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8화 〉 제 8화. 헌터.(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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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레아와 루산이 자신들이 살던 이세계를 파괴하기로 결심한 후.
안드레아는 남은 신들과 반신들을 몰아내기 위해 미궁에 숨어들어 여러 가지 일들을 해냈고, 그 계획에 가장 중요한 역할이던 루산은 안드레아에게 부여받은 권능을 통해.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모든 곳에 강제로 지구로 빨려 들어가는 게이트를 만들어냈다.
그 와중에 루산이 자기 세력을 크게 잃어가면서까지 게이트를 열어놓은 곳이 세계수가 있던 곳이었고.
그렇게 세계수인 샤르는 어쩔 수 없이 지구로 쫓겨났으며, 그 와중에 대부분의 신성력을 소모해 엘프와 세계수 본체 일부를 지켜내는 것에 성공했다.
다만 본체가 넘어옴과 동시에 지구에 적응을 못 한 본체는 삽시간에 시들어 버렸고, 결국 엘프들이 알던 것처럼 두 개의 어린 세계수만 살아남아, 지구와 블랙마켓 두 곳에 뿌리내리게 되었다.
물론 블랙마켓의 경우 초기 미궁의 악마들과 계약한 대로 얌전하게 지내기로 한 것을 약속을 어기고 내부에서 자신만의 구역을 선포해 엘프들을 통해 신성력을 모으고 있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였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게 엘프들을 위해서였다?"
왠지 거짓말인 것 같지만, 엘프들이 정령들을 모두 잃고 그저 활을 잘 다루는 산악인이나 다름없어졌다는 샤르의 말에 일단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네가 생각하는 대로 지구를 선점하기 위해서야."
그러니까. 안드레아와 루산은 자신들의 세계를 파괴하는 데에만 급급하여, 인간들의 신인 아르데나가 싸지른 똥을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모든 것을 지구로 몰아넣었다.
그렇기에 지금 안드레아와 루산이 지구로 보낸 용사들이 반신이 되어 지금의 지구에서 깽판을 부리고 있는 것이고.
그리고 추가로 교차검증을 통하여 역시나 메타버스가 내게 숨긴 게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는 아르데나를 다시 한번 만나서 확인해 보아야겠지만, 지금 당장 중요한 사실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사는 이 지구가 내가 알고 있는 용사들 말고도도 노리고 있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이건 메타버스 또한 모르는 사실이지만, 샤르와 비슷한 급의 존재들. 즉 준신급의 존재들이 지구로 넘어와 힘을 숨기고 있거나, 키우고 있는 중이라는 것이었다.
"미친. 완전 개 난장판이네."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 개판이나 다름없는 지구의 상태를 떠올리며 혀를 찼다.
이건 뭐 수습은커녕, 오히려 더 이상 뭔가 넘어오지 않기를 기도해야 할 정도였다.
참고로 미궁에 있는 마왕 또한 준신이기도하고, 현재 블랙마켓을 지배하는 세 명의 악마 중 한 명 또한 거의 준신에 가깝다고 말했다.
그 셋 중에서 가장 약한 것이 내가 만난 렌시아였고.
"왜 이렇게 지구를 노리는 것들이 많아."
가볍게 한탄하면서 이세계는 물론 지구에까지 질펀하게 똥을 투척시킨 아르데나와 안드레아의 얼굴이 떠올랐다.
순간 욕이 절로 나오려다가도 말았다.
어차피 욕해 봤자 달라질 것도 없고, 일단은 이렇게 된 이상 나도 그 치킨 레이스에 강제적으로 참여할 수밖에 없었다.
메타버스가 노리는 것 또한 샤르가 원하는 것과 별다를 것이 없었다.
애초에 지구에서 메타버스라는 신이 생긴 것도 조금 웃기고, 이상하다 싶었는데. 스카이넷.
그래 메타버스는 어떻게 보면 스카이넷과 비슷한 존재였다.
인간을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입맛대로 사육한다는 것만 다를 뿐.
아니 생각해 보면 신이라는 것이 어쩌면 다 그런 개념의 존재들이었지.
뭔가 나도 그런 존재가 되어 간다는데 씁쓸함이 느껴졌지만, 그렇다고 그런 이들과 결이 같은 것은 아니었다.
이세계에서 인간들의 신이었던 아르데나와 다르게 나는 진짜 순도 백 퍼센트 인간에서 신이 되어가는 존재였다.
권능이나 능력이 좀 독특할 뿐. 이 또한 창조신의 기억을 뒤져 보면 반신에서 신으로 거듭나는 순간 이러한 제약들이 사라지고 권능 또한 내 오리지날 형식으로 바뀐다.
머리 쓰는 건 별로 안 좋아하는데.
뭔가 내 반응을 기다리며 안절부절하는 샤르의 통통해 보이는 뱃살을 손등으로 가볍게 툭 툭 두들겨 주었다.
"걱정 마 더 이상 뭐, 해코지하거나 엘프들을 차별하는 그런 행위는 안 할 거니까."
내 말에 샤르가 살짝 안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물론 그 안심하는 포인트가 엘프가 아닌 자신에게 해코지를 하지 않겠다는 점에서 안심하는 것이 조금 괘씸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사나이 김지호. 한번 한 약속은 꼭 지킨다.
샤르에서 시선을 떼서 저택의 초상화들이 잔뜩 걸려 있는 벽면을 바라보았다.
벽 제일 오른쪽 끝자락에 위치한 아르데나의 초상화.
그것을 보면서 조만간 다시 아르데나를 만나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가졌다.
"오빠. 새벽에 어디 갔었다며."
"어."
심상 세계에서 빠져나오고 나서 이른 아침을 먹고 난 후에 깨어난 여동생을 데리고 우리는 오전에 예약되어 있던 사냥터로 향했다.
뻥 뚫린 운전석의 뒷모습을 보면서 가볍게 대답을 내뱉자, 잠시 차량을 정거한 것으로 보이는 여동생이 머리를 옆으로 쓰윽 빼내서 내 쪽을 바라보았다.
"어디 갔던 거야?"
"뭐 조사 좀 할 게 있어서."
블랙마켓을 갈 때 두고 갔었던 핸드폰을 신경 쓰면서 말하자, 곧 꺼져 있던 핸드폰의 액정이 제멋대로 켜지면서 그 위로 자그마한 홀로그램 창이 떠올랐다.
"맞아요! 저한테 따로 말도 없이 말이예요."
메타버스의 분신인 메타쨩이 나타나서 화가 났다는 듯이 팔짱을 끼고 볼을 부풀렸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그 귀여운 모습에 피식하고 웃겠지만, 나는 이 메타쨩의 정체를 알기 때문에 웃는 대신에 무표정하게 대응했다.
"뭐, 중요한 일은 아니고, 몇 가지 궁금한 점이 있어서 나름 혼자서 돌아다녀 본 거니까."
어쩌면 메타버스. 즉 메타쨩은 대충 내가 어디에 갔을지 예상하고 있을지 몰랐다.
왜냐하면 아무 생각 없이 핸드폰으로 블랙마켓을 검색했던 기록도 있었고, CCTV나 위성 같은 것으로 내 위치를 추적해 보았을지도 모르니.
내 말에 의미심장하게 웃는 메타쨩의 모습이 보였지만. 뭐, 거기까지가 한계겠지.
서큐버스가 있다는 뜬 소문보다는 현실적으로 블랙마켓이 그저 성인들의 놀이터 쯤으로 알고 있는 메타버스일 테니까.
그나저나 확실히 블랙마켓에 존재하는 세 명의 악마 중 한 명은 서큐버스인 렌시아였다. 그리고 아마도 나머지 둘도 서큐버스이겠지.
렌시아 이상으로 강하다는 마족이라면 내 기억상 미궁에서 존재하는 서큐버스 뿐이었으니까.
물론 내가 완벽하게 아는 것은 아니었지만, 블랙마켓이 마왕의 권능 중 일부인 것을 샤르에게 직접 들어서 알게 되었다.
정확히 무슨 권능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부의 영역을 자기 영역으로 선포하는 그런 권능이라고 들었다.
마왕 정도의 권능이면 국가 수준의 영역 선포가 가능하다고 했는데, 지금은 부상을 입고 미궁 전체에만 영역을 선포한 상태라고 했다.
그래서 내가 미궁을 나갈 수 없었던 것이고, 미궁이 각 층 마다 제각기 독자적인 환경을 갖출 수 있는 이유도 되었다.
더욱이 마지막에 게이트가 미궁을 삼킬 때 각 층마다 하나씩 삼켜나가던 것도 마왕의 권능 때문에 그랬던 것 같다.
대화가 끊기자, 곧 메타쨩의 홀로그램 창이 사라지며 핸드폰의 액정이 꺼졌다.
조금 귀찮긴 해도 메타버스의 의심을 피하려면 어쩔 수 없이 핸드폰을 가지고 다녀야 한다.
일단 나와 엮여 있는 이들은 내 심상 세계로 불러서 언질이 가능하니 상관없는데...
순간 내 시야에 열심히 운전을 하는 여동생의 모습이 들어왔다.
뭐, 동생한테까지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지.
잠시 심상 세계로 들어갔다가 린이 자기 방에 들어가서 뭔가 만들고 있는 모습과, 저택 1층에 다시 생겨난 튤립 봉오리 안에 의욕없이 대자로 누워 있는 샤르를 확인하고선 빠져나왔다.
근데 심상 세계에서 뭔가를 만들어서 현실 세계에 구현하는 방법이라도 있나?
심상 세계는 완전히 독자적인 나만의 세계다.
현실과 이상의 경계선에 있는 세계랄까?
이제 대충 이 심상 세계라는 것이 어떻게 쓰는 것인지, 그리고 어떤 목적을 갖고 생성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현재 내가 용사였을 적에 가지고 있던 상태창은 심상 세계라는 안에 묶여 있는 상태였다.
그렇기에 상상의 세계라고 할 수도 있는 이 심상 세계에서 권능을 이용해 상태창에 능력 같은 것을 현실로 투영시킬 수 있는 것이었고.
그렇지 않은 것은 투영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만약 내가 심상 세계에서 열심히 수련을 한다 치자, 그럼 그건 현실에 반영이 되지 않는다.
다만 수련을 했던 기억이나 감각은 상태창을 통해 권능으로써 불러올 수 있다.
그러니까 이게 무슨 말이냐면. 심상 세계에서 상태창이 관여 할 수 있는 것은 현실 세계로 불러올 수 있지만.
반대로 상태창에서 할 수 없는 것은 권능으로도 불러온거나 투영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상태창과 권능으로 묶여 있는 저 초상화의 능력. 즉 나와 관계를 맺은 이들을 이곳 심상 세계에 불러오거나 능력을 빌려 올 수 있는 것은 가능하나.
반대로 그녀들의 육체를 이곳에 불러오거나, 반대로 이곳에서 변화시킨 무언가를 가지고 나갈 수는 없다는 말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지금껏 이 심상 세계에 있던 린이 이곳에서 만들어진 것들을 아무것도 이용하지 못하고, 텔레파시를 통해서 내게 하고 싶은 말을 전달하던 것도 이 심상 세계에서만 가능했던 것이었다.
그런 린이 갑자기 좀 더 다채롭게 변화된 심상 세계에서 무언가를 만드는 장면에 나는 의문을 느꼈다.
혹시 곁에 있는 마신이 무언가 수를 쓴 걸까?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에 마신은 현재 신성력도 없었고, 린이 무언가를 만드는 것을 얼핏 보았을 적에도 뭔가 내 신성력을 건드는 일이나 심상 세계에 영향이 있을 것 같은 행동을 하는 것 같진 않았다.
무언가를 만든다라는 개념이 전달되면서 정작 린이 무엇을 만드는지는 자세히 보이지 않아서 생긴 의문이었는데.
생각해 보면 내 심상 세계에 계속해서 머문다면 샤르 같이 의욕없이 드러누워 있는 상태가 오히려 정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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