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0화 〉죠닌
“그럼 갈까요?”
나는 준비를 마친 트리샤를 보며 그렇게 말했다.
오드왈 영지에서 잠시 쉬었다가 곧바로 떠날 생각이었지만, 전날 테나와의 분위기가 불타 오른 탓에 하루를 아예 통째로 묵은 채였다.
그 사이에 나와 당분간 떨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하얀이가 떼를 쓰는 일이 있었지만, 여급과 데이나가 어떻게든 하얀이를 타이른 모양이었다.
트리샤는 하룻밤 사이 뭘 그리 많이 준비했는지, 등에 커다란 배낭까지 지고는 나를 따라 나섰다.
나는 영지 중앙에 포탈을 만들어 냈고, 그 모습을 목격한 아서와 테나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으음, 이거 느낌 별로던데요.”
“싫으면 지금이라도 빠져도 된다.”
“…아뇨, 빠지는 건 좀.”
트리샤 외에도 나와 함께 아르카 왕국으로 떠나게 된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는데, 그건 알렌이었다.
오드왈 영지에 도착하자마자 마차를 살핀 알렌은 테나의 호의도 거절하고는 마차에서 숙식을 마친 상황이었다.
뒤늦게 나와 트리샤 둘만 아르카 왕국으로 떠난다는 소식을 들은 알렌은, 주군이 가는 길에 기사가 빠질 수 있냐는 논리를 펼쳤고, 나는 결국 알렌의 합류를 허락했다.
알렌의 전투 능력 자체가 꽤나 쓸만하다는 것이 그 이유이긴 했지만, 실상은 사내놈인 터라 죽지만 않으면 상관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잘…다녀오세요. 다음에는 꼭 따라갈 수 있을 만큼 강해질 테니까.”
데이나가 나를 향해 그렇게 말했고, 이어 하얀이와 테나, 그리고 아서까지 나를 배웅하는 인사를 마쳤다.
나는 여급을 흘끗 바라봤지만, 그녀는 무슨 생각인지 입을 꾹 다문 채로 내가 만든 포탈을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어쨌거나 일행과 그렇게 작별 인사를 마친 나는 포탈로 들어섰고, 이내 알렌과 트리샤가 뒤따라 들어오는 것을 느끼며, 포탈의 문을 해제했다.
**
“여기가, 아르카 왕국?”
포탈에서 빠져 나온 트리샤가 멍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건 나나 알렌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중세 유럽 풍에서, 일본의 전국시대로 배경을 옮긴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아르카 왕국의 수도는 내가 창작물에서나 봤던 에도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저기가 아르카의 국왕이 머무르는 곳인가 보군.’
나는 동양풍의 건물들 사이로 우뚝 솟아 오른 건물을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도시 중심부에 다른 건물과도 비교는 안될만큼 화려한 일본식 성 하나가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인?”
다행히 포탈이 열린 곳은 인적이 드문 골목이었지만, 어쨌거나 모든 사람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주택으로 보이는 낡은 건물 문을 열고 나온 이가 우리를 발견하고는 놀라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억!”
내가 명령을 내리기도 전에 움직인 것은 트리샤였다.
빠르게 이동한 트리샤는 짧은 단도의 뒷부분으로 우리를 발견한 아르카 왕국 사람의 뒷목을 내리쳤다.
놀란 표정으로 나를 보던 아르카 왕국인은 그대로 축 늘어져 버렸고, 트리샤가 어쩔 거냐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이 보였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죠.”
나는 트리샤에게 그렇게 말했고, 그녀는 곧장 자신이 기절시킨 사내의 집 안으로 들어갔다.
나와 알렌 또한 주위를 살피며 트리샤를 따라 사내의 집 안으로 몸을 숨겼다.
이국적인 가정집의 내부를 살핀 나는 사내를 붙잡고 있는 트리샤를 바라봤다.
“컥….모,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사내는 단도를 들고 있는 트리샤를 보며 그렇게 말했다.
갑자기 집 앞에 이인이 나타난 것도 모자라, 자신의 집에 쳐들어온 상황이었으니 사내가 겁을 집어먹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아아, 걱정하지 마요. 협조만 잘 해주면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을 테니까.”
나는 사내를 안심시키기 위해 그렇게 말했다.
적응력이 뛰어난 것인지, 아니면 순진한 것인지 몰라도 사내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침착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런 사내의 모습이 평범하지는 않다고 느끼며, 그를 상대로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아르카 왕국 사람들의 특성인 것인지는 몰라도, 사내는 꽤나 협조적으로 내 질문에 대답하기 시작했다.
**
“그러니까, 아르카 왕국 내부에서도 이번 전쟁은 이해를 못하고 있다?”
“네. 그렇습니다.”
나는 스스로를 죠닌 계급이라 소개한 사내를 보며 그렇게 물었고, 사내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화는 거의 내가 질문을 던지고 죠닌이란 사내가 대답을 하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트리샤는 아무 말도 없이 나와 죠닌의 대화를 옆에서 듣고 있었고, 알렌은 문 앞에 서서 혹시 모를 누군가가 찾아오지는 않을지 감시를 하는 중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죠닌 계급이라니.’
나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사내를 바라봤다.
죠닌 계급이라고 하면, 전국시대의 부르주아 같은 계급으로 자본력을 지닌 상인을 의미했다.
그러니까 일반 백성 치고는 돌아가는 정세에 조금 더 관심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소리.
처음부터 상인을 붙잡은 것은 운이 좋다면, 엄청나게 좋은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르카는 평소에도 국지전을 벌이지 않았는가?”
“그거야, 말 그대로 국지전일 뿐이지요. 아르카의 군대를 지휘하는 이들은 욕심이 많으니까요.”
“욕심이 많다?”
“쇼군, 그리너까 군대를 지휘하는 이들은 그런 국지전을 통해 얻은 물품을 통해 부를 쌓습니다. 국왕도 쇼군들의 그런 행동에는 딱히 제지를 하지 않았던 것뿐이고요. 하지만 이번 전쟁은 조금 이상한 것이 사실입니다.”
나는 죠닌이라는 사내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고, 그건 트리샤 또한 마찬가지였다.
“처음 전면전 이야기가 흘러 나왔을 때는 쇼군들도 반발을 했습니다.”
“왜지? 전면전이 벌어지면 그들이야 말로 가장 이득을 얻는 것 아닌가?”
“쇼군들은 굳이 알을 잘 낳는 거위 배를 가를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했겠죠. 그리고 국지전이야 대충 무마할 수 있겠지만, 전면전이 벌어지면 제국이 나설 가능성도 있었으니까요.”
나는 죠닌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의 황제가 전쟁을 일단 관망하겠다는 의사를 보인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건 전쟁이 일어나고 난 뒤의 일이었다.
사실 사신을 맞기 직전까지만 해도 이시디나 왕국의 귀족들은 당연히 제국이 나설 것이라고 낙관을 하고 있었다.
지금껏 대륙의 지배자 역할을 해오던 제국이 이런 일에 빠질 이유가 없었으니까.
더군다나 아르카 왕국이 마물까지 이용했다는 것이 알려진 순간에는, 제국이 아르카를 정벌할 것이라는 소문까지 돌았던 판이었다.
‘하지만 황제는 결국 아무 것도 하지 않기로 했지. 가만, 그렇다는 건 아르카 왕국의 왕이 뭔가를 알고 있었다는 것인가?’
“아무튼 제국이 나서지 않은 것은 천운이긴 합니다만, 어쨌거나 쇼군들의 입장에서는 불안감을 느낄 수밖에 없죠. 그리고 전장에서 들려오는 소문들도 어쩐지 괴이한 것들 뿐이라…”
“괴이한 소문이라니?”
“그것이….저희 군이 마물을 부린다는 소문입니다.”
트리샤의 질문에 죠닌이 그렇게 대답했다.
아무래도 아르카 왕국 사람들은 아직 자신들의 나라의 군대가 마물들을 동원하는 것을 모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마왕이 몇 번이나 등장했다는 대륙의 역사 때문인지, 대륙인들은 어느 국가에 속해 있건 마왕과 마물에 대해 뿌리 깊은 증오심과 혐오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는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은 어떻게든 소문을 통제하고 있는 모양이었지만, 아르카 왕국 내에도 마물에 대한 소문이 조금씩 도는 모양이었다.
“그거, 소문이 아니라 사실인데?”
“진짜입니까?”
“응, 바로 그저께 전장에서 봤으니까, 확실하지.”
나는 죠닌을 향해 그렇게 말했고, 이내 죠닌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죠닌은 뭔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잠시 눈을 감더니, 이내 다시 눈을 뜨고는 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이시디나 왕국 분들이시죠?”
“…어.”
죠닌은 그렇게 물었고, 눈에 띄게 당황하는 트리샤를 대신해 나는 그의 질문에 사실대로 답했다.
“이곳에는 무슨 일로 찾아오신 건가요?”
“이봐, 아저씨. 지금 상황을 잠깐 잊은 모양인데, 당신은 우리한테 협조만 제대로 하면 되거든?”
트리샤가 죠닌을 위협해봤지만, 그는 담대한 표정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어차피 모든 상황에 대한 결정권을 내가 가지고 있다고 판단한 모양.
장사를 생업으로 삼는 사람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눈치가 여간 빠른 것이 아니었다.
“그래. 솔직히 말해서, 당신들의 왕을 붙잡으러 왔어.”
“…..왕 말입니까?”
죠닌은 내 말에 놀란 기색을 보이며 그렇게 말했다.
그는 다시금 뭔가를 계산하는 것 같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제가 도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도와? 당신 미쳤어? 당신 나라의 왕을 잡으러 왔다고!”
트리샤가 놀라 소리쳤지만, 눈 앞의 죠닌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나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나는 그런 죠닌을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유는?”
“왕에게도 이상한 소문이 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믿으실지 모르지만, 저는 꽤나 최근 생활에 만족하고 있었습니다. 전쟁이 일어나면서 본 손해가 말도 못하지요.”
“그러니까, 더 이상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해 왕을 팔겠다?”
“저는 장사치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이득과 손실로 파악하는 사람이지요. 그러니 도움이 되지 않는 왕이라면 팔아 치우지 못할 것도 없습니다.”
나는 죠닌의 말에 고민스러운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굳이 그의 도움이 필요치는 않았지만, 편한 길이 나타났는데 돌아갈 이유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설마, 이 말을 믿는 건 아니지?”
트리샤는 죠닌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나에게 그렇게 말했다.
아무리 용병이라고는 하나, 이시디나 왕국 출신인 그녀는 죠닌의 사고 방식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싶었다.
하지만 나는 달랐다.
국가보다 개인의 이익이 더 중요한 가치인 세상에서 살다 온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좋아. 한 번 믿어보지. 방법은?”
내 말에 놀란 것은 죠닌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자신의 말을 아무렇지 않게 믿는 나를 향해 고개를 조아리며, 자신이 생각한 방법을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오늘 밤, 황궁, 아니 왕궁으로 제가 거래하는 마차가 들어갈 예정입니다. 대략적인 왕궁의 구조는 알고 있으니, 그 마차를 타고 들어가 움직이시지요. 지금 왕궁의 내성은 국왕을 지키는 몇몇 호위들을 제외하고는 텅 빈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따로 문제는 없을 것입니다.”
나는 죠닌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거나 커다란 성의 모습을 보면, 왕을 찾는 일이 가장 힘들 것 같았는데 그 부분을 죠닌이 도울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아니, 도대체 이 인간을 뭘 믿고?”
트리샤가 나를 향해 그렇게 물었지만, 나는 그녀의 질문에 따로 대답을 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도 죠닌을 완전히 믿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전쟁으로 인해 손실을 봤다고는 하지만, 수도로 쳐들어온 적국의 사람들을 잡는 공을 내세우면 그 정도의 손실은 쉽게 만회할 수 있을 것이었다.
상식적으로는 자신들이 섬기는 왕을 배신하는 것보다 나를 팔아먹는 것이 훨씬 수월하고도 확실하게 이득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일단 죠닌이 말한 방법을 따르기로 했다.
어쨌거나 나에게는 포탈이라는 사기나 다름없는 능력이 있었고, 상황이 틀어진다고 하더라도 몸을 내뺄 방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신세를 좀 지지.”
나는 죠닌에게 그렇게 말했고, 그는 차를 내오겠다며 자신의 집 주방으로 들어갔다.
트리샤는 나에게 따지고 싶은 말이 가득한 얼굴이었지만, 죠닌이 혼자 움직이는 것이 더 걸렸던지 그를 따라 다니며 감시하기 시작했다.
“차 맛 좋군.”
나는 죠닌이 내민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그렇게 말했다.
순간, 죠닌의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자신이 내민 차를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마시자, 뭔가 탄복한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던 것이다.
“저를 믿으십니까?”
“아니, 난 아무도 믿지 않아. 그냥, 당신이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내가 감당할 자신이 있을 뿐이지.”
내 말에 죠닌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종이에는 아르카 왕국의 국왕이 머무르는 성의 내부 지도가 상세히 그려져 있었다.
“이건 제가 왕성의 물품을 대며 만들어둔 지도 입니다. 물론 전적으로 제 기억에 의존하는 만큼 틀린 곳이 있을 수도 있지만, 대략적인 위치는 아마 이와 같을 겁니다.”
죠닌은 그렇게 지도를 펼쳐 보이며, 나에게 자신이 마차를 대는 곳에서 국왕이 머무르는 곳까지 움직이는 최단 거리를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설명이 끝난 순간, 창 밖의 풍경이 조금씩 어두워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