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4화 〉대전 회의
나와 눈이 마주치자 상대는 다급히 시선을 피했다.
꼴사납게 전장에서 도망치던 것을 들켰으니, 아무리 뻔뻔한 인간이어도 부끄러움은 느끼기 마련인 듯 했다.
그랬다.
내가 항복문서를 자랑하려다가 멈춘 것은 대전 한쪽에 오로시우스 후작이 서 있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엉덩이에 화살을 맞고 전장에서 도망치던 그는 부끄러움도 모르고, 왕궁의 대전 회의에 참석해 있었던 것이다.
“본 백작. 제가 분명히 질문을 했을 텐데요?”
내가 대답 없이 오로시우스만을 바라보자, 미네로바 공주가 눈을 치뜨며 나를 향해 날카로운 목소리로 그렇게 물었다.
이미 내 마력에 겁을 집어 먹은 귀족들은 내심 통쾌함을 느끼는 표정이었지만, 아무도 그녀의 말에 호응을 하지는 못했다.
“아아, 그건 급할 거 없지 않나요? 공주. 그것보다는 지금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지가 더 궁금한데요.”
나는 화가 난 것처럼 나를 바라보는 공주를 향해 그렇게 물었다.
결국, 그녀의 아버지이자, 이시디나의 왕이 나서서 상황을 풀어가기 시작했다.
“그렇지. 공주, 그가 가져온 소식이 궁금하기는 하지만 지금은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 않느냐?”
왕은 자신의 딸을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아버지의 시선을 받은 공주는 자연스럽게 오로시우스를 바라보았다.
“애초에 후작께서 자신이 있다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것이 마물들이 움직일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제가 아니라 그 누구가 전장에 나갔다고 하더라도 결과는 다르지 않았을 겁니다.”
공주의 말에 후작은 민망한 표정으로 그렇게 대답했다.
은근슬쩍 내 눈치를 살피는 후작의 모습에 나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대전에 있는 그 누구도 왕과 공주의 편은 없어 보였다.
이시디나 왕국 모두가 후작의 편이라기 보다는, 귀족들 대부분이 아르카 왕국과의 전장에 나서길 꺼리기 때문인 듯 보였다.
“그럼 어쩌자는 말입니까? 이대로 항복이라도 할까요?”
공주는 그런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아주 짧은 대화였지만, 나는 대충의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공주는 후작이 패퇴한 것에 대한 책임을 물으려 했지만, 후작은 마물들이라는 변수 때문이라고 둘러대는 상황이었다.
거기다 스스로의 보신에만 관심이 있는 귀족들이, 은근히 후작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당장 아르카 왕국이 당장 쳐들어 오고 있는 판국에, 적을 어떻게 상대할 지조차 가닥을 잡지 못한 암울한 상황이었다.
‘아르카도 개판이지만, 이시디나도 만만치 않군.’
나는 암담한 이시디나 왕국의 상황을 보며 조소를 감출 수 없었다.
어차피 왕국이 전쟁에서 패하는 순간, 귀족들은 그들이 누리던 기득권을 내려놓아야 할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족들은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을 알면서도, 다른 누군가 꺼주지 않을까 상황을 관망하는 중이었다.
“아아, 그러니까 대충 오로시우스 후작님의 패전 책임을 묻는 자리였군요.”
“큼!!”
내가 나설 타이밍이라는 것을 확인한 나는 그렇게 말했고, 이내 후작의 불편한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책임이라니, 당치도 않소!”
“그렇습니다. 후작께서 나섰기에 그나마 아르카 왕국군이 아직 국경지 근방에 머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후작의 정치 세력들이 자신의 수장을 보호하기 위해 바쁘게 입을 놀렸다.
확실히 아직 아르카의 상황이 이시디나 왕국까지는 전해지지 않은 모양.
나는 재미있는 구경을 하는 기분으로, 오로시우스를 보호하기 위해 떠드는 귀족들을 바라봤다.
아마도 그들이 믿고 있는 것은 오로시우스 자체는 아닐 것이었다.
이미 패전을 한 오로시우스는 스스로의 무능함을 드러냈고, 그들을 지켜줄 힘이 없다는 것도 증명이 된 상황이었으니까.
“어차피, 제국이 나서면 그 마물도 자연히 해결 될 겁니다.”
“그렇습니다. 오로시우스 후작을 당장 제국으로 보내서 도움을 요청해야 합니다.”
결국 이시디나 귀족들의 입에서 제국의 이름이 나오기 시작했다.
애초에 귀족들이 오로시우스를 보호하는 것은 그 뒤에 있는 제국을 믿기 때문이었다.
제국이라면 어떻게든 이시디나 왕국을 보호해 줄 것이라는 믿음.
웃긴 것은, 제국을 따르지 않던 귀족들 조차, 그들에 은근히 편승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이 자리에 모여 있는 이시디나의 왕국 귀족들은 전부 자신의 발등의 불을 꺼줄 대상을 제국으로 생각하고 있던 것이다.
‘황제가 관망하기로 한 것은 아직 모르나 보지?’
나는 제국 사신을 만났던 일을 떠올리며, 의아한 표정으로 공주를 바라봤다.
그 순간, 공주 또한 사신과의 일을 떠올린 것처럼 귀족들을 향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얼마 전 찾아온 제국의 사신은, 이번 전투에 제국은 나서지 않을 것이라 밝혔어요.”
공주의 말에, 대전의 분위기가 다시 얼어붙기 시작했다.
그제야 심각함을 느낀 귀족들이 패닉을 느낀 표정으로 한 마디씩 하기 시작했다.
“그런 일을 왜 이제야..!!!”
“제국이 나서지 않는다니, 그럼 이 일을 어쩐단 말입니까?”
“오로시우스 후작! 그대가 제국과는 인연이 있으니, 어찌 된 일인지 설명을 좀 해보시오!”
“나라고, 어찌 제국의 일을 다 알겠소!”
모두가 한마디씩 떠들다 보니, 대전 안은 금새 소란스러워졌다.
공주는 그 모습을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보고 있었고, 이시디나의 왕은 조금 서글픈 표정으로 자신의 수하들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건 어찌 됐을까나?’
나는 제국의 사신에게 암시를 걸어, 황제에게 보냈던 것을 떠올렸다.
나를 노린 것에 대한 복수였지만, 이런 저런 일로 완전히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와 어떻게 되었는지 확인할 수도 없는 일이었기에, 나는 그 일을 머릿속에서 지우고는 눈 앞의 상황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제국이 참전하지 않는다는 말에, 귀족들은 그야말로 난리가 난 상황이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서로 눈치를 살피며 몸을 사리던 귀족들이, 상대에게 당장 전장으로 나가 싸우라는 식으로 일을 떠넘기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미 전쟁이 끝났다는 것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꽤나 웃기는 코미디가 펼쳐지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어쩐지 그 우스꽝스러운 모습도 계속 보다 보니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하아, 진짜 여기나 저기나 정치 하는 것들은 다 쓰레기 밖에 없다니까?’
나는 한숨을 푹 쉬며, 왕을 향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와 동시에 마력을 살짝 풀었기에, 시장 통처럼 떠들어대던 귀족들의 입이 다물어지기 시작했다.
“뭐, 들어봤는데 그닥 영양가 없는 소리들만 하고 계시네요.”
내 말에, 귀족들의 표정이 똥이라도 씹을 것처럼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마력 때문에 당장 반발을 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날 향한 그들의 시선이 그리 곱지 않은 것이 느껴졌다.
“….그대에게는 방법이 있는가?”
이시디나의 왕은 나를 향해 그렇게 물었다.
어차피 왕 또한 뾰족한 방법이 없는 상황이었다.
어쩌면 귀족들 뿐 아니라, 국왕 조차도 제국에게 도움을 구걸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있었을 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왕은 아주 미약한 희망을 가지며, 날 향해 그렇게 묻고 있었다.
타국의 침략에 맞서기 위해 외세를 끌어들이는 것이 얼마나 멍청한 일인지 정도는 알고 있는 눈빛이었다.
“방법이 있는 게 아니라, 방법이랄 것이 필요 없습니다.”
“그게, 무슨!”
공주가 짜증이 난 것처럼 날 향해 그렇게 소리쳤지만, 왕은 자신의 딸의 손을 붙잡아 말렸다.
어쨌거나 왕에게는 내가 마지막 희망이었고, 지금껏 수많은 일들을 일으켜 온 나만이 자신이 생각지 못한 일을 만들어낸 유일한 변수였다.
“여기, 아르카 왕국 국왕의 항복문서입니다.”
나는 품에 가지고 있던 종이를 내밀며 그렇게 말했다.
순간, 대전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종류의 정적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딱히 마력으로 입을 닥치게 만든 것이 아님에도, 귀족들이 너무 놀라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항복 문서라니? 그런 게 지금 왜 나온단 말이에요?”
공주는 내 말을 전혀 믿지 못하겠다는 눈으로 그렇게 말했다.
“간단합니다. 방금 전에 아르카 왕국 국왕에게 제가 직접 받아왔거든요.”
나는 공주를 향해 그렇게 이야기 하고는 알렌과 트리샤를 돌아봤다.
알렌의 증언이야 아무런 힘도 없겠지만, 용병 여제씩이나 되는 트리샤의 말이라면 귀족들도 그냥 무시하고 넘어갈 수는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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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카 국왕의 인장이 맞습니다.”
귀족 중 하나가 내가 가져 온 문서를 보며,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이미 트리샤의 증언에 귀족들 또한 반쯤은 넘어간 분위기였다.
거기다 확실한 증거까지 나오자, 대전은 그야말로 정적으로 휩싸였다.
“도대체, 어떻게…”
공주는 도저히 지금 상황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나를 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표정이 거의 없기로 유명한 공주였지만, 어쨌거나 날 만났을 때는 꽤나 다채로운 표정을 보여주는 중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공주의 색다른 모습들을 보는 게 재미있었다.
“아, 아까 전 그거 말인데요.”
나는 그렇게 말하며, 옆에 포탈을 하나 열었다.
대전에 나타난 검은 구멍에 대신들이 또 다시 술렁이는 것이 보였다.
“예상하셨겠지만, 다른 공간으로 이동하는 문입니다.”
내 말에 대신들의 술렁임이 더욱 커졌다.
그건 마치 말도 없이 혼자서 움직이는 마차를 봤을 때의 사람들의 반응과도 비슷해 보였다.
상상으로만 가능하지 싶었던 일이 눈 앞에 실제로 펼쳐졌을 때의 혼란.
대신들은 그 혼란에 빠져들고 있었고, 나는 그런 분위기를 여유롭게 즐기고 있는 중이었다.
“그게, 다른 공간으로 이어져 있다는 것인가?”
그나마 가장 정신을 빨리 차린 것은 국왕이었다.
국왕은 신기한 눈으로 내가 만든 포탈을 바라보며, 그렇게 질문을 던졌다.
“네. 그렇습니다.”
나는 국왕을 향해 광대처럼 익살스럽게 인사를 하며, 그렇게 대답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텔레포트는 8서클에 존재하는 마법이거늘, 어디서 사기를 친다는 말인가!”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오로시우스였다.
전쟁이 끝나는 순간 패전의 책임이 옅어지기는 하겠지만, 어쨌거나 나와 사이가 가장 안 좋은 이가 그였기 때문이었다.
“못 믿겠으면 들어가 보시던가.”
나는 후작을 향해 그렇게 말했고, 오로시우스는 나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내 말을 믿지는 못하더라도 포탈에 마법적인 힘이 얽혀있다는 것은 세 살짜리 아이도 알 수밖에 없는 상황.
“내가 그대를 어찌 믿고, 그 구멍에 들어간다는 말이요?”
오로시우스 후작은 불쾌한 표정으로 나를 향해 말했다.
사람에게 신뢰를 얻지 못한다는 것은 실로 슬픈 일이었으나, 나는 오로시우스 후작의 말에 웃음을 보였다.
“아, 아쉽군요. 저는 후작님께서 상당히 좋아하실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무슨 개소리….”
“제국의 황궁으로 연결되어 있거든요. 이거.”
내가 말을 끊고 그렇게 말하자, 후작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하나같이 무능해 보이는 귀족들이었지만,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일에는 누구보다 머리가 빠르게 굴러가는 것이 이들이었다.
반 제국 노선의 귀족들은 내 말을 듣자마자 눈을 반짝이기 시작했다.
“이, 이건 기적입니다. 이 힘만 있다면, 그 제국을 상대로도…”
“말 조심하시오!”
“본 백작, 이것으로 병사는 얼마나 옮길 수 있는가?”
“지금 제국에 반기를 들겠다는 말인가! 알폰스 백작! 그 말 책임질 수 있겠소?”
정작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음에도, 이시디나의 귀족들은 편을 나눠 싸움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건 이 기회에 제국의 압제에서 벗어나려는 귀족층과, 영혼까지 제국에 팔아먹은 귀족들의 싸움이었다.
얼핏 생각하면, 제국과 맞서려는 귀족들이 선한 쪽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들 또한 제국이라는 거대한 권력을 집어 삼킬 욕심으로 눈을 번들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만! 이게 무슨 짓들인가!”
결국 두 패거리의 싸움을 말린 것은 이시디나의 왕이었다.
양 쪽이 치열하게 싸움을 벌였기 때문인지, 의외로 왕의 호통이 먹혀 들어갔다.
양쪽은 서로 한 발씩 물러서며, 왕을 향해 고개를 조아렸다.
하지만, 그들이 진심으로 왕에게 존경을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지금 칼자루를 쥐고 있는 사람이 따로 있다는 것을 깨닫고 물러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칼자루를 쥔 게 나라는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