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29화 〉근묵자흑 (129/158)



〈 129화 〉근묵자흑

순간, 주위가 정적에 휩싸였다.
아무리 신분제가 분명한 세상이라지만, 공주 앞에서 드잡이 질을 하는 것이 보기 좋은 일은 아니었으니까.

“큼.….가시지요. 공주님.”

민망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 사제가 공주를 향해 그렇게 말했다.
공주 또한 당황한 것은 마찬가지인지, 사제를 따라 빠르게 자리를 벗어나는 것이 보였다.
나는 잔뜩 화가 난 눈으로 알렌을 노려봤다.
아무리 위기 상황이라고는 하나, 갑자기 뺨을 얻어맞고 기분이 좋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알렌은 눈치가 없는 것인지, 날 향해 표정으로 뭔가를 열심히 설명하는 중이었다.

“…그, 아무리 그래도 뺨까지 때리시는 건.”
“내가 이 놈을 어떻게 다루든, 신경 쓰지 마시오!”

알렌은 뻘쭘한 표정으로 말을 걸어오는 성문 책임자에게 그렇게 말했다.
성문 책임자가 안쓰러운 눈으로 나를 보는 순간, 나는  고개를 숙였다.
마음 같아서야 다 뒤집어 엎고 싶었지만, 그러면 진짜로 괜히 얻어 터진 셈이 되니까.
나는 화를 꾹 억누르며, 연기를 시작했다.

“저…화장실은 어디 있습니까?”

당장이라도 눈물을 쏟을 거 같은 내 표정에, 책임자가 턱 끝으로 한 쪽을 가리키는 것이 보였다.

“이 순간에도 똥이 마려운 것이냐! 이 쓸모 없는 놈, 네 놈은 진정 똥 만드는 기계로구나!”

완전히 시종장 역할에 몰입한 알렌이 나를 향해 그렇게 소리쳤다.
이가 빠드득 갈렸지만, 나는 화를 억누르며 책임자가 알려준 화장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다행히 화장실은 책임자가 쓰는 집무실 밖에 있었고, 나는 감시가 소홀해진 틈을 타서  몸에 투명화 마법을 걸었다.

‘알렌, 두고 보자.’

일단은 넘어갔지만, 나는 알렌에게 피의 복수를 맹세하며 교단의 중심부를 향해 나아갔다.

**

“그래서, 성녀를 처리한단 소리야?”
“쉿! 조용히 하라니까. 아직 이 일이 밝혀져서는 안돼.”

교황이 머무는 곳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어차피 루케른은 데메테르 교단을 위해 세워진 도시나 다름 없었고, 그 중앙에 있는 가장 화려한 건물이 바로 교황의 거처였으니까.
물론 거기엔 교황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수많은 데메테르 교의 사제들과 성기사들이 업무를 보는 공간이었고, 나는 한참을 돌아다닌 끝에 성녀에 대한 단서를 잡을 수 있었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 법이지.’

나는 몸을 감춘 상태로, 주위를 살피며 비밀 이야기를 하는 사제들을 바라봤다.
입고 있는 복장으로 보아 그리 높은 신분으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원래 이런 일은 현장에서 일하는 밑바닥 인사들이 더욱  알고 있는 법이었다.

“도대체 왜? 성녀 성격이 좀 그렇다고는 하지만 지금껏 아무 문제도 없지 않았는가?”
“나야 모르지. 교황 성하가 그렇게 결정하신 일이니까. 아마, 며칠 안에 성녀의 죽음이 발표가 날 거야.”
“….벌써 죽은 건 아니고?”

이야기가 심각해지자, 사제 하나가 소식을 물고  사제에게 그렇게 물었다.

“아직은….”
“봤다고? 자네가?”
“그럼. 내가 근무하는 곳이 어딘지 모르는가? 교황청의 죄인은 다 지하 감옥으로 보내지지.”

대답을 한 것은 성녀에 대한 소식을 먼저 꺼낸 이가 아니었다.
그저 불편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사제 하나가 망설이다 자신이 알고 있는 성녀의 소식을 꺼내 놓은 것이었다.
나는 성녀가 지하감옥에 갇혀 있다는 말에 눈에 불똥이 튀는 기분이었다.
첫 만남은 그리 좋지 못했지만, 어쨌거나 성녀와는 이런 저런 식으로 정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성녀는 잘 있던가?”
“말도 하지 말게. 지하 감옥에는 처음 들어가 보는 데, 세상에 그리 잔인한 곳도 없을 거야. 인세에 지옥이 있다면, 아마 거기겠지.”
“허. 교황청 내부에 지옥이라.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린지.”
“이번 교황 성하가 즉위하고 난 뒤에는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일이 없지 않은가?”

누군가 던진 말에 사제들이 교황에 대한 불만을 하나 둘 털어 놓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나는 단 한가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거 아주 씹새끼네?’

이번 교황이 무척이나 정치적으로 움직이는 인간이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밑에 있는 사제들의 입에서 나온 교황의 이야기는 그야말로 최악의 인간을 묘사하고 있었다.

“말 조심들 하게. 그러다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수도 있어.”
“참, 어쩌다 우리 교단이 이렇게 변했는지. 여신님도 슬퍼하실 거야.”

결국 보다 못한 사제 하나가 그렇게 말했고, 사제들 중 누군가 그렇게 대화를 끝냈다.
누군가 다가오자 사제들은 재빨리 흩어졌고, 나는 그 중에 지하 감옥에 근무한다는 사제를 쫓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예상대로 사제가 향한 곳은 교단 내부의 후미진 곳이었고, 나는 철창으로 가로막힌 지하실의 입구를 확인하고는 사제의 머리에 마력을 쏟아 부어 그를 기절시켰다.

“누구…? 어엇?”

사제가 쓰러지는 소리를 들은 것인지 지하 감옥에서 기사 하나가 나오는 것이 보였다.
기사는 바닥에 쓰러진 사제를 보고 다급히 다가왔고, 나는 그 옆에 기다리다 기사에게 다시 슬립 마법을 걸었다.
바닥에 쓰러진 두 남자를 내버려 둔 나는 빠르게 지하 감옥 안으로 들어갔다.
음습한 공기가 느껴졌고, 문 앞에 앉아 있던 다른 기사와 마주했다.

“누구냐!”

낯선 이의 등장에 기사가 검을 빼어드는 것이 보였지만, 나는 여유롭게 기사를 향해 마법을 쏘아 보냈다.

“슬립!”

꽤나 거리가 떨어져 있었지만, 8서클에 오른 것 때문인지 기사는 내 마법에 별다른 반항조차 하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성녀여! 대답해라. 어디에 있지?

지하 감옥은 꽤나 깊고 넓어 보였고, 나는 그 넓은 공간을 향해 마력을 흘리며 성녀에게 전음을 보내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소란에 감옥 안의 죄수들이 나를 향해 구해달라 소리치며 손을 흔드는 것이 보였다.
순식간에 감옥 입구가 소란스러워졌지만, 감옥 밖으로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이미 마법을 발동해 놓은 상황이었다.
나는 성녀의 대답이 없는 것에 불안함을 느끼며, 조금씩 감옥 안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감옥의 깊은 곳으로 향할수록 나는 이상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감옥 초입의 죄수들은 살려달라고 울부짖었지만, 안으로 들어갈수록 죄수들의 상태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는 벽을 향해 기도를 하고 있었고, 또 어떤 이는 나를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여보게, 잠시   보지.”

그 순간, 감옥 깊은 곳에 있는 죄수  하나가 점잖은 목소리로 나를 바라보며 말을 걸어왔다.
내 성격대로라면 그냥 무시하고 지나가야 옳았지만, 죄수의 목소리가 너무나도 따스했기에 나는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는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지?”
“혹시, 무슨 연유로 이 곳에 들어온 지 알려줄 수 있겠나?”

남자는 나를 보며 그렇게 물었다.
갇혀 있던 시간이 오래됐기 때문인지, 머리는 산발을 하고 있었고 몸에서 자연스러운 악취가 풍겨 나왔지만 남자의  눈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맑았다.
어차피 성녀의 정확한 위치를 알지 못하는 나는 남자를 향해 오히려 질문을 던졌다.

“혹시, 최근에 성녀가 이 쪽으로 들어오지 않았나?”
“아! 그 아이 말인가? 들어왔지. 근데 자네는 그 아이의 친구인가, 아니면 적인가?”

남자는 나를 보며 느긋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남자의 태도에 나는 호기심을 느꼈다.

“친구야. 구하러 왔어.”
“그렇군, 내 그럴 것 같았어. 여신님이 그 아이를 그렇게 버려둘 리 없으니까.”

남자는 혼자 뭔가를 납득한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렇게 혼잣말을 했다.
내가 가만히 자신을 쳐다보고 있자, 남자가 아차 싶은 표정으로 나에게 말했다.

“그 아이는 저 쪽의 제일 안쪽 끝 방에 있네. 부탁이네만, 그 아이를 꼭 구해줬으면 좋겠군.”

나는 남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나 자신도 풀어달라는 말을 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남자는 그 말을 끝으로 용건이 끝났다는 것처럼 몸을 돌려 앉았다.
나는 남자의 인상착의를 머리속에 집어 넣고는 그가 알려준 방향으로 향했다.
감옥 안을 지키는 인원은 입구의 기사 둘이 전부였는지, 더는 방해꾼이 나타나지 않는 상황.
나는 조금씩 안쪽으로 향하는 걸음에 속도를 높였고, 이내 빠르게 감옥 안을 달리기 시작했다.

**

“그래, 무슨 일로 저를 뵙자고 하셨죠?”

공주는 능글거리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교황의 모습에 표정을 굳혔다.
이미 몇 번이나 마주한 얼굴이었지만, 도저히 눈 앞의 남자의 얼굴은 적응이 되지 않았다.
인자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남자의 눈은 뱀처럼 기분 나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전쟁이 끝났다는 것을 알리러 왔습니다.”

공주는 교황을 향해 그렇게 말했다.
어떻게든 성 안으로 들어왔으니, 공주가  일은 교황을 붙들어 시간을 끄는 것이었다.
아마도 나머지 일은 ‘그’가 어떻게든 해 줄 테니까.

“호오? 전쟁이요? 그거 기쁜 소식이군요.”

교황은 공주를 보며, 그렇게 말했다.
왕실과 사이가 나쁘다고는 하나, 데메테르 교 또한 이시디나 왕국에 자리를 잡고 있는 이상에는 전쟁이 반가울 수는 없었다.
전장에서 신도들이 죽어나가는 문제를 떠나서, 당장 그 아르카 왕국은 종교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소식을 전하려 저를 보자고 하신 겁니까?”

교황은 의심이 가득한 눈으로 공주를 보며 그렇게 물었다.
전쟁이 끝난 것은 꽤나 중요한 소식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공주가 직접 찾아올 정도의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공주는 자신을 향해 의심을 드러내는 교황을 보며 가볍게 침을 삼켰다.
어설픈 거짓말을  바에는 차라리 진실을 드러내는 것이 편했다.
어차피 자신이 할 일은 시간을 끄는 것 뿐이라면, 어느 정도의 진실은 흘려도 문제가 없을 듯 했다.

“사실은 성녀에 대해 여쭈러 왔습니다.”
“성녀요?”

교황은 의외라는 표정으로 공주를 바라봤다.
그녀가 성녀와 같은 아카데미에 다니고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둘 사이에 어떤 친분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왕실과 교단의 사이를 생각하면,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네. 구금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교단의 일입니다. 아무리 공주님이라고 해도, 이런 문제까지 관여하시는 것은 조금 불편하군요.”

교황은 공주를 보며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시간을 끌어야 하는 공주로서는 어떻게든 대화를 이어나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왕실의 공주로서 관여를 하겠다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친분이 있는 사이로서 그녀의 일이 궁금했을 뿐입니다.”
“….친분이라, 공주와 성녀가요?”

교황은 생각지도 못한 공주의 말에 호기심을 드러내며 그렇게 말했다.
공주는 교황의 시선이 야릇하게 변하는 것을 느끼며, 입술을  깨물었다.
이미 왕실의 정보를 통해 교황이 어떤 취향을 가지고 있는지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생각만해도 기분이 나쁜 일이었지만, 지금 교황의 시선을 붙잡아 두기 위해서는 그 방법 밖에는 없었다.

“네. 그녀와 저는 서로를 애정하고 있습니다.”
“호오?”

공주의 말에 교황의 눈빛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그랬다.
공주가 왕실의 정보망을 통해 알게  교황의 비밀스러운 취향은 여성들간의 동성애였다.
데메테르 교의 사제들은 과반수 이상이 남자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여자 사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교황은 그런 여자 사제들을 자신의 개인적인 공간으로 불러들이는 일이 잦았다.
그것도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을 동시에 불러들이는 일이 많았기에 왕실은 처음 교황이 여자를 취하는 것에 미쳐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랜 조사 끝에 드러난 정황은 정말 놀라운 것이었다.
교황이 여성들끼리 서로 성애를 나누는 모습을 보는 것을 즐긴다는 것이었다.
정말로 보는 것만을 즐기는 것뿐인지, 교황은 여자 사제들에게 정말로 손끝 하나 대지 않고 바라만 볼 뿐이라고 했다.

“두 분이 어쩌나 그런 사이가 된 겁니까?”

교황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공주를 바라보며 그렇게 물었다.
그의 시선이 뱀처럼 공주의 전신을 훑고 지나가기 시작했다.
공주는  시선이 몸서리가 처질 정도로 끔찍하게 느껴졌지만, 시간을 끌기 위해 적당히 교황이 듣고 싶어할만한 이야기를 해주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원래 애정과 증오는  끗 차이입니다. 생각하시는 것처럼 성녀님과 제가 처음부터 친했던 것은 아니었죠. 하지만 같은 반에서 자주 부딪치다 보니, 어느새 정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성녀님은 꽤나 매력적인 여성이니까요.”
“으음? 그런가요? 계속 이야기를  보시죠.”

교황이 갑자기 자신의 고간을 주물거리며, 공주를 보채기 시작했다.
공주는 그 모습이 무척이나 역겹게 느껴졌지만, 지금은 달리 방도가 없었다.

“그러니까,  날은 성녀님이 갑자기 제 집무실에 들이닥쳤습니다.”

공주는 기분이 더러워지는 것을 느끼면서도, 성녀와 자신의 연애사를 지어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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