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1화 〉 제 4화. 스트리머 에실리.
* * *
잠시 에실리의 말에 뭐라고 대답을 해주어야 할까 싶었는데, 잠시 침묵을 하고 있으니 에실리가 나를 올려다보며 입술을 조물조물거렸다.
"지금이라도 아빠를 만날 수 있어서 너무 좋아."
에실리가 다시 한번 얼굴을 내 가슴팍에 문지른다.
그러면서 반짝반짝이는 천사링이 코를 두드리는데, 아프거나 하진 않고 오히려 천사링이 내 코를 관통하면서 코를 비롯한 안면이 파스를 뿌린 것처럼 시원하면서 얼얼해지더니 곧 상쾌함이 느껴졌다.
으... 시원한데. 뭔가 가슴팍에 느껴지는 에실리의 약간 서늘한 체온까지 느껴지니까 오히려 더 껴안아 주고 싶다고 해야 하나?
자연스럽게 에실리의 몸을 가까이 끌어당긴 후에 머리를 쓰윽 쓰윽 쓰다듬어 보았다.
마치 말캉거리는 젤리가 내 손바닥에 의해 밀려나가듯이 쓸려나가는 머리 모양.
슬라임이다 보니 금새 흐트러진 머리카락은 원형을 찾아가듯이 제자리를 찾아가는데, 그 모양이 인간과 달라 신기해보였다.
그나저나 아르데나와 하고 난 뒤라서 그런지 몸이 좀 나른하네?
일단 어느정도 정력은 회복 된 것 같지만 말이야. 그렇다고 당장에 사용할 수 있냐? 라는 건 또 좀 그랬다.
뭐라고 해야할까? 현자타임과는 또 다른 느낌이랄까? 허하다는 느낌과는 또 다르다.
뭐, 어쨌거나 당장에 쓸 일은 없으니까.
천천히 에실리의 머리를 쓰다듬다보니, 어느새 빨간색 져지로 갈아입은 보미가 눈 앞에 다가와 있었다.
인간처럼 변한 하나나, 그저 천사링만 생기고 원래의 색인 푸른색 슬라임의 몸과 달리, 각성하면서 몸이 붉은색으로 변한 보미.
마치 옛날에 먹었던 딸기맛 젤리 같이 생긴 모습으로 변해 있었는데, 빨간색 져지까지 입으니까 뭔가 진짜 리얼 레드 같네.
"아빠. 나 이세계 와서 강해졌어!"
그러면서 주먹을 만들더니 허공에 슉 슉 하고 내지르다가 마지막에는 깔끔하게 돌려차기까지 한다.
"그러니까 아빠를 괴롭히는 놈들은 내가 혼내 줄 거야."
콧김까지 후 후 내 뱉으면서 깔끔하게 마무리 자세를 마친 보미가 그대로 내게 다가와 소파 옆에 앉았다.
"그래. 그래."
이게 딸내미들 자랑하는 걸 보는 아빠의 심정이랄까?
나 대신 싸워주겠다는 보미의 의젓한 모습을 보다가 이내 이번엔 과일모듬을 거대한 쟁반접시에 담아온 하나의 모습에 방긋 웃어주었다.
그러고 보니 미궁에서는 제대로 된 식사나 과일을 먹어본 적이 없다. 그 흔한 물 조차 없어서 처음에는 버섯만 먹었으니까.
"아빠. 여기요."
하나가 내미는 쟁반접시를 받아들자, 곧 왼편에 하나가 바짝 붙어 앉았다.
"앗."
그러더니 앞에서 의기양양하게 서 있던 보미가 재빠르게 오른편에 와서 앉았다.
"아빠. 과일은 어떤 거 좋아해요?"
하나가 이쑤시개를 들어서 온갖 과일들이 늘어선 쟁반접시 위에 손을 올렸다.
그러고 보니 나는 지구에 있을 때 어떤 과일을 좋아했더라? 너무 오랫동안 남의 기억속에서 머문 탓이었을까?
사실 방금 먹었던 사과 또한 무슨 맛이라고 생각하기 이전에 목구멍을 빠르게 넘어가 버렸다.
아니 사실 과일을 먹어서 맛을 느낀다는 행위 자체가 내게 필요한 걸까? 그 보다 중요한 것들이 많은데.
"아빠?"
쓸데 없는 생각이 길어서였을까? 스윽 내 쪽으로 얼굴을 내민 하나가 고개를 살짝 기울여보인다.
보미나 에실리와 다르게 인간의 모습을 완전히 따라한 하나는 정말이지 TV에서나 나올 법한 유명 아이돌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태어난 기간을 따지자면 하나나 보미, 에실리도 2살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슬라임은 애초에 정해진 수명이 없는 존재이기도 하고, 태어날 때 부터 본체인 에슬리에게서 분열되어 나온 아이들인 만큼 삶에 필요한 지식을 전반적으로 깨닫은 채 태어났다.
거기에 에슬리가 슬라임에게 꼭 필요한 생존 지식들을 주입한 것 같은데, 그 덕분에 지구에서도 완벽하게 적응하여 잘 살고 있었던 것 같다.
슬쩍 보미 쪽을 바라보았다가 다시 과일이 담긴 쟁반접시를 바라보았다.
"딸기. 딸기가 먹고 싶네."
그 말에 하나가 방긋 웃어보인다.
그리고 곧 이쑤시개로 거대한 사랑니처럼 생긴 딸기 위를 콕 집어서 내 입술 앞에 내밀었다.
먹여 주겠다는 의도가 가득했기에 입을 아, 하고 벌리자 곧 신선한 딸기가 입안 한가득 들어찼다.
사과 때와 다르게 맛을 느껴보겠다는 생각으로 혀와 이빨을 천천히 움직이며, 딸기 한가운데를 콱 깨물었다.
곧 입 안 가득 터지는 딸기향과 동시에 달달한 과즙이 입 안을 점령한다.
말 그대로 달달하네.
어금니로 천천히 딸기를 씹다 보니 어느새 또 다른 딸기를 이쑤시개로 꽂은 하나가 내 입술 앞에 가져다 대고 있었다.
"나도. 아빠한테 줄 거야."
내 품에 안겨 있던 에실리가 그런 하나의 손에 들려 있던 이쑤시개를 강탈하자, 하나가 스윽 냉랭한 눈빛으로 에실리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살짝 움찔했던 에실리가 나를 보더니 용기를 내면서 빼앗은 딸기를 내 입술에 내밀었다.
"아빠. 아~!"
"그래. 아."
에실리의 입모양을 따라 입을 벌려서 딸기를 덥썩 물자, 끽해야 초등학생정도 되어보이는 외모의 에실리가 순수하게 방긋 방긋 웃는다.
그러고 보니 딸기 맛을 떠나서 이 아이들이 어떻게 2년 동안 지구에서 지냈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물론 여동생이 대충 간추려서 말해준 것도 있지만, 정확히 무엇을 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생활 해 왔는지가 궁금했다.
"음... 에실리. 아빠가 지구에 올 때 동안 뭐하고 지냈니?"
딸기를 오물오물 씹으면서 묻자, 에실리가 밝은 얼굴로 내 허벅지 위에 옆으로 돌아 앉으며 나를 올려다 보았다.
"아빠. 그러니까 에실리는 우움... 그러니까 방송을 하고 있어. 그리구 언니들이랑 사냥도 다녀... 그리구... 이거 봐라."
그러면서 조막만한 손을 내 쪽으로 내밀더니 그 손바닥 위에 푸른색의 액체가 서서히 고여들기 시작했다.
"이거 바르면 다 나아."
그러면서 내 볼에 손바닥을 가져다대더니 이내 볼을 비롯해서 턱까지 골고루 액체를 문질러 바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이거... 에슬리가 사용하던 액체 포션 같은 거겠지? 다만 에슬리는 이렇게 액체 상태로 만들어서 바르는 것이 아니라 신체 일부를 몸 안에 삼키는 식으로 치유 했던 것 같은데.
액체를 포션화 시켰던 것은 루루와 야리의 연금술로 만든 합작품이 나오고 나서부터였다.
근데 그런 과정을 전부 패스하고 스스로 치료할 수 있는 액체를 만들어내다니.
놀란 표정으로 에실리를 바라보자 뿌듯한 얼굴의 에실리가 내 볼을 사정없이 주무르면서 방긋 웃고 있다.
"아빠. 나는 엄청 강해."
갑자기 오른쪽팔이 주욱 당겨지는 느낌과 동시에 보미가 내 팔을 잡아 당기는 모습이 보였다.
완력으로 치자면 그래... 사린 보다 조금 못한 정도랄까?
참고로 미궁에서 만났던 아가씨들 중에 가장 완력이 쌨던 것은 미노타우르스 걸 자매인 아우라스와 아우렌.
그 다음이 듀라한이었던 세라자드, 라미아였던 요네. 그 다음이 아마 사린 정도일 것이다.
한마디로 전위로 싸울 수 있는 이들 중에서도 가장 아래...
참고로 에슬리는 완력으로는 힘을 구별하기 어려워서 제한 상태였다.
뭐라고 할까? 구분 자체가 미궁을 기준으로 하다 보니 뭐랄까? 엄청 기대치가 낮아지는 느낌인데.
내가 용사였을 때 사린의 괴력을 보고 기겁을 했던 것을 떠올리면 분명 여기서는 어마어마한 수준의 완력이 틀림 없을텐데.
잠시 내가 이세계에 와서 만났던 정부의 요원들과 형사, 그리고 협회장의 수준을 생각해 보았다.
협회장의 실력을 직접 본 것은 아니었으나, 느껴지는 마나의 양을 보면 일단 여기에 있는 내 딸들이나 여동생보다 훨씬 많은 양이었다.
일단 내 세 딸들중에 가장 마나가 많은 것은 하나, 그리고 에실리, 보미, 여동생 순이었다.
여동생이 마나가 있다는 것도 조금 놀라웠지만 내 딸들 보다 못하다니... 나중에 이유를 꼭 물어봐야 할 것 같았다.
잠시간의 운전 뒤에 다시금 내 집에 도착했다.
그때까지 잠시동안 메타쨩은 내 핸드폰에서 나오지 않았는데, 에실리의 말로는 현재 방송시간중이라 아마 안나타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나저나 나를 서포트 해준다면서 방송이라니...
집에 도착하자마자 곧장 나는 에실리의 손에 이끌려서 에실리의 방으로 들어왔다.
원래는 내가 쓰던 컴퓨터방인데, 분위기상 다시 빼서서 쓰는 건 어렵겠지.
그러다 문득 내 통장에 들어 있는 돈이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이제 돈도 많아졌는데, 빌라보다 전원주택이나 신식 아파트로 이사가는 게 낫겠지?
잠시 머릿속에서 옛날에 부자들이나 살 거라고 생각했던 아파트나 고급빌라들이 생각났다.
일단은...
미궁에 있던 아가씨들을 생각하면 미궁에서 사는 것도 나쁘지 않나 싶었다가 이내 생각을 바꾸었다.
미궁은 듣기로 던전으로 소환이 된다고 했다.
던전에 대해서 다시 한번 자세히 알아봐야겠지만, 확실한 것은 몬스터라는 새로운 존재들이 던전안에서 무한으로 등장한다는 것이었고.
그것은 기존에 미궁에 있던 몬스터 아가씨들이나 부하들과도 또 다른 개념의 존재들이라고 했다.
그래서 간혹 던전이 나타나면 그 곳에 원래 살고 있던 던전 주민이나 몬스터들과 던전으로 인해 생겨나는 몬스터들끼리 서로 싸우는 경우도 일어난다고 했는데.
절반 정도는 기존에 있던 던전의 주민이나 몬스터들 밑으로 흡수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니까 내가 아는 미궁의 아가씨들이라면 글쎄?
성격이나 생활패턴이 전부 제각기인 아가씨들이라 어떻게 될지는 전혀 예측하기 어려운데?
근데 확실한 건 만약 자신을 닮은 몬스터들이 생겨난다고 했을 때 가장 그것을 좋아하며 받아들일 두 아가씨가 떠올랐다.
아이린과 사린.
둘 다 이제는 자신 빼고는 동족이 남지 않은 아가씨들이었다. 이 둘이라면 자신을 닮은 몬스터가 나타났을 때 분명 자신의 밑으로 받아들일게 분명했다.
근데 여기서 문제는 그 이후란 말인데...
이 곳의 시스템은 일단 메타버스가 구축하고 활용하는 중이라는 것은 알았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을 만든 것은 안드레아고.
그러면 대체 지금 이 곳에 소환되면서 던전이 되고 몬스터가 나타나는 이 괴상한 현상은 누구 때문에 벌어지는 일일까?
"아빠! 나 방송 할 거야! 뒤에서 잘 지켜 봐야 돼?"
어느새 컴퓨터 부팅을 마친 에실리가 뒤로 휙 돌아서며 내게 말해 왔다.
푸른색의 육체에 핑크색 원피스를 입고, 얼굴 옆면을 거의 다 덮는 거대한 헤드셋을 착용한 에실리의 모습에 순간 어질했다.
슬라임이 해드셋을 끼고 컴퓨터로 방송을 한다니... 그럴 거라고 생각은 했었는데, 실제로 방송을 하려는 모습을 보니 뭔가 너무나 이질적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