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2/98)

 1화.

 1. 안녕하십니까, 팀장님

 착각이라고 생각했다. 아니면 미처 깨지 못한 꿈이든지.

 종종 무심코 스쳐 지나가던 길 한복판에서, 널 닮은 사람을 보곤 가슴이 철렁했던 적이 있으니까.

 그런 밤이면 꼭 네가 나오는, 악몽인지 뭔지 모를 꿈을 꾸며 질식할 것 같은 목을 부여잡고 잠에서 깬 적도 많았으니까.

 그러니까, 이번 역시 그런 것이라 생각했다.

 그저 묵은 기억이 토해낸 환영일 뿐이라고. 하지만.

 “다들 인사하세요.”

 인연이란 것은 대체 왜 이렇게 얄궂은지 모르겠다.

 “이쪽은 오늘부터 우리 마케팅 2팀을 담당하게 된 권도하 팀장.”

 많고 많은 재회의 방법 중 왜 하필, 이런 잔인한 방식을 택한 건지.

 “처음 뵙겠습니다, 팀장 권도하입니다.”

 예의도 갖추지 못하고 무참히 끝냈던 너와의 인연을, 꼭 이렇게 이어야만 했었던 건지.

 널 보자마자 흔들리고 만 내 눈과 마찬가지로, 날 보자마자 굳어버리는 너의 안면을 보며.

 나는··· 이 재회가 분명 우리 둘 모두에게 지독한 악몽임이 틀림없다는, 그런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다.

 * * *

 “신임 팀장님 완전 젊지 않아요?”

 탁탁, 매끄러운 엄지손톱이 바짝 오므라든 검지 밑을 초조하게 튕겨냈다.

 “젊기만 해? 난 무슨 연예인이 들어오는 줄.”

 너 나 할 것 없이 신임 팀장 얘기로 떠들썩했으나, 사람들의 말이 하나도 귀에 들어오질 않았다.

 “그러니까요. 부장님 옆에 서 있는데 후광이 똿!”

 알아봤을까. 알아본 거겠지.

 “몸은 또 어떻고. 슈트 핏이 딱 잡힌 게, 운동깨나 한 것 같지 않아?”

 알아보기엔 살짝 먼 거리였지만, 나 또한 보자마자 누군지 대번에 알아챘으니까. 못 알아봤다면, 그렇게 오랫동안 날 빤히 보고 있지도 않았을 테고.

 “몸매에 얼굴에. 덕분에 우리 마케팅팀 비쥬얼 순위도 쫙― 상승하겠는데요?”

 그럼 난,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그냥 모르는 척하는 게 나을까, 먼저 다가가 자연스럽게 인사하는 편이 나을까.

 “솔직히 남직원들 외모가 좀 아쉽긴 했지.”

 아니, 그보다도 권도하가 나에 관해 이상한 말이라도 하면 어쩌지? 하곡에서의 일을 회사 누군가에게 말해버리기라도 한다면.

 “여직원들 비쥬얼 순위야 우리 윤 대리 덕에 이미 원탑이었지만.”

 아니다. 그렇게까진 하지 않을 거야.

 다경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념을 잘라내듯 얕게 도리질을 쳤다. 그런데도 불안함은 쉽게 가시지 않고 아플 만큼 심장을 조여왔다.

 그 마음을 어떻게든 달래보려 잊고 있던 커피를 막 손에 집어 든 순간이었다.

 “안 그래, 윤 대리?”

 툭, 시답잖은 농담과 함께 다가온 누군가가 팔꿈치로 다경의 팔을 건드렸다.

 “아!”

 그 덕에 손을 이탈한 커피가 순식간에 그녀의 스커트와 블라우스로 쏟아졌다.

 “어머! 괜찮아, 자기야?”

 깜짝 놀란 송 과장이 부리나케 티슈를 뽑아 수습에 나섰다.

 그럴수록 얇은 옷감에 갈색 물이 더 깊게 스며들어 돌이킬 수 없는 흔적을 남기고 말았다.

 뒤늦게 상황 판단을 마친 다경의 얼굴 위로 낭패감이 번졌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필이면 오늘따라 입은 옷도 위아래로 죄다 연한 계열이었다.

 “어떡해. 커피 들고 있는 줄 모르고···.”

 송 과장이 어쩔 줄 몰라하며 말했다.

 “아니에요, 과장님. 제가 딴 데 정신이 좀 팔려서.”

 “괜찮으신 거 맞아요, 대리님? 흰옷이라 지금 당장 지워지지도 않을 텐데···.”

 맞은편에 있던 미애도 난감한 듯 다경을 들여다보았다.

 “아냐. 세제로 바로 문지르면 돼. 그럼 웬만한 건 다 지워지더라고.”

 “아무리 그래도.”

 “옷이야 마를 때까지 부서 티 입고 있음 되죠. 맘 쓰지 마세요, 과장님.”

 다들 곤란해하는 분위기를 갈무리 지으려 다경이 부러 쾌활하게 덧붙였다.

 “아니, 그래도 어떻게···.”

 거듭 괜찮다고 했으나 송 과장의 얼굴에선 도무지 미안한 기색이 가시질 않았다.

 따지고 보면 계속 헛생각 중이었던 제 탓이 큰데, 죄스러운 표정을 한 주변인들을 보고 있자니 다경은 공연히 더 마음이 불편했다.

 아무래도 이 옷부터 좀 어떻게 해야지.

 “죄송한데, 저 먼저 일어나 볼게요.”

 “자기 정말 괜찮겠어? 같이 갈까?”

 “아이, 괜찮다니까요. 가서 옷 갈아입고 있을 테니까 수다 조금만 더 떨고 오세요. 미애 씨도 단 거 조금만 먹고.”

 휴식시간인데도 당장에 따라나설 기세인 동료들을 향해 손을 내두르며 서둘러서 휴게실을 벗어났다.

 “하··· 미치겠네.”

 복도로 발이 닿자마자 태연을 가장하던 얼굴 위로 짙은 근심이 어렸다. 옷도 옷인데 정리되지 않는 머릿속 때문에 기분이 더 심란했다.

 엉망이 된 블라우스야 일단 있는 티로 갈아입고 퇴근 전까지 버티면 그만일 일이었다.

 하지만 엉망으로 꼬인 인연은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정말 어떡하지.’

 과부하가 걸려 뜨끈해진 이마를 짚으며 사무실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을 때였다.

 “···!”

 무심코 제 자리로 향하던 눈에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익숙한 인영이 잡혔다.

 순간 심장이 바짝 죄어들며, 두 발이 덫에 걸린 듯 멈춰 서고 말았다.

 어딘지 심란해 보이는 낯으로 문을 향해 걸어오던 상대 역시 다경을 보자마자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

 권도하였다. 엉망이 된 옷보다도 그녀를 더 심란하게 만드는 신임 팀장.

 그 또한 미처 예상치 못한 대면이었던 듯, 확장된 동공을 감싼 눈매가 흐릿하게 구겨졌다.

 ‘어떻게 하지.’

 잠시 저 깊은 곳으로 밀어두었던 마음의 소리가 다시금 가열차게 머릿속을 떠돌았다.

 쿵쿵― 뛰는 심박 음이 미처 결론에 닿지 못한 머릿속을 더욱 어지럽게 했다.

 그 사이, 서늘한 표정의 남자가 긴 다리를 뻗어 먼저 한 걸음을 좁혀왔다. 결심이 선 듯, 날 선 눈으로 그녀를 저격한 채.

 ‘대체 뭐라고···.’

 바싹 그러쥔 손안으로 어느새 땀이 고였다. 박제된 듯 그를 마주하고 있는 눈에 점차 가까워지는 거리가 보였다.

 검게 침잠한 눈과 서늘하게 잠긴 입술, 비딱하게 내리 닿는 각도로 정확히 저를 응시한 채 다가서는 낯익고도 낯선 얼굴.

 어설픈 풋내 따윈 벗어던진 짙은 사향에 그를 지척에 둔 눈앞이 아득해져 오던 순간.

 “너···.”

 꾸벅―.

 다경이 정중히 머리를 숙였다. 그와 동시에 거침없이 다가오던 상대의 발걸음 또한 한 발 앞에서 멈춰 섰다.

 간신히 사정거리를 지킨 구두 앞코가 파르르 떨리는 시야 속에서 흔들린다. 이윽고 다경이 미뤄뒀던 결론을 내리며 10년 만의 첫인사를 건네었다.

 “안녕하십니까, 팀장님.”

 창백한 침묵이 발끝을 휘돌았다. 목구멍을 타고 나온 음성이 스스로가 듣기에도 가증스러웠다.

 이런 식은 아니었던 것 같다는 후회가 물밀듯이 밀려들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재주 따윈 제게 없었으므로.

 “···.”

 외면을 가장한 인사를 끝으로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무심코 향한 눈에 한층 더 서늘해진 검은 눈동자가 잡혔다.

 남자를 피한 눈이 미끄러지듯 허공을 담는다. 그러곤 최소한의 예의를 다했다는 듯 멈춰선 상대를 지나쳐 제 자리로 걸어갔다.

 차마 그를 바로 보지 못한 다경의 눈에 푸른 힘줄이 돋아난 손등이 보였다.

 그 안에 뭔가가 담겨 있다면 필시 으스러지고 말았을 커다란 주먹.

 질끈 깨문 입 안으로 비릿한 피 맛이 번졌다.

 엉망으로 꼬인 인연이 제 세 치 혀로 인해 더욱더 단단히 엉켜버린 순간이었다.

 * * *

 쾅―! 굉음에 가까운 소리와 함께 옥상 문이 닫혔다.

 도하는 담배 한 개비를 꺼내어 물며 신경질적으로 라이터를 당겼다.

 착착, 가스 새어 나오는 소리가 적요한 흡연실을 긁는다. 아침부터 운수가 사납다 싶더니 라이터마저 말썽이었다.

 탁! 두 동강이 난 담배가 연기 한 번 피워올리지 못하고 재떨이로 처박혔다.

 ‘안녕하십니까, 팀장님.’

 태연한 낯으로 가증스레 지껄이던 목소리가 떠올라 속이 확 뒤집혔다.

 잠시 제 눈을 의심했으나 틀림없는 윤다경이었다.

 10년 전, 제 속을 다 태워놓고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린 발칙한 계집애. 어린 날의 순정을 짓밟고 튀어버린 나쁜 년.

 직원들 사이에서 윤다경을 발견한 이후부터 내내, 그 입에서 대체 어떤 말이 나올까 궁금했다.

 오랜만이라고 아무렇지 않은 척 인사하려나. 그때 그렇게 연락 못 하고 떠나서 미안했다고 사과부터 하려나.

 그럼 난 어떤 표정, 어떤 말로 대답해야 할까.

 네 덕에 10년째 악몽에 시달리는 중이라고 병신같이 실토라도 해야 하나.

 부서장과의 독대 내내 대화엔 집중하지 못하고 수없이 고민을 반복했다.

 그러고서 나왔더니 고작 한단 소리가 뭐? 안녕하십니까, 팀장님?

 “안녕은, 씨발.”

 갈 곳 잃은 손이 거칠게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저를 외면한 채 깊숙이 숙인 자그마한 뒤통수의 잔상이 뒷머리를 매섭게 강타했다.

 ‘윤다경’ 세 글자로 가득 찬 뇌가 잠재워지지 않는 화기로 자글자글 끓는다.

 그게 네가 택한 방식이라 이거지. 나 따윈 모른다는 듯, 무시하고 돌아서 버리는 그게.

 “귀엽네, 윤다경.”

 고작 그 정도로 과거의 인연을 회피할 수 있을 거라고 여긴 게 가소로웠다. 짐승처럼 번뜩이는 눈동자가 빈 흡연실에 머무는 희미한 연기 사이를 날카롭게 응시했다.

 이번만큼은 절대 네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테다.

 그 작은 머리로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지만, 예전처럼 네 계산대로만 움직여주지 않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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