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4화 〉 제 8화. 헌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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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내가 로또 1등을 맞고, 이세계로 빨려 들어가기 전까지는 헌터라는 직업 같은 건 없었다.
물론 소설이나 만화에서 나올 법한 이런 이 능력이나 다른 종족들도 마찬가지고 말이다.
"이쪽으로 와서 아빠랑 손 좀 잡아볼래?"
라고 하자마자 빛보다 빠르게 다가와 내 왼손과 오른손을 붙잡는 하나와 보미.
그리고 내 옆에 앉아서 만드라고라를 만지작거리던 에실리가 약간 어벙한 표정으로 닭 쫓던 개 지붕 올려다보듯이 이미 주인을 차지한 내 두 손을 번갈아 본다.
그러다가 슬쩍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과 동시에 나는 에실리 쪽으로 머리를 숙여 에실리의 이마에 내 이마를 맞댔다.
심상 세계에 진입하자, 나와 함께 내 세 딸이 동시에 심상 세계에 진입하는 것이 느껴졌다.
평소보다도 훨씬 넓어진 저택의 로비. 그리고 그 커다란 로비 한편에 린이 손을 흔들며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알몸이 아니라 검은 사제복처럼 보이는 펑퍼짐한 로브를 입고 있는 모양새.
그리고 저택 로비 중앙에 있던 튤립 봉오리도 사라진 것이 보였다.
마치 거대한 연무장처럼 변한 저택 로비에 나를 따라 심상 세계로 들어온 세 딸의 모습이 보였다.
"여기는 내 딸들."
내 간단한 설명에 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어. 여기서 너의 시야로 뭘 하는지 볼 수 있으니까."
린이 그렇게 말하면서 내 쪽으로 다가왔다.
동시에 여기가 어디인지 연신 시선을 둘러보는 내 세 딸들의 향해 입을 열었다.
"저기 오는 사람은..."
순간 설명을 하려다 보니 말문이 막혔다.
내 말에 그제야 이쪽으로 다가오는 린을 확인한 내 딸들이 내 말을 기다렸다.
그러고 보니 뭐라고 설명해야하지? 엄마의 친구? 아니면 또 다른 엄마?... 라고 해야 하나?
아, 생각해 보니 나 상황에 휩쓸리기만 해서 뭔가 제대로 정리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아빠가 되었지만 진짜 아빠라는 것이 솔직히 현실적으로 막 와 닿지는 않는다.
거기에 더 불어 현실적으로 무언가 결정을 내려야 할 상황이 오니 머리가 마비가 오는 것 같았다.
역시...
여기서 확실하게 정하고 넘어가야 할 일이 있었다.
지금까지 나와 관계를 맺은 이들을 연인이라고 할 수나 있을 정도의 개념인 상태로 현 상태를 이어갈 것인가.
아니면 모든 것을 인정하고 확실하게 내 가족 내 마누라로 인정하고 넘어갈 것인가.
권능이나 상황에 휩쓸려 여기까지 오게 되었지만, 생각해 보면 이제는 진짜 결정을 내릴 때였다.
권능 조차 이것을 가족으로 인정하고 있었고, 나 또한 에슬리를 통해 아이들을 갖게 되었을 때부터 어림직하게 짐작은 하고 있었다.
다만 내가 각오가 되지 않았을 뿐.
그리고 나는 지금부터 현실적으로 모든 것을 인정하기로 했다.
물론 이는 지구. 즉 한국이라는 법 자체에 모든 것이 어긋나는 관행이기도 했지만. 뭐 어떠랴?
인간이 아니기도하고, 앞으로 내가 벌일 일들이 법적으로 허락 되는 그런 개념의 것도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내 존재 자체가 거의 신에 가까워진 반신인데. 그런 인간의 허울 따위는 이제 버릴 때도 되긴 했지.
인정할 건 인정하고 넘어가자.
그 순간 내 권능이 무언가 강렬하게 내게 의사를 표하는 것이 느껴졌는데, 그것이 나쁜 것보다 좋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너희들 엄마인 에슬리와는 또 다른 엄마란다."
말하고 나니 뭔가 좀 이상한데? 그러고 보니 나와 관계를 맺은 마누라들의 순서나 서열 정리 같은 것도 한 번 하긴 해야겠구나.
순서로 따지면 에슬리가 첫 번째가 맞긴 한데. 그렇다고 관계를 맺은 순서대로 서열을 정하는 게 맞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건 모두를 모아 놓고 나서 다시 한번 이야기해 봐야겠다.
"또 다른 엄마?"
에실리가 처음 의문을 표하고, 하나와 보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생각해 보니 에실리와 하나, 보미. 셋 다 미궁에 있을 적에 린의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아이린이나 루루, 세라자드, 사린 까지는 본적 있겠지만.
그러고 보니 아라아라와 그아라. 그리고 아우렌과 아우라스도 못 봤겠구나.
잠깐. 야리나 마미앙. 요네 같은 라미아들도 못 봤으려나?
생각해 보니 관계를 맺은 마누라들이 너무 많은 것 같은데?
순간 등골이 오싹하면서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
미노타우로스 걸들과 했던 약속과 더불어 알들을 품고 있던 수많은 라미아들이 떠올랐다.
"김지호. 또 쓸데없는 걱정하고 있구나?"
어느새 내 앞까지 다가온 린이 내 복부에 가볍게 주먹을 먹이면서 말했다.
"이 나쁜 놈 같으니."
직접 이렇게 원래의 모습을 되 찾은 린과 침대 외에서 만나는 건 또 처음이었기에 뭔가 좀 신선했다.
어느새 댕기 머리처럼 묶은 붉은 머리로 내게 볼싸대기를 때린 린이 고개를 휙 돌린 상태로 내 세 딸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너희구나. 에슬리의 아이들이."
뭔가 조금 분해 보이는 표정이 보였으나, 금세 사라지고 귀여운 생명체를 바라보듯이 따뜻하게 웃기 시작한 린이 딸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여자 관계가 복잡한 아빠를 둬서 앞으로 고민이겠지만, 이 세계는 약육강식이란다. 너희들이 강해져서 아빠를 독차지하면..."
갑자기 쓸데없는 이야기를 내뱉기 시작하는 린에게 급하게 다가가 입을 틀어막았다.
"웁... 웁..."
린을 끌고 저택 구석으로 가서 입을 틀어막았던 손을 거뒀다.
"왜 애들한테 쓸데없는 소리를 해?"
"뭐가? 다 애들한테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이야기인데?"
처음에는 장난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 외로 진지한 얼굴로 내 말에 대꾸하는 린을 보면서 순간 위화감이 들었다.
"설마. 김지호. 너 아직도 아이들을 인간의 시점에서 바라보고 있는 거야?"
그 말에 순간 내가 린에게서 느끼던 위화감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김지호. 얘들은 인간이 아니라 마족이야. 물론 근원을 따지자면 몬스터에 가까운 마족이겠지만, 하여튼 인간과는 생리부터 가치관까지 모든 것이 다른 아이들이라고."
생각해 보니 그랬지.
내가 너무 인간답게 행동하는 그녀들이나 나를 대하는 방식을 보고 그녀들이 인간에 가깝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녀들은 엄연히 인간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녀들과 관계를 통해 태어난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반은 인간의 피가 흐르고 있겠지만.
딱 보아도 에실리나, 보미, 하나는 인간이 아니라 슬라임의 생김새를 갖고 있었고, 인간처럼 행동하고 있었지만, 간혹 인간과는 다른 행동을 보여 줄 때도 있었다.
내가 인간답게 행동하니 인간처럼 대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 린은 그런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게 뭐 어때서?"
"뭐?"
"이 애들은 내 애들이야. 내 피가 섞였고. 그러니까 아빠인 내가 인간이니, 인간의 방식대로 키운다는 게 뭐가 잘못인데?"
"너... 그게. 무슨 말인지 알아?"
"알지."
린도 한때는 인간이었다. 과거를 보았기에 알 수 있지만, 그녀는 인간이면서 신을 믿던 건실한 신앙인이었다.
다만 왕국에서 그녀의 종교를 탄압했고, 청소라는 명목하에 그녀의 종교가 괴멸 직전까지 몰렸을 때 그녀를 구원해 준 것은 그녀가 믿던 신이 아니라 마신이었다.
그리고 마신은 신앙심이 투철하던 그녀를 사도로 임명하였고, 그녀는 인간세계에서 세를 불렸다.
마신은 그런 그녀를 위해 마족들을 붙여서 보호했고, 결국, 그녀는 용사에 의해 당대 마왕 토벌의 첫 번째 희생양으로 삼켜져 버렸다.
그리고 마신은 그런 그녀를 가여이 여겨 무구 안에 그녀의 영혼을 봉인하였고, 그것이 저주받은 마갑의 탄생의 기원이었다.
추후에 그런 마갑을 세라자드가 입게 된 것이었고.
그렇기에 그녀의 마음을 나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다만 이해는 이해고, 내가 생각하는 것은 그런 이해 관계를 뛰어넘을 수 있었다.
"내 애는 내가 알아서 키워. 그러니까 양육에 대한 건 신경 꺼. 어차피 네 아이도 아니잖아?"
그 말이 린의 가슴을 후벼 팔 수 있는 말이었음에도 나는 서슴지 않고 말했다.
린은 강한 여성이었으니까. 나는 그것을 믿었다.
"미친놈."
린의 욕설을 흘려들으며, 아이들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억울하면 너도 애를 낳던가."
내 말에 린이 부들부들 떠는 모습이 보였다.
아마 지금의 린의 상태라면 열 받아 하기보다는 분해할 것이다.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기에 아마도, 나에 대한 원망이나 분노 보다는 자신이 아이를 가지지 못 하는 현실을 어떻게든 극복해보려고 할 것이다.
물론 그게 가능할지 말지는 잘 모르겠지만.
가능하다면 그녀도 뭔가 변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남자는 군대를 다녀오면 변하고, 여자는 아이를 가지면 변한다고 하지 않았나.
아이들을 향해 걸어가면서 생각을 정리하고 잡념을 털어냈다.
"애들아. 여기는 아빠의 심상 세계란다."
아이들의 시선이 구석에 쪼그려 앉아 있는 린으로부터 내게 옮겨졌다.
"심상 세계요?"
하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래. 아빠가 너희들의 실력을 보기 위해 심상 세계로 불러 온 거란다."
그러면서 몸에서 신성력을 끌어올려 1층의 로비의 크기를 좀 더 넓혔다.
그러자 거의 올림픽 운동장 크기의 널따란 공간이 만들어졌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조금 과하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어차피 여기는 현실이 아니다.
순식간에 변화하는 주변의 환경에 세 딸의 눈이 휘둥그레지는 모습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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