 아르카 왕국 출신으로 몰았던 이가 오로시우스 후작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공주의 도움이 아니더라도, 오로시우스 후작 정도야 언제든 내가 손봐줄 수 있을 듯 했으니까.
어쨌거나 나는 이 기회에 이시디나의 귀족들이 잡을 꼬투리를 아예 없앨 생각이었다.
전쟁에서 공을 세운 이를 적국의 사람이라 매도하기는 어려울 테니까.
거기다 덤으로, 아르카 왕국의 귀족들에게도 똑똑히 보여줄 생각이었다.
감히 내 것을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를.
**
“알겠습니다.”
“저도 준비해 놓을게요.”
나는 실비아가 데리고 온 알렌과 데이나에게 대충의 사정을 설명했다.
알렌에게는 전장으로 향할 마차를 준비하라고 일렀고, 데이나에게는 집에 먼저 돌아가 내가 움직일 수 있도록 준비를 도와달라고 말한 참이었다.
그렇게 둘에게 일을 시킨 나는 사신이 묵고 있는 관청으로 향했다.
전장으로 출발하기 전에 처리해둘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그렇게 말씀을 하셔도.”
사신은 꽤나 곤란한 표정으로 나를 보며 그렇게 말했다.
그가, 그런 표정을 짓는 이유는 간단했다.
나는 제국의 사신에게 아르카 왕국이 한 짓을 그대로 전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제국 또한 이 전쟁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 아니 반쯤은 협박을 한 탓이었다.
“그래서? 제국은 마왕과 맞서길 포기한다는 것인가?”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제게 그런 권한이 있을 턱이 없잖습니까?”
제국의 사신은 제발 봐 달라는 표정으로 나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러니 황제에게 지금 상황을 전하라는 거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아르카 왕국이 미친 것도 아니고 갑자기 마물들을 이용했다는 것이 좀…그거, 확실한 정보입니까?”
나는 아까 전과는 달리 비협조적으로 나오는 사신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아직도 나에게 겁을 먹고 있는 것은 확실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사신은 내 말을 귓등으로 듣고 있었다.
“그럼 확실하지, 못 믿겠으면 지금부터 나랑 같이 가던가!”
“….아니,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내 말에 사신은 한 발 물러나며 그렇게 대답했다.
제국의 사신은 아르카 왕국이 마물을 이용했다는 것을 쉽게 믿지 못하는 눈치였지만, 전장으로 끌려 가고 싶은 생각 또한 없어 보였다.
“일단, 황제께 말씀은 드려 보겠습니다.”
제국의 사신이 목을 잔뜩 움츠리며 그렇게 말하는 것이 보였다.
내가 원하던 대답이기는 했지만, 어쩐지 나는 그에게 믿음이 가질 않았다.
대충 나한테만 그렇게 말을 해 놓고는 니스에 뭉개고 있을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당장, 사신이라는 남자가 엉덩이를 딱 붙이고 앉아, 내가 떠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면 그 느낌이 꽤나 정확할 것 같았다.
“아아, 내가 깜빡했군.”
“….뭘 말입니까?”
“제국의 황제가 겁쟁이에다, 음험한 놈이라는 것을 말이야.”
나는 사신을 빤히 보며, 그렇게 말했다.
자신이 섬기는 주군을 모욕하고 있음에도, 놈은 가만히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게 무슨…”
“아마도 내 말대로 행동하면, 당신이 무사하기는 힘들겠지? 대충 지금까지 보인 행동 패턴으로 봐서는 부하가 자신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을 받아들일 놈으로는 안 보이니까 말이야.”
내 말에, 사신이 땀을 닦으며, 나를 향해 비굴하게 웃어 보였다.
“….이거 거기까지 이해를 해 주시다니, 감격입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제가 그렇게 움직였다가는 살아남기 힘들 겁니다.”
“그래서, 내 말을 안 듣겠다는 건가?”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라면, 가족들이라도 살리는 게 낫겠지요.”
사신은 침을 꼴깍 삼키며, 나를 향해 그렇게 말했다.
아마도 제국 황제란 놈은 내 생각보다 더 쫌스러운 것 같았다.
“그래? 황제가 자신의 말을 듣지 않으면, 가족까지 죽이나?”
“하하, 가족은 기본이고, 재수 없으면 영지민들까지 줄초상이 납니다. 그러니, 저한테도 납득이 가능한 정도의 말을 해 주셔야….”
나는 사신의 말에 흘끔 그의 방안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다행히 그를 호위하던 기사는 어딜 간 건지 보이지 않는 상태.
나는 잠시 망설이는 표정으로 사신을 바라보았다.
대머리의 주름진 목이 거슬리기는 했지만, 놈을 설득할 시간도 부족했고 설득할 수 있는 방법도 마땅치는 않았다.
“미안하군.”
“….네? 갑자기 그게 무슨!”
나는 그대로 사신에게 달려들어, 그의 목에 이빨을 박아 넣었다.
“아악!! 뭐 하시는 겁니까?”
사신이 비명을 질러 댔지만, 이미 사일렌트 마법을 걸어 소리를 차단해 놓은 상태.
진조의 능력을 얻고 처음으로 피를 빠는 상대가 이런 중늙은이라는 것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상황이 어쩔 수 없었다.
“……크윽!”
“퉤!….이렇게 하면 되는 건가?”
나는 내 몸의 힘 일부가 사신의 몸 안으로 흘러 들어간 것을 느끼고는 바닥에 침을 뱉고는 놈을 바라보았다.
빨갛게 변한 눈이 조금 거슬리기는 했지만, 놈의 목에 난 상처가 빠르게 수복되는 것이 보였다.
“…명령이다.”
“…네, 무엇이든 분부를 따르겠습니다.”
내 말에 늙은 사신이 바닥에 부복하며, 그렇게 소리치는 것이 보였다.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사신을 통해 지금 왕국의 상황을 알리고 제국의 참전을 유도하는 것 정도였지만, 이렇게 충실한 수하가 생긴 이상 그 상한선을 조금 더 올려도 될 듯 보였다.
“잘 들어라. 너는 이 시간 이후로 곧바로 제국의 수도로 돌아간다. 어떻게든 황제를 만나고…”
나는 멍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사신에게 꽤나 자세한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조금 복잡한 명령을 내리는 것이 가능한 가 의문이기는 했지만,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을 곱씹는 사신을 보자 굳이 걱정을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선물을 잘 받았으니, 나도 선물을 주어야 도리지.’
나는 내 설명을 듣고는 곧장 밖으로 뛰어나가는 사신을 보며 뿌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제국의 황제가 내가 보낸 선물을 받고 깜짝 놀라는 장면을 보지 못한다는 것뿐이었다.
**
“저도 갈래요!”
여관으로 돌아온 나는 황당한 표정으로 데이나를 바라봤다.
내 짐을 꾸려 달라고 그녀를 먼저 보낸 것이 화근이었던지, 데이나 또한 짐을 챙겨 나왔기 때문이었다.
“소풍 가는 거 아니고, 전쟁터에 가는 중이라고.”
“…걱정 마세요. 저도 이제 한 사람 몫은 할 수 있으니까.”
데이나는 손에서 정령을 불러내며, 나에게 그렇게 말했다.
처음 보는 모습의 정령이 그녀의 손 위에 나타나, 나를 향해 인사를 하는 것이 보였다.
“이게 뭔데?”
“불의 중급 정령. 샐러맨더에요.”
“이게?”
나는 데이나의 말에 눈을 가늘게 뜨고는 그녀의 손 위에 있는 정령을 바라봤다.
자세히 보니, 예쁘장한 몸에 도마뱀 같은 비늘이 돋아나 있는 것이 보였다.
‘음….중급 정령이라.’
데이나가 빠르게 강해진 것은 나쁘지 않았지만, 그녀를 전쟁터로 데리고 가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물론 중급 정령 정도를 다룬다면 그렇게 방해가 될 것 같지는 않았지만, 문제는 그녀의 옆에 하얀이와 여급이 짐을 싸 들고 서 있다는 것이었다.
“설마 너희도 가겠다는 건 아니지?”
나는 하얀이와 여급을 보며 그렇게 물었다.
“왜? 나도 가면 안돼?”
“후….그러니까, 놀러 가는 게 아니라 전쟁터 가는 거라고!”
나는 하얀이를 향해 소리를 질렀지만, 하얀이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쟁터는 내가 가면 왜 안 되는건데?”
“위험하니까!”
내 말에 하얀이는 뭔가를 납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손을 움직여 허공에 뭔가를 만들어내는 것이 보였다.
불길한 검은 기운이 서린 창.
그 미친 엘프가 사용하던 다크 스피어라는 마법이었다.
“나도, 꽤 강한데? 안 위험해. 히히.”
하얀이는 검은 창을 만들어 내고는 날 향해 그렇게 말했다.
하얀이가 마법을 사용할 줄 안다는 것이 꽤 놀랍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애를 그런데 데리고 갈 수도 없는 노릇.
내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설명을 하자 하얀이는 다시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나, 애 아닌데? 데이나 보다 내가 언니.”
생각해보니, 생긴 게 어릴 뿐, 하얀이가 데이나보다 먼저 태어난 것이 사실이었다.
변명거리가 떨어진 나는 다급히 화살을 여급에게로 돌렸다.
“설마 너도 가겠다는 것은 아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