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3/98)

 2화.

 2. 윤다경의 개

 블라우스를 벗다 말고 잠시 이마를 짚었다. 낮게 내리깐 속눈썹 끝이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조금 전 도하를 마주하고 뱉었던 첫인사가 아릿하게 혀끝을 맴돈다.

 안녕하십니까, 팀장님이라고 했던가.

 안녕하십니까, 라고.

 “하.”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다 나온다.

 그런 한심한 소릴 뱉을 바에야, 차라리 그냥 그대로 혀를 씹어버릴 것이지.

 자조하듯 입술을 비틀며 마저 단추를 풀고 블라우스를 벗어냈다. 엉망이 된 블라우스가 쇼핑백 안으로 툭, 처박혔다.

 꼬박 10년 만이었다. 드디어 봄이 오리라 확신했다가 시궁창엔 봄도, 희망도 없음을 깨달았던 스무 살의 초입. 마지막으로 함께 했던 그 밤을 끝으로 10년 만에 이루어진 재회.

 살다 보면 오다가다 한 번쯤은 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이런 식으로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살면서 한 번이라도 재회의 순간을 가정해봤더라면 오늘처럼 바보 같은 짓은 벌이지 않았으려나.

 “한심하다, 정말.”

 하나 마나 한 후회를 반복하다가 들고 온 티로 상의를 마저 갈아입었다.

 화장실의 문고리를 잡아 밀려던 중 조금 전 옆을 스치면서 봤던 손이 문득 떠올랐다.

 ‘해가 왜 자꾸 너만 따라오냐, 예쁜아.’

 언젠가, 그 손이 제게로 쏟아지는 따가운 햇발을 막아주던 기억과.

 ‘오늘도 참 쓸모 있게 예쁘네, 윤다경.’

 바람에 흩날린 머리칼을 곱게 쓸어 넘겨주었던 기억이.

 그리고 10년 전 마지막으로 함께 했던 날엔···.

 ‘씨발, 윤다경. 너 이러다 아프면 어쩌려고.’

 제 비루한 몸뚱이를 마치 조금만 힘을 주어도 깨어져 버릴 유리처럼 조심스럽게 매만져주었던 것도.

 그땐, 그 손이 제게 유일한 구원이라 생각했었다. 지독했던 하곡에서의 기억을 덮어줄 단 하나의 반짝임이라고.

 몰랐기 때문에 가능했던 선택이었다. 이렇게 또 짓궂은 운명의 농간으로 너와 재회할 것을 몰랐기에 내렸던 선택.

 울컥, 감정이 차오른 눈앞이 불현듯 뿌예졌다.

 도려내고 싶을수록 더욱 선명해진 기억이 벗어나고픈 과거의 굴레 속으로 자꾸만 저를 처박으려 들었다.

 싫어.

 다경은 질기게 옭아매는 올무를 끊어내듯 열다 만 문고리를 힘 있게 밀어냈다.

 두 번 다신, 그 끔찍했던 날에 갇혀 그때와 같은 모멸감 속에서 발버둥 치고 싶지 않았다.

 빼앗은 게 아니라 주고, 받은 것이다. 대가를 지불하고 받은 네 마음이었다.

 그러니 네게 미안할 것 따윈 없었다.

 그날의 나로선, 그것이 최선이었으므로.

 다경은 합리화에 가까운 결론을 내리고 문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쓸데없이 일어서는 감정의 편린을 꾹꾹 밟아 내리며 흔들리는 마음을 갈무리 지었다.

 이제 와 후회해 본들, 되돌릴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10년 전의 내 선택도, 10분 전의 내 외면도.

 * * *

 10년 전.

 쫙―!

 소름 끼치는 마찰음이 물빛 하늘을 그었다. 새하얗던 뺨이 순식간에 핏빛으로 물들었다.

 “걸레 같은 년.”

 너무 귀에 익어서 이제는 제 이름처럼 들리는 날 선 욕설이 얼얼해진 뺨을 연달아 할퀸다.

 고개가 돌아갈 정도로 세게 맞아놓고도 버틴 다경이 쏟아진 머리카락을 천천히 쓸어넘겼다.

 “어제도 니년 엄마 때문에 우리 집 분위기가 어땠는 줄 알아?”

 점심시간, 교내 귀퉁이에서 미쳐 날뛰는 김주미를 말리기는커녕 좋다고 키득대는 소리가 분리수거장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나 같음 학교 때려치우고 차라리 집에만 틀어박혀 있었겠다!”

 친구들을 등에 업고 한층 고무된 김주미가 아예 학교가 떠나가라,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동네에 면상 들고 다니기 쪽팔리지도 않니? 모녀간에 아주 쌍으로 부끄러운 줄 모르고.”

 “그러는 넌.”

 잠자코 듣고 있던 다경이 터진 입을 매만지며 건조하게 되물었다.

 “다방에서 종일 죽치고 앉아 있는 아빠 둔 건 안 쪽팔리고?”

 “무, 뭐?”

 미처 생각지 못한 반격인 듯, 기세등등하던 낯이 단박에 일그러졌다.

 “나 같았음 지금 너처럼 이렇게 대놓고 우리 아빠 다방 단골이에요, 는 못할 것 같아서. 좀 그렇잖아. 부녀간에 호구 인증하는 것도 아니고.”

 “이, 이 미친년이. 야, 너 지금 뭐라 그랬어? 호, 호구?”

 잘못 들은 줄 알고 말까지 더듬으며 ‘호구’라는 단어를 곱씹던 얼굴이 초 단위로 붉으락푸르락한다.

 성질 같아선 같이 뺨 한 대 올려붙여 주고 싶었으나 다경은 여기까지만 하기로 했다.

 김주미의 아빠가 다방 문지방을 닳게 오가며 부은 돈을 깽값이라 생각하면 그뿐이니까.

 제 엄마의 일로 왜 번번이 이 사달을 겪어야 하는 건지 억울했지만, 이조차 이젠 초연해졌다.

 엄마 말마따나, 누구 씨인 줄도 모르는 걸 낳아다 여태 길러줬으면 이 정도는 감수하고 살아야지.

 “이게! 야, 너 거기 안 서?”

 돌려준 말을 끝으로 뒤돌아서는 등을 보며 김주미가 악다구니를 질러 댔다.

 그러거나 말거나. 무시한 채 묵묵히 걸음을 옮겨가던 어깨가 우악스레 붙잡혔다.

 “야 이 썅년아!”

 옷깃이 잡아채이는가 싶더니 투둑― 둔탁한 소리가 허공을 찢었다.

 눈을 돌리자 주미의 손에 잡아 뜯긴 교복 단추가 데구루루 마른 시멘트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하! 꼴좋다.”

 헤벌어진 교복 사이로 안에 받쳐 입은 얇은 민소매가 드러났다.

 단추가 떨어져 나가 벌어진 교복을 보며 김주미가 고소하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여기저기 벗고 벌리고 다니는 제 엄마 닮아서, 별로 부끄럽지도 않겠네?”

 깔깔거리는 여자애들의 높은 웃음소리가 역겹게 귓등을 쳤다.

 뱅그르르 도는 단추가 다경의 머릿속마저 빙글 돌리며 점점 이성이 흐려졌다.

 동시에 모든 걸 감내하리라 다짐했던 갈색 눈동자에 선뜩한 이채가 돌았다.

 이게 진짜.

 “얘들아, 가ㅈ··· 꺄아!”

 투둑―! 또 다른 단추가 허공 위로 튕겨 날아갔다.

 김주미의 뒤에서 시녀처럼 따르던 계집애들의 안면에 씻지 못한 경악감이 번졌다.

 “뭐, 뭐 하는 거야, 이 미친년이!”

 조금 전 다경이 당했던 것과 꼭 닮은꼴을 한 김주미가 벌어진 교복을 황급히 여미며 날카롭게 소리쳤다.

 “왜.”

 다경이 손안에 쥐고 있던 단추 하나를 툭, 바닥으로 내던졌다.

 “같이 벗고 다님 더 볼만할 것 같아서 뜯었는데.”

 태연자약하게 받아친 말에 김주미가 황당하다는 듯 입술을 뻥긋댔다.

 “머, 뭐? 이게 진짜 돌았나!”

 “어, 돌았다. 왜.”

 순순히 인정한 발걸음이 주미의 발치까지 성큼 다가섰다.

 “그래서 지금부터 네 머리도 같이 돌려주려고.”

 “뭐?”

 “나처럼 눈깔 뒤집히게.”

 동시에 다경은 앞에 있는 주미의 머리칼을 덥석 움켜쥐었다.

 “꺄아! 이 미친년이!”

 한순간에 머리채가 잡힌 주미가 돼지 멱따는 소리를 내며 애처롭게 바둥거렸다.

 가느다란 몸 그 어디에서 그런 깡이 나온 건지. 다경이 아랑곳하지 않은 채 손에 잡힌 머리칼을 마구잡이로 흔들었다.

 제대로 반격조차 하지 못한 주미의 머리통이 끌면 끌리는 대로 이리저리 휘청였다.

 “놔! 이거 놓으라고오!”

 “야, 이 또라이야! 이거 안 놔?”

 결국 한쪽이 일방적으로 당하는 것 같은 상황에 주변에서 보고 있던 여자애들도 하나둘 달려들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제 몸을 할퀴고 뜯는 와중에도, 다경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마치 감각이 존재하지 않는 밀랍인형 같은 얼굴로 오로지 주미의 머리칼만 잡아 뜯을 뿐이었다.

 오늘에야말로 제대로 보여주리라. 미친년을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머리털이 곤두서도록 느끼게 해 주리라.

 1년 전 전학을 오고부터 지긋지긋하게 이어지는 계집애들의 기 싸움을 이번에야말로 확실히 종결지으리라 다짐하던 그때.

 ― 확!

 주미의 머리채를 잡고 흔들던 손이 별안간 위로 잡아채였다.

 “···!”

 여자애들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압도적인 악력에 다경의 날 선 눈이 빠르게 제 머리 위로 향했다. 동시에 작열하는 태양 빛을 등진 큼직한 그림자가 시야를 강탈했다.

 “권도···.”

 “씨발, 너.”

 악문 잇새로 짤막한 욕설이 튀어나왔다. 날카롭게 저를 스캔하는 눈빛에 습관처럼 이름을 부르려던 혀끝이 얼어붙었다.

 흐릿한 땀 내음 섞인 후끈한 체향이 삽시간에 코끝을 뒤덮는다. 이윽고 내던지듯 손을 놓은 녀석이 한마디 예고도 없이 훌렁, 제 교복 상의를 벗어 올렸다.

 “···!”

 운동 중이었던 건지 땀방울이 맺힌 미끈한 상체가 눈부신 햇빛 아래 무방비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미처 대비할 틈도 없이 시야를 덮친 맨몸을 보며, 다경이 화들짝 놀라 얼굴을 붉혔다.

 “야, 너 뭐 하는!”

 “시끄러워.”

 닥치라는 말을 애써 순화해서 뱉은 녀석이 뒤집어씌우듯 다경의 머리로 제 옷을 끼워 넣었다.

 방패막이처럼 둘러진 옷을 보며 다경이 터질 듯 눈을 키웠다.

 그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정면을 향한 검은 눈에 어느 순간부터 숨죽이고 있는 김주미의 일행들이 담겼다.

 “꺼져.”

 표정 없는 얼굴에서 그와 상반되는 섬뜩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싹 다 밟아버리기 전에.”

 한여름의 무더위도 불식시키고 남을 음산한 경고.

 그렇게 천지 분간 못 하고 날뛰던 광기가 씻은 듯 사그라진 순간. 윤다경의 개, 권도하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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