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1화 〉아르카의 국왕
“정지!”
마차 너머로 사무적인 병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천천히 가도를 달리던 마차가 멈춰서는 것이 느껴졌다.
“오랜만이군, 자네.”
마차 밖에서 죠닌의 경쾌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우리를 상대할 때와는 전혀 다른 목소리로 병사와 대화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병사가 죠닌의 마차를 막아선 것은 우리 때문이었다.
아무리 아르카 왕국이 야만인들로 불린다고는 하나, 그들도 마법을 사용하는 존재가 있었고 그들 중 누군가 왕국의 수도에 마법적인 파장이 나타난 것을 확인한 것이다.
덕분에 아르카 왕국의 경계는 조금 더 높아졌고, 병사는 평소 성을 드나들던 죠닌까지 검사를 하고 나선 것이었다.
“마차 안을 좀 살펴봐도 되겠소?”
“나야 상관은 없네만, 알잖은가? 마차에 뭐가 실려 있는지. 나중에 혹시라도 누가 묻는다면, 나는 자네의 이름을 말할 수밖에 없네.”
“끙…”
죠닌의 대수롭지 않은 반응에, 병사는 곤란한 듯한 신음소리를 흘렸다.
병사가 곤란해 하는 이유는, 죠닌의 말처럼 마차에 실려 있는 것들 때문이었다.
아니, 그건 물건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역시 남자는 다 똑같다니까.’
마차 안에는 미모의 여자들이 앉아 있었다.
죠닌에게 듣기로는 국왕이 모종의 이유로 여자들을 자신에게 구해오라고 했다는 것이다.
권력자가 여자를 구해오라면, 그 이유가 뭔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거기다 아르카 왕국의 국왕은 그 성격이 매우 특이해서, 자신을 상대할 여자들을 누군가 먼저 보는 것을 끔찍이도 싫어한다고 했다.
“여자가 택배 박스도 아니고 말이지…”
나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마차 한쪽에 앉아 있는 여자들을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마치, 자신에게 온 택배 박스를 누군가 먼저 뜯으면 김이 새는 것처럼, 아르카의 국왕도 비슷한 기분이 아닐까 싶었다.
“이건 뭐 어쩌라는 건지…”
“사람 일이라는 게 다 유도리가 필요한 거 아니겠나? 경계를 느슨히 한 것이야 몇 대 맞고 넘어갈 일이겠지만, 국왕 보다 먼저 여자들을 확인한 건 목이 달아날 일이지.”
죠닌은 곤란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병사를 그렇게 설득했다.
곧 이어, 짤랑이는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봐서는 뇌물 또한 주는 모양.
“갑자기 뭔 돈이요?”
“위로금일세. 나중에 얻어 터지면 약값이나 하라고.”
“….허, 참. 이거 좋아해야 하는 건지, 울어야 하는 건지를 모르겠군요.”
병사는 결국 그렇게 말하며, 마차를 통과시켰다.
마차 안에서 긴장된 표정으로 칼자루를 쥐고 있던 알렌과 트리샤가 한숨을 푹 내쉬는 것이 보였다.
어쨌거나 성문을 통과한 마차는 다시금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마차가 멈출 때까지, 마차 안에 있는 여자들을 하나씩 품평하며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도착했습니다.”
다시 마차가 멈춰 서고, 죠닌이 문을 열며 나에게 그렇게 말했다.
나와 트리샤, 그리고 알렌은 죠닌이 미리 알려준 통로를 향해 빠르게 움직였다.
진짜로 전쟁 때문에 병력이 빠진 탓인지, 성 안에는 따로 경계를 서는 병사들이 보이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 닦아놓은 길을 가는 것처럼, 우리는 빠르게 왕이 있는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런…막혔는데요?”
“거 봐. 내가 함정이라고 그랬지?”
하지만 그 편안함 또한 오래 가지는 않았다.
죠닌의 설명대로 움직였음에도 불구하고, 지도에서는 확인할 수 없던 막힌 벽이 나타난 것이었다.
나 또한 길이 막힌 것을 보며 당황하기는 했지만, 아직 죠닌을 의심하기엔 일렀다.
어쨌거나 우리가 있는 곳은 한 나라의 왕이 거주하는 곳이었고, 그곳의 보안이 이토록 허술한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잠깐만.”
나는 알렌과 트리샤의 사이를 끼어 들어가며, 막힌 벽을 두드렸다.
벽은 가벼운 소리를 내며 울렸고, 나는 그 소리를 통해 눈 앞의 벽이 임시로 세워둔 가벽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알렌, 잘라.”
“네?”
“이 벽, 자르라고.”
내 말에, 알렌이 나를 미친놈처럼 보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내 말뜻을 알아들은 트리샤는 검에 기운을 불어 넣고는 그대로 벽을 향해 내려쳤다.
검기의 특성 때문인지, 스릉-하는 소리와 함께 칼은 마치 두부라도 써는 것처럼 벽을 뚫고 들어갔다.
대충 사람이 통과할 크기로 벽을 오려낸 트리샤는, 빠르게 벽 너머를 살폈다.
다시 지도에서 본 것과 비슷한 공간이 나타났고, 우리는 빠르게 벽 너머로 이동했다.
“조심!”
그 순간, 트리샤가 어디선가 날아온 단도를 쳐 내며 그렇게 소리쳤다.
문제는 트리샤의 검에 부딪친 단도가 날아간 곳이 하필 알렌의 얼굴 방향이었다는 것이었다.
알렌이 재빨리 고개를 틀어 단도를 피했지만, 그 얼굴에 생채기가 나는 것만큼은 피할 수가 없었다.
“….괜찮아?”
“크윽-! 이 개자식들이!!”
나는 알렌을 향해 물었지만, 대답은 들을 수 없었다.
단도에 맞는 순간, 알렌의 눈이 붉게 물들었기 때문이었다.
‘또 분노의 정령인가?’
분노의 정령이 알렌의 머릿속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전부터 특정 상황만 되면 알렌이 미쳐 날뛰는데, 그 정도가 조금씩 심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다행히 완전히 정신이 나간 것은 아닌지 알렌이 적들을 향해 달려드는 것이 보였다.
적의 수는 다섯.
함정이라기엔 그 수가 너무 적었고, 호위라고 하기엔 조금 많은 수였다.
하지만 그 적들 또한 갑작스러운 침입자에 당황하는 것을 보면 함정 보다는 그냥 우리가 재수가 없는 쪽이 맞는 것 같았다.
“여긴 우리에게 맡기고 먼저 가요!”
트리샤가 알렌을 돕기 위해 달려가며 날 향해 그렇게 말했다.
나는 대충 적들과 알렌의 전투를 지켜보다 몸을 돌려 왕이 있는 곳을 향해 뛰었다.
알렌이 조금 후달려 보이긴 했지만 아마도 트리샤까지 합류한다면 능히 적을 제압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복도를 달리던 나는 빠르게 몸에 투명화 마법을 걸었다.
혹시라도 마주칠 적을 피하기 위해서였고, 그건 꽤나 훌륭한 선택이었다.
“적습이다!!”
알렌과 트리샤가 떠들썩하게 전투를 벌이기 시작해서인지, 성 안 여기저기에서 병사들이 튀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덕분에 알렌이 조금 걱정되기는 했지만, 당장 트리샤가 곁에 있는 이상에는 큰 문제는 없을 거라고 여기는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지금 내가 돌아가서 그들을 돕는 것 보다는, 빠르게 왕을 잡는 편이 더 성을 침입한 목적에 부합했다.
‘저기군.’
병사들이 튀어나간 탓에, 나는 왕이 있는 곳에 접근하는 것이 더욱 수월해졌다.
열린 문틈 사이로 몸을 들이밀자, 초라해 보이는 노인이 왕좌에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왕좌 주변으로 몇몇 병사들이 삼엄하게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지만, 이래서야 병사들이 왕을 지키는 것인지 위협하는 것인지조차 분간이 안 갈 정도였다.
‘에어 블라스트.’
나는 동시에 매직 에로우를 여러 발 날릴 수 있는 마법을 영창하며, 왕 주위에 있는 병사들을 노려봤다.
투명화가 걸려 있는 것은 내 몸뿐이었기에, 허공에 갑자기 생성된 마법 화살을 발견한 병사 하나가 깜짝 놀라는 것이 보였다.
“누구냐!”
내 마법을 발견한 병사가 그렇게 소리를 쳤지만, 나는 곧장 그 병사에게로 마법을 쏘아 보낼 뿐이었다.
그래도 왕의 최 측근을 지키는 이답게 실력이 나쁘지는 않은 것인지, 나를 발견한 병사가 마법을 쳐내는 것이 보였다.
문제는 다른 병사들의 경우 마법을 뒤늦게 발견한 탓에 반응이 느려졌다는 것.
나는 몸의 여기 저기에 구멍이 뚫리며 쓰러지는 병사들의 모습을 보며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본능적으로 죽지 않을 곳만을 공격한 것 같았지만, 그 탓에 바닥에 쓰러진 병사들의 절규 소리가 더욱 거슬리게 들렸던 탓이다.
“이런 개 같은!!”
내 마법을 쳐 낸 병사는 쓰러진 동료들을 보고 곧장 나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제법 빠른 몸놀림이었지만, 제운종을 사용할 수 있는 나를 붙잡을 정도는 되지 못했다.
나는 칼을 빼 들고 달려드는 병사에게서 멀어지며, 그의 하반신을 향해 마법을 터트렸다.
“익스플러젼!”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병사의 다리가 터져 나갔다.
피와 육편이 튀는 모습이 꽤나 잔인하게 느껴졌지만, 그래도 머리를 터트렸을 때보다는 그 충격이 훨씬 덜했다.
나는 비명을 질러대는 병사를 지나쳐 왕좌를 향해 천천히 나아갔다.
화려한 왕좌에 어울리지 앉는 늙고 비루한 왕은 무심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대는 누구인가?”
늙은 왕이 메마른 목소리로 나에게 물었다.
“전쟁을 끝내러 왔다.”
나는 늙은 왕을 향해 그렇게 대답했다.
텅 빈 것 같은 왕의 눈에 이채가 어리는 것이 보였다.
“그런가, 그대는 이시디나 인이로군.”
“뭐, 그렇다고 볼 수 있지.”
나는 왕의 말에 그렇게 대답했다.
정확히는 한국인이었지만, 어쨌거나 지금은 이시디나의 백작으로 생활 중이었으니 꼭 틀린 말도 아니었다.
“안타깝지만, 나를 붙잡는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무슨 소리지?”
나는 왕에게 다가서며 그렇게 말했다.
애초에 죠닌 조차도 전쟁을 벌인 것은 왕의 독단이라고 말했다.
당장 최전선에서 싸우는 지배 계급도 이 전쟁을 마땅치 않게 여기고 있다는 증언이었다.
그러니 이 전쟁은 왕이 패배를 선언하는 순간 끝이 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전쟁을 멈출 생각이 없다.”
“당신이 죽더라도 말인가?”
나는 위협적인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며, 불덩이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아르카의 왕은 미미한 미소를 띄운 채로 내가 만든 불덩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정말로 삶에 대한 의지가 없는 것처럼 자신을 향해 다가서는 나를 가만히 지켜볼 뿐이었다.
“마왕, 마왕이 이 땅에 부활할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게 무슨 소리지?”
아르카 왕의 말에 나는 멈칫하며,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지금껏 마왕이 다시 나타날 것이라는 시그널은 수도 없이 나타나고 있었지만, 그 장소나 시기는 정확하게 밝혀진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마왕의 수하라는 자가 나를 찾아왔다. 그는 자비를 베풀겠다며, 우리에게 이 땅을 비울 것을 명했다.”
“하? 누군지도 모를 놈의 말을 믿고 전쟁을 일으켰다고?”
나는 아르카 왕의 말에 콧방귀를 꼈다.
한 나라의 국왕이라는 자가,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그리 쉽게 전쟁을 결정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마물을 조종하는 귀걸이. 그것이 그가 내민 증거였다.”
아르카 왕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들의 전쟁은 영토를 침탈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언제 나타날지 모를 마왕의 강림을 피하기 위해 열심히 도망을 칠 궁리를 하는 것에 불과했다.
“나로서는 방법이 없었다. 전쟁이 일어나면 많은 이들이 죽겠지만, 마왕이 강림하는 곳에 있는 것보다는 그래도 조금 더 살아남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아르카 왕은 힘 없는 목소리로 나를 향해 그렇게 말했다.
“차라리 그 힘으로 마왕에 맞서는 것이 낫지 않나?”
“….글쎄. 지금껏 마왕에게 반항해서 살아남은 곳은 이시디나 왕국, 그 국가를 세운 용사밖에 없지. 제국은 마왕의 등장에 도망치기 바빴고, 소국들은 어떠한 저항도 하지 못한 채 멸망에 이르렀으니까.
고작 마왕 따위 하나가 나타난다고 한 나라의 왕이 멸망을 생각하는 것이 우습기는 했지만, 역사적인 기록들을 볼 때 아르카 왕의 판단을 마냥 비웃을 수만은 없었다.
그리고 아르카 왕국이나 여타의 왕국들은 대부분이 인간이 살 수 없는 땅이 되었었다.
그 땅을 되찾은 것이 용사였고, 용사와 그의 동료들이 세운 국가가 이시디나였다.
그리고 마왕이 물러난 땅에도 사람들이 모여 살기 시작했고, 그렇게 만들어진 국가들이 아르카 왕국을 비롯한 여러 소국들이었다.
“어차피 죽을 날을 기다리는 몸이다. 내 목숨은 아깝지 않으나, 한 명의 백성이라도 더 살 수 있는 방법을 택한 것뿐이다.”
“개 소리.”
나는 아르카의 국왕을 보며 그렇게 말했다.
그가 어떤 이유로 전쟁을 일으킨 것인지는 알았지만, 싸워 보기도 전에 미리 포기하는 꼴이 그리 좋게 보이지는 않았다.
“나를 죽일 테면, 죽여라. 이국의 마법사여. 하지만, 이 전쟁은 끝내 막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결연한 표정으로 날 향해 그렇게 말하는 국왕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말을 해도 설득이 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렇게 백성을 아끼는 왕이라면, 적어도 해 볼만한 상대를 건드렸어야지.”
“….뭐라?”
“차라리 제국을 치지 그랬어?”
나는 아르카의 국왕을 향해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