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싫어.”
철컥, 열리는 금속성의 마찰음 사이로 단호한 음성이 따라붙었다.
꼴리는 대로 하라며 어떻게 해도 상관없다는 듯 굴던 입에서 처음으로 나온 완강한 거부였다.
도하가 거침없이 벨트를 잡아빼던 손을 멈추고 옆을 보았다.
곧 울 것 같은 표정의 다경이 고개를 숙인 채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버클을 쥔 손에 와득 힘이 가해진다.
입술을 씹는 건, 다경이 제 안에 이는 초조함을 감추려 할 때 보이는 모습이었다.
극한의 불안감을 느낄 때 보이는, 윤다경 저조차 모르는 습관.
그걸 보자 도하는 제 안에서 시종 난폭하게 일어서던 분노가 한결 수그러드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한 가닥 미련한 바람이 불어와 가슴 끝을 가늘게 흔들었다.
이제라도 내게 미안하다 말하라고. 조금 전 그 말은 진심이 아니었다고 하라고.
내 자존심을 세우기 위한 발악이었을 뿐. 실은 나 또한 그 밤만큼은 진심이었다고.
애초에 화대니 뭐니 하는 소리로 날 자극하지만 않았다면 벌어지지도 않았을 상황이었으니. 그래 준다면, 이제라도 네가 그렇게만 말해준다면···. 지금 당장, 이 유치한 짓 따윈 집어치우고 10년 만에 겨우 내 눈앞에 무사히 나타난 널 온 힘을 다해 꽉 안아줄 텐데···.
하지만.
“차라리.”
사람 돌게 예쁜 입술은.
“그냥 네 멋대로 하고 빨리 끝내.”
이번 역시 제 간절한 바람을 깔끔하게 무시했다.
그냥 내 멋대로 하고 빨리 끝내라고. 마치 한 번 대주고 말겠다는 듯 지껄이는 그 말에 도하는 잠시 수그러졌던 화가 도로 정수리까지 치솟고 말았다.
으득, 물린 턱 끝이 분노로 꿈틀거렸다. 검게 침잠한 눈에 증오가 들끓었다.
그래. 윤다경은 원래 이런 애였지.
매사 저에게만큼은 절박했던 내게 언제고 발을 뺄 수 있다는 듯 굴었던 무정한 계집애.
그러고선 처음으로 진심이 닿았다고 생각한 그 밤, 정말로 날 떠났다. 그 흔한 인사 한마디 없이.
씨발, 그렇게 당하고도 또 정신을 못 차리고.
“누구 좋으라고.”
때늦은 깨달음이 다시금 그를 몰아붙였다.
“누구 좋으라고 그냥 그렇게 끝내. 재미없게.”
버클에 닿은 채로 잠시 멈춰 있었던 손이 망설임 없이 벨트를 잡아 뺐다.
“···뭐?”
“못 하겠으면 지금이라도 나가.”
차갑게 내던져진 벨트가 시린 바닥 위로 툭 떨어졌다.
“목구멍이 포도청인 윤다경한테 과연 회사까지 때려치울 배짱이 있을진 모르겠지만.”
한 줄기 남아 있던 미련마저 깡그리 내던지며, 그가 가차 없는 어조로 뇌까렸다.
시린 바닥 위로 떨구어져 있는 기다란 벨트가 도하의 발밑에서 사악한 뱀의 형상처럼 꿈틀댄다.
동시에 미약하게 자리 잡고 있던 죄책감이 사라지고, 그 자리로 난폭한 합리화가 들어섰다.
그래. 또다시 병신처럼 굴다가 네게 버려지느니, 차라리 천하의 개새끼가 되는 편이 나았다.
이런 와중에마저 존심도 없이 아래를 세우는 건, 발정 난 짐승 새끼와 한 끗도 다를 바가 없으니까.
“너 원래··· 이런 애였니?”
도하가 짐승과 저를 동일시 한 채 자조하듯 웃고 있자, 그런 그를 보며 다경이 물었다.
이런 애라···.
“말 잘했어, 다경아.”
상처받은 마음을 비릿한 미소로 지우고 다경의 시선에 맞춰 고개를 낮추었다.
“맞아. 나 원래 이런 놈 아니었지. 오죽하면 친구 새끼들 입에서 윤다경 네 개라는 별명까지 붙었을까.”
그래. 어울리는 친구 놈들로부터 꼭 그와 같은 별명으로 불리었던 적이 있었다.
누가 들으면 기분 나쁘다 할 그 별명을, 제 입으로 직접 자처하겠노라 다경의 앞에서 선언한 적도 있었다.
그렇게 하면, 마치 널 내 옆에 옴짝달싹 못 하게 묶어 놓을 수 있을 줄 알고.
네 옆자릴 온전히 차지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서.
“근데.”
그 모든 게 다 병신 같은 짓이었다.
“먹고 버려지니까 이렇게 되더라고.”
결국, 너에게 날··· 너 좋을 대로 이용하고 버릴 도구쯤으로 치부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니까.”
못돼먹은 너처럼, 나 또한 못되게 구는 것밖엔 방법이 없었다.
“읏···.”
“식상한 소린 그쯤하고 그만 올라와. 다경아.”
그래야 이번에야말로, 내 이 좃같은 미련을 끝낼 수 있을 테니.
“하으···.”
무자비한 손끝이 말간 앵두 같은 입술을 짓이기며 다경의 혀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난 일단, 이 입술 맛을 좀 보고 싶거든.”
투박한 손길 위로 질척하게 감기는 혀의 감촉이 아래가 뻐근하도록 황홀했다.
“네 말 한마디면 배까지 뒤집어가면서 절절 기었던 날.”
곧 있으면 다경의 몸으로 밀어닥칠 제 것처럼, 축축하게 전 윗입을 손끝으로 무자비하게 유린하며 그가 아프게 웃었다.
“잘도 기만하고 튀었던 이 예쁜 입술을.”
이번에야말로 철저히 이용당하고 버려지는 건, 내가 아니라 너일 거라는 듯.
* * *
지이익― 지퍼를 잡아 내리는 손끝이 덜덜 떨렸다.
수치심으로 일렁이는 눈에 드로어즈를 뚫고 나올 것처럼 꿈틀대는 흉흉한 실루엣이 보였다.
그 낯선 형상을 차마 담지 못한 눈이 도망치듯 바닥으로 처박혔다.
10년 전, 도하와 함께 했던 그 밤을 끝으로 다경 또한 남자 경험이 전무 한 상태였다.
섹스는 물론이며 연애조차 제대로 해본 적이 없었다.
사심을 품고 다가오는 남자들이야 있었지만, 먹고 살기만으로도 바빴던 제게 이성과의 관계는 과욕이며 사치였다.
아니, 어쩌면 10년의 죄책감이 저를 그리 생각하고 살도록 만들었을지도 몰랐다.
네게 그런 짓을 해놓고 감히 다른 이와 떳떳한 관계를 이어나가선 안 된다는 뼈 아픈 주제 파악.
그런데.
“뭘 빤히 보고만 있어.”
그랬던 제 죄책감의 원형이 자비 없는 눈을 한 채 저를 향해 명령하고 있었다.
“처음도 아닐 텐데.”
그렇게나마 네가 내게 했던 짓을 갚으라고. 낯설고도 오만한 눈으로 앉아 비딱하게 아래를 턱짓했다.
피할 수 없이 가까워진 몸에서 질식할 듯 후덥지근한 열기가 퍼져 나왔다.
커다란 손이 금방이라도 들이닥칠 것 같은 욕망을 다스리듯 위아래로 천천히 훑어내렸다.
그러곤 이내 여전히 꼼짝 않는 그녀의 입술을 손끝으로 툭, 짓눌러 벌렸다.
더는 기다려 줄 생각이 없다는 무언의 신호.
“···.”
이루 말할 수 없는 모멸감이 목젖을 데웠다. 바들거리는 입술을 꾹 사리물며 더운 살덩이를 손에 움켜쥐었다.
그래. 모든 걸 작정하고 여기까지 온 마당에 겨우 이깟 걸로 자존심을 세우고 있는 것이야말로 우스운 짓이었다.
자존심이라면 이미 10년 전 권도하의 바지춤을 잡은 그 순간, 다 던져버린 것과 다름없는데.
다경은 무겁게 뱉어낸 호흡을 끝으로 비로소 그와 시선을 맞추었다.
냉혹하게 내려다보는 검은 눈을 빤히 올려다 본 채 천천히 그가 원하는 대로 입술을 움직였다.
네가 보고 싶은 게 나의 밑바닥이라면. 나를 능욕함으로써 얻는 쾌감이라면.
그렇게 해서 네 10년의 원망이 좀 풀린다면, 이깟 행위쯤 못할 것도 없지.
“···.”
낯선 광경을 담은 눈매가 흐릿하게 일그러졌다.
순응은 하나 결코 순종적이진 않은 눈이 대놓고 그의 심기를 거슬렸다.
원초적인 자극에 뜨거워지는 몸과는 다르게 그 짓을 지켜보는 머릿속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차게 식었다.
윤다경이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토록 저속한 척 구는 것인지, 그 속을 모르지 않았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네가 원하는 대로 열 번쯤 놀아나 준 뒤 남은 부채감을 말끔히 털어내겠다는, 얄팍한 속셈이겠지.
하지만 그런 생각이라면 잘못 생각해도 한참은 잘못 생각했다.
예전의 저라면 어땠을지 모르나, 이번만큼은 다경의 손안에서 놀아나 줄 생각이 없었다.
아무것도 아닌 듯이 군다면 아무것도 아닐 수 없게 만들어주면 될 일이었다.
그래야 더는, 그딴 식으로 먼저 날 내버릴 수 없을 테니.
“형편없네.”
무참한 평가가 서늘한 입술을 갈랐다.
“그간 만난 놈들이 여기까진 안 알려줬나 봐. 아님, 그쪽으론 영 학습력이 없거나.”
서툰 건 서툰 대로 만족스러웠으나 부러 작정하고 비틀어 뱉자 존심 상한 얼굴이 처참하게 무너졌다.
겨우 이깟 말에 표정 하나 못 지키고 흔들릴 거면서 능란한 척 굴긴.
이대로 저 예쁜 얼굴이 일그러지도록 계속할까 싶었지만, 잠자코 보고 있기도 감질난 탓에 그는 이쯤에서 그만두기로 했다.
어차피 남은 밤이 오늘 하루만 있는 것도 아니니까.
“관두고 벗어.”
움켜쥐고 있던 뒷머리를 놓곤 셔츠 단추를 풀었다.
“···뭐?”
이미 볼 장 다 본 사이에 옷 벗으란 소리가 당혹스러웠던지, 다경이 놀란 토끼 같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왜, 입고 하는 쪽이 취향이야?”
“···그게 아니라.”
“정 그러면 치마만 벗고 올라오든지. 그건 그것대로 볼만하겠는데.”
대놓고 비아냥대는 음성에 수치심을 이기지 못한 얼굴이 발갛게 물들었다.
도발하는 족족 반응하는 낯이 야만적인 호승심과 죄책감을 동시에 자극했다.
순진한 척은.
낮게 혀를 차며 아랑곳하지 않고 손목시계를 풀었다. 그때, 지익― 하는 소리가 귓불을 진동시켰다.