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놔, 이거.”
다짜고짜 손이 잡아끌렸다.
“이거 좀 놓으라고, 권도하!”
완강한 저항에도 손목을 붙잡은 커다란 손에선 좀처럼 힘이 빠지질 않았다.
상의를 벗어준 바람에 드러난 제 알몸 따윈 신경도 쓰이지 않는 듯 녀석이 성큼성큼 복도 한복판을 가로질렀다.
덩달아 쏟아지는 시선에 다경은 때늦은 창피함이 몰려들었다.
“야, 팔 아프다니까? 이것 좀!”
참다못해 손목을 비틀어 빼려던 찰나, 드륵― 어딘가의 문이 열렸다.
“뭐야.”
목적지도 모른 채 정신없이 끌려가는 와중에, 보건 키트를 정리 중인 보건 선생님이 눈에 들어왔다. 동시에 더는 날뛰길 포기한 입이 꾹 다물렸다.
“도하 너 꼴이···. 다경인 또 왜 그러고.”
문 앞에 선 둘을 바라보는 선생님의 눈에 황당함이 깃들었다.
“혹시 둘이 싸웠냐?”
“내가 할 일이 없어서 얘랑 싸웠겠어? 일단 연고나 좀 줘, 삼촌.”
까칠한 대꾸를 끝으로 도하가 벽 쪽 양호 베드에 다경을 밀어 앉혔다.
“연고 필요 없!”
“입 다물어.”
대체 뭐가 그렇게 화가 난 건지 녀석은 평소보다 훨씬 고압적이었다.
여기서 한마디만 더했다간 목덜미라도 콱 물어뜯어 버릴 것 같은 사나움.
영문을 알 수 없는 반응에 황당해하고 있을 때, 도하의 등 뒤에서 핀잔이 날아들었다.
“삼촌 아니고 선생님, 짜식아.”
널찍한 어깨를 옆으로 밀며, 선생님이 소독용 솜과 연고를 들고 앞으로 다가섰다.
“여어.”
뒤늦게 얼굴을 제대로 본 입에서 감탄산지 뭔지 모를 소리가 터져 나왔다.
“우리 다경이 어디서 거하게 한 빠이트 했나 보네. 얼굴 꼴이 아주 예쁘고 앙칼지고 말이 아닌데?”
“이리 줘, 발라주게.”
“어딜 손대, 짜샤.”
약솜 통을 향해 성질 급하게 뻗은 손이 닿기도 전에 찰싹 내쳐졌다.
“치료는 내가 할 테니까 넌 가서 옷이나 빨리 입고 와. 어디 대낮에 웃통 까고 교내를 활보하고 있어? 네 아버지 귀에 들어가면 어쩌려고.”
그 소리에 도무지 물러날 기색이 없어 보이던 녀석의 미간에 흐릿하게 실금이 갔다.
선생님이 턱짓한 곳에는 가지런히 개어진 티셔츠 한 장이 놓여 있었다.
이른바 서림고의 황태자라는 낯간지러운 호칭으로 불리는 이 녀석은 앞에 있는 보건 선생님의 조카이자 이 학교 재단 이사장의 외아들이었다.
덕분에 권도하는 학교 안에서 그 누구보다 제멋대로 행동하면서도, 동시에 누구보다 감시당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손 하나만 까딱해도 바로 제 부모 귀에 들어갈 수 있는 상황.
결국, 나지막이 욕지거릴 읊조린 녀석이 마지못해 뒤로 빠졌다.
후···.
그제야 다경도 줄곧 날 세우고 있던 눈을 누그러트리며 낮게 한숨을 뱉었다.
생각도 못 한 타이밍에 등장한 권도하 덕에 다경 역시 심장이 조여든 상태였다.
저도 저였지만, 앞에 있던 여자애들한텐 어찌나 살벌했는지.
그걸 빌미로 애들이 또 여기저기서 씹어댈 걸 생각하니, 벌써부터 귀가 근지러워지는 듯했다.
대체 어디에 있다 나타나선.
“오늘은 또 누구 솜씨길래 이 난리가 났을꼬.”
착잡한 얼굴로 종전의 기억을 리플레이 하는데, 약솜이 닿는 곳으로 쓰라린 감각이 번졌다.
터진 입가와 여기저기 할퀴어진 얼굴을 보며 선생님이 쯧쯧 혀를 찼다.
“다른 건 그렇다 치고 눈 밑에 난 이 손톱자국은 꽤 가겠는데?”
“괜찮아요.”
우려 섞인 말에 다경이 무감한 어조로 짤막하게 답했다.
어차피 권도하의 유난이 아니었다면 굳이 보건실을 찾지도 않았을 저였다.
얼굴에 상처 몇 개쯤 더 생긴다 해도 엄마는 이유조차 묻지 않을 테니까.
방으로 가려 가게를 거칠 때면, 저는 돌아보지도 않은 채 아저씨들 옆에 찰싹 붙어 앙탈을 부리느라 여념이 없는 엄마가 떠올랐다.
까르르, 간드러지는 웃음을 흘리며 그들의 손에 가슴이며 엉덩이를 내어주던 천박한 몸짓도.
조금 전. 김주미를 향해 수시로 다방을 들락거리는 네 아버지는 부끄럽지 않으냐고 당당한 척 외쳤지만, 실은 알고 있다.
그런 엄마를 둔 이상, 제가 누구에게 큰소리칠 입장은 못 된다는 걸.
그렇다고 매번 죽은 듯이 처맞고 있을 수만도 없잖아.
고개를 숙이고 몸을 웅크릴수록 더욱 거센 발길질을 감내해야 하는 게 내가 사는 세상인걸.
“그래서.”
대체 언제쯤이면 이 지긋지긋한 편견 속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생각하던 사이, 처치를 마친 선생님에게서 장난스런 질문이 건너왔다.
“붙은 애는 제대로 손 봐줬고?”
터진 입가에 연고를 발라주는 것을 끝으로 손을 거두며 선생님이 빙긋 입매 끝을 당겨 웃었다.
권도하와 많이 닮았는데 그보다는 선이 연해, 묘하게 경계심을 풀게 하는 얼굴이었다.
다경은 대답 대신 제 왼 주먹 안에 한 움큼 담겨 있는 김주미의 머리카락을 쓱 내보였다.
“역시 훌륭하네. 우리 다경이.”
능청스러운 칭찬에 통쾌한 마음이 들기는커녕 도리어 입 안이 씁쓸해졌다.
칭찬받을 게 없어서 이런 걸로 다 칭찬받는구나 싶어 자조 섞인 웃음마저 흘러나왔다.
“학생한테 수작 부리지 마시죠, 선생님.”
등을 타고 넘어온 까칠한 음성과 함께 티셔츠를 입고 온 권도하가 둘 틈으로 끼어들었다.
“이 새끼가 지금 제 삼촌을 뭐로 보고.”
“뭐로 보긴요. 선생님으로 보는 거지.”
다경이 뒤늦게 표정을 가다듬고 힐긋 눈을 올렸다.
190에 가까운 장신 탓인지, 진회색 교복 팬츠에 심플한 브이넥 티를 받쳐 입은 모습이 도무지 학생으로는 보이질 않았다.
그러고 보니 웃통을 벗었을 때 드러났던 몸도 마찬가지였지.
적당히 그을리고 근육이 붙어 있는 게 꼭 TV에서나 보던 운동선수 같아선, 겁먹은 주변 여자애들조차 그 모습을 힐끔대느라 여념이 없었었다.
열아홉이라는 나이 자체가 위화감을 주는 녀석.
좀 전에 예기치 않게 알몸을 본 탓일까.
별것 아닌 모습에도 괜스레 눈이 가고 귀 끝이 뜨거워져, 다경은 의식적으로 눈을 딴 곳으로 돌려버렸다.
“퍽이나 스승을 대하는 태도다, 짜샤.”
“모르시나 본데 전 원래 선생님한텐 이렇게 합니다. 그건 그렇고 치료 다 끝나셨음 좀 빠져주시죠, 선생님? 제가 얘랑 긴히 할 얘기가 있는데.”
꼬박꼬박 선생님, 소리는 붙이고 있으면서도 말투는 오만불손하기 그지없었다.
“아오, 이게 빨리 졸업을 해야 할 텐데.”
약솜 통을 닫은 선생님이 볼멘소리와 함께 베드 앞에서 벗어났다.
“한 대 태우고 올 테니까 빨리 정리하고 교실로 가. 점심시간 다 끝나간다.”
당부를 끝으로 문이 닫히며 비로소 보건실엔 둘만이 남겨졌다.
다경은 소리 없이 입술만 꾹 감쳐물었다.
도하의 따가운 시선이 얼굴에 진 상처 위로 하나하나 옮겨 닿는 게 느껴졌다.
그 눈이 이목구비를 핥듯이 스치더니 그의 커다란 상의가 둘러진 옷깃 속으로 파고들 듯 시선을 미끄러트린다.
‘쟨 왜 또 저런 눈으로 보는 거야.’
집요할 정도로 따라붙는 눈에 문득 아랫배가 조여왔다. 다경이 저도 모르게 다리 사이를 꽉 붙였다.
“할 말이 뭔데?”
결국 숨 막힐 듯한 침묵을 견디다 못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있다며. 해.”
목소리는 한없이 태연했으나 눈 둘 곳을 찾지 못한 시선은 시종 녀석을 피하고 있었다. 그때.
“존나 못생겼다.”
정수리로 난데없는 외모 비하가 떨어졌다.
“뭐?”
다경이 황당하다는 얼굴로 번쩍 고개를 들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예쁘단 소릴 버릇처럼 뱉은 녀석이었다.
서림으로 전학 온 첫날.
‘정신 사나울 정도로 예쁘네, 너.’
수작인지 뭔지 모를 첫마디를 시작으로 예쁜아, 예쁜아 라고 수시로 불러대며 강아지가 꼬리 흔들 듯 뒤를 따르던 녀석.
그런 입이 뱉은 황당한 외모 평가에 어이없다는 듯 두 눈을 치켜뜨자, 성큼 몸을 낮춘 도하가 엉망이 된 머리칼을 손끝으로 훅 감아 돌렸다.
“그나마 봐줄 만한 건 얼굴 하나였는데 얼굴 이 지경 되고 머리털 개털 되니까 존나게 못생겼다고, 너.”
마디 굵은 손끝에서 푸르륵― 풀려나온 머리칼이 상처 난 뺨을 간질였다.
가까워진 거리에 두근거린 것도 잠시. 말을 듣고 보자 지금 제 꼴이 어떨지 떠올라 다경은 뒤늦게 뺨이 붉어졌다.
입술은 터지고 얼굴 여기저기는 상처가 난데다가 머리까지 산발이 된 게 못생겼다는 말로도 부족할 듯싶었다.
그러게 누가 남의 일에 신경 쓰랬다고.
“신경 꺼. 남이사 머리털이 개털이 되건, 닭털이 되건.”
인정하면서도 어쩐지 불퉁스러운 마음이 올라와 차갑게 대꾸하고 몸을 일으킨 찰나였다.
“읏···.”
“한 번만 더.”
거칠게 어깨를 잡아 눌러 벽으로 밀친 녀석이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그딴 식으로 지껄여, 윤다경.”
씹어뱉듯 읊조린 경고가 여린 콧잔등 위로 뜨겁게 흩어졌다.
“더는 남이란 소리 따위 못 뱉게 만들어 줄 테니까.”
검게 가라앉은 두 눈이 마주한 시야를 통째로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 다경의 얼굴에 짙은 긴장감이 번졌다.
대체로 순한 개처럼 구는 녀석은 가끔 이렇듯 생각지 못한 부분에서 특유의 포식자 같은 면모를 드러내곤 했다.
아니, 어찌 보면 일관성 있는 반응이었다. 제가 녀석의 존재를 무시하려 들 때만 보이는 모습이었으니까.
내 마음을 받아주지 않는 것까진 그냥 넘어가겠지만, 부정하고 밀어내는 건 허용할 수 없다는 비틀린 소유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