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9/98)

 8화.

 “박 과장님, 권도하입니다.”

 미친 자식.

 순간 심장이 덜컹, 하며 반사적으로 그에게로 손이 뻗어졌다. 하지만 그보다 민첩한 손아귀에 손쉽게 손목이 낚아채이고 말았다.

 “앗!”

 중심을 잃은 몸이 그의 가슴팍 위로 풀썩 미끄러졌다.

 ― 아, 네! 팀장님. 팀장님께서 이 시간에 어쩌신 일로.

 수화기에서 흘러나오는 박 과장의 목소리가 보다 선명하게 들려왔다.

 ‘말도 안 돼.’

 맞닿은 셔츠 위로 보통의 것 이상으로 높은 체온이 느껴졌다.

 속을 가늠할 수 없이 검은 눈이 제 가슴 위로 미끄러진 작은 몸을 말없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당황한 심장이 펄떡거렸다. 이성을 잃은 머리가 쾅쾅 울렸다.

 그를 올려다보는 눈에 짙은 불안과 원망이 어렸으나, 그녀를 바라보는 남자의 눈엔 비정만이 가득했다.

 어떻게, 어떻게 이런 짓을···.

 ― 팀장님?

 “···.”

 제발, 권도하.

 다경이 흔들리는 호흡을 삼키며 마주한 고개를 얕게 저었다.

 제발 아무 말도 하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듯 절박하게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제 겨우 평범한 길로 들어선 삶이었다.

 어린 날, 제가 선택조차 할 수 없었던 부모의 업으로 하루하루를 모진 욕설과 핍박 속에 살다가 이제 간신히 그 편견들로부터 자유로워진 참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여기서 도하가 무슨 말이라도 해버린다면.

 ― 저··· 권 팀장님?

 의아해하는 박 과장의 음성이 둘 사이에 머무는 적막을 가로질렀다.

 그 순간, 금방이라도 울 것 같던 다경의 눈가로 불현듯 남자의 손이 닿았다.

 “···.”

 “···.”

 다경은 잠시 숨을 멈추었다. 델 듯 더운 체온이 발개진 눈가를 쓸고 내려와 덜덜 떠는 턱을 지그시 움켜쥐었다.

 바짝 언 뺨이 파르르 떨렸다. 정염으로 점철된 손이 굳게 다문 입술을 슬쩍 내리눌렀다. 맥없이 벌어지고 만 분홍빛 속살 위를 짙어진 눈동자가 탐미하듯 쓸고 지나간다.

 뜨겁고, 또한 노골적일 만큼 탐욕에 젖은 눈빛.

 맞닿은 곳 위로 이상스러운 열기가 번졌다. 혀끝이 바싹 마르고 목구멍 어딘가가 울컥거렸다.

 뿌리치고 싶은데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박제하듯 마주친 시선에 마치 온 신경이 마비되어버린 것만 같아서.

 맞닿은 곳만으로도 모자라 심장 끝이 타들어 가는 것 같은 조갈을 느끼던 순간.

 “거래처 문제로 박 과장님과 긴히 상의할 일이 있습니다.”

 도하가 제 손끝에 눌린 입술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휴대폰 너머 상대에게 말했다.

 “내일 출근하시면 바로 제 자리로 좀 와주세요.”

 그 말을 끝으로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곧장 통화종료 버튼을 눌렀다.

 그제야 다경의 입에서도 숨이 트였다. 비로소 정신을 다잡은 그녀가 제 입술에 닿은 손을 야멸차게 쳐냈다.

 “···나쁜 새끼.”

 울음에 가까운 소리가 가쁜 호흡과 함께 쏟아졌다.

 저를 겁박하려 도하가 쇼를 했다고 생각하자 피가 머리끝까지 솟구쳤다. 좀 전까지 목젖을 데우던 죄책감이 차갑게 물러섰다.

 비열한 자식. 또라이. 나쁜놈!

 온갖 욕을 퍼부어도 풀리지 않을 속을 끌어안고 도망치듯 몸을 돌린 순간이었다.

 확―

 “···!”

 순식간에 당겨진 팔과 함께 사고처럼 입술이 맞붙었다.

 “놔··· 하읍!”

 도하가 고집스레 닫힌 입술을 날카롭게 베어 물며 깊숙이 입술을 맞물었다. 뺨을 덮은 커다란 손이 목덜미까지 감싸 당겼다.

 당황하여 벌어진 입 안으로 두툼한 혀가 갈급한 짐승처럼 들이닥쳤다. 옅은 담배 향이 밴 숨결이 무작스럽게 호흡을 앗아갔다.

 덜컹, 저항이 만들어낸 소음이 차 안을 울렸다. 다경이 격렬히 그를 밀어내며 벗어나려 애썼으나, 강탈하듯 밀려오는 입술엔 도무지 자비가 없었다.

 “하, 흡···.”

 목젖 깊숙한 곳까지 혀를 비집어 넣은 그가 난폭하게 입 안 곳곳을 휘저었다. 도망치는 혀를 뿌리까지 얽어매고 숨 한 줌 남기지 않고 모조리 들이 삼켰다.

 타액과 타액이 엉키고 살끼리 부딪히고 빨리는 소리가 밀폐된 공간을 채웠다.

 어린 날의 서툰 키스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거칠고 게걸스러운 입맞춤에 사지에서 빠르게 힘이 빠졌다.

 “으응!”

 결국 저항하길 포기한 입에서 야트막한 흐느낌이 새고 말았다. 언제 흘렸는지도 모르게 떨어진 눈물이 두 입술을 축축하게 적셨다.

 그제야 마지못해 입술을 놓아준 그가 젖은 눈가로 혀를 옮겨 눈물을 핥았다.

 “나쁜 건 내가 아니라 너지, 다경아.”

 맥없이 흐르고 만 눈물이 부푼 입술 위로 시큰하게 녹아들었다.

 “이 환장하게 예쁜 입술로.”

 씹어뱉듯 읊조린 그가 제게 물려 생채기 난 입술을 손끝으로 진득하게 훑었다.

 “내 순정을 화대로 치부한 윤다경, 바로 너 말이야.”

 눈물로 출렁이는 갈색 눈에 열로 들뜬 검은 눈이 넘칠 듯 담겼다.

 조금 전 다경이 뱉은 말을 그대로 돌려준 입술 끝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타들어 간 재처럼 검게 그은 눈엔 정제되지 않은 욕망과 원망이 한데 뒤엉켜 있었다.

 “하···.”

 웃음도 울음도 아닌 것이 쓰라린 입술을 타고 흘렀다. 허탈한 후회가 목젖까지 밀려들었다.

 화대라고.

 살고자 뱉은 그 단어가 이런 식으로 돌아와 도리어 제 숨통을 죌 줄이야.

 “이제 어떻게 할래? 돈이야, 몸이야?”

 있는 대로 무법자처럼 굴어놓곤, 뒤늦게 선택권을 주듯 그가 물었다. 말로는 의사를 묻곤 있지만, 이미 그녀가 내릴 답을 다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너한테 내 의사가 필요하긴 하니?”

 자포자기에 가까운 무기력한 답이 생채기 난 입술 위를 서늘히 긁는다.

 “그냥 너 꼴리는 대로 해.”

 희미하게나마 정복욕이 비치던 낯이 도로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꼴리는 대로, 그거 좋네.”

 들은 말을 그대로 곱씹은 그가 잔인하게 입술을 휘었다.

 “안 그래도 10년째 반응 없던 물건이 키스 한 번에 제대로 서버렸거든.”

 스스럼없이 뱉어진 말과 함께 거만하게 기울어진 고개가 까딱, 다리 사이를 가리켰다. 어느 틈에 도드라진 바지 앞섶이 뻔뻔하게 형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10년 만의 재회에서 그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더는 부정할 수 없을 만큼 노골적으로.

 “하···.”

 물기 어린 갈색 눈에 텅 빈 공허가 깃들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모멸감과 수치심이 목젖까지 밀려들었으나, 이 모든 게 제 업보라 더는 누굴 원망할 의욕도 생기질 않았다.

 제 세 치 혀로 직접 꼬고 뭉그러트려 버린 관계.

 “벨트 매.”

 그가 기울어져 있던 몸을 바로 하며 브레이크에 발을 올렸다.

 “아무리 급해도 길바닥에서 해댈 순 없잖아?”

 이윽고 목적지가 명확해진 차가 거친 엔진 소리를 내며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5. 계산

 “뭐해?”

 도하가 창백해진 얼굴을 빤히 응시한 채로 비딱하게 아래를 고갯짓했다.

 “올라와.”

 “···뭐···.”

 호텔 방까지 올라오는 내내 줄곧 초연하게 굴던 얼굴 위로 그제야 희미한 균열이 생겼다.

 그 순진한 반응이 기가 차 공연히 속이 더 뒤틀렸다.

 화대니, 하룻밤 대가니 잘도 떠들어댈 땐 언제고 고작 올라오란 말 한마디에 바들거리는 꼴이라니.

 “왜 자꾸 순진한 척이야. 이미 볼 장 다 본 사이에.”

 그가 비정한 눈으로 성큼 한 발을 내디뎠다.

 “대체 뭘···.”

 “왜.”

 눈 둘 곳을 찾지 못해 방황하는 고개를 가벼이 잡아채 강제로 눈을 맞추었다.

 “화대 운운하던 입이라 이 정돈 껌일 줄 알았는데, 안 내켜?”

 부러 독하게 내뱉은 말에 맞닿은 눈이 어지럽게 나풀댄다.

 사실, 윤다경에게 그런 게 가능할 리 없다는 건 제가 더 잘 알고 있었다.

 10년이란 세월이 강산을 바꿀 수 있을진 모르나, 사람의 타고난 본성마저 변화시킬 수는 없었다.

 어린 시절, 가진 건 쥐뿔도 없으면서도 자존심 하나로 버텨온 게 바로 윤다경이었다.

 창년 딸이라고 손가락질을 당하고 때론 뺨까지 얻어맞으면서도, 도리어 뻔뻔할 만큼 큰소리를 치며 머리채를 잡던 고고한 천성.

 그런 애가 알아서 올라타다니. 저 성격에 그런 게 가능할 리 없지.

 “못 해, 그런 짓은.”

 역시나 예상을 비껴가지 않은 답에 그가 악랄하게 웃었다.

 “왜 못 하는데.”

 시원하게 뻗은 눈매를 빙글 휘며 다경이 치욕스러워 할 말만 골라 저속하게 내뱉었다.

 “10년 전엔 잘만 했던 짓이 지금은 왜 안 되실까. 적어도 그때보단 수월할 텐데.”

 “너 꼭 말을 그런 식으로 해야 돼?”

 꼭 말을 그런 식으로 해야 하냐니.

 남의 순정을 하룻밤 대가라 칭한 입이 뱉기엔 참으로 양심 없는 소리가 아닐 수 없었다.

 “내 말이 어때서. 다 사실이잖아. 기억 안 나?”

 도하는 천연덕스럽게 응수한 얼굴을 다경의 코앞까지 바짝 들이밀었다.

 “네가 순진한 얼굴로 허튼짓 운운하면서 내 바지춤 잡고 매달린 거.”

 뱀처럼 속살거리는 음성에 줄곧 고고하던 낯에서 씻은 듯이 핏기가 가셨다.

 동시에 그는 희미하게 비소를 머금던 입술을 더욱 싸늘하게 굳혔다.

 기억이 안 날 리가 없을 테다. 제 말대로라면, 화대를 받기 위해 아주 작정하고 매달렸던 밤이니까.

 참, 목적에 따라 그렇게나 처세가 능한 줄도 모르고.

 “긴말하기 싫으니까 그만하고 올라와.”

 냉혹하게 뇌까리며 굳게 잠긴 벨트의 버클로 손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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