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화 〉 제 1화. 빨래 당하다. (4)
* * *
이세계. 즉 내가 소환당한 이 세계는 대대로 마왕과 용사가 존재했고, 마왕은 대륙 정벌을 용사는 마왕 퇴치란 사명을 안고 역사를 반복해 왔다고 한다.
그리고 반복되는 마왕들의 패배 속에 마왕군은 결국 용사를 무찌를 하나의 방법으로 여자 마왕과 함께 마왕군 전체를 여자 몬스터들로 채워버렸다.
결국, 용사를 연속해서 퇴치하는 데 성공했고, 인간들은 연이은 용사의 사망으로 인하여 여자 마왕에겐 남자 용사가 안 된다는 생각을 했고, 이번에 소환된 여자 용사에 의해 마왕성이 박살 나고 마왕과 간부진 그리고 부하들 대부분이 중상을 입은 채로 마왕성에서 멀리 떨어진 지하 미궁으로 도망쳤다고 한다.
“그러니까 날 소환하고 싸다... 아니 나를 때린 사람이 네 언니라고?”
“응. 맞아. 마왕군 간부 중 하나야.”
순간 내 기억을 다시금 뒤적거려 봤다.
지금 내 앞에 자신의 이름이 에슬리 라고 밝힌 푸른 액체의 슬라임 퀸과 나를 소환했던 백옥 피부에 붉은 뿔의 악마와는 자매라고 생각하기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응. 그렇구나.”
친자매가 아닐 거야. 그냥 아는 언니 정도 혹은 몬스터끼리 뭐 친한 동네 언니 정도 되겠지.
“흐응. 뭔가 반응이 좀 시원치 않은데. 한 발 더 뽑고 나면 좀 더 빠릿빠릿해지려나?”
그 말에 두 손으로 똘똘이를 가렸다.
아악! 이 괴물 같은!
아, 괴물 맞지?...
“흐응. 뭐, 일단 뽑는다고 해도 내 아이들한테 양보해야 할 거 같고...”
그녀의 말에 갑자기 내 뒤를 받쳐주던 슬라임들이 격하게 부들거리기 시작했다.
그만해. 애들아. 무섭다...
"일단은 정말 쉬는게 좋겠네."
어느새 다가와 내 똘똘이를 가린 두 손을 붙잡고 젖히더니 90도로 인사하고 있는 똘똘이를 손가락으로 툭 건들듯 때려주고 나서는 몸을 돌렸다.
물론 방금 터치로 내 똘똘이가 살아나진 않았고, 내 뒤에 있던 슬라임들의 진동도 멎었다.
이 녀석들도 내가 더 이상 기운이 없다는 걸 눈치 챈 것 같았다.
마치 군부대에 아이돌이 위문공연을 온다고 해서 커다란 운동장 안에 빼곡이 장병들이 모여서 환호성을 지르는데 뜬금없이 남자 아이돌이 무대에 올라오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랄까?
그런 복합적으로 실망스러운 느낌이 물씬 풍겨져 나오는 슬라임들을 베고 슬슬 몰려오는 수마에 그대로 눈을 감았다.
꿈에서 깼다. 이세계로 가서 성고문을 당하는 꿈이었지만, 확실한 건 지금은 로또를 맞은지 이틀이 된 월요일이란 사실이었다.
당첨금을 수령받기 위해 서대문역으로 향했다. 목적지가 지금 사는 집에서 가까웠기에 별로 해맬것 없이 잘찾아 들어갔다.
몰래 당첨금을 수령받았다. 세금을 떼고 내 주거래 은행으로 옮긴 1등 금액이 거의 40억에 달했다. 1등이 3명이 나왔는데 그 중 한명이 나였다.
몰래 은행을 빠져나와 택시를 잡았다. 그리고 계획한대로 명동 백화점에서 명품을 사 입고, 핸드폰을 최신 기종으로 바꾼 뒤.
친한 친구들에게 연락을 싹 돌렸다. 밥 먹자. 놀자. 여행가자.
연락을 뿌린 뒤에 근처 유명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했다. 보통이라면 예약을 해야 들어갈 수 있는 곳이지만 좌석을 비싼곳으로 잡으니 예약이 필요없이 바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레스토랑의 첫 코스 요리로는 스프가 나왔다. 푸른 액체로 된 스프였는데, 뭔가 무색무취에다가 깨물었더니 탱글탱글한 식감에 잘 씹히지도 않았다.
어째서일까?
어째서지?
왜 내 입에 슬라임이 물려 있는 걸까?
심지어 내 입에 일부가 물린 채 푸른 액체에 둥둥 떠 있는 두 눈동자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다.
일단 내 입에서 슬라임을 빼냈다.
"음..."
꿈이라고 믿었는데, 꿈이 현실이었고, 현실이 꿈이었다. 젠장!
보이는 풍경이 동굴 안이라서 그런지 이 곳에서 얼마나 긴 시간이 흘렀고, 잠은 얼마나 잔 것인지,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 도무지 알 방법이 없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잠들기 전과 달리 지금은 굉장히 몸이 가볍다는 사실과 배가 고프다는 점이었다.
"배고픈데..."
주위를 둘러보니 잠이 들었는지 미동도 없이 축 늘어진 슬라임들과 거대한 미녀 슬라임인 에슬리가 벽에 기대 잠들어 있는 모습이 보였다.
도망치려면 지금이 기회인가? 아니 그보다 도망치면 살 수 있을까?
잠들기전 에슬리가 말했던 것에 의하면 이 지하미궁은 99층까지 있고, 제일 밑에층에 중상을 입은 마왕이 그리고 층층마다 서로 다른 몬스터들을 배치 해놓았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덤으로 여기가 몇층인지는 말해주지 않았다. 그러니 실수로 다른층으로 올라가거나 내려갔을 때 지금 같이 럭키섹스 같은 경우보다는 인간 말살이라는 목표아래 살해 당할 위험이 더 컸다.
[이름:김지호]
[종족:인간]
[레벨:2]
[나이:32]
[직업:종마]
[스탯 힘 5 체력 15 민첩 5 지능 5 지혜 5 운 999]
체력이 전부 회복되어 있다. 이제 사정을 최대 7번까지 할 수 있고 체력이 1이 남는단 소리였다. 휴. 정말이지. 판타스틱 하구만.
서서히 몸을 일으켜세우자 내 밑에 깔려있던 슬라임들이 잠에서 깬 듯 내가 편하게 일어설 수 있도록 몸을 밀어주었다.
"고맙다. 얘들아."
자리에서 일어나 슬라임들에게 말하자, 주변 슬라임들이 "삐. 삐." 거리며 방방 뛰었다.
이거 기쁘다는 의사표현이겠지?
말이 안통하니까 좀 불편하긴 하네.
"하암."
길게 하품을 하고 나서 맨발로 동굴 바닥을 걷다보니 주변에 깨어난 슬라임들이 모여서 내 뒤로 줄지어 붙었다.
깔깔. 이런 귀여운 놈들.
줄줄이 슬라임을 달고 나서 동굴 주위를 둘러보다가 결국 위로 올라가는 계단과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음..."
내 뒤에 슬라임들이 따라올까? 따라온다면 같이 가면 위험은 적어질 거 같은데.
그리고 내겐 운 999가 있잖아? 만약 다른층에 갔다가 위험하면 바로 튀면 튈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체력도 15나 되니까. 음.
좀 전에 일어났을때는 겁부터 났는데, 지금 이렇게 내 뒤에 슬라임들이 받쳐주니까 뭔가 자신감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오오..."
그러다가 내 시원한 아랫도리를 깨닫고서 뭔가 낮부끄러워졌다.
뭔가 걸칠거라도 있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아무리 몬스터들 밖에 없다지만 나체로 돌아다니면서 똘똘이를 자랑하고 다니는 변태같은 취미는 없었다.
"혹시 애들아. 아빠가 걸칠만한 거 없을까?"
뒤로 돌아서 덩치 순별로 예쁘게 줄을 서 있는 슬라임들을 보면서 묻자, 그 중 제일 앞, 내 바로 앞에 있던 슬라임이 슬쩍 몸을 들어올려서 머리 모양을 만들더니 갸웃갸웃 흔들었다.
"흠 어쩌지?"
잠시 고민하다가 뭐 어쩔 수 없지. 란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게 생각해보니 몬스터들은 대부분 벗고 다니잖아? 그게 아니더라도 어제 봤던 마왕 간부도 거의 헐벗고 다녔고...
으... 잠시 기억을 떠올리다 보니 그 백옥 빛깔의 풍만한 가슴골이 생각났다.
시발. 나중에 강해지면 반드시 이겨서 따먹어주마.
의욕이 앞서자 계단앞에 다다르는 걸음도 당당해졌다.
"99층의 지하 미궁이랬으니까. 여기서 나가면 역시 올라가야겠지?"
당당한 보무로 윗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라섰다.
그리고 당연하다는듯이 내 뒤로 슬라임들도 줄지어 따라 올라오기 시작했다.
위층 계단으로 오르면서 느낀거지만 바닥이 동굴 바닥임에도 발바닥이 더러워지는 일은 없었다. 원인은 알 수 없겠지만, 덕분에 발바닥이 다치거나 더러운 이물질 같은 것이 묻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툭. 툭.
나선형으로 이루어진 계단을 뚜벅뚜벅 오르다보니 뒤에서 흐물흐물해진 몸으로 열심히 계단을 따라 오르는 슬라임들이 보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저 푸른 액체만 보아도 무섭고 두려웠는데, 저런 모습을 보니 의외로 귀엽다는 감정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 본 에슬리도 귀엽긴 했지. 물론 귀엽다기 보다는 미녀에다가 풍만한 몸매가 제법이었지만 말이다.
"큼. 큼."
헛기침을 하면서 계단을 계속해서 오르다 보니 어느새 뻥 뚫린 공간이 나타났다.
방금전 내가 있었던 슬라임 동굴보다 몇 배는 더 커보이는 공간. 천장의 높이도 거의 고층 아파트 높이 정도였고, 좌우로 펼쳐진 공간은 거의 끝이 모르게 펼쳐져 있었다.
물론 배경자체가 동굴이라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그 중 특이한 것은 이 넓은 공간에 수 없이 많은 형광 버섯들이 자라나 있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흔히 아는 식용버섯부터 시작해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버섯들까지. 크기도 제각기였고, 균집도 제멋대로였다.
저거 먹을 수 있는 걸까?
아침을 굶은 탓인가 신선한 버섯들을 보니, 평소 버섯을 싫어하던 나조차 저 신선한 버섯이 너무나도 탐스럽게 보였다.
불이 있으면 뽑아도 구워 먹을텐데.
버섯 숲? 이라고 할 수 있는 동굴 안으로 들어서자, 바닥이 딱딱한 돌에서 축축한 흙바닥으로 바뀌었다.
"스읍."
상쾌한 공기가 폐를 관통해 온몸을 후레쉬하게 훑고 지나간다.
하아. 어제 능욕 당했던 장기들이 깨끗하게 청소되는 느낌이다.
"좋아."
산뜻한 마음으로 버섯 밭을 향해 좀더 가까이 다가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