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2화 〉메테오!!
“웃기는 소리로군.”
내 말에 아르카 왕국의 왕이 웃음을 흘리며 그렇게 말했다.
이시디나가 아닌 제국을 치라는 말이, 그의 입장에서는 말도 안 되는 소리로 들렸기 때문이리라.
그도 그럴 것이 제국과 이시디나의 국력 차이는 그야말로 어마 어마했다.
괜히 오로시우스 후작 같은 놈들이 제국에게 알랑거리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시디나에 현자의 제자가 나타났다는 소리는 못 들었나?”
나는 아르카의 왕을 향해 그렇게 물었다.
순간, 왕의 눈에 다시금 이채가 떠올랐다.
삶을 포기한 듯 무미건조하던 왕의 얼굴에 신기한 것을 보는 것 같은 표정이 떠올랐다.
“….그랬지. 그대가 그 현자의 제자라는 사람인 모양이군. 그래, 생각해보니 이곳에 현자가 있다는 소리도 들었던 것 같네.”
아르카왕의 말에 나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로잘린에게 대충 둘러대기 위해 했던 말이, 어느 새 이국의 왕의 귀에까지 들어간 것이었다.
‘발 없는 말이 천리간다더니…’
나는 앞으로 말 조심을 해야겠다는 다짐을 하며, 왕을 바라봤다.
어쨌거나 그가 나, 아니 현자에 대한 소문을 들은 것은 나에게는 득이 되는 일이었다.
“그렇지. 스승님이 괜히 이곳에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쯤은 당신도 알지 않았나?”
나는 있지도 않은 현자를 또 한 번 팔아 먹었다.
말 조심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이건 마치 누군가 이용해 먹으라고 깔아 둔 것 같은 설정이었으니까.
“현자라…”
아르카의 왕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리다가는 눈을 감았다.
“글쎄, 현자가 아닌 용사가 나타났다면 나도 다른 결정을 내렸을지도 모르지.”
잠시 동안 생각을 한 아르카의 왕은, 나를 보며 그렇게 말했다.
현자 또한 전설 속의 인물이기는 했지만, 용사에 비하면 그 이름값이 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용사의 수많은 동료 중 하나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성녀와 기사, 그리고 현자와 엘프 마법사, 거기다 드워프 전사까지 당장 떠오르는 용사의 동료만 해도 다섯이었다.
거기다 각각의 왕국마다 다르게 전해지는 용사의 조력자들까지 더하면 그 수를 감히 헤아릴 수도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이야기 속의 현자에게는 나 같은 제자가 없었다는 것이다.
“글쎄, 내가 용사일 거라는 생각은 안 해봤어?”
나는 아르카 왕국의 국왕에게 다가서며 그렇게 말했다.
국왕은 마치 나를 비웃듯 조소를 띄우며 내 질문에 답했다.
“용사는 마왕만큼이나 특수한 존재지. 용사가 태어날 때는 누구나 알아챌 수 있는 사건이 일어난다. 하지만, 이시디나 왕국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지.”
“그래봐야, 이전 용사의 경우일 뿐이잖아. 그리고 나 정도면 꽤나 특이한 사건을 많이 겪었다고.”
나는 아르카 국왕을 향해 그렇게 말했고, 국왕은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들었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웃기는 소리. 그대는 지금 자신이 용사라 주장하는 것인가?”
“괜히 현자의 제자가 된 게 아니라고. 거기다 내가 태어날 때 아주 대단한 일이 있기도 했고 말이야.”
내 말에 아르카 국왕의 표정이 묘하게 변하는 것이 보였다.
아직도 내 말을 믿는 기색은 아니었지만, 반쯤은 호기심이 생긴 모양.
나는 그런 아르카 국왕을 설득하기 위해, 즉석에서 내 탄생설화를 지어내기 시작했다.
“우리 아버지는 하늘의 자손이야. 그리고 엄마는 곰이지. 물론 그냥 곰은 아니야, 동굴에서 마늘과 쑥만 100일을 먹고 자랐는데…”
내 말에 아르카 국왕의 표정이 굳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렇게 여차 저차 해서 둘은 결혼을 하고 날 낳지. 그리고 나는 태어나자마자 한 손으로 하늘을 한 손으로 땅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어. 천상천하 유아독존…”
단군 설화만으로는 약하다고 판단한 나는 석가의 탄생설을 가져다 붙였다.
하지만 그래도 반응은 미적지근한 상황.
나는 아르카 국왕의 눈치를 살피며, 필살기를 사용했다.
“사실은 예전부터 용사가 태어날 거라는 예언이 있었지. 별의 움직임을 통해 그 용사의 출생을 직감한 동방박사들이 예물을 가지고 와서 내 탄생을 축하해 주는데…”
“하아. 그만. 그대의 그런 이야기는 믿을 수 없다. 그런 일이 있었다면, 당연히 대륙에 퍼졌을 터이니…”
“뭐, 꼭 세상의 모든 일들이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만은 아니지. 마치 당신이 전쟁을 일으키는 이유를 사람들이 모르는 것처럼.”
내 말에 아르카 왕국의 왕은 침통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어쨌거나, 국왕으로서 백성들과 병사들을 전쟁으로 내 몬 것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어쨌든 그대의 말은 신뢰할 수 없다. 이대로 나를 죽이건, 그냥 돌아가건 그대 마음대로 하라.”
나는 왕의 말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믿을 수 없다고 포기하면 내가 아니었다.
믿을 수 없다면, 믿게 만들어 주는 것이 도리.
나는 국왕의 눈을 바라보며, 속으로 새로 얻은 마법의 주문을 영창했다.
“당신이 전쟁을 하는 것은 아르카 왕국의 백성들을 살리기 위한 거랬지?”
“….그렇다.”
“그럼, 내가 그 자들을 다 죽이면 어떨까?”
“아무리 그대가 강하다지만,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 불가능하다.”
“….글쎄? 용사라면 가능할지도.”
나는 그렇게 말하며, 아르카 국왕의 뒷덜미를 손으로 붙잡았다.
왕이라고는 하나, 힘 없는 노인에 불과한 아르카의 국왕은 내 손에 이끌려 궁전 한 쪽에 나 있는 창으로 다가섰다.
“….저, 저건!”
창 밖을 본 아르카 왕국의 국왕이 기겁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응. 9서클 마법인 메테오야. 저 정도면 아르카 왕국 사람들 대부분이 죽어버리겠지.”
그는 두려움이 가득한 눈으로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국왕이 놀란 이유는 간단했다.
아르카 왕국의 수도 위에, 거대한 운석이 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대는 악마인가?”
진족의 힘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으니, 악마보다는 마족에 가깝지만 나는 국왕의 말에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러니까, 결정해. 지금 뒤지던지. 아니면 마왕이랑 싸우다 뒤지던지. 물론, 후자를 선택하면 나도 어느 정도는 도와줄 생각이야.”
내 말에, 아르카 국왕의 표정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 시간에도 운석은 빠르게 다가와 점점 더 그 크기를 불려나가는 중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아르카의 백성들도 마찬가지.
백성들은 빠르게 도망을 치거나,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리는 등 다양하고 생동감이 넘치는 반응을 보여주는 중이었다.
“항복. 무조건 항복하겠다…”
마치 핵을 맞은 일본의 일왕이 그랬던 것처럼, 아르카 왕국의 국왕은 나에게 무조건 적인 항복 선언을 내뱉었다.
“좋아. 그 말을 기다렸어.”
나는 그와 동시에 아르카 왕국의 국왕에게 슬립 마법을 걸었다.
늙은 그의 몸이 축 늘어졌고, 이내 피투성이가 된 알렌과 트리샤가 내가 있는 곳으로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둘 다 무사해요?”
“국왕은? 어떻게 된 거야?!”
나는 트리샤의 말에 피식 웃음을 흘리며, 내 발 아래 쓰러진 아르카 국왕을 가리킬 뿐이었다.
**
“성공하셨군요.”
뒤늦게 성으로 들어온 죠닌은 나와 일행들을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정신을 차린 국왕은 멀쩡한 왕성과 도시의 모습을 보며 눈물을 흘렸고, 이내 무조건적으로 내 말을 따르기로 합의를 마쳤다.
국왕은 내가 메테오 스트라이크를 사용했다가 취소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당연히 그건 아니었다.
당장 나는 8서클 밖에 되지 않았고, 설혹 9서클이라고 해도 한번 발동한 마법을 취소하는 것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닐 것이었다.
‘환영 마법이 이렇게 편리할 줄은 몰랐지.’
그랬다.
나는 메테오를 사용한 것이 아니라, 아르카 국왕에게 환영을 건 것이었다.
환영을 거는 마법은 6서클이었는데, 구입하자마자 진조의 힘 때문인지 강화 됐다는 메시지가 떠올랐었다.
그리고 그 효과는 기대 이상.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나라 하나를 꿀꺽 한 것이었다.
“….아이고, 아파 죽겠네요.”
물론, 내가 안 흘린 것 뿐이지, 알렌과 트리샤는 온 몸에 자잘한 상처를 달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그들의 상처를 치료해주며, 죠닌을 바라봤다.
“일단 국왕은 전쟁을 멈추기로 했습니다. 전장에 나가 있는 이들에게도 서신을 보냈구요.”
“그거 정말 다행입니다.”
내 말에 죠닌은 가슴을 쓸어 내리며 그리 말했다.
아마 그도 이 땅에 마왕이 강림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 반응이 조금은 다르지 않을까 싶었다.
이런 저런 생각으로 기분이 조금 복잡하기는 했지만, 굳이 죠닌에게까지 그런 말을 털어 놓을 필요는 없지 않을까 싶었다.
“참, 당신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부탁이요?”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보는 죠닌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르카의 왕이 전적으로 내 말을 따르기로 했다지만, 언제까지고 내가 이 곳에 머무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당연히 적절하게 왕을 견제해줄 이가 필요했고, 나는 그 대상으로 죠닌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저같이 미천한 상인이 어찌…”
“사람에 귀함과 천함이 어디 있겠습니까? 오히려 시장의 안정을 생각하는 당신이라면, 가장 합리적인 답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요.”
나는 죠닌을 향해 그렇게 말했고, 잠시간의 대화 끝에 그를 설득할 수 있었다.
내가 떠나고 난 뒤, 왕이 태도를 바꿀 수도 있는 노릇이었지만 내가 보기에 죠닌은 그리 만만한 인물은 아니었다.
거기다 나는 왕에게 적당한 시간 동안 죠닌을 따르도록 최면을 걸어둘 생각이었다.
적어도 어느 정도의 시간만 확보되면, 눈 앞의 남자가 자신의 세력을 만들 능력 정도는 있어 보였던 것이다.
“필요한 것이 있다면, 저에게 연락을 주시면 됩니다.”
“네.”
나는 죠닌에게 그렇게 말했고, 그를 빤히 바라봤다.
어차피 알렌과 트리샤의 상처는 대충 치료를 마친 상황.
국왕에게 항복을 받아 놨으니, 빼 놓고 갈 수 없는 일이 하나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혹시, 전에 데리고 온 여자들은 어디 있습니까?”
“…..예?”
죠닌은 조금 뜬금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며 그렇게 물었다.
그 표정에 조금 민망함이 느껴지기는 했지만, 나는 뻔뻔함을 유지한 채 죠닌의 대답을 기다렸다.
“아아, 그녀들이라면 아마 성안의 비밀 장소에 있을 겁니다.”
“혹시, 그녀들이 강제로 이곳에 끌려 온 겁니까?”
이어지는 내 질문에 죠닌은 조금 감동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뭔가 단단히 오해를 한 모양이었지만, 나는 그 오해를 굳이 바로잡지 않았다.
죠닌은 이내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나에게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곳이 꽤나 번영한 것은 사실입니다만, 그 만큼 가난에 허덕이는 이들도 많습니다. 그녀들 대부분은 스스로 생계를 책임지지 못해 자신을 판 것이며, 저는 그런 여인들을 구해 씻기고 단장하여 국왕에게 넘긴 것입니다.”
나는 죠닌의 설명에 흔쾌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억지로 잡아 온 여자들이라면 조금 껄끄러울 수도 있겠지만, 동의 하에 성에 온 여자들이라면 양심에 걸릴 것도 없었다.
“그 비밀 장소라는 곳이 어디입니까?”
“…마음은 알겠지만, 그녀들은 풀어준다고 해도 어디 갈 곳이 없는 처지라서.”
죠닌이 답답한 얼굴로 나를 향해 그렇게 말했다.
물론 내가 답답한 것이 아니라, 그런 여인들이 많은 아르카의 상황이 답답하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그런 죠닌을 향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어차피 들킬 것이 분명한 이상, 더 이상 점잖을 떨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누가 풀어준답니까? 저도 사내니, 정복의 대가는 누려야죠.”
“예?”
“그래도 늙은 왕을 상대하는 것보다는 저처럼 젊고 멋진 남자를 상대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내 말에 죠닌은 멍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하지만 이미 내 성격을 알고 있는 알렌과 트리샤는 그저 쓰레기를 보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나도 인간인 터라, 나를 존경스러운 눈빛으로까지 보던 죠닌에게까지 내 실체를 보인 것이 조금 안타깝기는 했다.
‘하지만 전국시대풍 미녀라니, 이건 못 참지.’
하얀 카부키 화장에, 둥근 눈썹.
일본산 게임에서나 보던 미녀들을 맛 볼 수 있는 것은, 씹덕인 나로서는 절대로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