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28화 〉공주의 작전 (128/158)



〈 128화 〉공주의 작전

‘이건 반칙인데?’

나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느끼며, 공주를 바라봤다.
솔직히 그녀의 웃는 얼굴은  자체로 반칙이나 다름 없었다.
애초에 예쁜 얼굴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생동감 있는 표정이 더해지니 그 정도가 장난이 아니었다.

“제가 생각해 둔 방법이 하나 있거든요.”

공주는 생글거리는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는 자신의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 나와 알렌에게 내밀었다.

‘옷?’

나는 공주가 내민 것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건 왕궁에서 근무하는 시종들이 입는 의상이었던 것이다.

“공주 혼자서 이곳까지 오는 건 말이 안되잖아요. 어차피 두 분도 성내로 들어가시려면 이 방법이 제일 좋지 않겠어요?”

공주는 장난기로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나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러니까 나와 알렌을 시종으로 위장시켜 루케른 성으로 들어가겠다는 소리였다.
아니, 공주의 신분이라면  안으로 들어가는 것뿐만이 아니라 아마도 교단의 중심지까지도 쉽게 들어갈 수 있을 것이었다.

“오오! 공주님, 대단한데요?”

알렌이 당장 옷을 벗으며 그렇게 말했다.
갑작스러운 알렌의 스트립쇼에 공주가 당황한 표정으로 몸을 돌리는 것이 보였지만, 알렌은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옷을 갈아입는 중이었다.
퍽-.

“아,  때려요!”
“그냥.”

나는 알렌의 뒤통수를 한 대 후려친 후에 찝찝한 표정으로 공주가 준 옷을 바라봤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공주가 제시한 방법이 가장 깔끔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째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딱히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나는 몸을 돌리고 있는 공주의 뒷모습을 보며 천천히 옷을 벗었다.
방금 전까지 예쁘다고 생각했던 여자를 훔쳐보며 옷을 벗자 자연스럽게 하물이 반응했다.
어느새 옷을 다 갈아입은 알렌은 잔뜩 성이 난 내 물건을 보고 기겁한 반응을 보였지만, 그래도  기사라는 자신의 처지를 잊지 않았는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다 됐어요?”
“잠깐만요.”

나는 공주의 말에 그렇게 대답하며, 급히 옷을 입기 시작했다.
바지가 상당히 끼는  같은 느낌이 들기는 했지만, 어떻게든 들어가기는 했다.
그렇게 옷을 입고 난 나는 공주의 어깨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잘 어울리네요.”

옷을 다 갈아 입은 것을 확인한 공주가 나를 보며 그렇게 말했다.
나는 공주의 말에 알렌과 내 옷을 번갈아가며 바라보기 시작했다.
어쩐지 알렌의 옷이 내 옷보다 조금 더 좋아 보였던 것이다.

“….왜 이 녀석 옷이 더 좋아 보이죠?”
“당연하죠. 알렌이 입은 건 시종장의 옷이고, 당신이 입은  시종 옷이니까.”

공주는 내 질문에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그렇게 대답했다.
나는 이를 빠득 갈며, 공주를 바라봤다.
애초에 알렌과 나는 옷의 사이즈 자체가 달랐다.
그렇기에 딱히 공주가 준비해 온 옷을 확인도 하지 않고 크기에 맞춰 나눠 입은 것이었다.
그럼에도 알렌의 몸에 맞는 옷이 시종장의 것이고, 나는 시종의 옷이었던 것에는 공주의 의도가 깔려 있음이 분명했다.

“히히. 왕국 시종장도 괜찮네요. 이런 좋은 옷도 입고.”

알렌은 시종장의 옷이 마음에 들었는지, 몸을 움직이며 그렇게 말했다.
어쩐지 그 모습에 열이 뻗쳤기에, 나는 다시금 알렌의 뒤통수를 후려치려 했다.
하지만 알렌도 한 번 당하지, 두 번을 당할 성격은 아니었다.
재빠르게 내 손을 피한 알렌은 나를 향해 짐짓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헛! 어디 감히 시종장의 몸을!!”
“…..미쳤냐?”

나는 알렌을 보며 그렇게 물었고, 알렌은 내가 화도 내지 못할 정도로 해맑게 웃기만 할 뿐이었다.
장난을 친 것에 죽자고 달려드는 것도 추잡한 일이라고 생각한 나는 한숨을 푹 쉬고는 공주를 향해 물었다.

“이제 어쩔 생각입니까?”
“어쩌긴 뭘 어째요? 이시디나 왕국에서 제가 못 갈 곳은 없다구요.”

공주는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는 당당히 성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나와 알렌은 서로의 얼굴을 보다 다시 공주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먼저 앞서 간 공주가 흘끗 우리를 돌아보는 것이 보였다.

“뭘 그리 꾸물대는 것이냐!”

공주는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나와 알렌에게 그렇게 외쳤다.
그녀의 목소리에, 다른 곳을 바라보던 성문 앞 병사들이 이쪽을 주시하는 것이 보였다.

‘이거였구나!’

나는 장난끼가 가득한 공주의 표정을 보고는 그녀의 속셈을 눈치챘지만, 이미 돌이키기엔 너무 멀리 온 상황이었다.

“예이. 갑니다. 공주 마마!”

알렌은 허리까지 굽실거리며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멋지게 소화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은근히 웃고 있는 것이, 지금 이 상황 자체를 즐기고 있는 듯 보였다.

“네 놈은 귀까지 먹은 것이냐!”

공주가 나를 보며 그렇게 소리쳤다.
나는 황당한 표정으로 그런 공주를 바라봤지만, 이내 그녀의 뒤에서 이쪽을 경계하듯 바라보는 병사들을 살피고는 그 표정을 감출 수밖에 없었다.

“죄, 죄송합니다.”

나는 공주에게 허리를 숙이며, 그렇게 그녀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자존심이 아주 살짝 상하기는 했지만, 상대의 신분은 어차피 공주였다.
이 정도의 예의는 차려주지 못할 것도 없었던 것이다.

“이런 멍청한!”

공주가 뒤늦게 다가온 내 정강이를 걷어차며, 짜증을 부렸다.
물론 차는 시늉만을 했기에 그리 아픈 것은 아니었지만, 상대가 나를 놀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도 당할  밖에 없다는 것이 조금 약이 오르기는 했다.

“…..죄송, 합니다.”

나는 어금니를 꽉 깨물고는 공주를 향해 그렇게 말했고, 공주는 병사들 몰래 내 귀에 속삭이듯 이렇게 말했다.

“알죠? 이거 다 작전인 거?”

작전이라기엔 심하게 즐기는 것처럼 보였지만, 나는 그냥 이 순간은 공주가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기로 했다.

**

“그쪽이 공주님이시라고?”

공주의 예상과는 달리 그녀가  들어가는 곳은 꽤 있을 듯 보였다.
자신만만했던 그녀의 모습이 무색할 정도로, 루케른의 병사들은 공주를 심드렁한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당장 비키라고 말 했을 텐데요?”
“어이. 우리가 당신이 공주라는 것을 어떻게 믿지? 그리고, 그 공주가 지금 같은 시기에 왕성을 비우고 왜 여기에 와 있다는 말이야?”

자존심이 상한 공주는 막무가내로  안으로 밀고 들어가려 했고, 병사는 창을 뻗어 공주의 몸을 막았다.
그  끝이 묘하게 공주의 가슴 부위를 찌르는 것이 거슬리기는 했지만, 나는 일단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이 무례한 놈들이!!!”

하지만 내가 간과한 것이 있었으니, 여기엔 공주와 나 말고도 다른 놈이 하나 더 있었다는 것이다.
알렌은 자신의 역할에 한껏 몰입한 것처럼, 병사들을 향해 고함을 질러댔다.
목에 핏대를 세우고 방방 뛰는 그 모습이 진짜로 왕국의 시종장처럼 보일 지경.
오죽했으면, 심드렁한 얼굴로 공주를 보던 병사들마저도 설마 하는 표정으로 나와 일행을 다시 살피기 시작했다.

“네 놈들이 죽고 싶은 게냐! 감히 공주님에게 이런 무례를 끼치다니!!!”
“….그렇게 말해도 공주라는 증거가 없잖소?”

발악을 하는 알렌의 모습에 병사 중 하나가 그를 말리며 그렇게 말했다.

“증거?  분이 공주님 그 자체이신데, 무슨 증거가 필요하다는 말이냐!!”

알렌은 자신을 말리는 병사의 멱살을 잡으며 그렇게 소리쳤고, 덕분에 주위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병사들이 알렌을 제압하기 위해 움직였다.
하지만 알렌은 왕국의 기사들을 한참 상회하는 실력을 지니고 있었고, 당연히 병사들 따위가 그를 상대할 수는 없었다.

“무슨 소란이냐!!”

결국  앞에서 일어난 난동에, 병사들 보다 신분이 높은 이가 나타났다.
하급 병사들 따위야 공주의 얼굴을 모르는 것이 당연했지만, 병사들을 부리는 이 정도 되면 어떻게든 공주의 얼굴을 본 적이 있었던 모양.

“고, 공주님?”

뒤늦게 나타난 책임자는 공주를 보자마자 눈을 크게 뜨고는 그렇게 소리쳤다.
그  한마디에 상황은 역전되기 시작했다.
알렌에게 일방적으로 밀리던 병사들은 곧 바로 바닥에 무릎을 꿇었고, 창대로 공주를 희롱하던 병사는 자신의 죽음을 직감하고는 오줌을 지리기까지 했다.

“하아, 도대체 병사들 교육을 어떻게 시키는 겁니까?”

공주가 책임자를 향해 그렇게 따졌고, 책임자는 송구한 표정으로 공주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물론 그가 그런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공주에게 만이었다.
잠시동안 병사들을 노려보는 그의 눈에는 짙은 살기가 흐르고 있었으니까.

“그, 그것보다 갑자기 이곳에는 무슨 일로…?”
“교황을 뵙고자 나섰습니다.”
“교황 성하를요?”

공주의 말에 성의 출입을 책임지는 남자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그렇게 되물었다.
누누이 말했다시피 왕성과 교단의 사이는 최악을 달리는 중이었다.
가뜩이나 전쟁이 터진 상황에, 공주가 교황을 찾아왔다는 것은 그리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안에 말씀은 전하겠습니다만, 무슨 일이신지 여쭈어도 될까요?”

공주의 눈치를 살핀 책임자가 그렇게 질문을 던졌다.
특별히 데메테르 교단에 신앙심이 강한 이들을 뽑는다더니, 그 또한 왕궁에 대한 충성보다는 교황에게 더욱 충성을 하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당신에게 그런 일까지 설명해야 합니까?”

공주의 말에 책임자는 다시 고개를 조아리며, 근처에 있는 병사 하나를 불러 안 쪽에 소식을 전하도록 했다.
교황의 허락이 떨어지기 전에는 공주를 안으로 들일 수 없다는 듯한 행동이었지만, 그렇다고 공주를 성 앞에 그냥 세워둘 수도 없는 일.

“괜찮으시다면, 제 집무실에서 잠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공주 또한 그것이 남자가 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호의라는 것을 알기에, 남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상황을 정리하는 것과 동시에 성문 근처에 있는 자신의 집무실로 우리를 안내했다.

**

“공주 전하를 뵙습니다.”

집무실에서 기다린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자, 집무실로 사제 복을 입은 남자가 찾아왔다.
남자는 공주를 발견하자 마자 머리를 숙여 예를 표했고, 나와 알렌은 그런 남자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는 중이었다.
공주의 작전대로라면, 그가 우리를 교단의 최심부로 인도해 줄 것이었다.

“교황께 말씀은 전해졌습니까?”

공주는 다짜고짜 사제를 향해 그렇게 물었다.
경어를 사용하기는 했지만, 절대로 자신을 낮추지 않는 공주를 보면서도 사제는 은은한 미소를 유지하고 있었다.

“성하께서 공주님의 요청을 허하셨습니다. 저를 따라 오시죠.”

사제는 공주에게 그렇게 말하고는, 도성의 출입 관리를 맡은 남자에게 슬쩍 눈치를 줬다.
뭔가 미묘한 느낌이 둘 사이에 흐르는 것 같았지만, 아직은 아무것도 확실치 않은 상황.
내가 공주를 따라 나서려 하자, 사제의 눈빛을 받은 남자가 나를 붙잡기 시작했다.

“자, 두 분은 저와 여기서 대화나 나누시죠.”
“뭐라? 감히 우리를 공주 마마와 떨어뜨려 놓으려는 것이냐!”

알렌이 불쾌한 표정으로 남자를 보며 소리쳤다.
나는 이제는 완벽한  명의 시종장이 된 알렌을 보며 속으로 혀를 차는 중이었다.
원래부터 정상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는 놈이었지만, 보면 볼수록 이상한 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교단 내에 사소한 문제가 있어 외부의 출입을 금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공주 전하야 특별하신 분이니, 성하께서 따로 만남을 허하신 거지요. 죄송하지만 두 분은 이곳에서 잠시 머물러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공주께서도 이 상황이 불편하시다면 다음을 기약하셔야 할 겁니다.”

짜증을 부리는 알렌을 보며, 결국 사제가 나서서 그렇게 상황을 설명했다.
중요한 것은 사제가 언급한 내부 문제라는 것은 성녀의 일일 가능성이 높았다.

‘확실히 뭔가 있군.’

상황을 관망하던 나는 그렇게 판단하고는 알렌의 어깨를 붙잡았다.
당장 알렌이 떼를 쓴다고 어떻게 상황이 바뀌지 않을 것인 이상에는, 여기서 물러나 기회를 노리는 편이  나았으니까.

“잠시 뒤로…”

짝-.
나는 순간 따귀가 얼얼해지는 것을 느꼈다.
내가 잊고 있었던 것은 알렌은 시종장이고, 나는 현재 시종의 입장이라는 것이었다.
시종 주제에 시종장을 말리는 것은 언어도단.
내가 나서자 집무실 내부의 분위기가 묘해졌고, 그 분위기를 느낀 알렌은 그대로 내 뺨을 갈긴 것이었다.

‘….이 새끼. 이거  프로 감정이 실려 있는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