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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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전장에서 뵙겠습니다.”
아로하는 나를 보며 비장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어젯밤 일 때문인지, 그녀는 그 표정을 길게 유지하지 못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마자, 황급히 고개를 돌려 버린 것이다.
‘하긴, 진짜 엄청나기는 했지.’
나는 아로하의 그런 반응에 전날 밤 있었던 일을 회상했다.
아로하와 끝내자, 하얀이가 달라 붙었고, 그런 하얀이를 상대하고 있는 사이, 다시 아로하가 눈치를 보며 나를 기다리는 일이 반복됐다.
덕분에, 아로하의 얼굴이 조금 피곤해 보였지만, 다른 엘프들은 눈치를 채지 못한 듯 싶었다.
‘으음…나머지 애들도 한 번씩은 해야 하는데.’
나는 아로하의 주변에 서 있는 엘프들을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하나 하나가 다 놓치기 아까운 미녀들.
더욱이 어제 세계수 사건 때문인지, 여자 엘프들이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호감이 가득했다.
마음 같아서야 엘프 마을에 몇 날 며칠이고 눌러 앉고 싶었지만, 마침 드워프 족장 그렌달에게 맡겨 놓은 보물들이 완성될 타이밍이었다.
나는 졸린듯 눈을 비비고 있는 하얀이의 손을 붙잡고는 포탈을 열었다.
포탈이 생성되자, 카룬이 빠르게 하얀이의 반대쪽에 달라 붙었다.
“그럼, 또 보지.”
나는 아로하와 엘프들에게 그렇게 말하고는 포탈로 들어섰다.
**
“…이젠 뭐 놀랍지도 않네요.”
갑자기 내가 나타나자, 성녀가 나를 보며 그렇게 말했다.
내가 곧장 드워프 마을이 아닌, 여관으로 온 이유는 한 가지.
하얀이가 꽤나 피곤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하얀아, 집에서 좀 쉬고 있어.”
나는 하얀이를 향해 그렇게 말했고, 하얀이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그런 하얀이의 모습을 지켜보다, 다시 포탈을 열려던 그 순간.
성녀가 내 팔을 다급히 붙잡는 것이 보였다.
“왜…?”
“이전에 매일 도착할 거라는 사람이 안 왔어요.”
성녀는 나를 향해 불안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나 또한 성녀의 말에 놀라기는 마찬가지.
“며칠이나요?”
“그저께부터요.”
나는 성녀의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아르카 왕국에서 이틀이나 사람이 도착하지 않았다는 것은, 뭔가 문제가 있다는 소리나 다름 없었던 것이다.
나는 드워프 마을로 향하는 대신, 곧장 아르카를 향해 포탈을 열었다.
포탈의 문이 열리고, 익숙한 얼굴이 나를 바라보는 것이 보였다.
“본 님?”
상대는 바로 아르카에서 만났던 죠닌이었다.
나는 죠닌을 확인하자마자, 주위를 살폈다.
아직까지는 왕성이 무사해 보이긴 했지만, 어딘가 침울한 분위기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 그게….마왕이 부활했습니다.”
죠닌은 나를 향해 그렇게 말했다.
현자의 돌이 그렇게나 경고했던 일이 실제로 벌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마왕의 부활씩이나 되는 이벤트를 겪은 것 치고는 아르카 왕성의 상태는 썩 괜찮아 보였다.
“아, 아직 제대로 전투가 벌어진 것은 아닙니다. 그저, 국경선 쪽에 몬스터들이 모일 뿐이에요.”
실력 좋은 상인답게, 죠닌은 빠르게 내 의문을 눈치채고는 답을 내 놓았다.
“부활은 어떻게 알게 된 겁니까?”
“마왕의 수하가 찾아왔어요. 항복하라고.”
나는 죠닌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왕씩이나 되는 놈이 항복 의사를 묻는 것을 보면 꽤나 점잖은 놈이구나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사람은 왜 안 보낸 거죠?”
나는 다시 한 번 죠닌을 향해 의심스러운 눈길을 보냈다.
생각보다 아르카 왕국의 상태는 나쁘지 않았고, 전령 하나를 보내는 것에 그리 큰 문제가 없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아니, 죠닌의 말들이 사실이라면 이미 아르카가 마왕과 어떤 협상을 끝냈을 수도 있었다.
“그, 그게…”
내 말에 죠닌은 조금 난감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확실히 뭔가 걸리는 것이 있는 표정.
나는 굳어진 표정으로 죠닌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죠닌은 내 질문에 대답을 하는 대신, 나를 왕성 안에 있는 감옥으로 안내했다.
“결국 이렇게 된 건가?”
나는 감옥에 갇혀 있는 아르카의 국왕을 보며 그렇게 말했다.
대충의 상황은 짐작이 갔다.
아마도 아르카 국왕은 마왕군의 제안을 받아들이려 했을 것이었고, 죠닌은 그런 아르카 국왕을 막은 것이리라.
그리고, 내 예상 그대로의 설명이 죠닌의 입에서 펼쳐졌다.
“수고가 많았군요.”
나는 그간의 일을 요약해서 설명한 죠닌을 향해 그렇게 말했다.
아닌 게 아니라, 진짜로 기대 이상으로 일을 잘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모두가 불안해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언제까지 제가 억누를 수 있을 지…”
죠닌이 자신도 불안하다는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하긴, 일개 상인에 불과한 그가, 국왕을 억류해 둔 것만 해도 엄청난 일을 해 낸 것이라고 볼 수 있었다.
“걱정 할 것 없습니다.”
“그럼, 여기에 계시는 겁니까?”
내 말에 죠닌은 반색하며 그렇게 물었다.
당장, 자신을 지킬 무력이나 세력이 없다 보니 내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로서는 드워프 마을이나 다른 곳들을 들려야 했기에, 계속 아르카 왕국에 머무를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뭐, 굳이 내가 없어도 되겠지.’
나는 죠닌의 말에 고개를 저으며, 내 옆에 딱 달라 붙어 있는 카룬의 등을 밀었다.
“이 아이가 제 대신 도와드릴 겁니다.”
“예?”
죠닌은 내 말에, 의구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카룬을 바라봤다.
하지만 카룬과 눈을 마주친 죠닌은, 놀란 표정으로 말을 더듬거리기 시작했다.
“설마…..”
“맞아요. 드래곤입니다.”
**
아르카에 카룬을 남겨둔 나는,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물론, 바쁘게 움직인다고 해봐야, 포탈이 있었기에 실제로는 하루 안에 대륙을 횡단할 정도였다.
가장 먼저 드워프 마을에 들린 후에 완성된 무기를 되찾았고, 드워프들에게 참전을 요구했다.
엘프 마을에도 들려 아르카의 상황을 알렸고, 엘프들이나 드워프들 모두 아르카에 병력을 보내기로 약속했다.
이 종족들에게 참전을 약속받은 나는 인간들이 세운 나라들에서 병력을 지원받기 위해 움직였고, 이미 나와 깊은 관계를 맺은 이시디나 왕국은 곧바로 아르카에 지원군을 보내겠다고 했다.
혼자서는 마왕과 맞설 힘이 없는 다른 왕국들도 사정은 그렇게 다르지 않았고, 그들 또한 아르카로 파병을 시작했다.
‘문제는 황제였지.’
제국의 황제는 내 예상대로 꽤나 오만하고 음험한 놈이었는데, 놈은 내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마왕과 맞서는 것은 제국이 알아서 할 일이니, 참견하지 말라는 것이 황제의 대답이었다.
나는 결국 황제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주기로 결심했다.
물론, 황제 측근의 병사들이 나를 제압하기 위해 덤벼들었지만, 이미 9서클에 오른 나에게는 상대가 되지 못했다.
결국, 황제는 내 손에 잡혔고 그는 오줌까지 지려가며 나에게 무조건 적인 협력을 약속했다.
그렇게 나는 짧은 시간 안에 대륙의 모든 세력에게 협력을 얻을 수 있었다.
“아아, 저기도 이제 도착하는 군.”
전쟁터가 가장 익숙한 트리샤는, 아르카 왕국의 국경선에 몰려든 타국의 병사들을 보며 그렇게 말했다.
트리샤 뿐 아니라, 마탑의 로잘린 또한 전장으로 왔으며, 미네로바 공주는 직접 이시디나 왕국군을 이끌고 참전한 상태였다.
물론, 그녀의 수호기사인 실비아 또한 미네로바 공주의 옆에 딱 붙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세라 성녀와 하얀이, 그리고 샬롯까지 내 주변에 포진해 있었는데, 거의 최종 결전이다 보니 싸움에 도움이 될만한 인물은 하나도 빠짐 없이 전선으로 향한 탓이었다.
알렌은 샬롯이 참전하는 것에 의아함을 표했지만, 이미 뱀파이어의 피를 받아들인 샬롯은 웬만한 기사보다 더 민첩하고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이렇게 모아 놓고 보니까, 엄청나긴 하네.’
나는 전장에 모여든 여자들을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나와 몸을 섞은 여자 대부분이 전장에 나와있었고, 유일하게 이곳에서 볼 수 없는 것은 여급뿐이었다.
여급은 예전처럼 밥이라도 할 테니 따라가게 해달라고 말했지만, 나는 아무런 힘도 능력도 없는 그녀를 전장에 끌고 올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하얀이 또한 걱정되는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최소한 하얀이는 스스로의 몸을 지킬 힘이 있었기에 합류를 허락했던 것이다.
“기다리고 있으면, 금방 돌아올게.”
나는 여관에 혼자 남게 된 여급을 향해 그렇게 약속했다.
마치 버림이라도 받은 것처럼 여급의 얼굴은 슬퍼 보였지만, 그래도 전장에서 죽는 것 보다는 훨씬 그 편이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마왕군은, 아직인가요?”
미네로바 공주는 실비아와 함께 나에게 다가와 그렇게 물었다.
어쩌다 보니, 내가 연합군의 지휘자 역할을 맡게 되었기에 나에게 그런 질문을 던진 것이었다.
“네. 아직 움직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상한 것은 아르카 왕국 주변으로 몬스터들이 몰려 들기는 했지만, 아직 공격을 시작해 오진 않았다는 것이었다.
내가 아무리 포탈을 이용해 대륙을 빠르게 모았다고 해도, 그 군대들이 이동하는 것에는 시간이 걸리기 마련이었다.
그러니까 그 사이 마왕 군이 공격을 해왔다면, 각개 격파를 당할 수도 있는 상황.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왕 군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마치, 인간들과 이종족들의 군대가 한 군데 모이는 것을 기다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움, 움직입니다!”
그렇게 내가 공주와 말을 하는 사이, 마왕군의 동태를 확인하던 병사 하나가 나에게 달려와 급보를 전했다.
공교롭게도 마지막 병력까지 전선에 배치를 하자 마자, 마왕군이 총 공세를 펼쳐 온 것이었다.
“모두, 살아 남아요.”
나는 내 주변에 모여 있는 여자들을 향해 그렇게 말했다.
하얀이와 데이나 정도를 제외하고는 모두 한 세력을 이끌거나, 그 세력의 중요 인물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나는 빠르게 자신들의 위치로 달려가는 여자들을 보며, 마력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헬 파이어!”
멀리서 달려들던 몬스터 군단의 앞에 불길한 검은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거대한 검은 화염은 내 모든 마력을 다 갉아 먹을 정도로 빠르게 적들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앞서 달려오던 몬스터들의 끔찍한 비명 소리가 전장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적어도, 이 정도면 날카로움은 꺾였겠지.’
나는 마력이 텅텅 비는 것을 느끼며, 전장을 바라봤다.
갑작스러운 마왕군의 공격에 당황하던 연합군들이, 그 짧은 순간 전열을 가다듬는 것이 보였다.
생각지도 못한 대규모 마법에 당황한 마왕군은 잠시 멈췄다가, 검은 불길이 사그라드는 것을 보며 다시 진격하기 시작했다.
“괜찮아요?”
“아저씨!”
내가 비틀거리는 것을 본 하얀이와 데이나가 다급히 내 곁으로 다가와 나를 부축했다.
마력이 한 번에 다 빠져나간 탈력감에 잠시 어지러움을 느끼기는 했어도, 그 빈자리에는 마력이 다시 빠르게 차오르는 중이었다.
-카룬!
나는 그런 마왕군을 보며, 카룬에게 다급히 전음을 보냈다.
순간, 하늘에 나타난 거대한 용이 마왕군을 향해 불길을 내뿜는 것이 보였다.
드래곤 브레스.
카룬은 어째서인지 그걸 쓰는 것에 거부감을 보였지만, 결국 내 말에 따라 적들을 향해 브레스를 날렸다.
검은 화염이 쓸고 간 자리에, 다시 붉은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으아아아!! 돌격! 돌격하라!”
“드래곤도 우리 편이다!!”
실시간으로 몬스터들이 녹는 것을 지켜보며 용기를 충전한 연합군이 적들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연합군은 용맹하게 몬스터들을 도륙내며 전선을 밀어 붙이기 시작했다.
헬 파이어와, 드래곤 브레스에 맞아 전열이 붕괴된 몬스터들은 속절없이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물론 개중에는 거대한 덩치의 몬스터들이 연합군의 병사들을 쳐 죽이는 상황도 펼쳐지는 중이었다.
“…..가자.”
어느 정도 마력을 회복한 것을 확인한 나는 데이나와 하얀이를 향해 그렇게 말했다.
가장 소중한 것은 내 주변의 사람들이었지만, 전장에 나선 다른 이들의 목숨 또한 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나는 연합군 병사들을 한 명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그리고 마왕 군을 하나라도 더 죽이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내 옆을 지키는 하얀이의 손에서 나온 검은 마력 창이 적들을 향해 쏟아졌다.
데이나 또한 불의 정령을 소환해 마왕 군의 몬스터들을 공격하는 중이었다.
“…..블리자드!”
나는 다시 한 번, 범위 마법을 발사했다.
겨우 차오른 마력이 다시 급격하게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전장의 한 부분에 난데 없이 얼음 폭풍이 만들어진 것이었다.
한 쪽에는 불의 정령이, 다른 쪽에서는 드래곤이 뿜어 낸 불길이, 그리고 전장의 가운데는 눈보라가 치는 상황.
그 사이에서 인간과 드워프, 엘프가 힘을 합쳐 몬스터들과 피를 흘리며 싸우는 중이었다.
그야말로 최종 결전이라는 말에 어울리는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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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마무리 가야죠.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